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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화. (117/390)

117화.

비페리 공작이 싸늘한 눈빛으로 황제를 바라봤다.

‘비열한 작자 같으니.’

그의 곁에 앉아있던 귀족이 속삭였다.

“이번엔 아스트라 공작의 손주가 경기에 나오려나요.”

“그렇겠지. 괜히 이 많은 귀족에게 콜로세움 경기를 보게 하겠는가.”

태양회를 이용해서 각국 황실·왕실의 동맹이 견고함을 선전하려는 것이다.

비페리 공작이 물었다.

“아스트라의 누가 경기에 나온다던가?”

“에릴로트 아스트라는 아니겠지요. 몇 년 전처럼 말입니다.”

세바스티아가 아니라, 한미한 능력의 다른 아이가 콜로세움 경기에 참가해야 했듯이.

망신을 주는 것이 목적인 자리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아이는 콜로세움에 세우지 않을 터다.

“함께 간 아이의 이름이…… 아, 리앙틴 아스트라라더군요.”

“리앙틴 아스트라?”

“아스트라의 서열권 안에도 들지 못하는 아이랍니다.”

“제대로 망신을 당하겠구나.”

“과연 아스트라 공작이 가만히 있을는지요.”

주변의 귀족들이 아스트라 공작을 힐끗 쳐다봤다.

저마다 입가에 비웃음을 매달고 있었다.

“손녀의 용이라도 이용하려 하지 않겠습니까?”

“하하, 그건 반역이 아닙니까.”

“예. 그 많은 손주 중 하나가 망신을 당했다고 설마 반역까지 일으키겠습니까?”

“글쎄요. 가문의 위신을 목숨처럼 여기는 인사이니.”

“모르긴 몰라도 재밌어지겠습니다.”

천하의 아스트라와 관계된 일이다.

황제가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을 리 없다.

‘사전에 태양회의 소속국과 연합하신 것이 틀림없다.’

아스트라 공작이 항의로 명분만 만들어주면, 바로 압박할 수 있도록.

‘아무리 아스트라라곤 하나, 각국의 공격에 버텨낼 수 있을까.’

그 대단한 비페리도 한 수 물러났는데 말이다.

그들이 히죽거리고 있을 때, 마경에서 중계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첫 경기를 시작합니다. 선수는 입장해주십시오.]

[리앙틴 아스트라 vs 콜로디오스 맥핀!]

아스트라 공작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리앙틴의 패배는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리앙틴은 한참 어린 아르망과의 전투 훈련에서도 쉽게 이기지 못했던 아이였으니.

결국, 망신은 예정된 일이란 뜻이었다.

‘황제의 뜻대로 놀아날 순 없지.’

그는 문가에 선 콘라드에게 눈짓했다.

콘라드가 다가오자, 아스트라 공작이 읊조렸다.

“원로 회합을 준비해라.”

콘라드가 서둘러 회의장을 나서려던 찰나였다.

[시합을 시작합니다!]

마경에서 중계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런데 이상했다.

시합을 시작하자마자…….

[졌습니다.]

[졌습니다!]

서로를 마주 본 아이들이 패배를 선언하며 냅다 고개를 숙인 것이다.

‘뭐?’

‘뭐라고?’

‘무슨…….’

마경을 지켜보고 있던 귀족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싸워보지도 않고 패배 선언이라니!

귀족 하나가 벌떡 일어났다.

“미, 미친 게 아닙니까—!”

이제껏 원하지 않게 콜로세움 경기에 투입된 아이는 많았다.

그 애들이 모두 항복할 줄 몰라서 안 했겠는가!

모두 다치는 게 두려웠을 테지만, 억지로라도 싸워야 했다.

자국 내에서 벌이는 결투라면 몰라도, 타국의 귀족과 싸우는 것이다.

‘타국에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 것으로 보여선 안 되니까.’

노년의 귀족이 소리쳤다.

“타국과의 경기에서 항복을 선언하다니요! 각국의 귀족들이 마경을 통해 경기를 관전할 것인데……!”

다른 귀족들도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들이 아스트라 공작을 쳐다봤다.

항복 선언이라니.

태양회가 시작된 지 50년이 넘었으나, 그 어떤 자도 경기에서 항복한 적은 없었다.

마경 속에 비치는 태양회 소년들도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칼소이에 제국에선 싸워서 이길 수 없는 상대에겐 항복하라고 가르치는 모양이지?]

[그렇게 따지면 슈엘리즈에서도 항복을 가르치는 것 같은데. 항복한 건 리앙틴 아스트라만이 아니잖아.]

리앙틴의 모국인 칼소이에 제국의 황자, 살바토레가 입매를 비틀었다.

[재밌네, 정말.]

상대 소년의 모국인 슈엘리즈 왕국의 왕자, 체자레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는 걸까~]

분위기가 얼어붙은 가운데, 중계자가 첫 시합의 종료를 알렸다.

[두 선수 모두 패배를 선언하였으므로 첫 시합은 무효가 되었음을 알립니다.]

[두 번째 시합을 시작합니다.]

[선수 입장.]

[케이티 톰슨 vs 안데르센 쇼이츠!]

귀족들이 황제와 아스트라 공작의 눈치를 보았다.

비페리 공작 또한 힐끗 황제를 쳐다봤다.

황제는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눈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쉽게 되었어. 아스트라가 자랑하는 3세의 능력을 볼 기회였는데 말일세.”

그 말에 아스트라 공작이 무미건조한 투로 대답했다.

“여흥은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회의로 돌아가시지요.”

“짐은 아스트라 공의 호승심이 제국 제일이라 여겼다네. 손주가 조부의 장점을 물려받지는 못했군.”

해석하면 이랬다.

손주 한번 유약하게 키웠구나.

“자손이 어디 마음대로 되더이까. 살바토레 황자께서도 폐하만 한 시야는 갖지 못하였지요.”

자식을 개떡같이 키운 주제에 할 말?

“공의 눈에는 그러한가? 하하, 짐이 자식을 너무 관대하게 본 모양이군. 짐의 눈엔 제법 잘 큰 것으로 보였는데 말일세.”

어디 감히 일국의 황자에게 그따위 망언을 하지?

“폐하만 한 지략을 갖추기가 어디 쉽겠습니까.”

결국, 내가 두려워서 타국의 힘을 빌리려는 주제에.

귀족들은 마른침을 삼키고 두 사람의 설전을 지켜보았다.

황제는 쯧, 혀를 차고 손을 들었다.

“회의를 재개하지. 마경을 정리—”

그때였다.

[졌습니다!]

[졌습니다…….]

마경에서 또 한 번 패배 선언이 흘러나왔다.

황제의 손이 멈칫했다.

다른 귀족들 또한 미간을 좁히고 마경을 주시했다.

“대체…….”

세 번째 시합도 마찬가지였다.

[졌습니다!]

[졌어요.]

네 번째도.

[졌습니다.]

[졌습니다…….]

다섯 번째 시합까지도.

귀족들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마경을 주시했다.

‘대체 태양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콜로세움 경기가 모조리 무효가 되었다.

딱딱하게 굳어진 태양회 소년들의 얼굴이 마경에 비추었다.

[저것들이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거야.]

저먼 왕국의 크리스토퍼 왕세손이 드물게 분노한 얼굴로 경기장을 내려다보았다.

[……감히.]

언제나 애교 섞인 표정이던 체자레 왕자도.

[어쩐다. 이렇게 설치는 건 예상하지 못했는데.]

메르세데스 황자 또한 잔뜩 굳은 얼굴이었다.

경기장 아래에서 리앙틴이 좌석을 향해 양팔을 휘저었다.

[에릴로트!]

마경이 에릴로트를 비추었다.

여유롭게 웃은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이러한 일을 예상했다는 양.

“잠깐만요. 저 아이, 뭡니까?”

“뭐요? 에릴로트 아스트라가 아니오.”

누군가 별 해괴한 것을 물어본다는 듯이 대답했다. 귀족은 고개를 젓고 마경을 가리켰다.

에릴로트가 머리를 묶은 리본.

“잠깐, 비페리 영애도 저 리본을…….”

“비페리 영애뿐만이 아닙니다.”

관중석에 있는 귀족 아이들, 아니, 시합장의 귀족 아이들까지 같은 리본을 묶고 있었다.

소녀들은 같은 리본으로 저마다 머리를 묶고 있고, 소년들은 리본을 손목에 묶었다.

“……!”

“……!”

“……!”

연합했다.

태양회에 초청된 귀족 아이들이 연합한 것이다!

마경 속 소년들도 상황을 파악했다.

[저것들이 연합을 했어? 감히 각국의 황족·왕족이 모인 태양회에서!]

귀족 아이들의 연합.

저건 태양회를 향한 항의이고, 나아가 각국의 황실·왕실을 향한 반기였다.

귀족들이 황제의 눈치를 보았다.

‘이, 이게 무슨 일이야.’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가.’

아스트라 공작의 눈까지 커져 있었다.

콘라드가 공작에게 속삭였다.

“저 리본 말입니다. 아가씨의 드레스가 아닙니까?”

세바스티아 비페리로부터 받았던 그 리본이 아니었다.

“……그래.”

콘라드가 공작의 명으로 주문 제작했던 드레스.

그 드레스의 치맛자락을 잘라 리본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이 상황을 주도한 건 에릴로트란 뜻이었다.

아스트라 공작의 입매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잘했다……!’

태양회가 두려운 건 저들이 연합했기 때문이다.

가문 하나론 저들 연합에 당할 수 없지만, 이쪽도 연합한다면 다르다.

‘저들이 연합하여 황실·왕실을 노린다면?’

그 걱정만으로도 태양회는 결코 예전만큼 귀족들을 호령할 순 없을 터다.

보라.

당장 칼소이에 제국의 황제마저 격노하지 않았는가.

쾅—!!

황제가 테이블을 내리쳤다.

아스트라 공작이 미소를 머금고 물었다.

“어찌 그러십니까, 폐하.”

“저 맹랑한 아이들이 누구에게 반기를 들었는지 모르는가!”

각국의 후계자들에게 반기를 든 것이다.

황실과 왕실의 상징들에게……!

아스트라 공작은 조소했다.

“애들 일에 지나치게 흥분하십니다.”

“애들 일에 지나치게 흥분하는군, 비페리 공.”

이 말은 비페리 공작이 태양회의 일로 항의했을 때 황제가 한 말이었다.

황제가 분노로 희게 질렸다.

“공……!”

그러자 비페리 공작이 입을 열었다.

“아스트라 공작의 말이 틀리지 않습니다, 폐하.”

“비페리 공작!”

“고작 애들 일입니다. 한때 여흥이고 말이지요.”

비페리 공작 또한 비웃음을 숨기지 못했다.

두 권력가의 합심에, 귀족들은 별말을 하지 못했다.

‘망신은 폐하께서 당하셨군.’

비페리 공작은 하하, 웃으며 말했다.

“경기도 끝났으니, 회의 전에 잠시 휴식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아아, 아스트라 공. 이다음에 자네 손녀를 저택으로 보내주게. 우리 세바스티아와 좋은 친구가 될 것 같으니.”

“그러지.”

두 공작이 웃는 동안, 황제는 주먹을 꽉 그러쥐고 있었다.

‘살바토레, 이 멍청한 놈이……!’

* * *

콜로세움 경기가 개판으로 끝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국경성으로 돌아온 귀족들은 신이 난 표정이었다.

“체자레 왕자의 얼굴을 보셨어요? 세상에, 묵은 체증이 싹 가시더라니까요!”

시중을 잘못 들었다는 이유로 경기에 나가야 했다던 영애가 밝게 소리쳤다.

라온트라 국의 영애는 음산한 표정으로 쿡, 쿡쿡, 웃었다.

“메르세데스 황자의 꼴이…… 쿡, 쿡, 쿡쿡…….”

그간 엄청나게 쌓인 것이 많았나 보다.

“저어, 아스트라 영애. 감사해요. 덕분에 남동생이 다치지 않을 수 있었어요…….”

“저도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약혼녀가 망신당하지 않았습니다!”

귀족들이 내게 몰려들어서 떠들었다.

“다 여러분들이 합심해주신 덕이에요. 저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이었어요.”

내 말에 팔짱을 끼고 있던 세바스티아가 픽, 웃었다.

“에릴로트, 네가 주동하지 않았다면 누가 이 간 큰 계획에 찬동했겠니.”

리앙틴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너나 되니까 다들 하겠다고 한 거지.”

그야 그렇긴 하지.

용을 가진 내가 뒤에서 버티고 있으니 용기를 낼 수 있었을 거다.

리앙틴이 첫 시합인 것도 좋은 작용을 했고.

아스트라에서 첫발을 떼주자, 귀족들은 보다 쉽게 합심했다.

‘하지만 이 일에 제일 큰 공로자는…….’

나는 힐끗, 마차에서 내리고 있는 소년들을 쳐다봤다.

태양회 소년들의 얼굴이 노기로 가득했다.

냉랭한 표정의 그들이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너희들이란다.’

얼마나 행패를 부렸으면, 다들 냉큼 내 손을 잡았겠니.

나는 그들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특히, 굳어 있는 살바토레 황자의 눈을.

난 나를 노려보는 황자를 보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럼 여러분, 저녁 식사 때 뵈어요.”

“가, 가시려고요?”

“함께 계시면 좋겠는데…….”

일은 저질렀지만, 태양회는 여전히 무서운지 귀족 아이들은 불안한 표정이었다.

“에릴로트는 쉬게 두지요.”

“세바스티아 언니가 다른 분들과 함께 계셔주시겠어요?”

“그래.”

세바스티아는 비페리 공작이 가장 사랑하는 손녀였다.

거기다 대륙에서 가장 큰 나라인 칼소이에 제국의 동군 원화.

태양회라 할지라도 그녀까지 어쩌진 못할 것이다.

나는 귀족 아이들에게 인사하고, 성안으로 들어갔다.

‘할아버지에게 소식을 전하고, 황제의 진노에 대항할 계획을 짜야─’

그렇게 생각하며 코너를 돌았을 때였다.

“앗!”

누군가 내 손목을 거칠게 끌어당겼다.

벽에 부딪힌 나는 끙, 신음했다.

난 인상을 찌푸리고 상대를 쏘아보았다.

“이게 무슨 짓인가요, 살바토레 황자님.”

내가 말하자 살바토레 황자가 짓씹듯 말했다.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영애.”

“아, 드디어 그 꼴 보기 싫은 미소가 가셨네.”

“뭐?”

“치명적인 척하는 거, 정말 재수 없었거든.”

“감히 제국의 황자에게 그따위로 지껄여도 되겠어?”

나는 아하하, 하고 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한 대 치시든가.”

“감히…….”

“그런데 감당할 수 있겠어? 오늘 일로 황제 폐하께서 머리끝까지 화가 나셨을 텐데. 여기서 사고까지 치면 감당하기 힘들걸.”

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황자의 복장을 터뜨려줬다.

황자의 잇새에서 으득, 이 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귀엽게 봐줄 때 여기까지 하는 게 좋을 거야.”

“귀여워요? 얼마나?”

“……뭐?”

“뺨 한 대는 더 쳐도 될 정도로 귀엽나? 그렇게 봐주면 좋겠는데!”

“이게 진짜…….”

“여기서 서로 한 발씩 물러나면 화해할 수 있어요. 저와 리앙틴 언니에게 사과하신다면, 저도 더는 가지 않을 거예요.”

살바토레 황자의 입매가 비틀렸다.

“못 하겠다면?”

“끝까지 가는 거지, 뭐.”

“대체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는지 궁금한데. 내가 황제가 된다면 너도, 아스트라도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나는 키득키득 웃었다.

‘그게 두려웠으면 처음부터 납작 엎드려 있었겠지.’

“마지막으로 기회를 드릴게요. 이 손 놓고, 사과하세요.”

“싫은데.”

“그래?”

“그래. 그리고 널 절대로 가만두지 않겠어.”

“아쉽네.”

나는 정말로 아쉽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순간,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난,

“꺄악!”

─비명을 내질렀다.

살바토레가 미간을 좁혔다.

“또 무슨 수작을…….”

그때였다.

“이게 무슨 짓이야!”

“살바토레, 너!”

날카로운 고함이 들려왔다.

팔라사의 아딘 왕자와 알리기오사의 아비노 왕손이 이쪽을 보고 험악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귀족들만 연합시키겠니.’

태양회가 합심해서 공격하면 피해가 클 텐데.

‘태양회도 와해시켜야지.’

그래야 귀족 연합이 공고해진다 이거야.

나는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아딘과 아비노를 쳐다봤다.

“전하…….”

“하?”

살바토레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날 쳐다봤다.

‘아, 내가 말을 안 해줬네.’

난 이전 삶에서 최종 악역이던 몸이라 이거야.

이간질은 악역의 필수 덕목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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