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책을 집어 든 나는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이상한데.”
“그래.”
“너무.”
셀레네와 리앙틴이 차례로 대답했다.
그러자 디오네라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으응? 왜?”
순진한 표정이었다.
‘이상하지.’
12983번이 실험할 때마다 항상 마탑에 들어간 길라르 자작.
그러나 그 12983번의 기록은 없다.
12983번이 마지막 실험을 했던 날에 발현한 에레카의 가호.
즉, 이 모든 이야기는…….
‘에레카의 가호는 가짜다.’
─로 귀결될지도 모른다.
* * *
나와 셀레네, 리앙틴은 함께 대교육실로 향했다.
그런 우리의 뒤를 한지혁이 따르고 있었다.
리앙틴이 한지혁에게 물었다.
“에레카 길라르가 정말로 대교육실에 있어?”
“예.”
“소문이 거짓이라고 들통났는데, 무슨 이유로 대교육실에 얼쩡거려? 직계들이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세작을 찾으려는 모양입니다.”
내 승부로 인해 방계가 잠잠해진 후, 직계 3세들은 이제 세작 찾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에레카도 그 틈에 껴서 세작을 찾으려는 모양이었다.
리앙틴은 헛웃음을 흘렸다.
“간도 크네.”
그렇게 얘기했을 때, 대교육실에 다다랐다.
한지혁은 문 앞에서 대기하고, 우리 셋은 교육실 안으로 들어갔다.
직계들은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앉아있었고, 방계들은 구석에 모여 있었다.
이전엔 기고만장했던 방계들이 오늘은 직계들의 눈치만 보며 우물쭈물했다.
‘된통 당했나 보다.’
하기야, 조프리가 그냥 놔뒀을 리 없지.
“안녕, 에릴로트.”
나는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사촌 언니인 아일라였다.
로레이나 만큼 나를 싫어하기로 유명했는데?
“아, 네. 안녕하세요.”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인사하자, 아일라는 새침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리앙틴이 킬킬 웃으며 속삭였다.
“지난번에 네가 에레카의 늪요정에게서 구해줬잖아. 호감이 좀 생긴 모양인데?”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나저나 에레카는…….’
에레카 길라르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는다.
셀레네와 리앙틴도 미간을 좁혔다.
리앙틴이 책상에 엎어져 있는 사촌에게 물었다.
“에레카 길라르가 대교육실에 있다면서?”
“어. 미쳤나 봐.”
“어디 있는─”
말하던 때였다.
“너, 너 진짜 돌았어?!”
날카로운 고함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키가 훌쩍 크고 마른 소년이 씩씩거리고 있었다.
조프리의 껌딱지인 사촌 오라버니, 애덤이었다.
애덤이 화를 내고 있는 상대는 에레카였다.
조프리가 인상을 쓰고 물었다.
“뭐야? 왜 그러는데?”
“이 미친 게 화장실까지 쫓아와서 헛소리를……!”
“헛소리가 아니라 질문이었어요. 황도에 자주 가는 3세가 누굴까요? 외부인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려 있는 사람은요? 제 생각엔 아무래도 에릴─”
애덤은 얼굴이 터질 듯이 붉어져서 소리쳤다.
“소문이 가짜라는 게 밝혀진 지금도 봐줄 줄 알아?! 이게 처박혀 있지 못하고……!”
“저는 한 번도 제가 공작님의 손주라고 말한 적이 없어요. 혼자 오해해놓고서 마치 제가 거짓말이라도 한 것처럼 말씀하지 마세요.”
“그, 그래도─”
“소문의 당사자인 공작님도 저를 넘어가셨어요. 저도 헛소문의 피해자라고 생각하신 거지요.”
에레카가 오만하게 웃었다.
그러자 리앙틴이 울컥 소리쳤다.
“소문을 믿도록 만든 건 너잖아!”
“에릴로트 영애가 그러시던가요?”
에레카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애는 나를 힐끗 쳐다보곤 미간을 좁혔다.
“에릴로트 영애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으셨는진 모르겠지만, 다 오해예요.”
“…….”
“그보다 잘됐네요. 그렇지 않아도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
에레카가 나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왔다.
“내내 황도에 계셨잖아요? 누구와 접촉하셨어요?”
“그 많은 사람을 어떻게 다 기억해?”
“아아. ‘기억도 못할 만큼 많은 외부인과 마주쳤다’라……. 혹시 그들에게 아스트라의 정보를 넘긴 적이 있나요?”
“…….”
“왜 대답을 못하세요?”
에레카의 입매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그렇잖아요? 다른 직계분들은 함부로 움직이기 힘들지만, 에릴로트 영애는 아니시죠.”
“그래서?”
“황도에 계셨던 만큼 가장 많이 외부인과 접촉할 수 있었고, 이동지조차 기록되지 않았어요.”
“그건 우리 아빠가 작위를 받아서, 생활 공간을 이동했기 때문이지 일부러 상황을 만든 게 아니야.”
“작위도 그래요. 왜 갑자기 황제 폐하께서 작위를 주셨을까……?”
그렇게 말한 에레카가 주변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여러분! 제발 이성적으로 생각하세요. 적은 제가 아니에요. 세작이지.”
난 속으로 실소를 흘렸다.
‘궁지에 몰리니까 다른 먹잇감을 만들어서 빠져나가려고?’
에레카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을 이었다.
“지금 이 분위기, 너무 이상하지 않나요? 적을 앞에 두고 한 편끼리 싸우는 게 말이에요.”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자, 에레카는 눈썹을 늘어뜨리고 양손을 가슴 앞에 모았다.
“여러분도 아실 거예요. 아스트라의 진정한 적은 세작이란 걸. 하지만 현재 분위기는 마치 제가 공공의 적 같군요.”
“…….”
“이 분위기를 주도한 게 누구지요? 누가 저를 가장 적대했나요?”
“…….”
“이건 피해자인 저를 공공의 적으로 만들어놓고, 제 뒤에 숨으려는 세작의 흉계예요!”
직계들은 굳어졌고, 방계들까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묘해졌다.
에레카는 생긋 미소 지었다.
“공작님께서 왜 제게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으실까요? 그분께선 아시는 거예요. 이게 세작의 흉계라는 걸.”
“…….”
“그래서 제게 기회를 주셨어요. 아마도 세작을 잡아서 아스트라에 공헌하라는 것이겠지요. 여러분! 우리 함께 힘을 모아서 세작을 잡아야 해요. 제 생각엔 에릴로트 양이 세작일 가능성이─”
“저게 지금 뭐라는 거야?”
마지막 말을 한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시에 문가로 향했다.
문을 잡고서 이쪽을 서늘하게 쳐다보고 있는 사람은…….
“발자크 오라버니!”
발자크의 얼굴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그 곁에 있는 건 요슈아와 리시먼드였다.
발자크가 나와 에레카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별 미친 게 본성에 왔다는 얘기는 들었지. 그런데 정말 보통 미친 게 아니네.”
“네, 네……?”
“방금 뭐라고 했는지 내 앞에서 다시 말해.”
“그, 세작을…… 잡아야 한다고.”
“그게 아니잖아. 너, 내 꽃사슴이 세작이란 것처럼 말했잖아!”
발자크의 주변으로 열기가 일렁였다.
발자크의 가호인 <강화>로 인해 발현한 오러.
그 오러의 영향이었다.
“내 꽃사슴이 뭐?”
“저, 저는…… 전…….”
“저 작은 몸으로 아스트라를 위해 하루도 쉬지 않은 내 꽃사슴이 뭐 어쨌다는 거야.”
“아, 아니…….”
“내 꽃사슴은……!”
그만해!!
‘꽃사슴 얘기 그만해!’
어디서 또 꽃사슴에 꽂혀와서 저러는 거야!
나는 발자크의 허리춤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이를 악물고서 속삭였다.
“꽃사슴이라고 하지 마.”
“아……!”
발자크의 얼굴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에릴, 내가 임무에 나가서 사슴 새끼를 잡아 왔어.”
“새끼 사슴이라고 해야 욕처럼 들리지 않아, 발자크 오라버니…….”
“조그맣고, 털도 금빛이고, 귀여운 게 너랑 똑 닮았어. 꽃사슴이래.”
거기서 꽂혔구나.
그가 내 허리를 잡고 번쩍 들었다.
“봐, 가벼운 것도 똑같아.”
알았으니까 제발 놔줬으면 좋겠다.
“이거 놔!”
“그래, 그래. 나도 보고 싶었어.”
“아니, 놓으라니까.”
“나도 엄청 보고 싶었다니까.”
발자크가 나를 끌어안고 툭, 툭, 등을 두드렸다.
방계들은 마치 눈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저 발자크 님이…….”
“어, 엄청 무서운 분이라며?”
“그래. 몬스터를 반 토막 내는 분이야. 세로로…….”
‘망했네, 망했어.’
지금까지 방계들 앞에서 우아한 영애님처럼 보였는데.
그때였다.
발자크에 이어서 요슈아와 리시먼드가 내게 다가왔다.
“잘 있었어?”
리시먼드의 말에 요슈아가 대답했다.
“잘 있던 것 같진 않은데요, 형님. 별 헛소리를 듣고 있었던 걸 보면.”
요슈아의 말투가 매우 서늘했다.
미소 짓고 있지만, 등줄기가 선득하다.
‘엄청 화났네.’
리시먼드가 발자크에게서 나를 빼앗아 땅에 내려주는 동안, 요슈아는 방계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방계들을 쭉 돌아본 시선이 에레카에게 향했다.
에레카는 떨리는 눈으로 나의 세 오라버니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얼굴이 새빨갰다.
‘세 사람 다 외모는 끝내주니까.’
알맹이가 무서워서 그렇지.
에레카가 어깨를 살짝 움츠리며 입술을 모았다.
“저, 오해하시는 것 같아서 말씀드릴게요……. 이 일이 어떻게 된 거냐면─”
“조부님의 사생아라는 소문을 네가 부풀리고 다녔다고 들었어.”
요슈아의 말에 에레카는 흠칫했다.
“어…… 동생분께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정말로 오해예요. 저는 단 한 번도 제 입으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답니다.”
“해서.”
“사실 매우 속상해요. 제가 왜 그런 오해를 받아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영애는 제가 미우신가 봐요. 왜 그렇게 저를 싫어하시는지 저는 잘 모르겠지만, 영애와 친하게 지내고 싶은─”
에레카가 그렇게 말하던 찰나였다.
콰과과곽─!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바닥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초 지나지 않아서…….
쾅!
엄청난 소리가 들리며 에레카의 아래에서 땅이 뾰죽하게 솟아올랐다.
에레카는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쾅!
쾅, 쾅!
물러나는 곳마다 땅이 솟아오른다.
얼굴이 창백해진 에레카는 얼른 늪요정을 꺼냈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소리친 그 애가 어깨를 떨자, 요슈아의 입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글쎄. 내가 무슨 짓일까.”
“저를 공격하려고 하셨잖아요!”
“나도 그렇게 말한 적은 한 번도 없는데.”
“……!”
“저는 단 한 번도 제 입으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답니다.”
쿡.
어딘가에서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 양 직계, 방계 할 것 없이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다.
에레카가 부들부들 떨며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 너무하세요…… 에릴로트 영애!”
‘왜 또 나야?’
나는 기가 막힌 얼굴로 그 애를 쳐다봤다.
에레카는 눈물을 뚝, 뚝, 흘리며 서럽게 말했다.
“대체 세 분께 무슨 얘기를 하신 거예요? 무슨 말을 어떻게 하셨길래 다들 저를 이리 오해하시는 거냐고요!”
“난 네 얘기를 한 적이 없어.”
“거짓말! 세 분은 직계분들 중에서도 가장 현명하신 분들이잖아요? 그런데 저를 이렇게 오해하실 리 없어요.”
“오해한 적 없어.”
리시먼드의 말이었다.
그 말에 에레카의 얼굴이 밝아졌다.
“리시먼드 님…….”
“정신 좀 차려라.”
“……네?”
“망상은 다른 곳에서 해. 내가 정말로 화가 나기 전에.”
에레카와 방계들이 희멀게졌다.
마력이 일렁이지도, 가호를 시전하지도 않았지만, 가슴을 덜컹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리시먼드에게 있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직계 3세의 서열은 필기 성적, 임무 성적, 실전 훈련 성적 등을 모두 더해서 정해진다.
하지만 전투 성적만큼은 3세 중 그 누구도 리시먼드를 이기지 못했다.
아버지가 제국 최고의 무력이라면, 리시먼드는 3세 최강의 무력.
수백 킬로에 이르는 텔레포테이션이 가능한 가호 <이동>.
<이동>을 통해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데, 그에겐 엄청난 공격계 가호까지 있었다.
두 가지가 합해진 그는 사기적인 능력을 자랑한다.
아무리 에레카의 늪요정이 공방을 전부 할 수 있는 엄청난 몬스터라도, 리시먼드는 이길 수 없다.
늪요정이 공격하는 동안 이동하여 에레카의 어디를 찌를지 모르니까.
“부탁해.”
리시먼드의 목소리가 땅을 뚫을 듯 낮아졌다.
“날 정말로 화가 나게 하지 마.”
“리, 리시먼드 님…….”
“난 우리 꽃사슴에 관련된 일이라면 눈이 돌아간다는 것을 명심하고.”
리시먼드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방계 소녀들이 상황을 잊고 하아아, 한숨을 내쉴 만큼 아름다운 미소였지만…….
‘꽃사슴은 제발 그만해!’
은근히 장난기 있다니까.
난 한숨을 푹 내쉬었다.
* * *
나와 오라버니들은 함께 호숫가로 나왔다.
나는 내 앞에서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인 세 남자를 매섭게 쳐다봤다.
“꽃사슴은 금지야.”
“어울리는데?”
발자크가 고개를 번쩍 들면서 말해서 난 씁, 하며 인상을 썼다.
발자크가 얼른 다시 고개를 숙였다.
“알겠어…….”
“애들 앞에서 놀리지 마!”
발자크가 억울한 표정으로 “놀린 게 아니라─” 하고 말했지만, 요슈아와 리시먼드가 얼른 발자크의 입을 틀어막았다.
“알겠어.”
“그래.”
난 세 사람을 흘겨보고서 말했다.
“……임무 중에 다친 덴 없어?”
그러자 발자크와 요슈아, 리시먼드가 픽 웃었다.
“당연하지!”
“하나도.”
“안 다쳤어.”
“……다행이네. 관할령으로 돌아가서 쉬어.”
그러자 발자크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너는 관할령으로 돌아가지 않고?”
“나는 기다리는 일이 있어.”
이제 에레카 길라르가 어떻게 나오는지 봐야 한다.
‘그 열등감 덩어리를 그렇게나 자극해놨으니, 분명히 움직일 거야.’
어떻게 자극할까 싶었는데, 오라버니들 덕분에 진행이 쉽겠다.
나는 히죽 웃었다.
* * *
깊은 밤.
에레카는 입술을 꽉 짓씹었다.
“꽃사슴!”
“잘 있었어?”
“에릴로트.”
발자크와 리시먼드, 요슈아의 얼굴이 차례로 스쳐 지나갔다.
꿈에서 나온 듯 근사한 소년들…….
그들은 마치 깨지기 쉬운 보물이라도 대하는 것처럼 에릴로트를 대했다.
‘그게 뭐라고.’
대체 그 계집애가 뭐라고!
내가 더 대단하잖아.
난 가호가 셋이나 된다고.
내가 더 아름답고, 내가 더 똑똑하고……!
꽉 쥔 주먹이 혈색 없이 바르르 떨렸다.
[내 말 듣고 있어?!]
연결해둔 통신석에서 누군가의 고함이 터져 나왔다.
앳된 목소리였다.
에레카는 짜증 섞인 어조로 말했다.
“듣고 있어요.”
[제발 제대로 해. ‘그 분’께서 얼마나 화가 나셨는지 모른다고! 너 때문에 이게 뭐야!]
“그럼 좀 도와주지 그랬어요. 당신 사촌들이 날 몰아세울 때 돕지는 못하고 날 더 공격했잖아요!”
[네가 나와 한 편이란 걸 들키면 안 되니까 그랬지! 하여간에 너, 절대로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 알겠어?]
“…….”
[너 때문에 나까지 ‘그 분’께 버려지면 결코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