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리앙틴은 기가 막힌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너, 걔로구나. 에레카 길라르.”
그러자 몇몇 사촌들이 이름을 아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에레카? 에레카 길라르라고?”
“그 애란 말이야?”
12번째 탑을 나온 이후론 그쪽에 신경 쓰지 않아서 몰랐는데, 꽤 유명한 애인가 보다.
‘내가 있을 당시엔 없었는데.’
에레카는 생긋 웃으며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제 이름을 아신다니 기쁘네요.”
“착각하지 마. 좋은 의미는 결코 아니니까. 12번째 탑에서 그 난리를 쳤으니 내 귀에까지 이름이 들어온 거지.”
리앙틴이 비죽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자 에레카가 “아아.” 하며 가볍게 입술을 눌렀다.
“뭐, 난리라고 생각하려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리앙틴 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니 재미있네요.”
“뭐야?!”
리앙틴이 태양회에서 콜로세움 경기에 나갔다는 것을 알고 조롱하는 것이었다.
직계들의 표정이 울컥 일그러졌다.
“저 멍청이 때문에 본가가 무슨 망신이야…….”
사촌 몇이 짜증스러운 어조로 말했고, 리앙틴은 얼굴을 붉혔다.
에레카는 웃는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그 유명한 라곤도 보고 싶어요. 혹시 모르잖아요? 저도 테이밍할 수 있을지.”
“도전할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걸. 라곤은 나 말고 다른 인간은 극히 싫어해서.”
“그래서 말씀드렸는데. ‘혹시 모른다’고? 문맥을 읽으시는 게 좋겠어요.”
그러며 아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난 눈썹을 까딱 들어 올렸다. 무어라 말하려 했을 때, 에레카는 짝! 손뼉을 쳤다.
“앞으로 본성에서 교육받을 일이 기대돼요. 잘 부탁드려요?”
“…….”
“그럼 12번째 탑의 여러분은 공작님께 인사를 드리러 가실까요.”
그러자 방계들이 오만한 눈빛으로 직계들을 힐끗 쳐다보곤, 에레카를 따라나섰다.
발데릭 숙부의 아들이자, 로레이나의 남동생인 조프리가 책을 집어 던졌다.
“뭐야, 저 미친 것들……!!”
찢어지는 듯한 고함에도 타박하는 사람 하나가 없었다.
다들 긴장한 얼굴로 방계들을 노려보는 데에 여념이 없었으니까.
* * *
대교육실은 고요해졌다.
조프리가 씨근덕거리며 제 누나에게 말했다.
“이대로 둘 거야?”
“안 두면? 물어 죽이기라도 해?”
“못 할 거 없잖아.”
“이 멍청한……!”
로레이나가 제 동생을 살벌하게 노려봤다.
“가뜩이나 세작이란 놈 때문에 직계 3세의 신뢰가 떨어져 있는데, 조부님이 다른 수단으로 택한 방계들을 물어 죽이면 어떻게 되겠어?!”
“그, 그럼 저 오만방자한 꼴을 지켜보자고?”
로레이나는 짜증 섞인 표정으로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그러곤 리앙틴에게 시선을 돌렸다.
“너, 저 계집애를 알고 있지?”
“으응.”
“쟤가 뭔데 직계들이 한낱 방계 따위를 기억해?”
“가호가 뛰어난 애거든. 무려 둘이나, 아니, 이제 셋이지……. 하여간 셋이나 있대.”
“뭐?”
리앙틴이 설명한 에레카 길라르의 능력은 이러했다.
1. 특수계 가호인 <탐색>.
주변 지형을 파악해서 숨겨진 보물을 찾는 능력.
2. 공격계 가호인 <식물 변형>.
식물을 변형시켜서 채찍 등의 무기를 만들어 공격하거나, 가시덤불을 만들어 방어할 수 있는 능력.
3. 몇 달 전 손에 넣은 가호인 <마물 조련>.
사촌들은 질린 얼굴이었다.
“뭐야, 그 사기적인 능력은…….”
가호의 질로만 따지면 7서열권의 사촌들을 웃도는 능력이다.
리앙틴은 팔짱을 끼곤 칫, 혀를 찼다.
“<탐색>, <식물 변형>만으로도 ‘직계를 뛰어넘는 방계’라는 얘기를 들었대.”
“뭐야?!”
조프리가 이를 으득 갈았다.
다른 사촌들의 표정도 살벌해졌다.
리앙틴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런데 거기에 <마물 조련>까지 더해진 거야. 왜, 대천문이 닫히고 가호를 발현한 건 에릴로트가 유일하다시피 했잖아? 그래서 난리였지, 뭐.”
로레이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어쨌든 알량한 능력 때문에 유명한 거라 이거지.”
“또 있어.”
“또 뭔데.”
“조부님이…… 생일 때 선물을 보내셨대. 편지와 함께.”
“뭐?”
로레이나가 굳어지고, 다른 사촌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방금 뭐라고 했어?”
“다시 말해 봐.”
순식간에 분위기가 싸해졌다.
남들은 ‘할아버지에게 받는 생일 선물’이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아스트라에선 다르다.
그건 특별한 공로를 세운 아이에게나 하사되는 것.
받은 사람은 나와 리시먼드, 셀레네뿐이다.
“서, 선물이 뭐였는데?!”
흑염룡 사촌 언니가 치맛자락을 꽉 잡고서 소리쳤다.
“인형.”
“말도 안 돼……. 진짜 손주한테 줄 법한 선물이잖아. 거기다 편지라니. 에릴로트, 너 받은 적 있어?”
손주 중에 가장 사랑받는다고 평가되던 나다.
사촌들이 일시에 나를 쳐다봤다.
“아니요.”
“봐! 우리 중에 아무도 못 받았잖아!”
그러자 리앙틴은 잔뜩 심통이 난 표정을 지었다.
“모르지. 하지만 12번째 탑으로 공작성의 선물이 도착한 건 확실해. 방계 애들 앞에서 바로 포장을 뜯더니, 편지를 읽고 울음을 터뜨리더라는 거야.”
“…….”
“그 애가 펑펑 울면서 ‘기뻐요, 공작님…….’ 하는 바람에 난리였어.”
“말도 안 돼…….”
“그래서 ‘그 소문’이 진짜라는 얘기가 있었지.”
“소문?”
“에레카의 부친인 길라르 자작이 사실은 조부님의 사생아라는 얘기.”
“허…….”
곰곰이 생각해 보니 첫 번째 삶에서도 그런 소문이 돌았던 것 같다.
그게 에레카 길라르였는지는 몰랐지만.
‘할아버지가 젊은 시절에 정말로 사랑했던 평민과 아이를 낳아서, 선대의 손에 닿지 않게 사촌에게 맡겼다.’
─라는 얘기였다.
알음알음 퍼졌던 이야기라서 사촌들도 알고 있는 모양이다.
대교육실이 조용해졌다.
사촌 아이 하나가 중얼거렸다.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가 그 애를 어떻게 이겨……?”
“어?”
“조부님이 낳은 아이는 전부 사랑 한 줌 없이 태어났잖아. 그런데 정말 사랑하는 여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과 손녀……. 얼마나 예쁘겠냐고.”
“그야…….”
“애초에 정말 세작이 있는 거야? 방계로 알려진 에레카 길라르에게 혈족 교육을 받게 하기 위해 짜인 판 아니냔 말이야!”
“…….”
사촌들의 분위기가 혼란했다.
그들이 느끼는 감정이 뭔지 알겠다.
공정할 줄 알았던 승부.
하지만 미리 우승자가 정해져 있었다면?
사촌들이 굳은 얼굴로 하나둘 일어났다.
“난 가 봐야겠어.”
“시험은?”
“나중에 생각할래. 이게 정말 공정한지도 모르겠고.”
“그래…….”
얼마 지나지 않아 사촌들이 거의 다 돌아갔다.
끝까지 남아 있던 건 나와 리앙틴이 전부였다.
리앙틴도 책을 끌어안고 일어났다.
“시험 준비는 안 하고, 가려고?”
내가 묻자, 리앙틴이 입술을 삐죽였다.
“돌아가서 생각할래.”
“그래.”
리앙틴까지 나간 후, 나는 의자에 깊게 몸을 기댔다.
얼마 뒤에 휙휙, 주변을 둘러본 한지혁이 대교육실로 들어왔다.
“라이벌 출현이라던데?!”
“……널 보니까 긴장이 풀린다.”
“본성이 다 난리야. 고용인들이 에레카 길라르가 친손녀라는 소문을 믿고 줄을 대려고 아양 떨고 있다니까?”
“…….”
“심지어 <마물 조련>이라니. 저쪽은 진짜이기까지 하네. 너는 가짜─”
나는 한지혁의 입을 탁, 틀어막았다.
“입조심.”
한지혁이 고개를 끄덕여서, 난 손을 떼고서 말했다.
“에레카 길라르를 털어 봐.”
“어디까지?”
“전부. 아무래도 이상하거든.”
한지혁은 “엥?” 하며 미간을 좁혔다.
“뭐가?”
“그렇게나 대단한 아이라면 첫 번째 삶에서 내가 알았을 거야. 그런데 나…….”
“……?”
“본 적도 없어.”
에레카 길라르가 뭔가 감추고 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첫 번째 삶에선 할아버지가 그 애 부녀를 너무 사랑해서 숨겨 놨을 수도 있고.
‘그땐 달리아의 아버지인 백부님의 권력이 너무 강했으니까.’
싸워서 다치게 하고 싶지도 않을 만큼, 마음 깊이 사랑했을 수도 있지.
나는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 * *
저녁 무렵, 한지혁이 공작성 귀빈실에 있는 날 찾아왔다.
“조사해 봤는데, 별거 없어.”
“없다고?”
“응. 길라르 자작은 아스트라 장원의 마탑에서 일을 하고, 노아리젠이 죽은 후엔 마탑 책임자가 되었어.”
“응.”
“성격은…… 진짜 네 숙부일 수도 있겠더라고.”
“왜?”
“딱 네 숙부들을 합쳐 놓은 것 같거든. 과시욕 강하고, 오만하고…….”
“…….”
“집안에 돈은 없는 것 같은데, 되게 부유하게 살더라. 발데릭 관할령의 칸로트 지구 있지? 거기서 엄청나게 커다란 저택에서 사신단다.”
칸로트 지구의 집값은 엄청나기로 유명하다.
한국으로 따지면 강남과 같달까.
공작성과 가깝고, 상점 지구와 가깝고.
무엇보다 욕심 많은 발데릭 숙부가 미친 듯이 집값을 올려놔서, 평범한 지역의 10배는 된다.
“……누군가 지원해 주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그게 네 할아버지라는 얘기가 있는 거지.”
“<마물 조련>은?”
“정말로 몬스터를 조련해서 다녀. 늪요정을 테이밍했대.”
나는 헉, 숨을 들이켰다.
“부러워─!”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부녀라는 건 하나도 부럽지 않은데, 늪요정은 정말 부럽다.
‘늪요정은 진짜 개체 수가 적은데.’
손바닥만 한데도 공격력이 엄청나게 강하다.
웬만한 2티어 용병단은 상대도 안 될걸.
‘그런 몬스터라니. 부러워, 부러워!’
그리고 정말 드문 인간형 몬스터라서 진짜 귀엽다.
한지혁이 보고서를 계속 읽었다.
“원래 마물 친화력이 좀 있었나 봐. 네게 <마물 조련> 가호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혹시나 싶어서 테이밍해 봤는데 정말로 조련할 수 있었다는 거야.”
“내 거짓말이 나비 효과를 만들었구나.”
“그보다 빨리 나가 봐라.”
“왜?”
“성에서 온갖 활개를 치고 다니거든.”
대체 어느 정도면 한지혁이 저렇게까지 말하지?
나는 고개를 갸웃하고 몸을 일으켰다.
할아버지의 집무실 쪽으로 가자마자, 에레카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 늪요정이 아주 좋아하네요. 선한 분이라 그런가?”
그 애가 아하하, 웃으며 붙잡고 있는 사람은 콘라드였다.
아이와 여성, 노인에게 약한 콘라드는 쉽게 내치지 못했다.
주변엔 고용인들이 잔뜩 있었다.
콘라드는 워낙 인기인인 터라, 찰싹 달라붙어서 그를 괴롭히는 에레카가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아이고, 그레타도 있네.’
세 살에 처음 공작성에 왔을 때, 나를 돌봐 주던 공작성 하녀였다.
그레타는 손수건을 물어뜯으며 에레카를 쏘아보고 있었다.
콘라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영애, 송구하지만 저는 일이 바쁩니다.”
“그 유명한 콘라드 마르시알 님을 뵐 기회라고 생각해서 기대했는데…….”
그녀가 글썽거리자, 콘라드의 상관들이 펄쩍 뛰었다.
“마르시알 경. 영애의 상대를 해 드리지 그래!”
“하지만─”
“자료 정리 같은 건 내가 해 둘 테니까.”
다른 행정관들이 동조했다.
마물 조련이라는 엄청난 가호를 가진 아이.
심지어 공작이 사랑하는 손녀일지도 모르니, 행정관들도 저 애에게 쩔쩔매는 것이다.
에레카가 콘라드의 팔을 끌어안으며 에헤헤, 웃었다.
“모두 배려해 주시니, 잠시 시간을 내주시겠어요?”
행정관들은 헤벌쭉 웃으며 “예, 예.” 대답하고 돌아갔다.
나는 다른 행정관들과 스쳐서 에레카에게 다가갔다.
에레카는 콘라드를 올려다보며 종알거리느라 여념이 없었다.
“평소에도 콘라드 님을 흠모했어요. 최연소 공작의 부관이라니. 그보다 멋진 별칭이 어디 있을까요?”
“영애, 좀…… 아가씨.”
콘라드가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콘라드는 하던 일 하러 돌아가.”
그러자 에레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콘라드 님은 제가 먼저 예약했는데요. 뛰어난 분이라고 들었는데, 매너는 별로 없으시구나?”
그러자 그레타는 눈을 부릅떴다.
딱 봐도 ‘저, 저것이……!’ 하는 표정이었다.
한지혁이 그레타를 힐끔거리며 속닥였다.
“네 팬클럽과 콘라드 팬클럽의 공작성 지부 회장이래.”
“조용히 해.”
에레카는 콘라드를 놔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여전히 그의 팔을 끌어안고 생글생글 웃고 있었으니까.
나는 가만히 그 애를 쳐다봤다.
“사람은 물건이 아니니까 예약이 아니라, 선약이라고 하는 거야.”
“네?”
“가르쳐 주지 않으면 모르는 것 같아서. 공부는 좀 하는 게 좋겠다. 넌 매너보다 상식을 먼저 배워야겠어.”
“……하.”
에레카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네, 선약. 콘라드 님과의 선약은 제가 했답니다.”
“또 한 가지. 콘라드는 아무와도 선약을 잡을 수 없단다.”
“네?”
“그는 할아버지 휘하의 사람이기 때문이지. 모든 약속에서 할아버지를 우선해야 하므로 그 누구도 선약을 잡을 수 없어.”
나는 생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매너보단 예법을 익혀야겠구나. 물론 상식과 함께.”
“영애의 볼일은 공작님과 관련이 있나 봐요?”
“그런 건 아니지만, 그 어느 때에도 내 볼일은 언제나 너보단 우선일 거야.”
“……네?”
나는 미소 지었다.
그리고 검지로 나를 콕, 가리키고 그 후에 에레카를 가리켰다.
“나는 직계, 너는 방계니까.”
“이번 시험이 끝나면 방계도 함께 교육을…….”
“응. 받더라도 내가 우선이야. 나는 직계, 너는 방계니까.”
고용인들의 입꼬리가 비죽 솟았다. 누군가는 쿡, 웃다가 슬쩍 입을 가린다.
에레카는 눈썹을 늘어뜨렸다.
“다른 직계님들은 굉장히 상냥하시던데, 왜 아스트라의 직계는 오만하다는 소리를 들을까 했어요. 너무 속상한 말이지요?”
내가 오만하게 구니까 그런 소리를 듣는 거다?
하지만 에레카는 얼른 말을 바꿨다.
“물론 영애께서 그렇다는 말은 아니에요. 단지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너무하다는 거였어요.”
그러더니 콘라드를 힐끔 쳐다보고 말했다.
“직계께서 항상 우선이시라니, 제가 양보할게요. 용건은 하나이기도 했고…….”
“예?”
“공작님의 부관은 10년 주기로 바뀐다지요? 올해가 딱 10년째시라고 들었어요. 그래서…… 기회를 드리고 싶어요.”
“무슨…….”
“제 사람이 될 기회.”
한지혁이 “와우.” 하고 조그맣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공작의 부관을 데려갈 수 있는 위치.
그건 직계나 황족뿐이었다.
즉, 에레카의 말은 이렇게 들릴 수도 있다.
‘공작의 부관이었던 자를 데려가겠다는 것으로 보아, 그 소문이 사실일지도 모른다.’
콘라드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 저는…….”
나는 그와 에레카의 사이를 한쪽 팔로 가로막았다.
그리고 웃으면서 말했다.
“있지, 에레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