94화.
* * *
나는 요슈아의 말을 듣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고아원 준공식?”
“응. 황도의 자선 파티에서 모은 기금을 이클립토 백작령에 전달하는 거야.”
“그런데?”
“미성년자 귀족들이 가는데, 아스트라에선 이번에 내가 가게 되었어. 에릴로트, 너도 함께 가면 어떨까 싶어서.”
“갈래!”
말하자 요슈아가 빙그레 웃었다.
“그래. 네가 함께 갈 준비를 해두라고 할게.”
“응.”
그렇게 말한 요슈아가 내 방을 떠나고, 난 소리 없이 만세를 불렀다.
방에 함께 있던 미켈란이 웃었다.
“이클립토 령에 가고 싶어 하셨는데, 잘 되었군요.”
“응, 너무!”
“다행입니다. 몰래 숨어들기 어려운 지역이 아닙니까.”
이클립토 령은 우리 아스트라처럼 많은 사람이 드나드는 곳이 아니었다.
엄청나게 폐쇄된 곳인데다가, 출입 허가까지 필요했다.
“맞아. 그놈의 출입 통제 때문에.”
“보호받지 못하는 평민들이 많이 사니까요.”
그러고 보니까 수업에서 배웠던 것 같다.
“과거에 인신매매단이 출입하여 고아나,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마구 잡아갔다고 했지?”
“예. 그러한 이유로 출입 통제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 출입 통제 건으로 이클립토 백작이 백성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얻었고.”
“이클립토 백작가에도 좋은 일이었지요.”
“응. 이클립토는 백성들의 지지 덕에 힘을 얻게 된 거나 마찬가지니까.”
“아주 잘 알고 계시는군요.”
“시험에 나왔거든. 백 점 받았어.”
의기양양하게 말하니, 미켈란이 눈까지 접으며 쿡쿡 웃었다.
아무튼 너무 잘 됐다.
운 없기로는 제일인 내게 이런 행운이라니.
‘주인공 버프 덕인가.’
신이 난 나는 이클립토 령으로 갈 준비를 했다.
요슈아가 내게 이것저것 정보를 주어서 준비하긴 수월했다.
물론 하녀들이 붙기도 했지만.
하녀들은 눈을 부릅뜨고 짐을 쌌다.
“드레스코드는 푸른색이야. 붉은색 장갑은 치워. 장갑 쪽이 눈에 띄어서 푸른 드레스가 안 보이잖아!”
“고아원 아이들에게 나눠줄 과자는? 어멋! 이런 쿠키를 준비했단 말야? 하이디—!”
“세상에. 아가씨의 얼굴에 먹칠하려고 작정했어? 당장 칼리반 제과점에 다녀왓!”
하이디와 베티는 정말로 무서웠다…….
호랑이처럼 눈을 치켜뜨고 고용인들을 닦달한다.
난 그런 하이디와 베티를 보고 어색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이디, 베티.”
“네, 아가씨~”
“말씀하세요, 아가씨~”
여전히 내 앞에서는 꿀이 뚝뚝 떨어지지만.
“조금 무서워…….”
말하자, 두 사람이 흠칫했다.
“세상에나, 너무 지나쳤나 봐요.”
“시정하겠습니다.”
“으응.”
그렇게 말한 하이디와 베티가 사르르 눈을 접으며 하인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드레스코드가 푸른색이라고 알려줬는데, 어째서 보라색 드레스를 챙겼을까~ 혹시 카넬로의 머리는 발에 달린 걸까~ 내가 몰랐던 걸까~?”
“마카롱을 봉지에 담으면 이클립토 령으로 옮겨질 때까지 멀쩡할까~? 다 부서진 마카롱을 받으면 아이들이 좋아하겠다~ 미하일의 급료도 부숴서 주면 어떨까~?”
……웃으면서 말한다고 무섭지 않은 건 아니라고도 알려줘야겠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방을 나섰다.
그런 날 본 미켈란이 실소를 흘리며 쫓아왔다.
“하이디와 베티의 심정도 이해가 갑니다.”
“왜?”
“아가씨는 하인들에게 유난히 유하시죠. 실수를 해도 쉽게 넘어가 주시고요.”
난 복도에 서서 “음…….” 하고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니 그랬던 것도 같아.
‘나도 유혜민일 때 실수를 하면 엄청나게 두려웠거든.’
같은 직장인이었기 때문에 그 심정이 너무 이해가 잘 되어서.
“응, 그랬어.”
“어떤 사람은 고용주의 배려에 감사하고, 더는 실수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지만…….”
“음?”
“어떤 사람은 긴장의 끈이 풀어지기도 하죠. 카넬로와 미하일이 그렇고요.”
그런가.
‘하기야 유혜민 세계의 직장인과 이 세계의 고용인들은 다르지.’
난 고개를 끄덕였다.
“하이디와 베티가 나 때문에 무서워졌겠구나.”
“그런 뜻은 아니고요.”
미켈란이 곤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아이인 아가씨가 확실하게 자를 수 없는 부분이 있죠. 보통은 안주인이나, 유모가 선을 잡아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내가 고용주인 건 맞으니까.”
마냥 잘해주는 고용주가 최고인 건 아니지.
그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이 있다면 더더욱.
‘질서를 잡아줄 필요는 있겠어.’
그렇게 생각하던 난 고개를 돌려서 미켈란을 보았다.
“잔느는 어떻게 되었어?”
“지난주에 언니인 록산느의 신약 투약이 시작되었습니다. 신약이 잘 맞는 모양이니, 이제 슬슬 연락을 줄 때가 되었습니다.”
“응.”
잔느가 와야 움직이기 더 수월해질 것이다.
무력은 개코도 없는 한지혁과 갈 수 없는 곳도 갈 수 있을 테고.
* * *
며칠 후.
이클립토 령으로 출발할 날이 되었다.
마차에 막 오르려고 하는 순간, 문가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넌 출입 허가를 못 받았으니까 그냥 저택에 있으라고.”
“가면서 받으면 되잖아. 가면서!”
짐가방을 싸 온 발자크가 요슈아와 투덕거리는 소리였다.
요슈아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황도 경계만 넘으면 나와 에릴로트는 가호석으로 이동할 거야.”
“나도 <이동>의 가호석이 있으니까 함께 이동하면 되지.”
“이클립토 령의 정보도 모르는 게.”
“가면서 서류를 본다고!”
“문장이 세 줄만 넘어가면 잠이 온다며.”
“안 자. 맹세.”
발자크가 맹세한다며 양손을 가볍게 올리던 찰나.
요슈아가 짐가방을 걷어차서 문 안으로 넣었다.
“이 새끼—”
“꺼져.”
나는 미간을 좁히고 두 사람을 쳐다봤다.
“또 욕해!”
발자크와 요슈아가 흠칫했다.
“—가 아니고, 이 동생이. ……나 동생이라고 했어, 에릴!”
“들어가, 형님. 제발.”
그때였다.
마차 뒤로 쿵!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서 돌아보니, 리시먼드가 짐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있었다.
요슈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형님은 뭐하십니까.”
“출발하자. 늦겠다. 아, 난 미리 허가받아놨어.”
그렇게 말한 리시먼드가 홀랑 마차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곤 빙그레 웃으며 옆자리를 두드렸다.
“앉아, 에릴로트.”
“…….”
그 틈에 발자크도 얼른 짐가방을 가져와서 바닥에 내던졌다. 그러곤 마차에 쏙 들어왔다.
“아니야. 여기 앉아, 에릴.”
늘 달콤하게 미소 짓던 요슈아의 입매가 일그러졌다.
‘못 살아.’
난 한숨을 푹 내쉬고 요슈아에게 손짓했다.
“가자.”
“…….”
으득, 이 가는 소리가 살벌했다.
“요슈아 오라버니.”
“……갈게.”
소란스러운 가운데, 아빠가 나왔다.
인사하려고 하는데 표정이 음울했다. 아빠는 엔조를 물어뜯을 듯이 쳐다봤다.
“왜 자선행사엔 애들만 가는 거지?”
“……그 질문이 벌써 서른 번째입니다, 각하.”
엔조는 거의 울 듯한 표정이었다.
생각해보니까, 내가 고용인들에게 잘해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아빠와 오라버니들이 이러는데, 나까지 난리 치면 다 사표를 쓸 거야.’
난 아빠에게 가서 말했다.
“갔다가 금방 돌아와요.”
“…….”
“딱 일주일!”
“……식사는 빼먹지 말고. 넌 바쁘면 식사부터 거르니까.”
“네!”
아빠가 나를 끌어안고 등을 툭툭 두드렸다.
“잘 갔다 와라. 네게 즐거운 일이 잔뜩 있었으면 좋겠구나.”
“응!”
난 배부른 고양이처럼 아빠의 손에 얼굴을 비볐다.
아빠는 나를 마차에 넣어주고 문 앞에 서서 오라버니들을 슥, 둘러봤다.
“너희도 밥 거르지 말고.”
“예!”
“네.”
“동생들을 잘 챙기겠습니다.”
아빠가 오라버니들의 머리마다 툭, 손을 올렸다.
셋은 여전히 어색해했지만, 결코 싫은 얼굴은 아니었다.
“잘 다녀와라.”
우리 남매는 아빠에게 인사했다.
마차의 문이 닫히고, 드디어 바퀴가 구르기 시작했다.
이클립토 행의 시작이었다.
* * *
황도 경계엔 강력한 결계가 있어서 이동의 가호를 쓸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경계 밖에서 <이동>의 가호석을 사용했다.
눈을 감았다 뜨자.
“와……!”
거대한 이클립토 령의 경계성이 보였다.
내 뒤를 이어 이동해 온 오라버니들이 경계성 주변을 둘러봤다.
발자크가 깍지 낀 손으로 뒷머리를 받치곤 말했다.
“엄청 푸르네. 못 보던 꽃이나 나무도 많고.”
요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부 끝에 있는 아스트라와는 다를 수밖에. 거리가 그렇게나 차이 나잖아.”
리시먼드는 나를 쳐다봤다.
“동부의 특징은 알아?”
“응. 사계절이 뚜렷하고, 농경지로 딱이고, 또…….”
“온갖 맥이 흘러. 금맥, 온천수맥 등등.”
“황도에선 제일 멀지만?”
“맞아. 똑똑하네.”
리시먼드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발자크가 날 힐끗 돌아봤다.
“에릴은 동부는 처음인가?”
“그렇겠지. 에릴로트는 임무를 받은 적도 없으니까. 리시먼드 형님은 자주 오셨죠?”
“그래.”
오라버니들의 말처럼 난 동부는 처음이었다.
‘첫 번째 삶에서도 동부엔 와본 적이 없어.’
그래서 약간 설레기도 한다.
동부는 유혜민의 세계로 따지면, 동양과 비슷한 구석이 있어서 그리운 느낌도 들고.
우리 남매는 출입국으로 향했다.
요슈아가 말했다.
“아스트라에서 왔다. 데이몬드 관할령의 에릴로트, 리시먼드, 발자크, 요슈아다.”
“사전에 얘기를 들었습니다. 드시죠.”
미리 나와 있던 이클립토 령의 사람과 함께 우리는 영주성으로 향했다.
영주성의 홀엔 벌써 아이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에릴로트 양!”
“아, 파앙테 영애.”
“루멜리사라고 불러달라니까요.”
파앙테 후작가엔 자식이 하나뿐이라, 루멜리사가 온 모양이었다.
루멜리사는 내 손을 잡고 생글생글 웃었다.
“오신다는 소식은 듣고 기대하고 있었…… 아.”
루멜리사는 내 뒤에 있는 오라버니들을 보고 입을 떡 벌렸다.
얼른 헙, 하고 다물었으나 놀라는 건 다 봤다.
“세상에나…….”
“어머…….”
“와아…….”
귀족 아이들 사이에서 감탄사가 마구 터져 나왔다.
‘오라버니들이 얼굴만은 훌륭하니까.’
특히 리시먼드는 거의 성인처럼 보이는데, 서 있기만 해도 그림이었다.
그런데 루멜리사의 눈은 발자크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음, 루멜리사는 발자크 같은 타입이 취향이구나.’
“오, 오, 오라버니들이시군요. 얘, 얘기는 많이 들었…….”
얼마나 수줍은지 무려 황도 사교계의 공주님인 루멜리사가 말까지 더듬었다.
“소개해드릴게요. 이쪽이 리시먼드 오라버니고, 첫째예요.”
“아, 네에……. 알아요. 유명하시니까. 엄청난 가호를 둘씩이나 가지고 계신다고.”
“그리고 이쪽이 발자크와 요슈아인데 둘은 쌍둥이고—”
—라고 말한 순간.
“영애애액—!! 클리오라 시즈니입니다아아악! 저도 소개를!”
“저도!!!”
“저도!!”
“마틸다 로빌통이에요오옷!!!”
엄청난 괴성에 난 흠칫, 어깨를 모았다.
흡사 멧돼지, 아니, 불도저 같았다.
영애들 뿐만이 아니었다.
영식들도 눈을 번쩍번쩍 빛내며 내 주변을 에워쌌다.
“바, 발자크 님! 만나 뵙게 되어서 정말 여, 영광, 영광입니다! 최연소 오러 발현자라는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기대했는지……!”
“리시먼드 님의 위용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아아, 요슈아 님…….”
오라버니들은 몹시 귀찮은 얼굴이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 다들 반가워요…….”
이클립토 행의 시작부터 소란스러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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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클립토 백작은 자선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도착한 아이들에게 만찬을 열어주었다.
“여독을 푸시고, 즐거운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백작은 듣던 것처럼 엄청나게 사람 좋은 인상이네.’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찰나였다.
챙!
챙—!
퍽!
챙강—!
내 앞에 엄청나게 많은 접시가 놓였다.
“영애, 드셔보세요. 맛있네요.”
“해산물은 어떠신가요?”
“듣기로 달콤한 것을 좋아하신다고…….”
아이들의 표정은 호감으로 가득했다.
‘오라버니들에게 향한 통로는 나뿐이니까.’
저 세 오라버니는 아까부터 귀찮은 얼굴이더니만, 인사 외에는 아이들을 상대해주지 않았다.
‘뭐, 그것도 있지만 친절한 아스트라 혈족에 대한 호감도 있겠지.’
아스트라의 3세들은 싸가지 없기로…… 아니, 성격 나쁘기로 유명하니까.
그 아름다운 외모에 혹해서 다가갔다가 망신을 당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난 “아하하……”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고마워요.”
그런데 그때였다.
툭—!
등 뒤에서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와 오라버니들은 동시에 내 등 뒤를 쳐다봤다.
웬 영애가 부채를 떨어뜨리는 소리였다.
‘응?’
그런데 리시먼드가 이상했다.
그가 자리에서 빠르게 일어났다.
“저는 피곤하니 먼저 올라가 보겠—”
리시먼드가 그렇게 말했을 때였다.
“아기 고양이…….”
아기 고양이?
나와 쌍둥이의 표정이 묘해졌다.
어디서 많이 들은 말이었기 때문이다.
“리시먼드 님, 캐서린 J랍니다!”
‘역시, 편지를 보냈던 그 애구나.’
캐서린이라면 황도 귀족 아이들 중에 가장 윗줄에 적혀 있던 아이다.
왜냐면 모친이 타국의 왕족이거든.
‘그 타국의 왕이 급사해서, 이제 곧 캐서린의 모친이 왕위에 오른다고 했던가.’
꽤 좋은 나라인 터라, 캐서린 뒤엔 영애들이 가득했다.
줄을 잡아보려고 하는 듯했다.
그런데 캐서린 뒤에 있던 여자아이가 날 보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곤.
“더러운 피…….”
소란스러워서 말소리가 들리지 않았지만, 입 모양은 분명히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