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소녀는 두 사람을 빤히 쳐다보다가 “아.” 하고 중얼거렸다.
그러곤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체자레와 아딘이 왕자라는 것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두 분 왕자님을 뵙습니다. 광영을 누리소서. 아스트라 공작가의 에릴로트입니다.”
아딘과 체자레는 대답하지 못하고, 멍하니 에릴로트를 쳐다봤다.
저 애가 시선을 옮길 때마다 미미하게 움직이는 눈동자가 보석 같았다.
말할 적에 움직이는 붉은 입술은 앵두나, 자두처럼 보인다.
물결치는 결 좋은 곱슬머리에선 달콤한 냄새가 날 것 같다.
‘아니야. 확실히 좋은 냄새가 나.’
우, 우유 냄새인가…….
두 사람이 멍하니 쳐다보고 있으니, 에릴로트가 눈을 깜빡였다.
“전하?”
체자레는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응, 반가워.”
“두 분의 위용은 익히 들었습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에릴로트가 생긋 미소 짓던 찰나, 아딘이 입을 열었다.
“위용? 무슨 위용?”
아딘은 흠칫했다.
시비를 걸듯이 말이 나가버렸다.
체자레도 그렇게 느꼈는지, 미간을 좁히고 아딘을 쳐다봤다.
아딘은 마른침을 삼켰다.
‘아스트라 공작의 손녀에, 용의 주인이다. 나와 격이 맞으니 우습게 볼 필요는 없어.’
수습하려고 했는데, 에릴로트와 눈이 마주치니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역시 아부였나 보지?”
떠올리던 인사말은 사라지고, 또 한 번 시비가 튀어 나갔다.
‘이게 아냐—!’
에릴로트는 황당한 표정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아딘과 에릴로트는 그 어떤 접점도 없었다.
아스트라와 팔라사 왕국이 척을 진 것도 아니다.
인사 예법도 완벽했다.
그러니 아딘이 이렇게 날카롭게 나올 이유가 없는 것이다.
“내 말은, 그러니까…… 아스트라에서는 혓바닥 굴리는 법만 가르치나 보지?”
‘아, 미쳤냐고!’
무슨 말을 하려고 해도, 에릴로트만 보면 헛소리가 튀어나온다.
체자레마저 ‘뭐야, 미친놈.’ 하는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아딘은 평생 처음으로 쥐구멍에 숨고 싶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게 되었다.
에릴로트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왕가의 격에 걸맞은 실로 훌륭한 분이시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미소 짓는 얼굴이 엄청나게 귀여웠다.
팔라사에 있는 그 어떤 여신상이나, 요정상도 저 애보단 못할 것이다.
‘아, 역시 좋은 향기가 나…….’
우유 냄새인가 했더니, 그건 아니었다.
우유처럼 따뜻하면서도, 어딘지 여린 꽃 냄새처럼 산뜻하고 위태로운 듯한 기묘한 향기가…….
아딘이 무어라 말하려던 때에 체자레가 말을 가로챘다.
“슈엘리즈 왕국의 체자레야.”
“네. 막내 왕자님이시지요.”
“날 안다니 기쁘네~. 곧 점심인데 식사를 함께할까? 네게 궁금한 게 많거든.”
“제게요?”
“응. 네 용도 그렇고…… 너도.”
묘한 목소리였다.
에릴로트는 곤란한 듯 대답했다.
“어쩌지요. 같이 온 사촌 언니와 식사를 함께하기로 했거든요.”
“네 언니도 함께 오면 어때?”
“그건…….”
“좋을 거야. 다른 태양회의 회원들도 함께하거든.”
“…….”
“같이 하는 것으로 해. 응? 네 방으로 사람을 보낼게. 어디서 머물지? 제1성? 제2성? 아, 초대객이니 제2성이려나.”
“…….”
“식사 전에 나와 함께 가볍게 차를 마시는 건 어때?”
그때였다.
그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높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릴로트! 안 오고 뭐 해?”
리앙틴의 목소리였다.
그러자 에릴로트가 얼른 대답했다.
“응. 갈게!”
그러곤 아쉽다는 듯 체자레를 쳐다봤다.
“죄송합니다. 짐을 풀어야 해서요. 식사엔 참석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아쉽네…….”
“…….”
생긋 웃고 고개를 숙인 에릴로트는 얼른 리앙틴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아딘의 시선이 에릴로트의 뒷모습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 * *
리앙틴은 잔뜩 흥분한 얼굴로 방을 가리켰다.
“난 왼쪽 방을 쓸래! 넓어서 좋아!”
“그래.”
난 오른쪽 방이 더 좋았다. 테라스도 있고.
“그럼 식사 때 봐. 유모, 머리를 다시 묶어줘!”
리앙틴이 문 안으로 들어가고, 나도 내 방으로 향했다.
한지혁이 나를 따라 들어왔다.
그는 사색이 되어 있었는데, 방에 들어오자마자 “으아아!” 소리치며 재킷을 확 벗어 소파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재킷 안에서 자이언트 타란튤라의 새끼인 밍키가 뽈뽈뽈 기어 나왔다.
나는 엄청나게 상냥한 얼굴로 밍키를 살살 쓰다듬었다.
“숨어있느라 고생 많았지? 미안. 거미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서 어쩔 수 없었어. 널 잘 몰라서 그래. 넌 아주 귀여운 아이인데 말야.”
행여나 기가 죽을까 봐 속삭여주자, 한지혁이 혀를 찼다.
“그런다고 몬스터가 알아듣겠냐.”
“마음은 다 통하는 법이야.”
보라. 밍키가 애교를 부리듯 내 팔을 타고 쫄쫄쫄 걷지 않는가.
한지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왕자들과도 마음이 통했나?”
“뭐?”
“짐을 옮기면서 봤어. 함께 있던 남자애들, 팔라사의 아딘 왕자와 슈엘리즈의 체자레 왕자지.”
“응.”
“어땠어?”
나는 밍키를 쓰다듬으며 “음…….” 신음했다.
“재수 없어.”
“왜?”
“아딘 왕자는 갑자기 시비를 걸고, 체자레 왕자는 곤란한 내색을 했는데도 티 타임을 강요하잖아.”
성격이 나쁘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정말로 밥맛 없다.
한지혁은 킬킬 웃었다.
“있는 동안 피곤하겠네.”
내 생각도 그랬다.
워낙에 성격 나쁜 인종들을 모아놓은 모임이라.
‘까딱 잘못하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겠어.’
이럴 땐 정보가 필요하다.
그리고 내겐 현재의 정보를 알려줄 수 있는 지원군이 있지.
난 가호를 발동했다.
눈앞에 홀로그램 같은 창이 떠올랐다.
남주가 등장할 줄 알았는데 쓰레기들만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