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 * *
내가 밀란에게 손을 내민 건 승부 내용이 공지된 직후였다.
나는 공작성에서 밀란과 접촉했다.
“연합하자고? 나와?”
밀란은 눈을 가늘게 뜨고 팔짱을 꼈다.
“블리젠…… 아니, 리시먼드와 쌍둥이도 있을 텐데, 왜 굳이 나와 연합하겠다는 거지?”
“그야 셀레네 언니가 오라버니와 연합하려고 할 테니까.”
셀레네가 7서열권이 아닌 다른 3세를 선택할 리 없다.
7서열권은 고착되었을 정도로, 다른 3세들과 엄청난 차이가 있으니까.
7서열권의 명단은 이러했다.
[에릴로트, 셀레네.
리시먼드, 요슈아, 발자크.
밀란, 로레이나.]
승부에 참가하는 나와 셀레네를 제외하면 5명이 남는데, 그중 3명은 나와 형제.
결국 셀레네의 선택지는 둘로 좁혀진다.
밀란과 로레이나.
로레이나의 가호는 <수인화>로 완벽한 공격계다.
‘하지만 이 전투에 필요한 건 특수계지.’
이미 강력한 공격력을 가진 병사들이 있으니, 거기에 공격계 병사를 추가한다고 해도 특별히 도움이 되지 않을 거다.
그러니 <육체 지배>라는 특수 가호를 가진 밀란이 적합하다.
‘무엇보다 밀란은 셀레네 쪽과 연합한 헤르난 숙부의 아들이고.’
설명하자, 밀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셀레네가 나와 연합할 거라는 건 알겠어. 그런데 왜 하필 나야? 너는 셀레네와 동급인 리시먼드라는 선택지가 있는데.”
“밀란 오라버니는 셀레네 언니의 가호에 허를 찌를 수 있으니까.”
골치가 아픈 건 셀레네의 배리어와 증폭이다.
하지만 밀란이 <육체 지배>를 한다면?
‘셀레네는 그대로 병사들을 잃게 되는 거지.’
아무리 강력한 킹이라도, 다른 체스 말이 없는 한 게임에선 이길 수 없다.
끈기와 정신력을 두루 갖춘 셀레네는 보통 방법으로는 절대로 승부를 포기하지 않을 거다.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야 해.’
그러기 위해선 내게 밀란의 가호가 필요했다.
밀란은 “흐응” 신음하고 비죽 웃었다.
“내가 왜 너를 도와야 하지?”
“내가 밀란 오라버니를 도와줄 테니까.”
“날 어떻게 도와준다는 거야?”
“숙모님이 헤르난 숙부와 이혼할 수 있도록 도와줄게.”
“……뭐라고?”
헤르난 숙부는 겉으론 성격 좋은 막내로 보이지만, 가정에선 완전히 쓰레기였다.
애인만 줄줄이 4명.
그 애인들에게서 본 사생아가 2명.
애인들에게 황도와 아스트라 장원 내에 저택을 사주고, 매달 막대한 생활비를 지원.
심지어는 그러고서도 가정에선 폭군처럼 군림했다.
“숙모님은 좋은 분이시지. 지금까지 헤르난 관할령을 끌어온 건 그분이시잖아? 밀란 오라버니도 숙모님을 매우 존경하고.”
“…….”
“숙모님이 이혼하지 못하시는 게 오라버니 때문이란 걸 알아.”
“……그래서?”
“내가 이혼 후에 밀란 오라버니를 데려갈 수 있도록 할아버지를 설득해줄게.”
밀란이 움찔했다.
숙모님의 친정은 그리 대단한 권력가가 아니었다.
이혼하면 아들을 데려갈 수 없을 테니, 저 사이좋은 모자는 생이별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정신 나간 남편을 참고 산 것이다. 이 오랜 시간 동안.
“대신 숙모님을 설득하는 건 밀란 오라버니의 역할이야.”
“어머니는…….”
“그래, 소중한 아들을 고생시키고 싶지 않으실 테니 반대하실 거야. 그런데, 오라버니.”
“…….”
“이제 오라버니도 어머니가 마음고생 하는 걸 보고 싶지 않잖아.”
나 또한 자식이기 때문에 밀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부모가 고생하는 걸 좋아할 자식은 없다.
부모의 고통에 마음이 아프고, 서럽다.
밀란은 고심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내가 오라버니를 도울 수 있어.”
“알아. 넌 용을 가진 아스트라의 공주지. 할아버지가 가장 사랑하는 손주이고.”
“난 절대로 약속을 어기지 않아.”
“고민할 시간을 줘.”
그로부터 이틀이 지나서 밀란에게 답이 왔다.
[약속은 꼭 지켜.]
그렇게 우리는 손을 잡게 된 것이다.
현재.
밀란은 내 어깨에 팔을 걸치고 셀레네를 향해 씩, 웃었다.
“미안, 셀레네.”
“너…….”
“하지만 에릴로트잖아. 아스트라의 공주님이라고? 공주님이 손을 내미시는데, 내 까짓 게 거절할 수 있을 리가.”
그가 빙글빙글 웃으니, 셀레네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후퇴한다!”
소리치자, 배리어가 깨지고 우왕좌왕하던 셀레네측 용병들이 후다닥 도망치기 시작했다.
“감히 어딜.”
밀란이 콱, 주먹을 쥐자 다시 빛의 사슬이 나타나며 용병들이 굳어졌다.
“크으윽……!”
용병들이 눈가에 핏줄이 돋았다. 대부분의 셀레네측 용병들은 새빨개진 채로 옴짝달싹 못했다.
밀란의 반경 1km 밖에 있어서 가호에 당하지 않을 수 있었던 소수의 용병들이나 슬금슬금 뒷걸음질 칠 뿐이었다.
그러자 나의 용병단주인 칼리가 나섰다.
그는 온몸에 힘을 주며 강제로 밀란의 사슬을 끊어버렸다.
“이제 우리 차례입니까, 대장!”
밀란은 쯧, 혀를 찼다.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사슬을 풀어버리면 시전자 입장에선 자존심이 상하는데.”
그러더니 날 흘낏 쳐다봤다.
“이번엔 연극이 아니라 진짜로 묶는 걸 보여줄까?”
“됐어. 칼리 정도의 마력을 지닌 자는 네 사슬을 쉽게 풀 수 있다는 걸 알잖아.”
“그러니까 도전이지.”
“괜히 힘 빼지 말고 잘 잡고나 있어.”
나는 셀레네 언니를 향해 사뿐사뿐 걸어갔다.
“언니도 더 힘 빼지 말고 이만 항복하는 게 어떨까요.”
“처음부터 밀란을 이용해서 이런 상황을 만들 생각이었니.”
“네.”
“그럼 소년병을 납치할 필요는 없었는데, 완벽한 연극을 만들기 위해서 힘깨나 쓴 모양이구나.”
“뭐…… 다른 노림수도 있었어요.”
나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어쨌든 서둘러 항복해주셨으면 좋겠는데요. 더 귀찮을 필요는 없잖아요?”
“한 가지 간과했어.”
셀레네가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내가 신성계 최강이라고 불리는 건 가호 때문이 아냐. 마력의 양이 다른 신성계 가호 사용자들보다 월등히 많아서지!”
셀레네가 무언가를 재빨리 던졌다.
그것이 바닥에 부딪혀 깨지자마자 주변으로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
나는 얼른 소매로 코와 입을 가리고 물러났다.
‘독은 없어. 평범한 연막용 마도구야.’
그 사이에 셀레네가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어딜 가려고.”
땅을 강하게 박차고 낮게 뛰어온 루카가 셀레네를 향해 뛰어들었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하고, 가로막혔다.
“결계야!”
‘뭐야, 저 <모성애>는! 사기 아니냐고!’
아군의 신체 능력을 강화시킬 뿐 아니라 몸에 배리어를 치고, 이제 결계까지 펼치다니.
셀레네가 소리쳤다.
“움직일 수 있는 아군은 결계 안으로 넘어와라!”
밀란의 가호에 당하지 않은 자들이 후다닥 결계를 넘어갔다.
나는 땅에 발을 꽝! 구르며 짜증 냈다.
“이래서 신성계 가호 사용자들이란……!”
신성계가 최고로 분류되는 이유가 이것이었다.
활용도가 어마어마하게 많으니까.
심지어 셀레네는 마력량도 엄청났다.
원래 신성계 가호 사용자들은 평범한 가호 사용자들보다 월등히 마력량이 뛰어나다.
그런데 셀레네는 그 신성계 가호 사용자의 두 배나 되는 마력을 가지고 있었다.
‘거의 아빠 급으로 마력이 많은 거야.’
이대로 셀레네가 제 용병들과 함께 도망가도록 놔줄 수 없다.
‘저 근성이라면 종료 시간까지 도망 다니려고 할 거야.’
우리 쪽 용병들의 마력이 동나서 더는 가호를 쓸 수 없을 때까지.
거기다 저쪽은 온갖 마도구를 실어 왔다.
그 마도구를 이용하면 우리 용병들의 힘을 빼기 충분할 것이다.
내 용병들이 완전히 힘 빠졌을 때를 노리면 승리는 못 해도 무승부로 끌고 가는 건 가능할지도 모른다.
‘이래서 속전속결로 치려고 한 건데.’
“공격해! 도망치도록 두지 마!”
칼리가 결계를 향해 도끼를 내질렀다.
쾅! 쾅!
마력을 담아 도끼질하자 결계가 크게 흔들렸다.
셀레네 쪽의 궁수가 칼리를 향해 활을 쐈다. 나의 용병인 켄달이 재빨리 바람을 일으켜 화살을 막았다.
등 뒤에서 셀레네의 용병단주인 카비가 꽥! 고함을 내질렀다.
“공격해라! 멈추지 마! 셀레네 님을 엄호해서 빠져나가!”
“밀란, 뭐해!”
내가 말하자, 밀란이 “예, 예.” 하며 사슬을 끌어당겼다.
카비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 * *
난전이었다.
에릴로트측에서 공격했고, 셀레네 결계 안의 궁수와 원거리 공격기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 방어했다.
셀레네는 결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느라, 빠르게 빠져나가지 못했다.
[원진! 결계를 둘러싸!]
[화살을 멈추지 마. 저쪽에서 계속 바람을 일으키게 해야 해!]
마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이게 정말 애들 승부가 맞습니까?”
“아스트라의 수준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1티어 용병단과 과거 중앙기사들로 이루어진 용병단의 대결.
애들 승부라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셀레네 님의 가호는 정말이지 대단하군요.”
“에릴로트 님도 굉장하지 않습니까.”
승부를 지켜보는 자들은 손에 땀을 쥐었다.
요슈아가 입을 떡 벌리고 있는 귀족들을 보고 픽 웃었다.
“손님을 초청한 건 옳은 판단이었나 보군.”
리시먼드도 실소를 흘렸다.
“에릴로트와 셀레네 모두 악으로는 절대로 지지 않으니.”
“아스트라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걸맞은 자리군요.”
둘 다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기도 했지만, 가장 큰 장점은 성격이었다.
셀레네와 에릴로트는 2세를 통틀어도 오기에서 밀리지 않는다.
바스티나가 공작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곤 부러 큰 소리로 외쳤다.
“우리 셀레네의 가호를 보세요. 용병들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아도 홀로 승부를 끌고 가고 있잖아요!”
발데릭과 실뱅이 동조했다.
“셀레네의 능력은 이미 3세의 수준을 벗어났지.”
“왜 아니겠습니까. 이만한 가호를 지닌 아이야말로 원화가 되기에 걸맞은……!”
그때, 누군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승부 내용에서는 에릴로트 님이…….”
바스티나의 눈이 뾰족해졌다.
“뭐라고?”
“아, 아뇨!”
“에릴로트는 셀레네에게 홀로 맞서지조차 못하고 있잖아!”
드뷔시 자작이 검지로 턱을 가볍게 매만졌다.
“황제의 손마저 뿌리친 중앙 기사단장의 용병단을 찾아낸 눈, 그들과 밀란 님을 휘하에 둔 거래 능력, 상황 판단력, 상대의 몇 수 앞을 읽는 넓은 시야.”
드뷔시 자작은 바스티나를 힐끗 쳐다봤다.
“지휘관으로서 능력으론 수준급입니다. 웬만한 성인보다 훌륭하지요.”
“드뷔시 자작─!”
“인정하십시오, 바스티나 님.”
“이봐요!”
“셀레네 님은 마지막 발악을 하고 계시는 겁니다. 승부 내용에선 에릴로트 님의 압승입니다.”
아스트라 공작은 에릴로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빛나는 두뇌와 뛰어난 능력.
‘도무지 고작 열 살짜리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군.’
셀레네는 근성으로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에릴로트는…….
“수를 읽고 계십니다.”
“그래. 이대로 셀레네가 도망쳤을 때의 위험성을 말이지.”
그때 누군가 “어?” 하고 말했다.
“그런데 에릴로트 님의 군사들 말입니다. 하나도 다치지 않은 게 아닙니까?”
뭐라고?
사람들이 마경을 주시했다.
[켄달, 바람은 3시 방향으로 전개해.]
정말이었다.
에릴로트의 용병에게 닿을 뻔했던 화살이 방향을 잃고, 다른 곳으로 툭 떨어졌다.
“말도 안 돼.”
“저 와중에도 군사들을 보호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원화란 불의 근원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불(군사)의 근원.
군사들을 보호하는 것을 첫 번째 역할로 친다.
드뷔시 자작이 헛웃음을 흘렸다.
“맙소사. 우리가 보지 못한 것도 아가씨는 보고 계셨던 모양입니다.”
결국 이 승부는 ‘누가 더 원화에 걸맞은 자인가’를 가리는 것이다.
‘승리만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 내용에서도 완벽하게 승리하겠다?’
드뷔시 자작은 마경에 시선이 붙은 것 같은 공작을 쳐다봤다.
‘굉장하군.’
공작의 시선을 이만큼 빼앗는 자는 이제껏 없었다.
다른 3세들 또한 입을 떡 벌린 채로 에릴로트를 주시했다.
“대단한 건 알았지만…….”
“응. 휘하에 둔 몬스터만 굉장한 게 아니었어…….”
“에릴로트, 잘한다!”
3세뿐만이 아니었다.
초청된 에릴로트 또래의 소년, 소녀들마저 혼이 쏙 빠져서 관람 중이다.
“에릴로트 님! 와!”
“잘한다! 뒤로, 아냐, 아냐! 12시 방향……!”
사람은 누구나 강자를 동경한다.
이 승부로 에릴로트는 완벽한 강자임을 증명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저기 뭡니까?”
난전의 뒤에서 누군가 움직이고 있었다.
셀레네의 용병임을 증명하는 푸른색 어깨띠를 묶고 있는 남자였다.
그가 접근하고 있는 건 밧줄에 묶여 있는 소년이었다.
‘셀레네 님의 용병단주인 카비의 아들이라고 했던가.’
모비.
몰래 접근한 남자는 모비의 밧줄을 풀고 있는 것이었다.
귀족은 쯧, 혀를 찼다.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 묶여서 발발 떨고만 있던 모비를 구하다니.
“저 멍청한…….”
“이 와중에도 용병단주 카비가 제 아들을 구하라 명을 내린 겁니까?”
“셀레네 님이 완벽하게 용병들을 통제하던 것이 아니군요.”
카비는 흘끗흘끗 제 아들을 보고 있었다.
모비가 풀려나자, 그제야 한숨을 내쉰다.
[으, 으으, 으아아아!]
모비는 풀려나자마자 허둥지둥 전장을 빠져나가려 했다.
잔뜩 겁을 집어먹었던 모양이다.
“으하하!”
“도망치는 꼴 하곤!”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리던 그 때, 바스티나는 치맛자락을 꽉 비틀었다.
‘저 정신 나간 놈이……!’
가뜩이나 셀레네의 평가가 추락하는 이 때, 용병단주가 괜한 짓까지 하여 통제력마저 의심받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등 뒤를 본 에릴로트의 눈이 커다래졌다.
[안 돼!]
소리치자, 병사들과 셀레네의 시선이 흠칫 이동했다.
‘뭐?’
‘왜?’
‘어째서?’
셀레네를 상대하고 있는데 어째서 갑자기 일개 소년병의 이탈을 신경 쓴단 말인가?
공작의 등 뒤에서 흐뭇한 얼굴로 마경을 지켜보던 콘라드마저 미간을 좁혔다.
‘무슨 일이시란 말인가.’
어차피 소년병은 탈출하지 못할 것이다.
에릴로트는 결계용의 마도구를 잔뜩 챙겨서 승부에 나섰다.
자신의 진지가 공격당할 때를 대비해, 결계에 닿으면 충격을 주는 결계용의 마도구를 챙긴 것이다.
‘저 소년은 평범한 사람일 텐데.’
셀레네 정도의 강력한 신성계 배리어를 펼칠 수 있다면 몰라도, 일반인이 탈출하기엔 무리다.
순간, 불현듯 에릴로트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에일린의 이상은 안 돼!”
[예?]
“거긴 안 돼. 절대로. 다른 곳을 추천해줘. 차라리 2티어라도.”
<에일린의 이상>을 용병으로 택할 수 없던 이유.
‘그게 만약 에일린의 이상이 셀레네 님의 부친 가문에서 운영하는 곳이라서 기피한 게 아니라 다른 이유 때문이라면…….’
[모비, 멈춰! 거길 넘어가면 넌─!]
에릴로트가 소리쳤지만, 겁에 질린 모비는 결계에 뛰어들었다.
그러자.
카가가가가가가각─!
결계와 부딪친 모비가 번갯불에 맞은 듯 발작했다.
그리고 그대로 쓰러졌다.
[모비!]
용병단주이자 모비의 부친인 카비가 소리치기 무섭게, 에릴로트가 모비에게 달려갔다.
그러곤 그의 상의를 냅다 끌어 올렸다.
소년의 가슴에 어떤 보석이 박혀 있었다.
“저거, 설마…….”
누군가 중얼거리자, 마도 지식에 밝은 리앙틴이 꽥! 고함을 내질렀다.
“공명석이다!”
나라에서 금한 금술.
사람에게 마도구를 내장하여 몬스터와 공명하게 하는 것.
“그럼……!”
누군가 소리쳤을 때, 마경 안에 암운이 드리웠다.
쾅─!
번개가 내리치며, 에릴로트의 진지 위로 먹구름이 몰려온 것이다.
[피해─!!]
먹구름 속에서 나타난 건 거대한 마물이었다.
온몸에 기묘한 형태의 눈이 돋아나고, 팔다리가 없는 몬스터.
소름 끼치는 형상의 몬스터를 본 아이들은 “으으…….” 하며 어깨를 끌어안았다.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느낌.
본능적인 공포에 숨이 틀어막힌다.
몬스터는 얼마나 거대한지, 사람이 성냥깨비 같았다.
입을 틀어막은 리앙틴이 사지를 벌벌 떨었다.
“<공허>…….”
“뭐? 리앙틴, 뭐라고?”
“고대의 마물 <공허>야…….”
발자크가 벌떡 일어났다.
“저 미친놈들. 1티어치고 약하더라니 공명석을 써서 몬스터를 이용하고 있었구나!”
전쟁이나, 몬스터 토벌에 공허를 이용하고 있던 것이다.
고대에서부터 존재하는 몬스터들을 고대 마물이라고 부른다.
공허는 고대 마물 중 약한 축이긴 했으나, 그래도 일반 몬스터와는 궤가 다른 힘을 자랑한다.
아스트라의 직계들마저 뻣뻣하게 굳어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이, 이제 어떻게 합니까. <공허>라니요!”
“버려진 숲으로 출발해야 합니다! 공허가 숲을 벗어난다면……!”
“어, 어찌합니까.”
아스트라 공작이 굳은 얼굴로 명했다.
“데이몬드, 네가 형제들을 데리고 버려진 숲으로─”
데이몬드 정도의 강자가 나서야 수습되는 상황이다.
그런데.
[이걸 막으려고 그 노력을 했는데…….]
마경 속의 에릴로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옷깃 안에서 웬 나무 피리를 꺼냈다.
삐이익─!
피리를 분 에릴로트가 소리쳤다.
[라곤─!]
이것이 바로 에릴로트 아스트라를 사이에 두고 전 세계의 왕족과 귀족들이 맞붙게 되는 최초의 계기.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마룡 라곤’의 등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