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저, 전하.”
리앙틴은 자신의 가호가 형편없음을 알고 있었다.
사색이 된 리앙틴이 벌벌 떨자, 살바토레 황자는 말했다.
“시작하기 전까진 시간이 있어. 내 질문에 대답하고 싶어진다면 얼마든지 대기실을 나서도 좋아.”
“전하……!”
살바토레는 빙그레 미소 짓는 것으로 말을 맺었다.
* * *
나는 아비노 왕손과 함께 콜로세움 경기장으로 들어왔다.
경기가 시작되기 30분 전임에도 관중석은 바글바글했다.
태양회에 초청된 대부분의 귀족들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스트라 백작 영애!”
먼저 와있던 체자레 왕자가 우리를 향해 손을 들었다.
태양회의 소년들은 경기가 제일 잘 보이는 귀빈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아비노는 나를 이끌고 귀빈석으로 향했다.
“우린 여기 앉자.”
“네…….”
나는 대답하면서 주변을 둘러봤다.
‘리앙틴이 보이지 않아.’
살바토레 황자 또한 자리에 없었다.
“전하.”
내가 부르자, 싱글벙글한 얼굴로 경기장을 주시하고 있던 아비노가 “응?” 하고 돌아봤다.
“왜, 에릴로트?”
“살바토레 황자 전하께선 오지 않으셨나요?”
“그러게, 안 보이네. 출발을 늦게 한 게 아닐까? 콜로세움에 오지 않는 태양회 멤버는 없거든.”
출발을 늦게 했을 리 없다.
한지혁으로부터 리앙틴이 출발했다는 얘기를 듣고 서둘러 온 거니까.
주변을 살피고 있는데, 누군가 내 옆으로 털썩 주저앉았다.
“결국 일이 그렇게 되었나 봐요?”
세바스티아 비페리가 싸늘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네?”
“당신 사촌 말이에요. 결국 콜로세움 경기에 나가나 보더군요.”
“……!”
리앙틴이 콜로세움 경기에 나간다고?
나는 곁에 있던 아비노 왕손이 다른 소년들과 떠드느라 정신이 없는 걸 확인하고서 목소리를 낮췄다.
“리앙틴 언니는 제 혈족이에요. 아스트라 공작가의 일원이란 말이에요.”
개인의 능력이 뛰어나지 않더라도, 리앙틴은 ‘아스트라 영애’라고 불린다.
아무리 황자라도 아스트라의 혈족에게 함부로 대할 순 없었다.
세바스티아 비페리가 입매를 비틀었다.
“비페리 영애라고 불리는 내 사촌도 경기에 나갔어요. 아스트라라고 다를까요?”
“뭐라고요?”
세바스티아는 실소를 흘리며 태양회의 소년들을 노려봤다.
“이봐요, 에릴로트 아스트라. 태양회가 어떤 곳인지 알아요?”
“…….”
“각국의 왕이 제 후계자들을 몰아넣고, 대륙의 황가와 왕가의 동맹을 과시하는 곳이에요.”
“…….”
“아무리 대단한 권력가라도 대륙의 황가와 왕가의 동맹엔 대항할 수 없음을 아로새기기 위한 교육의 장이라고요.”
마침 살바토레가 홀로 관중석으로 내려왔다.
세바스티아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착석한 살바토레를 찢어 죽일 듯이 노려봤다.
“혹시나 해서 조언 하나 하죠. 만약 영애의 사촌이 경기장에서 크게 다치더라도 항의할 생각은 하지 마세요.”
“네?”
“나도 겪은 일이거든. 난 이런 조언을 해줄 사람이 없어서 가문에서 정식으로 대항했어요.”
세바스티아가 나를 힐끗 쳐다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어떻게 되었을 것 같나요?”
“말씀해주세요.”
“슈엘리즈에선 마법사의 지원을 끊었고, 팔라사에선 자원의 거래를 끊었어요. 라온트라의 교역로를 이용할 수 없게 되었으며…….”
세바스티아는 아비노를 슥, 돌아보곤 읊조렸다.
“저 순진해 보이는 왕손의 나라인 알리기오사에선 백수정의 거래를 끊었어요.”
“…….”
“물론 온갖 핑계를 댔지만, 태양회에 참석했던 귀족 아이들은 모두 알고 있었죠.”
“…….”
“결국, 저들이 제 가문을 압박한 건 내가 저들에게 대항했기 때문임을.”
“비페리 공작가가 그만한 일에 휘청이진 않았을 텐데요.”
“아뇨. 휘청였어요.”
“……네?”
“적은 황가와 왕가뿐만이 아니니까.”
팔짱을 낀 비페리 영애가 비죽, 입꼬리를 올렸다.
“저들의 연계에 우리가 휘청한 틈을 타서 가장 먼저 공격해온 가문이 어디일 것 같나요?”
“……설마.”
“맞아요. 영애의 조부예요.”
“…….”
“그 일로 동부의 무역로를 빼앗으셨잖아요?”
“황제가 도왔죠.”
“네. 그것도 일개 귀족인 내가 감히 황실과 왕실에 대항한 벌이었을 테고요.”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할아버지가 태양회의 초청을 안 좋아하시던 이유가 그거였구나.’
서둘러 돌아오라고 했던 것도.
태양회는 대단한 권력가들과 인맥을 틀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지만, 후계가 ‘교육 당할’ 곳이기도 했던 거다.
‘대륙의 황제와 왕에게 감히 고개를 들 수 없도록.’
세바스티아는 쯧, 혀를 찼다.
나는 그런 그녀를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세바스티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뭐가 좋아서 웃는담.”
“처음 식당에서부터 저희를 도와주신 거군요.”
“……네?”
“태양회가 아스트라를 노릴 거라는 걸 알고, 저와 리앙틴 언니를 서둘러 돌려보내려고 하신 거예요.”
“…….”
“감사합니다.”
“아스트라가 좋아서 그런 건 아니에요. 얄미워서 당해 보라는 마음도 있었어요. 하지만…….”
세바스티아는 태양회의 소년들을 찢어 죽일 듯 쏘아봤다.
“저 쓰레기들의 계획대로 되는 게 더 싫었어요.”
“저라도 그랬을 것 같아요.”
“나와 함께 왔던 사촌 동생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영지에서 나오질 못해요.”
“…….”
“몸의 상처보다 마음의 상처가 더 괴로울 때가 있으니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부러 큰 목소리로 말했다.
“제게 리본을 주세요─”
의자매를 상징하는 리본.
세바스티아가 내게 리본을 주려던 것은, 나와 연합했음을 태양회의 쓰레기들에게 보이려고 했던 것일 터다.
우리도 연합할 수 있으니, 함부로 굴지 말라고.
“─세바스티아 언니.”
내 말에 태양회 쓰레기들의 표정이 달라졌다.
“……!”
“……!”
“……!”
쓰레기 1, 2, 3이 차례로 얼굴을 굳혔다.
아비노 왕손만이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언니?” 하며 중얼거릴 뿐이었다.
세바스티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쳐다봤다.
그러나 곧 쓰레기들의 표정에 긴장이 어렸다는 것을 깨닫곤 “아아.” 하며 픽 웃었다.
그녀는 머리에 묶은 리본을 풀어, 내게 건넸다.
“잘 부탁해. ‘에릴로트’.”
나는 세바스티아의 리본으로 머리칼을 높게 묶고서 말했다.
“네. ‘세바스티아 언니’.”
황가, 왕가 동맹?
범접할 수 없는 태양이라 태양회?
‘웃기고 있네.’
나는 각성한 뒤로 싸움에 져본 역사가 없다.
“선수 대기실이 어디예요, ‘언니’?”
“저 계단으로 내려가서 좌측 코너를 돌면 돼, ‘에릴로트’.”
우리는 짓궂게 웃으며 서로를 쳐다봤다.
말하지 않았지만, 서로의 눈빛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뒤집어 버리자, 저 쓰레기들.’
* * *
나는 곧장 선수 대기실로 내려갔다.
대기실의 분위기는 완전히 얼음장이었다.
희게 질린 표정으로 허공을 노려보는 사람들 중에 리앙틴이 보였다.
리앙틴은 가장 구석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나는 그 애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인기척을 느낀 리앙틴이 흠칫, 고개를 들었다.
“에릴로트…….”
“꼴 좋네.”
“…….”
리앙틴이 다시 고개를 푹 수그린 채로 웅얼거렸다.
“왜 왔어. 가.”
“살바토레 황자가 원한 게 있었을 거야.”
“……!”
리앙틴은 어떻게 알았느냐는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황군을 붙여주고 언니를 감시한 거지!”
“감시였구나…….”
“그래. 호감이 아니라.”
“…….”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원한 걸 들어주지 않아서 콜로세움에 나온 거 아냐?”
“…….”
“어느 정도 피해는 예상했어. 할아버지도 어쩔 수 없을 거라 생각하실 거야. 원하는 걸 주고 시합에서 빠져나와.”
사촌들은 리앙틴의 가호를 이렇게 불렀다.
‘가호라고 부르는 것조차 우스울 정도의 능력’이라고.
그런 리앙틴은 태양회에 초청될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지닌 귀족들과의 대결에서 이길 수 있을 리 없다.
아니, 몸을 보호하지조차 못할 것이다.
“잘못했다간 크게 다쳐.”
“됐어. 그래도 죽이진 못해. 다치는 것 정도는 내 멍청한 짓에 대한 대가라고 생각할래.”
“언니!”
“창피 좀 당하면 돼. 살바토레 황자에게 휘둘린 것보다 더 창피할 일은 없고.”
“……살바토레 황자가 대체 뭘 원하는 거야?”
“신경 쓸 필요 없어.”
“뭘 지키려고 저 위험한 경기에 나가겠다는 건데.”
“벼, 별거 아냐. 그냥 재수 없어서 알려주고 싶지 않을 뿐이지.”
이렇게까지 말을 못하는 게 이상했다.
‘아스트라의 정보인가?’
하지만 할아버지는 정보를 까다롭게 다룬다.
황가에 절대 넘어가선 안 되는 정보라면 리앙틴이 알 리 없다.
‘리앙틴이 절대로 줄 수 없는 정보.’
저렇게까지 해서 보호해야 하는 것.
내겐 말할 수 없는 정보라면…….
“내 정보구나.”
“……!”
“뭘 물어봤지? 아, 뻔하겠군. 언니가 알고 있고 넘어가선 안 되는 정보라면 하나지, 뭐.”
“아, 아니라니까…….”
“드래곤 레어가 어디에 있는지 물어봐?”
리앙틴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얘도 참.’
귀하게 자라서 아픈 걸 그렇게 무서워하면서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다.
못돼 보여도 사실은 정에 약하다니까.
나는 숨을 깊게 들이켠 후 리앙틴을 쳐다봤다.
“알려줘.”
“싫어!”
“알려주라니까.”
“어떻게 여기서 더 염치없게 굴어……. 나도 그 정도는 생각할 줄 알아!”
리앙틴이 이를 악물었다.
그러곤 홱 고개를 돌린다.
내 앞에서 울고 싶지는 않은데, 도무지 눈물을 참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정말로 고통을 참을 수 있겠어? 경기에 나가면 아주 크게 다칠지도 몰라.”
“……참을 수 있어.”
“그럼 이렇게 해.”
“뭐?”
내가 계획을 속삭이자, 리앙틴의 눈이 커졌다.
“태, 태양회에서 그런 짓을 하라고?”
“응. 할 수 있겠어?”
내 눈을 빤히 바라보던 리앙틴은 이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할래.”
“그래. 이번 일은 잊을게. 언니가 나 대신 저 쓰레기들에게 복수해줄 테니까.”
“…….”
“응?”
“……으응.”
리앙틴은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훌쩍훌쩍 우는 그 애를 보고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어버렸다.
언젠가 한지혁이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리앙틴에게 좀 약하잖아, 너.”
정주는 사람에게 약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리앙틴을 보면 첫 번째 삶의 날 보는 것 같거든.’
재능이 없어서 발버둥 치던 나.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잡을 수 없던 것에 대한 원망.
열등감에 허우적거리던 비참한 에릴로트.
그때의 내가 생각나서.
‘나도 그런 적이 있었어.’
그때의 나는 누군가 손을 내밀어주길 바랐다.
실수를 해도, 용서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괜찮다고, 사람은 실수를 하면서 성장한다고.
그러니까 네 가능성이 거기까지라고 재단하지 말라고.
그렇게 날 믿어줄 누군가가 절실했던 것이다.
선수 대기실을 나온 나는 한지혁에게 명했다.
“현재 대기실에 있는 귀족 아이들의 신상 명세를 알아 와. 이름, 애칭, 사소한 것까지 전부.”
“지금?”
“그래, 서둘러.”
이 판을 제대로 뒤집어줘야 하니까.
* * *
살바토레는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곁에 선 시종에게 물었다.
“리앙틴 아스트라는.”
“경기를 준비하는 중입니다.”
살바토레가 헛웃음을 흘렸다.
리앙틴이 왜 입을 열지 않는지는 뻔했다.
에릴로트 아스트라에게 해가 갈까 봐.
‘멍청하긴.’
사촌이라 해도 결국은 경쟁자다.
경쟁자에게 해가 갈까 봐 기회를 줬음에도 잡지 못하다니. 멍청해도 이렇게 멍청할 순 없었다.
태양회의 콜로세움 경기는 마경을 통해 전 대륙에 중계된다.
‘각 황실, 왕실을 수호하는 귀족들의 능력을 만천하에 위시한다’라는 것.
현재에 이르러선 황자와 왕자들을 위한 광대놀음으로 전락했지만.
한미한 능력의 리앙틴 아스트라라면 다른 귀족 아이의 공격에 제대로 대항할 수 없을 것이다.
크게 다치거나, 엄청난 망신을 당하겠지.
잔혹한 아스트라 공작이 가문에 망신을 준 리앙틴 아스트라를 그냥 둘 리 없었다.
체자레 왕자가 싱글거리며 물었다.
“리앙틴 아스트라가 나온다면서?”
“그래.”
“제대로 망신을 당하면 아스트라에서 항의할 텐데~. 비페리 공작가 때도 골치 아팠잖아?”
그러자 은발의 메르세데스 황자는 쿡쿡 웃었다.
“살바토레 황자님께선 그걸 노리시는 것 같은데?”
살바토레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