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8화. (98/390)

98화.

사라 포그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러곤 나를 쏘아보고 있다가, 다시 눈썹을 축 늘어뜨렸다.

“왜 그런 오해를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신경쓰지 않으셔도 돼요. 그보다 먼저 와주셔서 너무 기뻐—”

또 상냥한 행세를 하길래 나는 얼른 말을 끊었다.

“다행이에요. 저는 저 때문에 만찬장 티파티에서 우셨다길래 굉장히 걱정했거든요.”

“……네?”

“제가 영애들을 데려오지 않아서 굉장히 서운해하셨다고 들었어요.”

“…….”

사라가 잠깐 멈칫했다.

‘그런 말이 다른 사람 귀에 안 들어갈 리가 없잖아.’

여자아이들의 오빠나 남동생도 참석한 티파티였다.

물론 이 나이대의 형제, 자매, 남매는 전생의 원수이므로, 사라의 편을 들 수도 있다.

하지만 남매간에 이런 얘기를 안 할 리가 없다.

서로를 공격하기에도 좋은 소재가 아니던가?

예를 들면 ‘넌 성격이 더러워서 불쌍한 영애를 따돌리고 다니잖아’ 같은 말로.

‘하기야 후환을 생각하고 뒷얘기를 하는 사람은 없지.’

같은 무리에서 서슴없이 뒷담하는 일도 흔한데.

성인들도 직장 동료들 사이에서 왔다갔다 하며 뒷말을 하기도 한다.

특히 중고등학교 때는 너무 흔한 일이었다.

그러다 후환이 생기는 사람은 수두룩빽빽했다.

나중 일을 생각하기보다는, 당시의 본인 감정이 제일 중요한 것이다. 

‘어쨌든 난 기회를 놓치지 않는단다.’

나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사라를 쳐다봤다.

“포그 양이 다른 영애들을 데리고 와달라고 한 줄은 몰랐어요.”

“그건—!”

“왜냐면 제게 ‘에릴로트 양, 기다리고 있을게요?’ 라고 밖에 안 하셔서…….”

공자들이 술렁였다.

정말?

그 정도면 데리고 와달라고 하는 줄 모를 수도 있잖아?

—그런 표정들이었다.

분위기가 묘해지자, 사라는 당황했다.

“아, 안 온 건 맞잖아요? 제가 그렇게 부탁했는데요!”

“정식으로 초청한 게 아니니까……. 게다가 저도 조금 속상하기도 했고요.”

그렇게 말하자 사라의 얼굴이 일순 밝아졌다.

공격거리를 찾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제게 서운한 마음 때문에 만찬장에 안 오신 거란 말이죠?”

“그런 걸 수도 있지요…….”

건수를 잡은 사라는 언제나의 ‘울먹거리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로 제게 서운하신 건지 모르겠지만, 부디 마음 푸셔요…….”

그 말에 나는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제대로 미끼를 물어주네.’

그럴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단박에 넘어와주니 재밌기까지 했다.

난 사라처럼 순진한 표정으로 에헤헤, 웃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기뻐요.”

“네? ……네.”

“서로 오해하지 않고, 좋은 관계를 쌓아가면 좋겠어요.”

“네, 뭐…….”

“아, 티타임을 방해했지요? 시간을 뺏어서 죄송해요.”

그렇게 말하고서 영식들에게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생긋, 미소 짓자 영식들이 붉혔다.

물론 이 장면이 사라에게 잘 보이도록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를 보는 사라의 표정이 날카로워졌다.

사라 포그는 그리 똑똑한 사람이 아니었다.

애초에 이런 식으로 한 무리를 적으로 만든 시점에서 절대로 영리한 아이라고 볼 수 없다.

저는 제가 엄청나게 똑똑한 줄 아는 모양이지만.

‘내가 가면 아마도…….’

난 속으로 킥킥 웃엇다.

“그럼.”

살짝 고개를 숙이고서 정원을 나섰다.

막 정원을 지나가던 세 명의 영애들이 보였다.

“아스트라 백작 영애?”

“네, 안녕하세요.”

“만나서 잘됐네요. 저희는 정원에서 산책할 생각인데 같이 가시겠어요?”

정원?

‘그건 안 되지.’

나는 요령 좋게 살짝 세 사람을 돌려세웠다.

“정원은 자주 갔으니까 외성 주변을 산책하는 건 어떨까요?”

“아, 그럴까요?”

“좋아요.”

“저도요!”

그거 다행이다.

‘사라는 저 무리에 혼자 둬야 하거든.’

저 생선은 미끼를 물었다.

그러니 이제는 혼자 펄떡펄떡거리면서 힘이 빠지게 할 차례였다.

“아스트라 백작 영애, 오늘 드레스가 유난히 아름다워요.”

“와, 훌륭한 심미안을 가진 영애의 눈에도 괜찮은 드레스라니, 기뻐요. 옷을 골라준 하녀들에게 상을 줘야겠는 걸요?”

“세상에, 어쩜 말씀도 상냥하신지!”

“아스트라 영애, 다음에 제 화실에 놀러오세요. 꼭 모델이 되어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렇다면 저도 초대해주세요, 영애! 아스트라 백작 영애와 함께 갈게요!”

우리들은 까르르 웃으며 즐겁게 산책했다.

***

에릴로트가 나간 정원.

사라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곤 언제나 그렇듯 영식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에릴로트 양은 정말 너무 하지 않나요?”

그때까지만 해도 킬킬거리며 다른 이야기를 하던 영식들이 눈을 홉떴다.

“예?”

“기분이 나빠서 다들 계시는 만찬 티파티에 안 오셨다는 거잖아요? 저는 정말이지 속상해서…….”

사라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결국, 저 하나 때문에 공자님들께도 실수를 한 거네요. 그걸 여기까지 와서 말씀하시는 것도 이상해요.”

“…….”

“…….”

“굳이 와서 제 탓을 하는 것 같달까…….”

사라는 어깨를 움츠린 채로 영식들과 하나하나 눈을 맞췄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그런데 이상했다.

영식들의 표정이 미묘해진 것이다.

“그건 좀 비약 같은데요. 그냥 사과하러 오신 것 같습니다.”

“네?”

“아스트라 백작 영애가 먼저 손을 내민 것이니, 잘 지내보면 좋을 텐데요?”

사라의 표정이 구겨졌다.

입술을 꾹 깨문 그녀가 말했다.

“어떻게 그렇게 말씀하셔요?”

“제가 무슨 말을……?”

“비약이라니. 너무 서운해요, 공자님.”

“…….”

“공자님은 제 편이 아니었나요? 다정하신 점을 좋아했는데…….”

사라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하자, 영식들이 흠칫했다.

그들은 얼른 사라를 감싸주기 시작했다.

“그래, 비약이란 말은 너무했던 것도 같습니다.”

“사과하세요.”

그 탓에 괜히 공격당한 공자의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뭐야.’

왜 이런 말에 상처를 받지?

별 것도 아니잖아.

“공자님, 사과해주시는 건가요?”

“……아, 예.”

“역시 상냥한 분이셨어!”

사라는 손뼉을 짝! 치며 기뻐했다.

그러곤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사과를 하는 건 사실 용기 있는 일이래요. 다정하고 용기 있는 분과 친구가 되어서 기뻐요.”

“…….”

“다들 이렇게 염려해주시니, 에릴로트 양의 일은 잊을게요.”

마치 ‘내가 사려 깊어서 에릴로트의 말을 잊어주는 거다’라는 이야기로 들렸다.

공격 당했던 공자의 표정이 구겨졌다.

그러나 사라는 생글생글 웃을 뿐이었다.

그리고 늘 하듯이 사람들의 중심이 되어 본인의 이야기를 떠들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어디까지 얘기했지요? 아, 제 말이 4년 전 황궁배 우승마의 혈통이란 것까지 말씀드렸네요. 제 말의 이름은 티아라인데—”

“…….”

“…….”

영식들이 표정이 좋지 않았다.

‘포그 영애와 있을 땐 왜 이렇게 피곤하지?’

‘가서 목검이나 휘두르고 싶은데…….’

사라는 한 번 이야기를 시작하면 몇 시간이고 놔주지 않는다.

어쩐지 엄청 귀찮았다.

***

나는 영애들과 함께 대회의실로 향했다.

백작이 슬슬 준공식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주려는 모양이었다.

자리를 잡고 앉아있는데, 영식들이 들어왔다.

두 무리의 분위기는 싸늘했다.

영애들은 고개를 홱, 돌렸고 그 모습을 본 영식들이 눈살을 찌푸린 것이다.

그때, 내가 입을 열었다.

“오슈론 영애.”

“네?”

“검술 시합에 나가신다고요?”

“오라버니랑 대련해서 이긴 쪽이요. 가문당 한 사람만 나가거든요.”

“검을 좋아하시나 봐요.”

“네! 검술 자체도 좋아하고, 검을 모으는 것도 취미예요.”

“어떤 검을 갖고 계세요?”

“12대 중앙 기사단장의 검인데, 엘로소드라고—!”

검을 좋아하는 오슈론 영애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러자 영식들 중에 한 사람이 말했다.

“엘로소드! 그거 영애가 가지고 있습니까?”

“……그런데요.”

“으아! 으아아—!”

영식이 잔뜩 흥분하여 다가왔다.

“한 번 보여주시면 안 됩니까? 제가 12대 중앙 기사단장을 엄청 존경하거든요!”

“뭐……. 공자는 어떤 검이 있으신데요?”

“검은 아니고, 랜서가 있습니다. 플루이더요!”

“플루이더?!”

물꼬를 터주니 같은 취향을 가진 두 사람은 말이 잘 통했다.

난 다음엔 미샤르 영애를 쳐다봤다.

“바이올린 연주가 취미라고 들었어요.”

“아뇨. 첼로예요. 바이올린은 별로…….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최근 현악기 연주모임에서는 매번 바이올린이 메인이거든요. 저는 그게 별로예요. 첼로의 중후한 소리가 얼마나 좋은—”

“제 말이 그 말입니다! 말이 통하는군요!”

첼로 연주에 일가견이 있는 공자가 덥석 동조해왔다.

미샤르 영애는 큼, 헛기침했다.

“……좀 듣는 귀가 있으시네요.”

“듀엣 연주를 해보고 싶었는데요. 혹시 시간이 되시면 저희 연주 모임에……!”

이쪽도 완료.

‘역시 취미가 같으면 말이 잘 통한다니까.’

나는 족족 친구 매칭을 해주었다.

물론 미켈란과 콘라드가 꼼꼼하게 조사해준 미성년자 귀족들의 신상 명세 덕을 봤다.

투자에 취미가 있는 영애와 영식.

비슷한 감수성을 가진 영애와 영식.

모형 조립이 취미인 영애와 영식.

대회의실은 화기애애해졌다.

그때였다.

“공자님들~”

사라가 한 무리의 공자들과 막 회의장에 들어왔다.

그리고 다른 공자들이 영애들과 신나게 말하는 걸 보고 우뚝 굳어졌다.

“어디 계시나 했더니……. 공자님들, 우리는 저 테이블에 앉아요.”

그렇게 말했으나, 공자들은 이미 즐거운 대화에 푹 빠져 있었다.

며칠째 관심도 없는 지겨운 사라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었으니, 이런 대화가 엄청나게 즐거웠던 모양이다.

나는 사라에게 다가갔다.

“공자님들은 대화가 즐거우신 모양이니, 영애는 저와 함께 앉아요.”

“……됐어요.”

난 사라의 손을 잡았다.

“그러지 마시고—”

“됐다니까요!”

관심에서 벗어난 사라는 기분이 상해있었다.

그녀가 홱, 손을 뿌리쳤을 때였다.

“앗!”

나는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일부러 소란스럽게 의자에 기대는 것도 잊지 않았다.

덜컹, 끼익—!

소음에 놀란 아이들의 시선이 온통 내게 집중되었다.

신이 나서 공자들과 투자 얘기를 하던 루멜리사가 벌떡 일어났다.

“뭐하는 짓이에요!”

“저, 저는 그냥 살짝 손을 뺀 것뿐이에요! 그렇죠, 에릴로트 양?!”

“맞아요…….”

그러면서도 난 손을 끌어안고 처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둘러보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오슈론 영애가 인상을 쓰고 말했다.

“대체 어디까지 가려는 거예요?”

그녀는 이곳의 영애들 중에선 가장 호전적인 성격이었다.

기사단장 출신의 아버지, 마찬가지로 기사단장 출신의 어머니를 둔 그녀는 폭력에 예민했다.

“이간질은 참았어요. 하지만 이런 건 너무하잖아요!”

“정말 아니라고요! 에릴로트 양, 말 좀 해봐요!”

“저는 괜찮아요, 오슈론 영애…….”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눈썹을 늘어뜨리면 뭐가 있어 보인다.

아이들은 굳은 얼굴로 사라를 쏘아봤다.

사라가 매우 당황한 표정으로 허둥거리다가 날 흘겨보았다.

‘네가 항상 하던 짓인데, 당하니까 화가 나?’

미안하지만, 이런 일은 내 쪽이 더 전문이다.

***

사라는 포그 가문이 황도에 올라가기 전에는 일대에서 가장 유명한 레이디였다.

넘치는 재화.

재화를 기반으로 한 대귀족과의 끈.

비록 자작가지만, 웬만한 대귀족들보다 더 부유한 가문이리라.

1년 전만 해도 사라는 그렇게 생각했다.

거기다 자신은 레이디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소녀였다.

“포그 양이 너무 부러워요. 훌륭한 가문에 빼어난 외모……. 황도의 레이디들도 사라 양만 못하겠지요?”

“당연하죠! 포그 영애 같은 분이 어디 있겠어요? 황도에도 없을 걸요.”

“아스트라의 장미라는 에릴로트 아스트라도 포그 양보다는 아름답지 못할 거예요.”

“지혜로우시고, 아름다우시고, 그런데 가문까지……! 포그 영애야말로 신의 사랑을 받는 아이가 아닐까요?”

사라는 고향에선 선망의 대상이었다.

파티에서도, 일대에서 가장 큰 아카데미에서도 그녀가 중심.

모두가 사라를 부러워했고, 그녀는 자연스레 무리의 대장이 되었다.

포그 가문이 황도에 입성했을 때만 해도 자신감이 넘쳤다.

하지만…….

“포그 자작가? 무슨 가문이더라.”

포그 가문을 모르는 영애들.

그녀들은 자신은 생일에나 선물 받을 법한 호화로운 드레스를 연일 입고 다녔다.

같은 옷을 두 번 입는 경우도 보지 못했다.

심지어는 포그 자작이 발바닥에 불이 나게 뛰어다녀도, 얼굴 한 번 안 보여주는 귀족들이 무수히 많았다.

거기다가…….

“사라, 캐서린 트랑과 잘 지내야 한다.”

“싫어요! 캐서린이 얼마나 재수 없는지 아세요? 대장이나 된 것처럼 군단 말이에요!”

“그야 캐서린 트랑이 황도에서 오래 지냈으니 그렇지. 우리 사라가 얼마나 상냥하고 귀여운 아이인지 안다면 다른 영애들도 캐서린보단 너를 따를 거다.”

“그래도……!”

“아비가 중앙탑에 들어갈 때까지만 참아라, 응?”

부모님은 아주 잠시만 참으면 된다고 했다.

못해도 올해. 아니면 내년 중엔 기필코 중앙탑에 들어갈 거라고.

그렇게 되면 콧대 높은 대귀족들 사이에도 꿀리지 않을 거라면서.

그때까지는 어려운 일도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황도 귀족들은 순진한 구석이 있으니까.

보라.

난다긴다하는 귀족 영식들을 전부 이끌고 다니는 자신을.

‘영식들이 날 얼마나 좋아해?’

그런데.

“포그 양, 저는 정말 괜찮아요.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에릴로트 아스트라의 말에 사라의 표정은 완전히 뻣뻣해졌다.

‘뭐야. 왜 다들 이런 표정으로 날 보는 거야?’

이 애가 나쁜 거잖아!

사라는 몰랐다.

그녀가 누구의 콧털을 건드렸는지.

에릴로트 아스트라.

아이는 지난 삶에선 메인 악역이었다.

잠자는 메인 악역의 콧털을 건드렸으니, 이대로 쉽게 넘어갈 수 없다는 것도 사라는 몰랐다.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