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에레카의 얼굴이 굳어졌다.
“네……?”
당황한 아이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아! 뭔가 오해가 있으시군요!”
에릴로트가 비열한 말로 공작님을 속인 게 틀림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공작님이 이런 표정으로 나를 볼 리 없잖아.’
무기물을 보는 것 같은 무감한 표정.
분명 에릴로트와 승부를 겨룰 적엔 흥미로운 눈으로 자신을 지켜보셨다.
“저, 공작님. 제가 최연소로 12번째 탑에 들어가고, 늘 12번째 탑에서 1등을 했으며, 또, 아! 가호가 셋이나 되는─”
“둘이지.”
아일라가 흥, 콧방귀를 뀌며 말하자 에레카가 그녀를 쏘아보았다.
그러나 곧 공작을 의식하곤 다시 말을 잇기 시작했다.
“네, 뭐…… 가호는 둘이에요. 또, 지금은 지저분해서 잘 못 알아보시겠지만, 머리는 예쁜 금발이에요. 투스코 자작님 말씀이 공작님을 똑 닮았다고 하고요!”
“…….”
“부끄럽지만 장원에서 제일 예쁜 아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있고, 또─”
“해서.”
“……네?”
“그래서 네가 하려는 이야기가 무엇이야.”
에레카의 눈이 커졌다.
아이가 “저…… 저어……!” 하며 당황하자, 리앙틴은 헛웃음을 흘렸다.
“여전히 망상에 빠진 꼴 하곤.”
“공작님의 앞에서 그 무슨 무례한 말씀인가요!”
에레카가 소리치자, 직계 3세들이 아이를 비웃었다.
리앙틴은 팔짱을 끼고 에레카에게 다가갔다.
“내 말의 어디가 할아버지께 무례하다는 거야?”
“그건─”
“아, ‘특별한 에레카’의 말을 끊어서? 착각하지 마. 네 어디가 특별하다는 건데?”
“그야…….”
“가호가 둘이라?”
조프리가 헹, 코웃음을 쳤다.
“가호가 둘인 사람은 직계 중엔 널렸어. 밀란, 리시먼드, 그리고 에릴로트. 모두 가호가 둘이라고.”
“12번째 탑의 최연소? 그건 에릴로트잖아.”
에레카가 울컥 소리쳤다.
“그건 실력으로 들어간 게 아니잖아요!”
로레이나가 인상을 찌푸리곤 물었다.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 건데. 우리는 12번째 탑의 시스템을 알 필요가 없어서 모르지만……. 에릴로트, 12번째 탑에 들어가려면 얼마나 재능이 있어야 하는 거지?”
그러자 3세들의 시선이 에릴로트에게 집중되었다.
에릴로트는 “음…….” 신음하며 대답했다.
“12번째 탑은 재능이 있어서 들어가는 곳은 아니지요.”
엄밀히 따지면, 본가에서 방계로부터 자식을 빼앗아 기르는 곳이다.
본가의 이상을 머릿속에 주입하기 위해 지어진 곳.
즉, ‘본가에 복종하는 방계를 만들기 위한 곳’이란 거다.
‘뭐, 할아버지 대(代)부턴 사상 교육은 안 하지만.’
3세들이 실소를 터뜨렸다.
“뭐야. 그럼 일찍 들어갔다고 잘난 체할 만한 곳이 아니잖아.”
“잘난 척이 하고 싶어서 미쳤던 걸까. 한심해라.”
에레카의 얼굴이 터질 듯 붉어졌다.
“그렇긴 하지만 현 공작님의 대(代)에선 뛰어날수록 일찍 들어간다고요!”
“뭐, 그럼 시험이라도 봐?”
에릴로트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시험이 아니라 소문을 본달까…….”
“소문.”
“뛰어난 아이라는 소문이 돌면, 데려가요. 학식은 상관없고요. 제가 있을 땐, 글자도 못 읽는 아이들이 있었어요.”
“뭐야. 그럼 쟤가 이때까지 자랑했던 건 ‘난 뛰어나다는 소문이 돌던 아이야’라는 거잖아.”
부들부들 떨던 에레카가 소리쳤다.
“제, 제가 들어갈 땐 글자를 읽을 수 있나 확인했어요! 저는 4살에 글자를 읽었다고요.”
“에릴로트는 3살에 글자를 읽고 썼어. 셀레네와 로레이나, 요슈아, 리시먼드도.”
“나도야!”
리앙틴이 어느 3세에게 얼른 말을 보탰다.
“직계들은 대부분 빨리 글을 떼거든?”
조프리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러자 그의 누나인 로레이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가호도 너보다 훨씬 뛰어나지. 셀레네의 <모성애>, 내 <수인화>, 에릴로트의 <마물 조련>, 밀란의 <육체 지배>…… 뭐 하나 너와는 비교도 안 되는 능력이야.”
“그건 직계라서……!”
“그러니까 네 말은 그거네. ‘평범한 사람 중엔 뛰어난 편’이라는 것.”
리앙틴이 에릴로트의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말야. 예쁘다는 건 이런 거거든!”
에릴로트가 민망한 듯 시선을 돌렸다.
디오네라는 에릴로트의 어깨 뒤에서 소리쳤다.
“그래, 에릴로트는 진짜 이쁘다고! 그치, 리앙틴? 황자, 왕자들도 한눈에 반했다고 했지?”
“맞아!”
옷자락을 꽉 비틀어 쥔 에레카가 파들파들 떨며 중얼거렸다.
“그야 하루 종일 그렇게 관리를 받으니 안 예쁠 수 있어요? 나도 공작님의 손녀로 태어나서 돈을 그렇게 펑펑 썼으면─”
“무슨 소리!”
리앙틴이 꽥 소리쳤다.
“얘는 일주일을 안 씻어도 예뻐! 작년에 외부 훈련에 갔을 때, 로레이나 팀의 공격 때문에 동굴에 일주일을 갇혀 있었는데 얼굴에서 빛이 났다고!”
다른 3세들도 분하다는 듯이 꽥꽥 말을 보탰다.
가장 외모에 신경 쓰는 엘먼은 씩씩대기까지 했다.
“다 같이 흙바닥에서 일주일을 뒹굴었는데, 교수가 에릴로트한테만 진창에 있어도 빛을 발하는 고귀함이라고 했단 말야!”
“화장수도 안 가져갔는데……. 씨이.”
‘그만해!’
에릴로트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왜 이러는 거야…….’
에릴로트가 인상을 찌푸리며 손뼉을 짝, 쳤다.
“할아버지의 앞이에요. 영양가 없는 얘기는 여기까지 하지요.”
에레카는 굳은 얼굴로 직계들을 노려봤다.
“뭐야, 대체……. 내가 뛰어나다고 하는 게 그렇게 질투가 나나요? 어째서 깎아내리지 못해서 안달이죠?”
리앙틴이 말했다.
“난 너 같은 애를 잘 알아. 내가 너와 같았으니까.”
“……말도 안 돼.”
리앙틴은 직계 중에 가장 못난 사람이었다.
쓸모없는 가호.
그 페널티를 없애기 위해 죽어라 공부만 하는 덜떨어진 애.
‘그런 네가 어떻게 나와 같아?’
“에릴로트에게 질투가 나서 미칠 것 같지? 네가 가지고 싶은 건 이 애가 다 가지고 있을 테니까.”
“아니야. 아니야! 에릴로트 아스트라가 나를 질투하는 거야!”
“왜?”
“그, 그야…….”
“에릴로트는 너보다 뛰어난 가호를 가지고, 너보다 훌륭한 혈족에게서 태어났고, 너보다 아름다우며, 너보다 지혜로워.”
“…….”
“그런 에릴로트가 어째서 너를 질투해?”
“그건, 그건…….”
“사실은 네가 질투했던 거야. 질투가 나서 못 견딜 것 같으니까, 에릴로트에게 너를 투영한 거라고.”
“……!”
“쟤도 나를 질투하고 있을 거라는 망상에 사로잡힌단 말야.”
태양회에 있을 때의 자신처럼.
사실 에릴로트를 질투하는 건 자신이었다.
그래서 에릴로트의 배려가 질투로 보였던 거다.
사람은 자신을 투영해서 타인을 보니까.
에레카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내가 질투했다고?’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다.
뛰어난 자신이 왜?
‘나는 가호를 둘이나 가졌고…….’
“에릴로트 님 말야. 이제 가호가 둘이래. <고대어 읽기>와 <마물 조련>.”
‘공부도 잘하고…….’
“엄청나지 않아? 에릴로트 님이 최연소 서열 1위라잖아!”
‘아름답고…….’
“황도 대귀족들이 ‘과연 아스트라의 장미’라고 했다잖아. 아아, 동경하게 돼.”
‘사실은 전부 지고 있었나? ……아니야. 아냐! 그럴 리가 없어!’
에릴로트가 저들에게 이상한 논리를 심어준 것이다.
다 틀렸는데, 사실은 내가 제일 특별한데, 저들만 모르고 있을 뿐이야.
에레카가 울먹이며 공작을 쳐다봤다.
“저는 정말이지 에릴로트 님을 이해할 수 없어요. 저를 너무 질투해서 직계님들께 이상한 논리를 심어주신 거겠죠.”
“…….”
“왜 제게 이렇게까지 하는지는 알겠어요. 직계가 아닌 저를 공작님께서 특별하게 생각해주시니─”
“미쳤군.”
“……네?”
드뷔시 자작은 기가 막힌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어리석은 길라르의 딸아. 공작님께선 승부 이전엔 네 이름조차 모르셨단다.”
“그, 그럴 리가…….”
공작은 눈살을 찌푸렸다.
“길라르 가문의 재산을 몰수하고, 귀족원에서 이름을 지워라.”
“부녀는 어찌할까요.”
“선대의 공을 헤아려 마물 실험에 관련한 일을 토설한다면 목숨만은 살려주어라.”
“예.”
“부친은 혀와 다리 한 짝을 끊어내 광산으로 보내고─”
에레카 길라르를 가만히 쳐다보던 공작의 한 쪽 눈썹이 까딱, 올라갔다.
“─감히 내 손녀의 몸에서 피를 보게 한 길라르의 딸은…….”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바닥에 낮게 깔렸다.
온몸의 털이 바짝 서는 것 같은 기분.
기요틴 아래에 선 것만 같았다.
공작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양다리에 금제석을 이식한다. 공작령으로 이 아이를 거두는 자는 없게 하여라.”
“……!”
에레카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금제구도 아닌 금제석 이식이라니.
금제구는 떼어내면 다시 가호를 쓸 수 있지만, 금제석 이식은 다르다.
평생 다시는 가호를 쓸 수 없다.
그렇다는 건…….
‘초라한 평민이 되라고?’
아무도 거둬주지 않는다면 거지처럼 구걸이나 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공작님─!”
에레카가 외쳤으나, 공작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가 방을 빠져나가자, 방계 아이들의 눈이 희번덕했다.
“그럼 이제 에레카는 귀족이 아니란 소리네……?”
“구걸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에레카는 조금이라도 제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아이가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따돌렸다.
반항하는 아이에겐 길라르 자작에게 부탁해 가문 단위로 벌을 내렸다.
거기다 이제는 직계들에게 미움을 사게 만들기까지…….
‘뭐, 뭐야. 이게 뭐야.’
우습게 보았던 방계 아이들이 소름 끼치게 무서웠다.
가장 친하게 지냈던 방계 아이가 히죽 웃었다.
“장난감 하나가 새로 생겼네?”
“아, 아아아, 아아…….”
“옥사에서 열심히 운동을 해둬. 금제석을 이식한 곳은 납덩어리를 매달고 있는 것 같다고 하니까.”
“으, 으흑…….”
“옥사에서 나올 날을 기다릴게. 에레카.”
직계들은 흥, 하고 웃으며 방을 빠져나갔다.
에레카가 가장 마지막으로 방을 나서는 에릴로트에게 헐레벌떡 매달렸다.
“고, 공작님께 말해주세요. 저, 저를 용서해달라고 말씀드려주세요!”
“발자크 오라버니가 많이 다쳤어.”
“네?”
“요슈아 오라버니와 리시먼드 오라버니도. 네가 내게 뒤집어씌우기 위해 불렀던 실의 때문에.”
“무, 무슨…….”
“네 말대로 난 못돼먹은 애라서─”
에릴로트는 에레카의 손에서 치맛자락을 빼내며 말을 이었다.
“용서가 쉽지 않단다.”
남은 그렇게 간단히 죽여버리려고 하고선, 자신은 쉽게 용서해달라니.
‘반성하려면 멀었구나.’
쿵!
문이 닫혔다.
에레카는 기계처럼 뻣뻣해져서 뒤를 돌아봤다.
방계 아이들의 히죽히죽 웃는 모습이 소름 끼치게 무서웠다.
* * *
며칠 후.
책을 읽던 나는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한지혁이 곤란한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지하 옥사에 갈 수 없겠던걸.”
“길라르 자작의 고신이 안 끝났어?”
“끝났는데…… 말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
엄청나게 당한 모양이다.
나는 음, 신음하며 책을 덮었다.
그러자 한지혁이 물었다.
“길라르 자작은 왜?”
“아무래도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어서.”
“석연치 않은 구석?”
“에레카 길라르가 직계들에게 그렇게 난리를 치고도 멀쩡했잖아.”
“그야 마물 조련의 가호가 있다고 하니까 겁먹은 것 아냐?”
“그렇다고 볼 수도 있지만…… 정말 3세들 중엔 세작이 없었을까 싶어서. 혹시 분위기를 주도해서 에레카 길라르를 공격하지 못하도록 했을 수도 있어.”
할아버지가 굳이 3세들 중에 세작을 찾으라고 한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2세들을 단속하려고 했다면, 2세들 중에 세작이 있다고 해도 될 텐데 굳이 3세들 중에 찾으라고 한 게 걸린다.
“그럼 에레카 길라르를 만나보지 그래?”
“만약 3세 중에 세작이 있다면, 내가 에레카 길라르를 만나려고 할 때 방해가 있을 거야.”
“그렇기야 하지.”
“나라면…… 죽이겠어.”
입을 다물게 할 가장 좋은 방법이니까.
‘아마 그 애가 지금까지 살아있는 건 우리 모두 관심을 주지 않기 때문일 거야.’
한지혁이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하게?”
“굳이 길라르 부녀가 아니라도 분위기를 주도했다면 찾기 어렵지 않아.”
3세들에게 한 명씩 말을 들어봐도 되고.
한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 그리고 밀란 말인데.”
“밀란?”
조사해오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왜 갑자기?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한지혁이 미간을 좁혔다.
“직계에서 폐해진다더라.”
“뭐?!”
“아무래도 헤르난의 자식이니까 그렇겠지?”
“하지만 밀란과 카나리아 숙모님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헤르난의 부정을 알지 못했을 거야!”
“다들 그렇게 생각하지만, 선례를 남길 수 없다고 하던걸…….”
나는 당황한 표정으로 벌떡 일어났다.
직계에서 폐해진다면 친정으로도 돌아갈 수 없을 거다.
원래부터 카나리아 숙모님의 친정은 약한 가문이었고, 아스트라의 눈치를 보느라 딸을 이혼시키지도 못했을 정도니까.
‘카나리아 숙모님 성격에 친정에 폐를 끼치고 싶어하지도 않을 거고.’
그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콘라드입니다, 아가씨.”
“무슨 일이야?”
“공작님께서 식사를 함께 하시자는 말을 전하셨습니다.”
“…….”
나는 한참을 고민했다.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다.’
난 단호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전해. 오늘부터 저는 식사를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이것이 바로 아스트라 역사에 기록되었던, ‘에릴로트 아스트라 단식 투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