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사라의 눈물에 오슈론 공자는 매우 당황했다.
황궁 기사단 중 남방을 상징하는 포이낙스 기사단. 그 단장 출신인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연약한 여자의 눈에선 눈물이 나서는 안 된다.’
오슈론 공자는 그 말을 엄명처럼 따랐다.
물론 괴물 같은 여동생은 제외였다.
가호가 <근육 강화>인 동생은 저보다 훌쩍 큰 남자애들의 다리도 연필심처럼 부러뜨리고 다녔다.
사라 포그는 연약하다.
연약한 여자를 울리는 건 쓰레기.
사라 포그가 우는 건 에릴로트 아스트라 때문이다.
그럼 에릴로트 아스트라는 쓰레기……?
‘그 애도 연약한 여자인데?’
아니지.
에릴로트 아스트라는 무려 용의 주인이었다.
걔는 강하다.
‘그리고 부탁도 했다잖아.’
강자는 약자의 부탁을 들어줘야 한다.
약자(사라 포그)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은 강자(에릴로트 아스트라)는 나쁜 녀석이었다.
오슈론 공자가 소리쳤다.
“울지 마십시오, 영애! 그런 무도한 자 때문에 어찌 눈물을 보이십니까!”
사라 포그는 턱에 양 주먹을 붙이고는 훌쩍였다.
“어쩜……. 오슈론 공자님은 상냥하시군요.”
사라의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이 가득 차자, 다른 소년들이 얼른 동조했다.
“예, 울지 마십시오. 따돌리는 녀석들이 나쁜 겁니다.”
“에릴로트 영애는 그렇게 안 봤는데 별로 좋은 사람은 아닌가 봅니다.”
공자들이 편을 들어주자, 사라는 배시시 웃었다.
“사실 저는…… 황도는 차갑고 무서운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공자님들 덕에 생각이 바뀌었어요…….”
“그, 그런가요!”
“네……. 정말 감사해요.”
사라가 눈을 깜빡이며 수줍은 표정을 지었다.
공자들은 머쓱한 듯 굴었지만, 결코 기분이 나쁜 얼굴은 아니었다.
* * *
해 질 녘.
내 방엔 오라버니들이 있었기 때문에, 난 사람이 없는 곳을 찾아왔다.
사라 포그가 온실에 있던 공자들을 죄 끌고 만찬장으로 간 터라, 온실은 비어 있었다.
다른 영애들은 항의의 의미로 방에 틀어박힌 모양이고.
나는 온실 구석에 숨어 통신석을 연결했다.
[예, 아가씨. 콘라드입니다.]
“이틀 뒤 이클립토 령에서 고아원 준공식이 있잖아.”
[예.]
“거기로 옮겨지는 아이들 명단은 알아봤어?”
다른 고아원의 원아들 명단은 이미 확인했다.
거기엔 달리아가 없었으니 아마도…… 아니, 확실히 이번에 준공되는 고아원에 달리아가 나타날 터였다.
[대부분이 이클립토 령에 있는 고아원에서 이동하는 모양입니다. 워낙 포화상태였던 터라.]
“이클립토 령의 고아원 아이들 말고.”
[슐뱅 자작령에서 옮겨오는 아이들도 있는 것 같았습니다. 몇 명 되지는 않았던 것 같지만…….]
“명단은?”
[아직 확보하지 못했습니다만, 내일 오전 중으로 소식이 올 듯싶습니다.]
“알아내는 대로 연락해줘.”
[예.]
콘라드와 통신을 종료한 뒤, 난 통신석을 주머니에 잘 넣어두었다.
그리고 온실을 나가려고 걸음을 옮겼을 때였다.
누군가 온실로 쿵, 쿵, 발을 구르며 들어오고 있었다.
‘으악!’
혹시 내 목소리를 들었을까?
아, 이래서 방에서 통신하고 싶었는데.
이놈의 오라버니들…….
그렇게 생각하며 숨죽이고 있었다.
그런데 온실로 들어온 사람은 곧장 테라스로 가더니, 벤치에 주저앉아 훌쩍이고 있었다.
“사람은 이 얼마나 간사한가요, 프린스 님……!”
이 목소리는 캐서린이다.
‘말하는 것으로 봐선 내 통신을 듣지 못한 것 같은데……?’
살금살금 다가가 보니, 캐서린이 손수건으로 입가를 틀어막은 채 훌쩍이고 있었다.
“캐서린 양?”
부르자 캐서린이 흠칫, 나를 쳐다봤다.
“에릴로트 양…….”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캐서린의 턱에 왕창 주름이 생겼다. 그녀는 울먹울먹 나를 쳐다보다가 벤치에 엎어져서 소리쳤다.
“별꽃성이 미워요~!”
엥?
별꽃성이라면 캐서린 무리가 사라 포그를 부르는 별명이 아니던가.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포그 영애가 왜요?”
“리시먼드 님께 갔거든요. 삽화를 보여드리려고요.”
“아아, 리시먼드 오라버니와 닮았다는 그 프린스 님의 삽화 말이지요? 오라버니는 제 방에 계실 텐데?”
“네. 그러시더라고요. 다른 영식들이 리시먼드 님을 붙들고 영애의 방 앞에 있었어요.”
“영식들이요?”
“사라 양을 오해하고 있으니 본인들이 설명해주겠다나 뭐라나…….”
캐서린은 훌쩍훌쩍 울면서 내용을 설명했다.
이야기는 이랬다.
캐서린은 평생 이상형이던 프린스 삽화와 리시먼드가 얼마나 닮았는지 보여주기 위해서 설레는 마음으로 찾아갔다.
그런데 영식들이 리시먼드를 끌고 나오는 중이었다.
캐서린은 그들을 저지했단다.
“리시먼드 님께 보여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우리가 먼저 약속을 잡았습니다.”
“약속 같지 않은걸요? 저, 리시먼드 님……! 이 삽화가 제가 계속 말씀드렸던—”
“정말이지. 아무리 트랑 공작가의 영애라도 좀 너무하신 게 아닙니까?”
“뭐라고요?! 여기서 왜 가문 이야기가 나오죠? 설마 트랑가를 모욕하려고 하시는 건가요?”
캐서린이 울컥하자, 영식들은 당황했단다.
하기야, 일국의 왕녀와 트랑 공작 사이에서 태어난 캐서린이었다.
정말로 화가 나면 영식들이 입을 벙긋이라도 할 수 있겠는가.
그때, 영식들의 사이에 있던 사라 포그가 나섰다고 했다.
“무, 무례한 일은 그만하셨으면 좋겠어요!”
“무례요? 누가 무례하다는 건가요, 별꽃성?”
“그런 이상한 별명으로 부르는 것도 그만둬주세요……!”
“뭐, 뭐라고요?”
“리시먼드 님이 곤란해하시잖아요. 모르시겠어요?”
“……네?”
“어린애도 아니고, 삽화 같은 것에 빠져서 망상하는 건 이제 그만두세요……. 캐서린 양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에요…….”
“기가 막혀! 리시먼드 님이 곤란하셨다면 직접 말씀하셨겠죠!”
“당연히 말씀하시기 힘드시죠. 트랑 공작가의 영애시잖아요……. 다들 영애처럼 막무가내로 사는 건 아니란 말이에요……. 그렇죠, 공자님들?”
그렇게 울먹이니, 공자들이 동조해주었다고 한다.
캐서린은 서럽게 울었다.
얼마나 우는지, 손수건이 눈물에 푹 젖을 정도였다.
나는 내 손수건을 꺼내서 캐서린에게 주었다.
“고마워요, 영애……. 코를 풀어도 되나요?”
“네.”
팽!
코를 시원하게 푼 캐서린이 눈물 젖은 눈으로 날 올려다봤다.
“손수건을 빨아서…… 아니, 새로 사드릴게요.”
“괜찮아요. 그런데 그게 끝이었나요?”
“저와 별꽃성, 아니, 이제 그렇게 부르지도 않을 거예요. 사라 포그라고 하겠어요.”
“…….”
“저와 사라 포그의 얘기는 거기서 끝이지만……. 영애의 오라버니들은 공자들과 좀 싸운 모양이에요.”
“오라버니들이요?”
“네. 공자들 중의 하나가 ‘여동생의 말을 믿을 것 없다. 포그 영애는 좋은 사람.’ 이라고 해서…….”
아하.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겠다.
‘사라 포그가 이번엔 나를 물고 늘어졌나 보지?’
공자들이 나를 못된 애로 취급하는 것 같으니, 오라버니들은 화가 났을 테고.
‘오라버니들은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려 깊은 애인 줄 아니까.’
전혀 아니지만.
마침 테라스 난간 아래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지나갔다.
사라와 영식들이었다.
‘이번에 온 영식들은 단순한 애들이 많지.’
이 자리에 모인 목적은 자선 행사 때문이다.
애들이 귀찮게 여길 만한 행사지.
재밌지도 않고, 흥미가 생길 만큼 자극적인 건 더더욱 아니고.
‘아무리 귀족들이 참석해야 하는 행사라지만, 핑계를 대서 빠질 수도 있는데 우직하게 온 애들이야.’
즉, 이런 행사도 귀찮아하지 않을 정도로 선량한 애들이 모이는 행사란 것이다.
사라가 눈물로 회유할 수 있을 정도로 순진한 애들이라는 의미였다.
나를 따라서 사라를 본 캐서린이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사라 포그는 뭘 원해서 이런 짓을 하는 걸까요?”
“원하는 건 벌써 이뤘을걸요.”
“네?”
“무리의 대장 노릇이 하고 싶었나 봐요.”
여자애들은 이미 무리가 형성되어 있었다.
보통 여자애들이 남자애들보다 빠르게 사교계에 나가므로.
무리의 왕 노릇을 하고 싶은데, 캐서린이라는 고귀한 핏줄이 있어서 무리겠지.
다른 무리인 루멜리사 쪽은…….
‘캐서린보다 루멜리사가 훨씬 똑똑하니까 엄두도 안 났을 거고.’
무엇보다 남자애들에게 공주님이 되고 싶었을 테고.
‘이대로 무리를 형성하면 된다고 생각했을걸?’
결국 남자애들도 머리가 크면 귀족 사회의 룰을 따르게 된다는 걸 모르고.
귀족 사회의 룰.
그건 힘 있는 자에게 고개를 숙이게 된다는 말이다.
당연히 시간이 지나면 고귀하기로는 첫 손 가는 캐서린이 저들을 찍어누르게 될 것이다.
‘거기까지는 생각도 안 한 거지 뭐.’
인터넷의 발달로 더 넓은 사회를 쉽게 접하는 유혜민의 세계에서도 저런 건 흔한 일이었다.
중, 고등학생들이 나중에 올 후환을 생각하고 학교 폭력을 저지르던가?
A에겐 B의 뒷담을 하고, B에겐 A의 뒷담을 하는 바보 같은 경우도 흔하다.
애들만의 일도 아니었다. 어른들 사이에서도 저런 멍청한 편 가르기를 하다가 호되게 당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라 포그가 열다섯…….’
한창 세상의 중심은 자기라고 생각할 때였다.
나는 생긋 웃고, 캐서린을 쳐다봤다.
“그래서, 이대로 계실 건가요?”
“아뇨! 사교계의 어른들께 말씀드려서 혼쭐을 내줄 거예요!”
“그건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은데요. 어른들이 나서면 너무 복잡해질 테고…….”
또, 저 영악한 사라 포그가 당하고만 있겠는가?
별명부터 해서 온갖 말로 어른들에게 자기는 따돌림을 당해왔다고 하겠지.
그건 결국 캐서린의 무리나, 나까지 귀찮아지는 일이었다.
“그럼 어쩌죠?”
“이번 일은 제게 맡겨주시겠어요?”
“네?”
나 이런 정리를 아주 잘하거든.
무늬만 보좌관이었던 게 아니에요.
여론전은 항상 내 담당이었다.
* * *
오라버니들은 당연히 길길이 날뛰었다.
발자크가 불 뿜는 용처럼 화를 냈고, 요슈아와 리시먼드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요슈아가 차갑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사라 포그가 사람들을 어떻게 휘젓든 간에 우리와는 관계없다고 생각했지만……. 에릴로트가 엮인다면 말이 다르지.”
뱀 중에서도 독사인 요슈아는 이미 사라 포그를 구렁텅이에 빠뜨릴 방법을 12,314가지쯤 생각해둔 모양이었다.
리시먼드도 조용한 걸 보니 요슈아를 말려줄 마음이 조금도 없는 듯했다.
“하지 마.”
발자크가 뚱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난 좀 재밌게 해결하고 싶어서 그래.”
“……재밌게?”
“응.”
유혜민으로 살던 세계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던 속담은 이것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내가 씩, 비열하게 웃자 요슈아의 입매가 말려 올라갔다.
“정말 재밌는 생각을 하는 모양인데?”
“응. 그러니까 나서지 마?”
“동조 정도는 하고 싶어.”
“그건…… 좋아!”
난 밝게 웃고,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
‘보자. 하이디와 베티가 내게 제일 잘 어울릴 거라고 했던 옷이 뭐더라.’
정리되어 있는 옷을 착, 착, 넘기다가 발견했다.
전체가 새카맣고 치마 밑단에 밤하늘의 별처럼 보석이 콕콕 박힌 드레스였다.
그래도 너무 우울해 보이지 않도록, 소매엔 붉은 레이스로 포인트가 되어 있었다.
옷을 갈아입은 후, 나는 거울을 쳐다봤다.
그리고 귀찮아서 아무렇게나 질끈 묶고 다니던 머리를 풀었다.
잘 빗질한 후, 입술엔 장미 오일까지 발라주었다.
‘사라 포그는 내가 예쁘다는 말에 발작하는 모양이니까.’
이상한 사람들에게 여자는 같은 예쁜 여자를 싫어한다고 선입견이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여자아이들은 예쁜 여성 친구를 좋아한다.
캐서린과 루멜리사만 해도, 내가 눈을 깜빡일 때마다,
“하아아……. 인형 같아요, 에릴로트 양.”
—하면서 황홀해했다.
남자들 중에서도 예쁜 여자는 못됐다고 생각하거나, 도도할 거라도 재수 없어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니까 사람이 예쁘다는 허접한 이유로 싫어하는 건, 성별을 불문하고 이상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사라 포그가 딱 그런 이상한 사람이지.
내가 드레스룸에서 나오자, 오라버니들 셋이 주르륵 늘어서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늘 예뻐, 에릴.”
“알아!”
“아버지랑 닮았네.”
“맞아!”
“원래 치장하는 건 귀찮아하잖아?”
“응!”
사라 포그를 열받게 하려고 그래.
난 생긋 웃고, 사라가 영식들을 끌고 가서 차지하고 있다는 정원으로 향했다.
사라는 생글생글 웃으며 영식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래서 저는 어머니께 이렇게 말씀드렸어요.”
“아, 네…….”
“그러시군요…….”
“하하, 하…….”
착한 애들이지만, 매일 같이 놀지도 못하고 사라에게 붙들려 있으니 죽을 맛인가 보다.
표정이 딱 혈족 파티에 불려갔을 때의 발자크 같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가제보로 다가가서 말했다.
“저어…… 포그 영애.”
말하자, 사람들의 시선이 일시에 내게로 향했다.
남자애들이 눈이 엄청나게 커다래져 있었다.
사라의 얼굴은 굳어졌다.
매일 귀찮아서 대충하고 다녔더니, 약간 치장해도 많이 달라 보이는 듯했다.
사라는 뚝뚝 굳은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어디…… 파티라도 하나 봐요. 저를 빼고.”
나는 놀란 척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아니면 오늘은 왜 그렇게 꾸미셨는지…….”
“사과하러 올 땐 격식이 중요하다고 배워서요.”
“사과요?”
“네……. 저 때문에 불쾌해하셨다고…….”
사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렇게 말한 적은 없는데요?”
사라의 목소리가 차가워지자, 영식들이 놀란 얼굴로 그녀를 쳐다봤다.
저런 목소리는 처음 들어봤을 테니 당연하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 그럼 제가 오해를 했나 봐요…….”
“네. 오해예요.”
“포그 양의 마음이 상하지 않았다면, 정말 다행이에요…… 저는 황도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모르는 게 많거든요. 그러니까 혹시 제가 모르는 사이에 실수를 했다면…… 꼭 알려주세요.”
내가 울먹이자, 공자들이 당황했다.
“우, 울지 마세요. 영애!”
“아…….”
“예, 울지 마십시오!”
“상냥하셔라…….”
사라가 늘 한다는 그 말을 하자, 영식들은 헤죽헤죽 웃었다.
물론 사라의 표정은 썩어들어갔다.
벌써부터 표정 관리를 못 하면 쓰나.
‘아직 시작에 불과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