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4화. (104/390)

104화.

“셀레네와 에릴로트가 승부를 겨뤄 이긴 쪽을 서부 예비원화전에 참전시키겠다.”

“아버지……!”

“아, 아버님……!”

“……!”

아스트라 공작의 선언에 파란이 일었다.

* * *

나는 회의장을 나섰다.

막 본성을 빠져나가려고 하는데 리앙틴과 디오네라가 달려왔다.

“어떻게 된 거야? 예비 원화전에 나간다니!”

리앙틴이 내 어깨를 흔들며 다급히 캐물었다.

“어떻게 벌써 알아?”

“회의 휴식 시간에 밀란이 교육실로 쳐들어와서 다 말했어.”

밀란은 재작년부터 7서열권에 든 사촌 오라버니였다.

돌멩이를 바위로 만드는 <확대>의 가호를 가졌는데, 가호와 달리 입이 가볍기로는 대장이다.

‘하여간에 그놈은.’

나는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맞아.”

“왜 갑자기?!”

“그게─”

내가 무어라 말하려 한 순간.

등 뒤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바스티나 고모가 씩씩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뒤엔 다른 사람들도 있었다.

실뱅 숙부와 헤르난 숙부, 그리고 다른 가신들.

열이 받은 바스티나 고모가 무슨 짓이라도 저지를까 봐 달려온 거다.

물론 저들 중 대부분은 날 걱정해서가 아니겠지만.

고모가 친 사고 때문에 셀레네가 기회를 잃을까 봐 그런 것이다.

‘셀레네가 원화가 되어야 유리한 사람들이니까.’

나는 아무렇지 않게 생긋 웃었다.

“안녕하세요, 고모님.”

“영악한 것.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감히 내 딸의 것까지 넘봐?”

“…….”

“네 억지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곤란해졌는지 알아? 아느냔 말야!”

하여간에 바스티나 고모는 가스라이팅 선수였다.

‘손톱의 때만큼도 영향을 받지 않지만.’

가스라이팅(죄책감을 심어줘서 상대를 휘두르려는 행위)은 유혜민 때 수도 없이 겪었다.

“언니가 되어서 동생에게 양보도 못 하고! 너 때문에 네 엄마가 얼마나 곤란해졌는지 봐라!”

할머니한테.

“어쩌면 그렇게 이기적이야. 동생 강습료 좀 도와주는 게 그렇게 억울해? 그래, 내가 죄인이다. 사업한다고 설쳐서 가족한테 피해나 주는 내가 죄인이야! 딸내미 아르바이트비나 노리는 내가 나쁜 새X라고! 어?!”

양아버지에게.

“제발 좀 조용히 지낼 수 없니. 왜 그렇게 가족들과 싸우지 못해서 안달이야. 혜민이 너 이럴 때마다 엄마는 숨도 못 쉬겠어.”

엄마한테.

유혜민으로 평생 겪어온 일이므로, 난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분란은…… 고모님이 만든 거잖아요?”

“뭐?”

“으음, 다른 사람들이 그랬어요. 고모는 온갖 일을 벌여서 황도에 올라가는 게 불안하다고요…….”

“뭐, 뭐야?!”

“저는 자꾸 사고만 치시니 혹시 또 황도에 올라가서도 가문에 피해가 갈까 봐……. 고모만 아니었다면 제가 왜 굳이 원화가 되고 싶어 했겠어요?”

내 말에 바스티나 고모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가스라이팅 돌려주기.’

즉, 이런 뜻이다.

네가 맨날 사고만 치니 네 딸이 기회를 뺏긴 거야.

“어디 감히 어른한테 그따위 말을─”

“게다가 제가 왜 셀레네 언니의 자리를 넘본 건가요?”

“너─!”

“할아버지께 떼를 써서 원화로 만들어달라고 한 게 아닌걸요?”

“이, 이……!”

“정당하게 대결해서 기회를 얻는 게 왜 자리를 넘본 것이 되는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팩트로 때리기.’

바스티나 고모는 부들부들 떨었지만, 아무 말도 못 했다.

나는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고모를 쳐다봤다.

“아! 혹시 겁이 나세요?”

“무슨…….”

“제가 셀레네 언니를 이길까 봐 겁이 나서 어쩔 줄 모르시는 거라면, 양보해드릴까요? 고모의 정신상태를 위해서요!”

‘자존심 뭉개기.’

바스티나 고모는 터질 듯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다가 찢어지는 고함을 내질렀다.

“이 망할 계집애가─!”

그리고 손을 확! 치켜든다.

나는 속으로 실소를 흘렸다.

가스라이팅 돌려주기.

팩트로 때리기.

자존심 뭉개기.

이 3단계 전법이면 그 어떤 가스라이팅 선수라도 거품을 문다.

‘그래, 때려라.’

내가 한 대 맞는 순간, 너는 장원에서 쫓겨나는 거야.

그런데 누군가 바스티나 고모의 손목을 잡았다.

“그만하지 못하겠니.”

디오네라의 모친인 바실레 고모였다.

“이거 놔요, 언니!”

바스티나는 악을 내질렀으나 바실레 고모에게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이익……!” 하고 신음했다.

“아이에게 손을 올리다니. 정신이 나갔구나, 바스티나.”

“이 계집애가 하는 소리를 언니가 들었다면─”

“들었어. 틀린 말이 없었고.”

“언니!”

“셀레네가 자리를 빼앗긴다면, 그건 에릴로트의 탓이 아니라 네가 무도하였기 때문일 거다.”

퍼뜩 정신을 차린 실뱅 숙부와 헤르난 숙부도 바스티나 고모를 뜯어말렸다.

“승부 전에 소란을 벌일 생각이냐. 그만하고 돌아가라, 바스티나.”

“예, 누님. 형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

바스티나 고모는 입술을 꽉 깨문 채 날 노려봤다.

그러나 이내 손을 내려놓고, 날 죽일 듯 쳐다보며 말했다.

“셀레네는 신성계 가호를 가진 아이야. 너 따위는 상대도 되지 못한다는 뜻이다.”

“염려해주셔서 감사해요! 혹시 정 상대가 안 될 것 같으면 저는 용을 불러오면 되니까 괜찮아요!”

“이익─!”

마지막까지 복장을 터뜨려주자, 바스티나 고모는 거품이라도 물 기세였다.

하지만 다른 숙부들에게 끌려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가만두지 않겠어!”

나는 발광하는 바스티나 고모에게 손을 흔들어줬다.

‘까불고 있어.’

히죽 웃고 있으니 등 뒤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리앙틴과 디오네라가 입을 떡 벌린 채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리앙틴이 눈을 끔뻑이며 물었다.

“넌 겁도 없어? 바스티나 고모님은 저래 봬도 가호를 2단계까지 연마한 분이야.”

“그런데?”

“뭐?”

“겁을 먹으면 그 시점부터 패배인 거야. 다른 데서도 질 일이 얼마나 많은데, 오기에서까지 져?”

디오네라가 숨을 크게 들이켰다.

“와…….”

그러자 바실레 고모가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아.” 하고서 얼른 바실레 고모에게 고개를 숙였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모님.”

“뭘. 나도 좋은 구경했는데.”

“네?”

“디오네라가 널 보면 용기가 생긴다고 했던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구나.”

“…….”

“그럼 난 가보마.”

바실레 고모는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고 등을 돌렸다.

몇 걸음 걷던 그녀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고 보니까 말이다. 몇 대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단다.”

“이런 일이요?”

“원화 후보를 놓고 승부를 겨뤘던 일 말이다.”

나는 흠칫, 눈을 크게 떴다.

‘이번 승부는 선례를 따를 수도 있겠구나.’

아니, 진중한 바실레 고모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온 걸 보면 필시 그럴 터다.

그러니까 바실레 고모는 내게 힌트를 준 거다.

“이 정도면 네게 줄을 선 건가?”

“실뱅 숙부님이나, 헤르난 숙부님이 도와주는 셀레네 언니보다 제가 더 든든할 거예요.”

바실레 고모는 후후 웃고, 사라졌다.

리앙틴과 디오네라가 말했다.

“승부 준비할 거지? 도와줄까?”

“응! 나도 도와줄게, 에릴로트.”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언니들은 며칠 후에 시험이잖아. 준비는 내가 할게.”

나는 두 사람에게 인사하고 곧장 공작성의 장서실로 향했다.

커다란 책장들을 가득 메운 장서들을 돌아봤다.

‘아스트라 역사 기록. 역사 기록이…… 여기 있다.’

나는 수십 권에 이르는 가문의 역사 기록서를 찾았다.

눈이 빠지게 책을 읽기를 두 시간쯤.

겨우 내용을 찾아냈다.

바실레 고모의 말대로 4대 전에 두 명의 공녀가 서부 원화전 참전을 두고 승부를 겨뤘다.

승부의 방식은 이러했다.

각각 용병을 고용하여 모의 전쟁을 치른다.

참가 인원은 15명으로 가호가 있는 자 또한 참전 가능하며─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