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아일라가 말하는 그 분.
그 분이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
‘헤르난은 아니야.’
헤르난은 이미 후계가 될 자격을 잃었다.
옥사에서 살아나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헤르난은 한참 어린 조카의 말에 울컥하여 남들 다 보는 곳에서 저주하려 한 바보.
그런 사람이 아일라를 저 지경까지 홀려 놓을 순 없었을 것이다.
‘헤르난 위에 뭔가가 있어.’
아일라가 달리는 복도에선 온갖 비명이 들렸다.
“꺄아악! 모, 몬스터!”
“겨, 경비병! 경비병! 여기!”
나는 황급히 소리쳤다.
“아일라에게 닿지 마! 뭐든 분해해버리고 있어!”
“예? 아일라 아가씨라고요?”
병사들이 주춤하는 사이, 아일라가 점점 멀어졌다.
이제 아일라는 조금도 사람의 모습으로 보이지 않았다.
완전히 몬스터의 모습이나 마찬가지였다.
온몸에 가시가 돋아나 있고, 꼬리가 났으며, 네 발로 뛰고 있었으니까.
달리는 속도도 짐승처럼 빠르다.
‘실험으로 저렇게 된 거야? 대체 뭐지?’
아일라가 완전히 짐승화 되었다면, 성을 나가려고 할 때 결계에 막힐 것이다.
아스트라의 결계는 억지로 깨뜨리려고 하면, 공격하는 자를 태워죽인다.
‘아일라가 죽으면 안 돼.’
아직 들어야 할 게 많단 말이야……!
난 황급히 주머니를 뒤져서 통신석을 잡았다.
성내에 있는 이그리츠 군사에게 연락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윽.’
나는 쇄골께를 쥔 채로 멈추어 섰다.
이건 그거다.
여주인공들이 기절하기 전에 늘 오는 그것.
나도 세 살 때 저주가 풀리며 겪어봤던 그것……!
“에릴로트?”
한지혁이 흠칫, 멈춰서자 알렉시스가 황급히 날 돌아봤다.
나는 얼른 손을 훠이훠이 흔들었다.
“너희는…… 저거…… 잡아!”
“널 두고 어떻게……!”
“─같은 소리…… 하네…….”
“어?”
한지혁이 당황해서 움찔했다.
“나…… 윽, 이 전개 알아.”
“대체 뭐라는 거야?”
“이러고 쓰러져서…… 며칠 뒤에 눈 뜨고…… 그러는 동안 적들 다 도망치고…… 주인공은 과거를 보고…… 흑화하는…… 그 전개.”
소설 내용을 줄줄 읊자, 한지혁은 흐린 눈이 되었다.
“넌 이 지경이 되어서도.”
“빨리 잡아!! 저거…… 잡아서 다 알아놔……!”
“넌!”
“난…… 지금 기절한다…….”
갔다 올게.
말하자, 한지혁이 기가 막힌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곧 “씨…….” 하고 이를 악물더니 알렉시스에게 말했다.
“잡으시랍니다!”
“……빌어먹을.”
알렉시스가 괴물이 된 아일라를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나는 중심이 무너지더니, 이윽고 암전되었다.
* * *
얼마쯤 지났을까.
의식은 돌아왔지만, 난 눈을 뜨지 않았다.
‘아, 이거 너무 익숙한 느낌이야.’
눈을 뜨면 또 모르는 여자가 등장해서 ‘너를 기다렸단다’ 같은 의미심장한 말을 할 것 같은 예감이 강하게 온다.
‘눈 뜨면 정신세계 이벤트 시작하니까, 그 전에 머릿속으로 물어볼 말들을 정리해놔야…….’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나를 툭툭 건드는 느낌이 들었다.
[일어나라.]
‘일단 누구냐고 물어보고, 중요한 말을 할 거면 정신세계 이벤트가 끝나기 전에 아슬아슬하게 하지 말라고 한 뒤에…….’
[좋게 말할 때 일어나라.]
‘그 분이라는 자의 정체, 그다음에 엄마의 문양이랑 또…….’
[일어낫─!!]
하여간에 예민하다.
나는 슬그머니 실눈을 떴다.
의식을 잃었던 세 살 때 보았던 그 여자가 날 한심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살다 살다 너 같은 령(靈)은 처음 본다.]
“살아 계세요? 아, 이거 질문 아니에요. 혹시 세 가지 질문에 답만 하실 거라면 빼주세요.”
[…….]
여자는 허리를 잡은 채 고개를 숙이더니, 곧 한숨을 푹 내쉬었다.
“기다려봐요. 지금 중요한 질문들을 꼽고 있으니까─”
[그만해! 그러지 않아도 알려줄 생각이니까!]
나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여자를 쳐다봤다.
그러자 여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아, 맙소사. 내가 왜 하필 이런 애의 수호성이 되어서…….]
“수호성? 이거 성좌물이에요?!”
왜, 판타지 소설에서 흔하지 않은가.
성좌물!
여자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제 너도 깨닫지 않았느냐. 이 세계는 소설이 아니라, 네 첫 번째 삶을 과거로 돌린 곳이라는 걸.]
“혹시 제 전생이 그 쪽에게 유난히 사랑받던 운명의 아이였나요?”
곤란하다.
그건 ‘응애는 악마를 키운다’의 표절이 아닌가!
여자가 뭐 이런 게 다 있냐는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그러곤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쥐었다.
[아니야.]
한 자, 한 자 힘을 주어 말하는 게 참고 있는 것 같아 보여서 나는 슬쩍 눈치를 보았다.
“그럼 그쪽은…….”
[너는 가호가 어디서 왔다고 생각하느냐.]
“네?”
그건……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여자는 [일어나라] 하고 말했다.
그전까지 바닥에 앉아있었는데, 여자가 말하자마자 몸이 붕 떠올랐다.
내가 탁, 하고 땅에 발을 디디자 여자는 걷기 시작했다.
[좀 걷자꾸나.]
“……네.”
여자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하자, 주변의 풍경이 바뀌었다.
온통 암흑이던 공간에 빛이 스며들며, 주변에 꽃과 풀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은 완벽하게 봄날의 들판처럼 변했다.
곳곳에 르네상스 양식의 신전들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태초에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
‘음, 신화부터 시작인가. 다들 그러긴 하더라.’
[좀!]
“생각하는 건 어쩔 수 없잖아요……. 무의식적으로 떠오르는 건데.”
‘생각을 읽지 말든가.’
여자는 나를 힐끗 쳐다보곤 후우, 깊은숨을 내쉬었다.
[신은 피조물을 각별하게 사랑하여 당신의 권능을 나누어주셨지.]
“…….”
[무한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목숨을 유한하게 만들지 아니하셨으며─]
‘나이 상관없이 무한하게 살 수 있었다는 말이구나.’
[초목과 불과 지혜를 나누어주셨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가호’를 내리셨다.]
“…….”
[땅을 가르는 가호, 싹을 틔우는 가호, 비를 내리는 가호, 개인마다 각기 다른 가호였다.]
그건 지금의 귀족들이 가진 ‘가호’와 같다.
[하지만 오만한 인간은 수천 년, 혹은 수만 년일지 모르는 세월이 흐르며 의문을 품는다.]
“의문이요?”
[신과 같은 능력을 가진 우리가 어찌하여…… 신의 범주에는 들지 못하는가.]
“…….”
[하여 그들은 생명을 창조하기에 이른다. 신께서 주신 선물과 수만 년이 흐르는 시간 동안 그들이 발전시킨 기술의 힘으로.]
“설마…….”
여자는 픽, 웃었다.
[하여간에 똑똑한 녀석.]
“말씀해주세요.”
[그래. 생명을 창조한 자들을 너희는 ‘고대인’이라 부르지. 그리고 고대인에 의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생명이 지금의 ‘사람’이다.]
“……!”
여자는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고대인들의 오만은 도를 넘었지.]
“…….”
[인간을 노예처럼 부렸어. 그 중 각별히 똑똑한 자들에겐 자신의 가호를 조금 나누어주었단다.]
“…….”
[너희 세계의 말로 한다면, 노예들의 관리자 같은 역할로 쓰인 것이야.]
그럼 지금의 인간이 고대인들과 같은 힘을 지니지 않은 것이 이해가 간다.
[만들어진 생명이라는 이유로 고대인들은 아무렇지 않게 창조한 자들을 죽이고, 핍박했어.]
“…….”
[부모의 앞에서 자식을, 아우의 앞에서 형을 죽이고 창조한 자들의 피를 포도주 삼아 마셨단다.]
“…….”
[신께선 크게 분노하셨지. 하여 일어난 것이 ‘폭풍’이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고대 도시를 전부 파괴했다고 알려지는 그 ‘폭풍’.
‘현대의 인간보다 우월한 기술과 지식을 가진 그들이 어째서 폭풍에 멸망했나 했더니…….’
여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변에 폭풍이 몰아쳤다.
엄청나게 강한 바람.
정말 신의 분노를 떠올리게 만드는 풍랑.
그러나 신기한 것은 나와 여자는 마치 홀로그램 영상 속에 있는 것처럼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여자는 폭풍을 무감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신은 폭풍 이전에 창조된 자들에게 안식의 땅을 내렸다.]
“안식의 땅……?”
[폭풍에 위협받지 아니하고, 너희가 창조된 인간이 아닌 그저 생명으로서 살 수 있는 시작의 터전이다.]
“…….”
[100일간의 지독한 폭풍이 세계를 덮쳤다. 고대인들은 그제야 반성하고, 신께 애원했으나…… 신의 철퇴는 멈추는 법이 없었다.]
“…….”
[고대인의 문명을 멸망시킨 100일이 지난 후, 드디어 해가 떴을 때 ‘창조된 인간의 세상’이 도래한 것이다.]
주변에서 폭풍이 가라앉았다.
하늘을 온통 가리고 있던 먹구름이 걷혔다.
그러자, 거대한 세계수 밑에서 웅크리고 있던 깡마른 자들이 고개를 들었다.
[인간은 뿔뿔이 흩어져, 핍박 없는 삶을 시작했다.]
“…….”
[고대인들에게 지혜와 가호를 나누어 받은 자들은 영리했지. 또 폭풍에 휩쓸리지 않도록 신전을 지었다.]
“…….”
[그것이 너희가 아는 왕조의 시작이다.]
“…….”
[지혜와 가호를 나누어 받은 자들은 ‘귀족’이란 이름으로 주변의 인간들을 지켰고, 신께선 흡족히 여기셨다.]
“…….”
[……너희까지 부패하기 전까진.]
여자가 내 쇄골의 중앙을 쿡 눌렀다.
[너희는 고대인과 같이 부패했다. 생명에 차등을 두고, 저보다 못한 자에겐 거리낌 없이 빼앗으며, 살인과 강도질을 일삼는다.]
“……곧 폭풍이 시작되나요?”
여자는 빙그레 웃었다.
[똑똑하구나, 아이야.]
“그런데 그게 저와 무슨 상관이 있죠?”
내가 알고 싶은 건 왜 ‘그 분’이란 자가 날 저주했는지다.
“수호성에게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전 세계의 멸망 같은 건 크게 관심이 없어요.”
[그래?]
“나 사는 게 제일 중요하니까.”
[흐음.]
“내가 알고 싶은 건, 왜 내가 태어나자마자 저주받았는지예요. 누가 날 노리는지,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요!”
여자는 빙그레 웃었다.
[참으로 솔직한 령이야.]
“세계를 지켜라 같은 꿈 같은 말 말고, 내 현실을 지킬 수 있는 게 중요하다고.”
신에게 부여받은 소명 같은 건 내게 필요 없다.
내가 아이X맨이야, 토X야?
영웅이 되고 싶어서 지금까지 발버둥 친 게 아니란 말이다!
[자, 그럼 다시 물으마. 고대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야 전부 죽은 게 아닌가요?”
[그들은 무한한 삶을 영위하는 존재. 육체가 사라진들, 영혼까지 소멸하진 않았지.]
“그럼…….”
[신께선 반성하는 고대인들에게…… 그래, 네가 말하는 그 ‘소명’을 부여하셨지.]
“…….”
여자의 눈이 일순 매서워졌다.
[너희는 너희가 창조한 자들을 지키라.]
“고대인들이 수호성이 되어 인간을 지키고 있는 거예요?”
[정말이지 영민한 아이야.]
주변의 풍경이 다시 바뀌기 시작했다.
인간의 곁에서 움직이는 영혼의 빛이 보인다.
저 영혼의 빛이 인간을 지키는 고대인인 모양이었다.
[고대인들에게도 힘엔 차이가 있어서, 약한 자들은 그리 강력하게 지키지 못하지만?]
“그럼…… 당신은 누구예요?”
내 수호성이라면, 날 지키는 고대인이란 뜻이다.
‘강력한 자인가.’
여자의 입매가 다정한 호선을 그렸다.
이윽고…….
‘윽!’
여자가 눈부시게 빛이 나기 시작했다.
찌르듯 날카로운 빛에 난 팔로 눈을 가렸다.
그리고 얼마쯤 지나 빛이 가신 뒤, 팔을 천천히 내리자 보인 건,
“……어?”
─눈부시게 빛나는 은발이 허리까지 늘어진 미소년이었다.
나이대는 20대 초반쯤일까.
190센티에 가까운 키.
날렵하게 빠진 화려한 눈매.
오뚝한 콧날.
칼날처럼 날카로운 턱선.
그야말로 신이 직접 빚은 것처럼 아름다운 남자였다.
“드디어 만났구나, 에릴로트.”
이제 머릿속으로 목소리가 직접 전달되지 않는다.
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남자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남자?! 아, 죄송해요.”
삿대질은 무례지.
손가락을 반대 손으로 잡고 내리자, 남자가 쿡쿡 웃었다.
“하여간 재밌다니까. 넌 태어났을 때부터 쭉 재밌었어.”
“……태어났을 때부터 곁에 있었어요?”
그럼 저주당할 때 좀 도와주지!
‘수호성이라면서!’
내가 인상을 찌푸리자, 남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수호성은 인간에게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못해.”
그러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나는 진짜 중요한 걸 다시 물었다.
“그래서 아저씨는 누군데요. 힘이 있는 고대인인가?”
“아……저씨……?”
우뚝 걸음을 멈춘 그가 무서운 눈으로 나를 돌아봤다.
엄청난 충격을 받은 것 같은 표정인데, 몸에서 기묘한 기세가 뿜어져 나와서 진짜 무서웠다.
남자가 정정해줬다.
“세일론 님이라고 불러.”
“……네, 세일론 님. 그렇게 부를…… 네?! 세일론이라고요?!”
나는 엄청나게 놀라서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나는 고대역사서를 읽었다.
세 살때부터 매일 몇 시간 꾸준히.
그래서 저 이름을 알고 있다.
고대인들의 제사장.
즉, 황제와 같은 역할을 가진 세일론……!!
세일론은 어깨를 으쓱했다.
“내 이름은 아는군. 그래, 난 그 어떤 고대인보다 뛰어난 자지.”
오만한 표정이 진짜 부패한 왕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자, 세일론이 다시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난 그냥 잘생긴 거야. 알겠어?”
슥, 눈을 돌렸다.
아빠와 알렉시스를 보고 자라서 그런가, 잘생겼다는 것엔 덤덤해졌다.
그래서 잘생긴 것보단 그냥 부패해 보인달까…….
“잘생긴 거야.”
“……네.”
난 흠칫, 말을 돌렸다.
“그, 그래서 ‘그 분’이란 남자가 왜 저를 저주한 건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