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알렉시스였다.
그가 나를 등 뒤로 가리며 말하자, 빈센트는 미간을 좁혔다.
“자주 대화 중에 끼어드는군.”
“자주 불편한 자리를 만드십니다.”
“우리 대화는 영애에게 허락을 받았는데.”
“선약은 저이니, 물러나시죠.”
허공에서 번쩍번쩍 스파크가 튀기는 것 같았다.
빈센트가 내게 물었다.
“선약이십니까?”
“네? 아…….”
그러자 알렉시스가 날 바라봤다.
알렉시스는 빈센트보다 내게 우선순위인 사람이었다.
동료이자, 친구.
빈센트 때문에 알렉시스를 망신 줄 수야 없지.
“맞아요, 선약.”
내가 알렉시스를 쳐다보며 말하니, 빈센트는 한숨을 내쉬며 물러났다.
“그럼 다음 기회에.”
그가 고개를 숙여서 나도 가볍게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인사했다.
그리고 빈센트가 떠난 후에 물었다.
“뭐야?”
그러자 알렉시스가 못마땅한 눈으로 날 쳐다봤다.
“오늘은 여기 있어봤자 공작님은 안 오신다.”
“왜?!”
“황궁에서 이시론 공작이 대사로 파견된다고 맞이할 준비 중.”
현 거래의 총책임자인 몬테로 백작이 두 손을 다 들었나 보다.
그보다 한 수 높은 이시론 공작이 온다는 걸 보면.
‘이시론 공작이면 친황제파의 거두지.’
슬슬 황궁과의 거래에 속도가 붙으려는 모양이다.
난 고개를 끄덕이다가 알렉시스를 쳐다봤다.
“그런데 넌 그걸 어떻게 알았어?”
“장원 경계벽으로 아스트라 공작군이 마중 겸 호위를 나간다고, 군사 선별 중이라.”
“아아.”
“들어가. 바람이 차다.”
“넌?”
“동계 훈련 준비.”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동계 훈련 준비는 종기사들이나 하는 것이다.
‘이것들이 용병 출신이라고 무시하는구나.’
나는 아무렇지 않게 돌아가려는 알렉시스를 붙잡았다.
“같이 가.”
“……뭐?”
“병영으로 가는 거야? 이쪽이네.”
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앞서 걷는 동안 등 뒤로 알렉시스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 * *
병영.
“아, 아가씨!”
병사 훈련을 담당하는 베글록 장군은 나를 보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모여있던 다른 장수들도 허둥지둥 일어나 나를 맞이했다.
장수들 뒤에 있던 이그리츠 군의 단장 칼리가 날 보고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오랜만이에요, 베글록 장군. 지난 하계 훈련 참관 수업 때 보고 처음이던가요?”
“예, 예, 그렇습니다. 아가씨!”
병사들에겐 불 뿜는 용 같은 베글록 장군이 내 앞에선 길이 잘든 강아지 같았다.
그도 그럴게, 일단 나는 할아버지에게 가장 귀여움받는 손주였다.
거기다 3세들 가운데 서열 1위.
우리 아빠는 장남이 아닌데도 백작위를 받은, 이른바 ‘공작의 후계에 가장 가까운 남자’니까.
난 베글록 장군에게 생긋 웃어줬다.
“제 군사들이 훈련에 참여하게 되어서 일이 더 많아졌겠군요.”
“뭐……. 하하!”
아니라곤 안 한다.
베글록 장군은 “아, 그것보다…….” 하며 얼른 내게 자리를 내주었다.
“차, 차를 내와라! 에잇, 에릴로트 아가씨께 그따위 차를 내줄 테냐! 그 왜 있잖아. 포노프(최상등 홍차 브랜드) 같은 거!”
“아, 차는 됐어요. 내 군사들을 보러 온 거니까.”
“예?”
나는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고 베글록 장군을 쳐다봤다.
‘내가 내 군사들을 주시하고 있다는 뜻이야.’
내가 내 군사들이 어떤 취급을 당하고 있는지 지켜본다는 의미고.
눈치 빠른 베글록 장군의 어깨가 움찔 솟았다.
“저, 그, 혹시 뭔가 불편하셨던 것인지…….”
“설마요! 베글록 장군은 사려 깊은 사람이니 염려조차 하지 않았어요.”
“예! 제가 또 이그리츠 용병단을 각별하게 챙기고 있─”
“이그리츠 군.”
“……네?”
“용병단이 아니고, 이그리츠 군. 데이몬드 관할군에 소속된 이그리츠 군이요.”
누가 내 군을 아직까지 용병단 취급하고 있어?
내가 웃는 표정으로 쭉 둘러보자, 장수들이 움찔했다.
그중에서 유난히 얼굴이 새파란 남자가 있었다.
누가 내 군을 홀대했는지 알겠다.
‘실뱅 숙부의 처남이구나.’
실뱅 숙부의 아내인 론다 숙모의 남동생.
나는 실뱅 숙부의 처남에게 다가가면서 베글록 장군에게 말했다.
“지난 하계 훈련에선 종기사들이 훈련 준비를 하던데, 이번에도 그런가요?”
“예? 아, 예! 물론 그렇습니다.”
“네. 그럴 거예요. 훈련 준비는 종기사들이.”
실뱅 숙부 처남의 팔 갑주에 손을 올리자, 그가 흠칫했다.
“훈련 준비는, 종기사들이, 하는 거죠?”
실뱅 숙부의 처남은 희게 질린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예, 그, 그렇습니다.”
알아들은 모양이다.
난 웃으며 손을 뗐다.
그리고 산뜻하게 베글록 장군을 향해 돌아섰다.
“이그리츠의 군사들과 대화를 나눠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고마워요. 그럼…….”
이그리츠 군에 소속된 사내들을 쳐다봤다.
그들은 뿌듯한 얼굴로 실실 웃고 있었다.
알렉시스도 픽, 실소를 흘렸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그리츠의 군사들이 날 쫓아 나왔다.
가장 호전적인 성격의 켄달이 킬킬 웃음을 터뜨렸다.
“꼴 좋군.”
“켄달.”
이그리츠 군의 참모장인 할러드가 인상을 찌푸리자, 켄달은 어깨를 으쓱했다.
“저놈들이 용병 출신이라고 얼마나 무시했어? 우리 애들(소년병)은 거의 훈련에서 배제된 거나 마찬가지였고.”
“칼리 단장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어. 그건 군사들의 일이니, 주인의 귀에 들어가게 하지 말라고.”
“하여간에 뚝심은…….”
켄달이 혀를 차서, 난 픽 웃었다.
“칼리 단장의 그런 점을 좋아하잖아? 정정당당한 점.”
“뭐, 그렇긴 합니다.”
“하지만 난 칼리 단장처럼 정정당당하지 않아. 굳이 따지자면 비열한 편이지.”
“……예?”
나는 통신석을 들었다.
그리고 최근엔 데이몬드 관할령의 자금까지도 관리하는 미켈란에게 연락했다.
[예, 아가씨.]
“이그리츠 군의 장비를 바꿔야겠어. 최대한 고급품으로.”
그러자 켄달과 할러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스트라에서 지원되는 장비도 훌륭합니다. 황궁의 것보다 좋고……!”
할러드가 날 설득하려 했지만, 난 손을 가볍게 들어서 그의 말을 막았다.
“누가 봐도 내가 이그리츠 군에 신경 쓰고 있다는 걸 보였으면 좋겠는데.”
통신석에서 미켈란이 쿡쿡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스드 대장간과 연이 있습니다. 미스드제(製)는 어떻습니까?]
“아주 좋지.”
[준비하겠습니다.]
“군마도. 아, 파앙테 후작가에 연락해봐. 최고의 혈통마들을 보유하고 있으니까. 내가 구매하고 싶다고 하면 내줄 거야.”
[기한은 언제까지면 되겠습니까?]
“일단 공작성에 들어온 이그리츠 군사들에게 최대한 빨리 보급하고, 남은 군사들은 차차. 보급은 최대 석 달 내로 끝냈으면 좋겠어.”
[예.]
“응.”
통신을 종료하자, 켄달과 할러드가 입을 떡 벌렸다.
“미, 미스드제 무기에, 파앙테 후작가의 군마요?!”
미스드의 무기는 황군의 사령관급이나 가지고 있다.
참모 할러드는 매우 당황했다.
“그 정도까지는 필요치 않습니다!”
“알아. 장인은 도구를 가리지 않고, 이그리츠의 군사들은 무기 따위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
“한데 어째서……!”
“너희는 보이는 게 중요한 세계에 들어왔으니까.”
숙부들이 사치에 눈 벌건 건 다 이유가 있다.
이곳은 얼마나 돈이 있고, 얼마만큼의 권력이 있는지가 가장 중요한 곳이니까.
“난 셀레네 언니의 <모성애>같은 신성계 가호로 너희를 강하게 만들어주진 못해. 하지만 감히 너희를 무시하지 않게 만들어줄 순 있어.”
“아가씨…….”
“…….”
할러드와 켄달이 떨리는 눈으로 날 쳐다봤다.
알렉시스의 시선 또한 짙어졌다.
허리춤에 양손을 올린 난 말했다.
“누우가 감히 내 군사들을 무시해!”
할러드와 켄달이 가슴에 손을 올린 채로 내게 무릎을 굽혔다.
“이 아스트라에서 최고의 군을 가진 자가 누구인지, 이번 동계 훈련으로 증명하겠습니다.”
“좋아.”
“예.”
“아, 칼리에겐 말하지 말고.”
그래 봬도 약간 수전노인 구석이 있어서, 장비에 얼마나 들었는지 알면 기절할 거다.
켄달과 할러드가 픽 웃었다.
“그리고 알렉시스는 당분간 내 곁에 붙여둘게. 이 녀석, 남이 챙겨주지 않으면 쉴 줄을 모르니까.”
“제발 부탁드립니다. 최근에 잠은 자는지 모르겠어요.”
켄달이 그렇게 말하자, 알렉시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난 킥킥 웃으며 알렉시스에게 말했다.
“가자.”
“……그래.”
켄달과 할러드에게 인사하고, 나는 알렉시스와 함께 병영을 빠져나왔다.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저녁 식사 시간이라 우리가 지나는 곳엔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나는 말없이 내 옆에서 걷는 알렉시스에게 말했다.
“화났어?”
“미스드제 무기를 보급해주시겠다는 주인에게 화가 날 게 뭐야.”
“그거 말고. 어제 머리핀.”
알렉시스가 나를 힐끗 쳐다봤다.
“그래.”
“화가 났으면서 왜 빈센트 에드로페는 막아줬대.”
“넌 그 녀석과 얘기만 하면 기분이 저조해지니까.”
“…….”
난 걸음을 우뚝 멈추고 알렉시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내가?”
알렉시스도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봤다.
노을로 붉게 물든 세상 위로 그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마치 키가 훌쩍 큰 성인처럼.
“상처받을까 봐 겁을 잔뜩 먹은 애처럼.”
“아니야.”
“그래.”
“아니라니까!”
“그래. 네가 아니라면 아니야.”
“…….”
나는 항상 내가 알렉시스보다 훨씬 크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그가 훨씬 더 커 보였다.
그게 이상하게…….
‘이상하게…….’
난 그에게 얼른 달려가서 말했다.
“굳이 상처받고 싶은 사람은 없잖아? 피할 수 있으면 피해야지.”
알렉시스가 날 빤히 쳐다봤다.
그러곤 한숨을 푹 내쉬더니, 이내…….
쿵.
내 머리에 이마를 박았다.
“안 물어봤어.”
“이씨.”
“네 감정이 궁금하다는 뜻이 아니라, 난 네가 그렇다면 그냥 그런 거니까.”
“…….”
그가 허리를 펴고 날 보며 픽 웃었다.
“그런데 나는 겁내지 마.”
“…….”
“난 널 지키는 존재잖아.”
그러며 멀찍이 가버린다.
난 이마를 매만지며 알렉시스를 쳐다봤다.
‘참 이상해.’
사춘기라서일까.
덜 영근 나이와 영글어진 감정이 교차하는 시기.
아이와 성인의 교차점.
마냥 애처럼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엔 깜짝 놀랄 만큼 어른스러워 보인다.
‘그랬나?’
내가 겁을 먹었나?
또 같은 상황이 반복될까 봐.
난 멍하니 노을을 돌아봤다.
‘이제 저물어버린 감정인데.’
왜 그렇게 그를 경계하고, 다른 사람을 경계했을까.
빈센트는 내게 이제 의미가 없는 사람이다.
의미 없는 사람이 주는 상처 따위에 겁낼 이유가 있나.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겁먹고 주저할 이유가 있어?
‘인정. 겁쟁이였네.’
멀리서 알렉시스가 말했다.
“안 와?”
“가!”
난 얼른 그를 쫓아 뛰어갔다.
그러니까 이날이 처음이었다.
알렉시스가 얼마나 자랐는지 알게 된 건.
그리고 내 안의 어린애를 마주하게 된 것은.
* * *
저녁.
방 안엔 훈기가 감돌았다.
나는 시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신성계 마법은 정말 싫다니까.’
끙끙거리며 문제를 풀다가 물잔을 잡았다.
한참 집중하고 있느라 몰랐는데, 물이 떨어져 있었다.
난 물잔을 들고서 내 잠자리를 준비하고 있는 하녀들에게 말했다.
“물을 좀 가져다줄래?”
“네, 아가씨.”
하녀가 얼른 내게서 빈 물잔을 가져갔다.
그런데 이상했다.
“하녀들이 바뀌었네?”
말하자, 방을 정리하던 하녀들이 “아!” 하면서 내게 고개를 숙였다.
세 명이었는데, 다들 내 또래의 어린 하녀들이었다.
“황궁인들의 접대 때문에 선임 하녀들이 본관으로 빠지고, 저희로 대체되었습니다.”
“그렇구나. 잘 부탁해.”
“네, 넷!”
하녀들이 저마다 물잔이나, 쟁반, 시트를 끌어안고 수줍은 표정을 지었다.
나는 다시 책에 집중했다.
“나, 이런 인사는 처음 들어봐. 기분 되게 좋다.”
“그러게.”
아직 어린 하녀들이라서 성인 하녀들처럼 주인의 앞에선 입을 조심해야 한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었다.
‘주의를 줄까.’
잠깐 생각하다가 이내 어깨를 으쓱하고, 펜을 고쳐 잡았다.
‘내 나이대의 애들로 보이는데 일하는 것만으로도 장하지.’
주인에게 주의를 받으면 의기소침해질 거다.
선임 하인들에게 주의 듣는 게 낫지.
문제를 열심히 풀고 있는데, 하녀들이 속닥속닥 대화를 나눴다.
“그런데 그 머리핀, 혼나지 않았어?”
“왜?”
“눈에 띄는 액세서리를 하는 건 금지잖아.”
“그 규칙은 이해를 할 수가 없다니까. 왜 하인은 꾸미면 안 되는 거야?”
“주인님들이 보시기에…….”
“아하, 너 질투하는구나. 내가 이걸 밀란 님께 선물 받아서?”
“어? 아니, 난…….”
머리핀?
나는 머리핀을 하고 있는 하녀를 쳐다봤다.
내가 어제 알렉시스에게 주었던 것과 비슷한 머리핀을 하고 있는…… 갈색 머리의 하녀.
‘안 줬구나.’
그런데 밀란이라고?
갈색머리의 하녀가 오만한 표정으로 다른 하녀를 쳐다봤다.
“직계 3세인 밀란님께서 주신 거야. 누가 뭐라고 하겠어?”
“거기 잠깐.”
내 말에 하녀들이 흠칫, 날 쳐다봤다.
“밀란 오라버니는 옥사에 있는 게 아니니?”
“아, 그게…….”
하녀들이 어쩔 줄을 모르고 날 쳐다봤다.
‘대체 뭐지.’
내가 모르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