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9화. (139/390)

139화.

한지혁은 어이없는 얼굴이었다.

“고작 단식투쟁에 뭐가 달라지겠어?”

“너는 가호가 없어서 모를 수도 있겠다. 한지혁, 5세 미만의 귀족 아이의 부모가 제일 무서워하는 게 뭔지 알아?”

“뭔데?”

“아이의 몸 아픈 거랑 단식투쟁. 왜 그런 줄 알아?”

“뭐……. 자식을 사랑해서?”

“아니.”

한지혁이 “엥?” 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 왜 그 둘을 무서워하는데?”

“정신이 불안정하면 가호가 조절이 안 되거든.”

특히 공격계나, 위험한 특수계 가호를 가진 애들이 무섭다.

예를 들어, <지진>같은 가호를 가진 애들은 불안정해지면 저택 하나를 무너뜨리곤 했다.

한지혁은 그제야 “아하.” 하며 킬킬 웃었다.

“용을 가졌다는 네가 단식투쟁으로 정신이 불안정해지면 큰일이 나겠구만.”

“그렇지.”

태양회 때도 ‘가호의 불안정’으로 잔뜩 겁을 주지 않았는가.

“뭐, 진짜 먹힐지 아닌지는 봐야 알겠지만.”

사실 단식투쟁 정도로 가호가 얼마나 불안정해지겠는가.

‘내가 5세 미만도 아니고.’

행여나 할아버지가 ‘감히 내게 반항을 해?’ 하며 불쾌해한다면,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

‘밀란과 카나리아 숙모님이 안타깝긴 하다만, 둘 때문에 애써 쌓은 할아버지의 신뢰를 무너뜨릴 순 없지.’

일단 할아버지의 눈치를 살펴보고, 안 먹힐 것 같다 싶으면 포기해야지.

‘……라고 생각했는데.’

* * *

공작의 집무실.

드뷔시 자작이 콘라드에게 되물었다.

“식사하지 않겠다고 하셨다는 거냐?”

“예.”

자작은 “호오.” 신음했다.

‘간이 큰 건 유전인가.’

공작과의 식사는 3세들은 물론, 2세들까지 손꼽아 기다리는 일이었다.

식사 자리에서 가문의 커다란 일이 결정되곤 했으니까.

장남 그리미에가 공작과의 식사 이후, 황도 저택을 책임지게 되었다는 건 유명한 얘기였다.

‘어려서 욕심이 없으신 건가. 아니면 그 자리가 얼마나 대단한 건지 모르시는 건가.’

그도 아니면 더 큰 것을 노리고 있는 것일까.

모르긴 몰라도, 정말이지 대단한 아이였다.

‘그럼 공작님의 반응은 어떠려나.’

드뷔시 자작은 흥미로운 얼굴로 공작을 쳐다봤다.

평소와 같은 무감한 표정이다.

‘그럼 그렇지.’

내심 에릴로트를 아끼지만, 평생 감정 표현을 하지 않고 산 양반이다.

‘불쾌해도 내색할 리 없지.’

드뷔시 자작은 픽, 실소를 흘리곤 말했다.

“하면 식사는 회의 후에 하시겠습니까? 황궁인들이 이제나저제나 공작님과의 대화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공작은 여전히 황궁에 ‘에릴로트의 용’에 대한 답을 주지 않았다.

황제는 에릴로트가 용을 움직일 때, 황궁의 허가를 받길 바라고 있었다.

황궁인들로썬 어떻게든 황제가 원하는 대답을 받아 가길 원할 터.

하지만 공작은 그 어떤 조건에도 합의해주지 않았다.

드뷔시 자작이 말했다.

“공작님께 답을 받지 않고는 돌아가지 않을 생각인 듯합니다.”

“…….”

“동의를 하든, 반대를 하든 간에 대화의 장 정도는 마련해주시죠.”

“그래.”

드뷔시 자작이 콘라드를 쳐다봤다.

콘라드는 고개를 숙이곤, 황궁인들에게 소식을 전하기 위해 나섰다.

황궁인들은 당연히 매우 기쁜 얼굴로 득달같이 찾아왔다.

공작과 황궁인들은 회의장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이번 거래의 총책임자인 몬테로 백작의 눈이 이글거렸다.

‘어떻게든 합의를 끌어내야 한다.’

황제는 말했다.

“아스트라 공작에게 동의를 받지 못한다면, 돌아올 필요가 없다.”

합의를 받을 때까지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아스트라에 죽치고 있으란 소리였다.

‘그렇지 않으면 황궁에 더 이상 내 자리는 없다는 뜻이야.’

몬테로 백작이 웃는 낯으로 아스트라 공작을 쳐다봤다.

“황제 폐하께선 앞으로 오를레앙 대륙과 체결한 기술 협약 건의 총책임을 아스트라 가에 맡긴다고 하셨습니다.”

오를레앙 대륙에서 받아올 기술을 아스트라 공작가와 나눈다는 거야.

굉장하지?

그러니까 이쯤하고 합의하자. 응?

몬테로 백작이 뜨거운 시선으로 아스트라 공작을 쳐다봤다.

그런데 이상했다.

이 엄청난 제안에도 공작은 말이 없었다.

“저, 공작님?”

“…….”

몬테로 백작의 표정이 구겨졌다.

‘역시 이것으론 안 된다는 건가.’

“이타록 전투에 협력군으로 아스트라 군을 보내시도록 제가 잘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다 이긴 전쟁이다?

싸울 필요도 없이 땅만 나눠 먹을 수 있다는 거야.

그 엄청난 전리품도 나눠 가질 수 있다는 것이라고?

……이번에도 공작은 말이 없었다.

황궁인들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것도 마음에 안 차는 모양입니다.’

‘그럼 대체 어디까지 바란다는 말인가!’

‘하여간에 욕심은…….’

황궁인들의 눈빛을 받은 몬테로 백작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눈을 꽉 감았다.

“황비 자리가 하나 비어있지요. 아스트라의 성씨를 가진 황비가 생긴다면, 이 나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것입니다.”

‘당신 가문에서 황비를 만들자고!’

황제는 아스트라를 매우 견제했다.

해서 아스트라 가문에서 몇 차례 황비를 만들려 하였으나, 절대로 아스트라의 성씨가 있는 황비를 맞이하지 않았다.

그들이 황위에 관여하려 한다면 황궁이 크게 흔들릴 테니.

‘이 정도라면 다 줬어. 이제 합의를─!’

……그런데 공작은 이번에도 말이 없었다.

‘아니, 이 영감탱이가……! 이것보다 더 한 것을 바란다고?’

대체 얼마나 욕심이 많은 게야?!

황궁인들과 몬테로 백작이 모두 희게 질려버렸다.

드뷔시 자작과 콘라드조차 당황한 얼굴로 공작을 쳐다봤다.

‘아스트라의 성씨를 가진 황비라니.’

그건 공작이 오랫동안 바라고 있던 게 아닌가.

몬테로 백작은 씩씩거리며, 테이블을 탕! 내리쳤다.

“바실레 님을 황비로 추천하겠습니다!”

‘뭐라고?’

‘뭐?!’

드뷔시 자작을 비롯한 가신들이 모두 입을 떡 벌렸다.

공작이 과거에 큰딸인 바실레를 황비로 밀었던 적은 있다.

하지만…….

‘실패해서 바실레 님은 결혼하시지 않았는가!’

디오네라라는 딸까지 출산했다.

드뷔시 자작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가능한 일이오……?”

“13대 황제인 리무스 대제께서 이혼 경력이 있는 페르시난타 님을 황비로 들이셨지요. 바실레 님께서 이혼을 하신다면 추천서를 올릴 수 있습니다.”

황제를 대신하는 사자(使者)인 몬테로 백작의 입에서 나온 소리다.

황비로 들이겠다는 확답이나 마찬가지였다.

‘아스트라의 직계 중에 황비가 나온다면…….’

현재 황궁은 오셀리아 황비가 장악하고 있다.

몸이 아픈 황후가 뒷방에 있기 때문이었다.

‘오셀리아 황비의 가문은 멸문한 것이나 마찬가지지.’

아스트라를 친정으로 둔 바실레라면 오셀리아 황비를 손쉽게 무너뜨릴 수 있을 터.

‘거기다 오셀리아 황비에게도 진 황후라면 끌어 내리는 건 일도 아니다.’

즉, 황후 자리도 꿈이 아니란 소리였다.

‘리무스 대제 때도 이혼 경력이 있는 페르시난타가 황후가 되지 않았던가!’

이대로 바실레가 아이만 낳는다면 황궁을 장악할 수도 있었다.

“고, 공작님…….”

“공작님!”

모두가 공작의 말을 기다렸다.

몬테로 백작과 황궁인들, 그리고 아스트라의 가신들까지 긴장한 얼굴로 공작을 쳐다봤다.

‘그래. 이 정도라면 합의를 해줄 만도 하다!’

‘어차피 문서화하여 규약 하지 않았을 뿐, 용을 움직일 땐 황궁의 눈치를 보지 않았던가!’

‘이 엄청난 것들을 모두 받는다면 우리 쪽에선 손해 볼 일이 없어!’

골몰하는 표정으로 테이블을 주시하던 공작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오늘은’이 아니라 ‘오늘부터’라고?”

콘라드가 전해온 에릴로트의 말은 이랬다.

“오늘부터 저는 식사를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은 오늘만 식사를 안 한다는 게 아니라 오늘부터 쭉 안 한다는 얘기가 아닌가.’

똑똑한 그 아이가 말실수를 했을 리도 없다.

공작이 굳은 얼굴로 내뱉은 말에 회장에 있던 모두가 눈을 크게 떴다.

“……?”

“……?”

“……?”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오늘은’이나, ‘오늘부터’같은 말은 한 적이 없는데?

의아한 표정으로 눈을 끔뻑이던 몬테로 백작이 “핫!” 하고 숨을 들이켰다.

“아아, 오늘은 이런 말로 아스트라를 현혹하고 내일 가선 모르쇠로 나올까 봐 염려하십니까?”

“…….”

“그것이 염려되신다면 폐하께 서약서를 받아오지요!”

“…….”

“하하, 아스트라와 황실의 혼인 동맹이라. 대륙이 들썩이겠군요.”

“……왜.”

“예? 그야 엄청난 세력의 동맹이니, 타국까지도 겁을 먹고─”

“왜 식사를 하지 않겠다는 거지?”

“예?”

‘아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가.’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던 와중에, 콘라드와 드뷔시 자작만이 눈치챘다.

‘에릴로트 아가씨의 단식투쟁 이야기로구나.’

‘하여간에 저 양반은 늘 감정엔 한 템포 늦다니까.’

드뷔시 자작이 픽 웃으며 말했다.

“뭔가 심사가 단단히 꼬이신 게 아니겠습니까?”

“왜! 내가 뭘 어쨌다고!”

“글쎄요……. 하지만 아가씨의 고집은 보통이 아니니, 정말로 굶어 죽을 때까지 식사를 안 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공작의 머릿속에 앙상하게 마른 에릴로트가 떠올랐다.

꼬르륵. 울어대는 배를 끌어안고 원망 어린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에릴로트.

“배가 고파요, 할아버지…….”

‘한데 어찌 안 먹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게야.’

“할아버지 미워서.”

미워서.

미워요.

미워.

할아버지, 미워~!

공작이 쾅! 테이블을 내리치며 일어났다.

“회의는 이만 파하지.”

“예? 이 조건도 마음에 안 드십니까? 공작님. 공작님!”

공작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나섰다.

황궁인들은 사색이 되어서 서로를 돌아봤다.

“오늘부터, 오늘도? 이게 대체 무슨 소립니까.”

“아, 암호인가.”

“고대 성경의 한 구절인 게 아닐까요. 뭔가 마음에 언짢은 구석이 있어서…….”

“굶어 죽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립니까?”

“이, 일단 암호 해석가를 부를까요?!”

황궁인들은 매우 당황했고, 가신들은 황당한 얼굴이었다.

그 틈에서 드뷔시 자작만이…….

“으학학학학학학학! 으학! 학학학!”

─미친 듯이 웃었다.

저 무서운 노인에게도 드디어 두려운 게 생긴 모양이었다.

‘아, 재밌구나. 재밌어!’

* * *

대교육실.

3세들은 오늘도 마독 검사를 받기 위해 모였다.

나는 자리에 얌전히 앉아 있었는데, 디오네라와 리앙틴이 그런 내 옆에 찰싹 달라붙어 물었다.

“진짜 안 먹을 거야? 점심도 걸렀다면서.”

저녁까지 먹지 않겠다고 하는 날 보고 디오네라는 몹시 걱정했다.

가호가 <괴력>인 만큼, 디오네라는 먹는 것을 엄청나게 좋아했다.

저 애로서는 한 끼도 아니고, 두 끼를 굶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일 것이다.

리앙틴도 턱을 괴고는 말했다.

“간식이라도 먹지 그래?”

“아니야.”

“네가 좋아하는 클로티드 스콘인데?”

“괜찮아.”

사실 배가 좀 고프긴 하다.

그래도 난 특별히 식욕이 엄청나게 강한 타입은 아니라서 버틸 만했다.

‘정 배가 고프면 방에 돌아가서 몰래 간식 정도는 먹어야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대교육실 안으로 본관의 고용인들이 주르륵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들 손엔 은쟁반이며, 식사 웨건의 손잡이가 들려 있었다.

책을 읽던 로레이나가 그들을 힐끗 쳐다봤다.

“뭐야, 그건.”

“3세 여러분들을 위해 본성에서 보내셨습니다.”

대교육실에 음식이 착착 차려지기 시작했다.

“와! 초콜릿 퐁듀!”

“이게 무슨 일이래. 늘 가호에 좋다는 풀떼기만 주더니만.”

마독 때문에 최근엔 해독초 요리만 먹어왔던 아이들은 잔뜩 흥분했다.

초콜릿.

치즈로 만든 핑거푸드.

과일.

여러 가지 샌드위치와 스프류.

모두 먹기 편해서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이었다.

디오네라도 활짝 웃으며 음식에 달려갔다.

“에릴로트, 정말 안 먹어?”

“응.”

“진짜 맛있는데! 조부님 전담 요리사가 만들었나 봐. 초콜릿이 벨벳 같아……!”

나는 고개를 젓고 일어났다.

‘괜히 여기 있으면 배가 고파질 것 같으니까 병동에 가야겠다.’

난 싱글벙글하며 오랜만에 맛있는 간식에 푹 빠진 애들을 뒤로하고서 대교육실을 빠져나왔다.

세 오라버니들은 아직 병동에 입원해 있었다.

발자크는 복부가 완전히 뜯겨나갈 뻔했고, 요슈아와 리시먼드는 마독을 밟아서 격리 중이었다.

최근엔 계속 날씨가 우울하더니만, 오랜만에 볕이 좋았다.

늪요정들이 소매 속에서 튀어나와 내 머리 위를 날아다녔다.

난 킥킥 웃었다.

“너희는 햇볕을 좋아하지 참.”

키링, 키링.

아이들이 날아다닐 때마다 유리구슬이 부딪치는 맑은 소리가 난다.

“그래. 병동에 가기 전에 잠깐 산책하게 해줄게.”

나는 웃으며 나무 그늘에 자리 잡았다.

‘애들이 노는 동안 난 꽃이라도 딸까.’

기왕 문병을 하러 가는 것이니까.

오라버니들에게 줘야지.

그렇게 쪼그려 걸어가며 들꽃을 따고 있던 때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빈센트.’

나는 볕처럼 따뜻하게 미소 짓는 그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말했다.

“혹시…… 제가 싫으십니까?”

* * *

그 시각, 공작의 집무실.

공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에릴로트만 안 먹었다고?”

“예……. 그렇습니다.”

공작의 머릿속에 쫄쫄 굶어서 웅크리고 있는 손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가뜩이나 뼈만 있는 게 이러다 죽는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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