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2화. (132/390)

132화.

“방 안으로 들어가!”

우리는 냅다 가장 가까운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실의가 쫓아 들어오기 전, 아슬아슬하게 문을 닫는 데에 성공했다.

“윽!”

사촌 오라버니인 밀란과 리시먼드가 온몸으로 문을 밀어붙였다.

나는 황급히 주변을 둘러봤다.

이곳은 창고였다.

이제는 별로 쓰지 않는 교구나, 부서진 무기를 보관하는 곳.

조프리가 장난을 치다가 반쯤 망가뜨린 메이스(무게추가 달린 쇠몽둥이)도 보인다.

나는 책장 근처에서 멀뚱멀뚱 선 방계들에게 소리쳤다.

“저리 비켜!”

그리고 사촌들에게 손짓했다.

“도와줘.”

“어? 어어!”

“뭘 어떻게 하면 돼?”

사촌들의 도움을 받아서 책장으로 문을 막았다.

‘얼마 못 버텨.’

쾅!

쾅!

콰곽─!

실의의 발톱이 벌써 문을 뚫고 들어왔다.

저 책장까지 넝마가 되는 건 시간문제일 거다.

눈치 빠른 애들이 먼저 무구를 향해 달려갔다.

사촌 오라버니인 애덤은 대검을 잡았다.

대검은 이곳에 있는 무기 중에 그나마 쓸 만해 보인다.

그러자 조프리가 애덤에게서 무기를 빼앗았다.

“이건 내가 쓸 거야. 이리 내!”

덩치만 컸지 겁 많은 애덤이 우물쭈물하며 대검에서 손을 떼었다.

“멍청이! 애덤에게 줘!”

내가 소리치자 조프리가 움찔했다.

“조프리, 아무리 괜찮은 무기라도 사용자에게 안 맞으면 쓸모없어. 대검은 너한테 너무 무겁고 커.”

“나도 들 수 있거든? 말만 그렇게 하고 네가 이걸 차지하려는 것 아냐? 절대 못─”

퍽!

누군가 조프리의 등짝을 걷어찼다.

로레이나였다.

“헛소리로 시간 뺏지 말고, 넌 저기 메이스나 들어.”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로레이나가 왜?’

그러자 로레이나는 벽에 걸려 있던 쌍검을 들며 말했다.

“열 받지만, 지금은 네가 사령관이니까.”

“…….”

“수업을 하면서 지겹게 배웠잖아. 군의 분열은 필패라고.”

인상을 찌푸린 그녀는 쯧, 혀를 찼다.

“진짜 재수 없는데, 다른 사촌보다 1위인 네가 명하는 게 더 믿음이 가잖아. ……나 말고 다른 사촌들한테 그렇다는 거야.”

나는 소리 없이 웃었다.

그리고 서둘러 무기를 나눠 줬다.

“특수계는 무기를 양보해. 어차피 싸울 수 없다면 후방으로 물러나!”

“으응.”

“방패는 둘뿐이니 어린애들에게 양보해. 힘 좋은 사람이 방패를 쥐고 애들은 그 뒤에 숨어. 최대한 구석에 있어.”

“하지만 그럼 도주로가 없어질 텐데…….”

“어차피 방까지 몰린 이상 도주는 글렀어. 죽기 살기로 방패에 붙어 있어.”

“무, 무기나 방패가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하죠?”

“깨진 유리를 막대에 묶어. 책이나 유리 공예품은 뒤에 모아 둬. 후방에선 책이나 유리를 던져서 전방에서 공격하는 사람들을 지원해 줘야 해!”

“아, 알겠어.”

“날붙이를 가진 여자애들은 잘 들어. 피부는 어차피 너희 힘으로 공격해봐야 소용없어. 너희는 최우선으로 눈을 노려야 해.”

“네, 넷……!”

“물렸다 싶으면 도망치려고 하지 마. 어차피 물린 부위는 못 쓰게 될 테니까. 차라리 주둥이 안을 잡아 뜯거나 찔러!”

다급히 아이들에게 명령하고서 말했다.

“우리 목표는 저 실의들을 없애는 게 아니야.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틴다!”

“응!”

“네, 넷!”

“옛!”

그 순간 책장이 넘어지며 실의 한 마리가 뛰어들었다.

“던져!”

후방에 있던 아이들이 책이며 유리 공예품을 던졌다.

실의가 주춤한 사이 리시먼드가 재빨리 창으로 눈을 찔렀다.

“키에에엑─!”

소름 끼치는 비명과 함께 실의가 주춤 물러났다.

‘한 마리씩 상대해야 해.’

저 많은 실의에게 둘러싸이면 승산이 없다.

눈이 찔린 실의가 물러나자 유난히 큰 실의가 크르륵, 울며 다가왔다.

“옴브레.”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옴브레가 슈룩, 소리와 함께 실의를 감쌌다.

실의는 크게 버둥거렸다.

바닥을 구른 실의가 “크르르륵!” 울며 거대한 앞발로 쿵! 책장을 내리쳤다.

단단한 흑목으로 만든 책장의 일부가 순식간에 부서졌다.

“가, 강철보다 강하다는 흑목이…….”

잔뜩 겁먹은 아이들이 부들부들 떨었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졌다고 하나 고대 몬스터.

일반 몬스터인 옴브레는 실의가 내뿜는 독기를 얼마 버티지 못했다.

“키엑─!”

실의가 크게 포효하며 몸을 뒤틀자 옴브레가 휙, 날아갔다.

실의와 가장 가까이에 있던 애덤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으, 으그극…….”

그 순간, 실의가 주둥이를 쩍 벌렸다.

“힉!”

새파랗게 질린 애덤은 눈을 꽉 감고서 아무렇게나 대검을 휘둘렀다.

가뜩이나 대검은 무거워서 움직임이 둔하다.

가볍게 대검을 피한 실의가 눈을 감고 있는 애덤의 목덜미를 향해 달려들었다.

“저 멍청이.”

“숙여.”

땅을 박찬 요슈아와 리시먼드가 낮게 달려서 순식간에 실의에게 바짝 다가섰다.

애덤이 몸을 웅크린 순간, 그의 어깨를 잡은 리시먼드가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그대로 실의의 등에 올라탔다.

리시먼드가 단숨에 실의의 머리를 눌러서 땅에 처박자, 요슈아는 실의의 콧잔등에 단도를 내질렀다.

“크르르르르륵─!!”

실의가 크게 요동쳤다.

그런데.

“뭐, 뭐야, 저게?”

“저, 저거…….”

실의의 피부가 진물처럼 녹아들며 뼈가 드러났다.

“아아악!”

리시먼드에게 눌려서 바닥에 주저앉았던 애덤이 비명을 질렀다.

실의의 녹은 물이 몸에 닿자 쿠르륵, 소리와 함께 피부가 타들어 간 것이다.

마치 염산에 닿은 것처럼.

나는 얼른 소리쳤다.

“오라버니들, 물러나!”

요슈아와 리시먼드가 애덤의 목덜미를 잡고 재빨리 우리 쪽으로 되돌아왔다.

그런데 이상했다.

‘염산처럼 피부를 녹였는데, 구두와 옷은 멀쩡하잖아.’

나는 황급히 애덤을 살폈다.

타들어 간 손바닥부터 핏줄을 타고 기묘한 무늬가 빼곡히 생겼다.

리앙틴이 부들부들 떨면서 말했다.

“가, 가까이 가면 안 돼!”

“뭐?”

“고대 몬스터 중에 마독을 뿜어내는 게 있다고 했어……. 저게 마독이라면, 만약 애덤이 마독에 감염된 거라면…….”

리앙틴이 양팔을 끌어안고 벌벌 떨었다.

성격 급한 로레이나가 고함을 내질렀다.

“마독이 뭔데!”

그러던 찰나에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던 애덤이 무어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죽…….”

조프리가 미간을 좁혔다.

“뭐라고?”

“죽……여…… 죽여야 돼…… 죽어…… 죽어…….”

“뭐라는 거야!”

“죽어.”

“무슨…….”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컥─!”

애덤이 조프리의 목을 양손으로 꽉 그러잡았다.

“조프리─!”

“뭐 하는 짓이야─”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정신이 나간 것 같았다.

가만 보자 눈이 마치 실의처럼 새빨개져 있었다.

나는 리앙틴을 쳐다봤다.

“설명해, 리앙틴!”

“마독에 감염되면 살의밖에 안 남은 인형이 된다고……! 고대 도시 몇이 통째로 사라진 건 그 도시인들에게 마독이 전염되었기 때문이라고 했어…….”

뭐?

나와 사촌들, 방계들은 모두 새파랗게 질렸다.

로레이나가 애덤의 팔을 할퀴어 가며 소리쳤다.

“이거 놔!”

“끄으윽…… 누, 님…….”

“누가 좀……! 조프리!”

‘맙소사.’

괴물 재난물에 이어서 이제 좀비물까지 찍으란 말이야?

“일단…… 일단 애덤 오라버니를 떼어 내!”

소리치자, 아이들이 허둥지둥 애덤에게 매달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실의는 계속 문을 넘어오기 위해 안달이었다.

밀란과 리시먼드, 요슈아가 어떻게든 막고 있었으나, 뚫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다들 힘을 모아도 어려운 판에 애덤까지 마독에 감염되어 버렸다.

사촌 오라버니인 엘먼이 겨우 애덤을 조프리에게서 떼어 내고 죽어라 끌어안았다.

“으윽, 이 자식, 힘이 왜 이렇게 세. 누가 좀 도와 봐……!”

“시, 실의 쪽도 도와야 하는데! 으아아!”

방패를 뒤에 몸을 숨긴 어린애들이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살려 줘…… 와아앙─! 엄마!”

“어헝……! 아부지……!!”

애들의 울음에 애덤과 실의들은 더욱 흥분했다.

로레이나가 새파란 얼굴로 중얼거렸다.

“뭐야. 가호 하나 없는 걸로 왜 우리가 이렇게나 무력해진 건데…….”

그녀의 손에서 이 빠진 쌍검이 툭, 떨어졌다.

사기까지 최악으로 떨어진 상황.

이대로라면 10분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엄마─!”

“공작성에 오는 게 아니었어. 아니었다고. 으아아!”

“애덤, 제발 정신 좀, 윽! 물어뜯었어!”

셋이나 거구의 애덤에게 붙어 있고, 애들은 마음이 꺾였다.

문은 뚫려서 실의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점차 벽으로 몰려갔다.

마치 궁지에 몰린 생쥐처럼.

대부분이 무기를 떨어뜨렸고, 실의들은 무기를 밟고 우리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다들 죽음을 예감한 표정이었다.

그 때.

나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책을 주워 들고 실의에게 달려들었다.

“이야아─!”

“……?!”

“……!”

“……!!”

사촌들이며, 방계들까지 눈을 홉뜬 채로 날 쳐다봤다.

난 책을 던져 실의의 시야를 막고, 턱 아래에 깃이 망가진 화살을 찔러 넣었다.

“난 이렇겐 못 죽어!”

“…….”

“…….”

애들이 얼 빠진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데, 얼마나 죽어라 살았는데! 이렇겐 못 죽어!”

“에, 에릴로트…….”

“이대로 얌전히는 못 죽어. 죽는다고 해도 싸우다 죽을 거야!”

“그런…….”

등 뒤로 시선이 쏟아졌다.

바보를 보는 것 같은 표정이어도 상관 없다.

나는 유리 조각이며, 책 등을 닥치는 대로 주워들고 실의를 공격했다.

첫 번째 삶에선 남의 계략에 당해서 무력하게 죽었다.

두 번째 삶에서도 병에 걸려서 무력하게 죽었고.

‘세 번째 삶도 그렇게 죽으라고?’

절대로 싫어.

크아아악!

실의가 내 목덜미를 향해 주둥이를 쩍 벌렸을 때였다.

“과연 내 자식이다.”

‘……어?’

콰과과과과과과곽─!!!

산산조각이 난 실의가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그리고 나타난 것은…….

아스트라의 문양이 새겨진 검은 케이프가 바람에 휘날렸다.

달빛에 닿은 금발이 찬란하게 부서진다.

칼소이에 제국에서 감히 최강이라는 칭호를 허락받은 유일한 남자.

전신.

무패의 영웅.

……아빠였다!

“아가씨~!! 무사하십니까~!!”

“아가씨!”

“우리 아가씨와 도련님들은 괜찮은 거냐고, 어?!”

아빠의 등 뒤로 험악한 아우성이 들려왔다.

랜스며, 메이스, 투 핸드급의 도끼를 짊어진 야수 같은 남자들이 떼로 몰려온 것이다.

아빠가 각지에서 모아온 아스트라 최강의 군사들.

즉, 광견들이라 불리는 데이몬드 관할령의 군사들이었다.

아빠의 싸늘한 시선이 방 곳곳에 닿았다.

실의에게 허리가 물어뜯겨 피투성이가 된 발자크의 복부.

부러진 듯 너덜거리는 요슈아의 손목.

엉망으로 할퀴어진 리시먼드의 목덜미.

그리고 실의를 공격하다가 유리조각에 베여 피가 뚝뚝 흐르는 내 손.

우리 남매는 식은땀과 먼지로 온통 엉망이었다.

아빠의 시선이 짙게 가라앉았다.

실의들은 그륵, 그르륵, 울며 아빠에게 몰려들었다.

셀레네를 비롯한 7서열권 아이들의 마력이 강하다고 해도, 아빠와는 비할 수 없었다.

아빠는 강력한 광역기를 시전하고도 숨 한 번 헐떡이지 않는 사람이다.

아빠의 마력은 퍼도 퍼도 마르지 않는 샘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

마력을 먹이로 삼는 실의들에겐 이만큼 근사한 먹잇감이 없을 것이다.

발자크가 인상을 찌푸렸다.

“빌어먹을. 아무리 아버지라고 해도 붉은 달이 뜨는 날에 대단한 힘을 낼 순 없잖아.”

요슈아와 리시먼드까지 고개를 끄덕였다.

“엄호해야 돼.”

“<이동>을 쓰실 수 있겠습니까?”

“나 하나라면 5미터의 단거리 정도는─”

그때였다.

아빠를 둘러싼 실의들이 일시에 중앙을 향해 내달렸다.

그런데.

“……!”

“……!!”

“……!”

우리 남매를 비롯한 모든 아이들은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그야 그 많던 실의가 단번에 가루가 되었으니까.

“캬아아아악─!!!”

그나마 피한 실의조차 몸 반절이 날아가 버렸다.

리앙틴이 숨을 크게 들이켰다.

“마, 말도 안 돼. 붉은 달이 뜨는 날엔 가호를 쓸 수 없, 없는…….”

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쓸 수 없는 게 아니야. 약해지는 거지.”

약해진 가호가 저 정도라고?

‘아무리 마력이 강하다고 해도…… 설마!’

이것저것 머리에 쑤셔넣은 정보량으로는 7서열권 최고인 나와 리앙틴이 서로를 쳐다봤다.

“4단계……!”

“그래. 4단계야!”

고대 역사서에 적혀 있었다.

가호를 4단계까지 개발한 자는 붉은 달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건 전설일 뿐이잖아……!’

게다가 아무리 만들어진 존재라고 해도 고대의 몬스터를 복원한 것이다.

그런 몬스터들을 순식간에…….

아이들이 스르륵, 주저앉기 시작했다.

어느 방계 아이가 사색이 된 얼굴로 중얼거렸다.

“대륙 최강…….”

─하고.

알렉시스를 감히 아빠와 비교하던 난 얼마나 어리석었나.

이게 바로 <빙.흑.손>에서 줄곧 ‘최강’이라 불린 남자.

데이몬드 아스트라의 저력이었다.

* * *

에레카는 불안한 표정으로 창 밖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된 거지?’

조금 전만 해도 턱 끝에 찼던 숨이 멀쩡해졌다.

마치 몸에서 무게추가 사라진 듯이.

“실의들이 전멸한 것도 아닐 텐데 왜…….”

“뭐라고?”

“…….”

“에레카, 무슨 일이냐. 응?”

에레카의 부친인 길라르 자작이 희게 질린 얼굴로 물었다.

“도망쳐야 하는 것이야? 그래?”

“바깥 상황은 어때요? 십 분 전에 보고 오셨잖아요.”

“난리지, 뭐. 지원군은 1층도 돌파하지 못하고 실의에 죄 물어뜯겨 죽은 모양이다.”

“……아스트라 공작 직속군은 못 움직이는 거죠?”

“당연하지. 공작이 없는데, 누가 직속군을 움직이려고 하겠어. 그건 이 가문에선 역모나 다름 없는 일이다.”

직속군이 움직인 것도 아닌데, 왜 갑자기 멀쩡해지냔 말야!

에레카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냐. 고대 몬스터를 복원한 거라고. 누가 실의 무리를 없애겠어.’

이대로 신관의 애들이 모두 전멸하고 나면 에릴로트 아스트라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면 된다.

‘내게 질투해서 더 엄청난 몬스터를 테이밍하려다가 실패했다고 하면 그만이야.’

그럼 그 계집애에게 어울리지 않는 위명도 전부 지워지겠지.

에레카가 히죽, 웃었을 때였다.

쿵! 쿵! 쿵!

문 밖에서 소란스러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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