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
그런데 문밖이 소란스러웠다.
쿵, 쿵, 쿵!
다급한 구둣발 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쾅쾅! 거친 노크 소리가 이어졌다.
“안이 소란스럽다던데, 혹시 아가씨가 일어나셨습니까?”
‘한지혁의 목소리다.’
하이디와 베티가 날 쳐다봤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들이 문을 열어줬다.
문 안으로 들어온 한지혁이 날 보고 멈칫했다.
그러곤 숨을 깊게 내쉬며 이마를 쥐었다.
손이 잘게 떨리는 걸 보니까, 저 까칠이가 답지 않게 날 엄청나게 걱정한 모양이었다.
난 픽 웃고, 말했다.
“괜찮아.”
“한 달이나 잠들어 있었는데, 무슨.”
“진짜 괜찮다니까. 엄청나게 멀쩡해.”
자신만만하게 말하고 일어나려 했는데…….
풀썩.
갓 태어난 병아리처럼 러그에 주저앉았다.
“…….”
“…….”
“안 멀쩡한데?”
“……부축 좀 해줄래?”
아픈 곳은 없지만, 근육이 다 빠진 모양이다.
‘하긴 한 달이나 누워있었는데.’
생각해 보니 욕창이 안 생긴 게 다행이다.
‘이럴 땐 권세가문의 아가씨인 게 참 다행이란 말이야.’
하인들이 얼마나 각별히 보살폈겠는가.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며 부스럼을 방지하고 마사지도 부지런히 했겠지.
그러니까 이 정도라도 움직일 수 있었을 거다.
하이디와 베티가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보세요, 아가씨. 재활이 필요해요.”
“네! 이런 몸으로 어떻게 공작성에 가시려고요.”
그 말에 한지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절대 무리입니다. 마차에 앉아있기도 힘드실 텐데, 무슨.”
그렇게 말한 한지혁은 날 번쩍 안아 들고 다시 침대에 잘 눕혔다.
그러곤 하녀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제가 감시할 테니 두 분은 아가씨가 깨어나셨다는 걸 알리십쇼. 주인님과 도련님들께도 전보를 보내시고요.”
“예.”
“네!”
하이디와 베티가 참 잘됐다는 표정으로 홀랑 나가버렸다.
쿵!
그렇게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이 멍청이가─!!”
한지혁의 잔소리 폭격이 시작되었다.
“무슨 정신으로 혼자 아일라를 만나러 갔어! 어?”
“아니, 나한테는 몬스터들이 있었고…… 아일라가 설마 가호를 추출했을 줄은 몰랐고…… 또…….”
“결과적으로 나와 알렉시스가 가지 않았다면 넌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지! 그런데도 입만 살아서 변명하는 거냐?!”
“나도 조심성이 없었다곤 생각하고 있어…….”
내가 한지혁의 잔소리에 대꾸할 말이 없는 날이 오다니.
치욕이다.
하지만 확실히 조심성이 없었다.
‘적의 힘을 너무 얕봤던 거겠지.’
이전까지 모두 내 생각대로 돌아갔기에 방만했던 것이다.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하자.’
이번 삶에서 난 실패를 경험하지 못했다.
지난 삶에서 얻은 지식 덕분이었다.
‘하지만 이제 첫 번째 삶과는 상황이 확실히 변했어.’
좀 더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아로새겼다.
“반성하고 있어.”
“공작성이고, 데이몬드 관할령이고, 황도까지 전부 뒤집혔다고.”
한지혁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해서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아일라는 어떻게 되었어? 공작성 상황은?”
“아일라는 결계를 깨고 탈출했어.”
“결계까지 깨졌다고…….”
아일라가 말한 ‘그 분’은 역시 헤르난이 아니었다.
‘그리미에, 그 개자식이 수괴겠지.’
내가 양지에서 힘을 기르고 있었다면, 그리미에는 음지에서 힘을 기르고 있었던 거다.
‘그것도 상당히 막강한 힘을.’
아일라가 아스트라 공작성의 결계를 깨뜨릴 정도라면 엄청나게 강력한 힘이었다.
“아일라의 부친인 실뱅이 딸을 대신해서 실각했고.”
“실뱅 숙부가?”
“그래. 아스트라 장원의 모든 관직에서 내려왔고, 실뱅 관할령의 예산은 대폭 삭감되었지. 거의 네가 오기 전의 데이몬드 관할령 정도라던데.”
난 눈을 크게 떴다.
그렇다면 10분의 1 수준으로 토막이 난 것이다.
“실뱅이 더 최악이 된 건…….”
“뭔데?”
“대회의의 참석권을 빼앗겼어.”
나는 기함했다.
의결권도 아니고, 참석권을 빼앗겼다니!
‘2세로서 대우하지 않겠다는 뜻이잖아!’
나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딸이 세작이었던 만큼, 그가 수괴일 가능성이 제일 크다고 여겨진 거겠지…….”
“실뱅 관할령의 모두가 지독한 고문을 당해서 만신창이가 되었다더라고.”
“아, 그렇지. 마법사들과 길라르 부녀는?”
“…….”
한지혁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는 것 같진 않았다.
투덜이라도 똑똑한 녀석이니, 내가 의식이 없는 동안 상황을 잘 살피고 있었을 것이다.
저건 차마 말을 못하는 표정이었다.
“한지혁.”
내가 부르자, 한지혁이 그제야 한숨을 내쉬었다.
“에레카는 정신을 놓았어.”
“뭐?”
“마법사들 말로는 인공 고대 마물을 움직였으니 당연한 일이라고 하더라.”
에레카가 붙잡혀 있는데도 그리미에 쪽에서 별다른 조치를 안 하는 게 이상하더라니.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구나.’
조치할 필요가 없으니 모른 체 하고 있던 거다.
“그렇구나……. 다른 사람은?”
“죽었어.”
“……뭐?”
“지하 옥사에 화재가 나서 전부 죽었다고. 아일라가 결계를 깨뜨린 그 밤에.”
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미에, 그 개자식이 지하 옥사에 온 게 그거 때문이었던 거야.’
정보를 알고 있는 자들을 전부 죽이려고.
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엄청나네.”
“그렇지? 아무리 그래도 그 많은 사람을 죽이다니.”
“그것 말고.”
“어?”
“아일라가 괴물이 되어 결계를 깨뜨린 건 예상 밖의 일이었을 거야.”
그 일은 ‘내가 아일라가 밀란을 죽인다는 것을 우연히 알아차렸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그러니 그리미에라고 하더라도 예상하지 못했겠지.
“그런데 예상 밖의 사태에 당황하기는커녕, 그걸 기회로 지하 옥사에 화재를 일으킨 거잖아.”
“……엄청나긴 하네.”
과연 할아버지의 등 뒤에서 이만한 힘을 비축한 놈이다.
‘만만치 않아.’
나는 쯧, 혀를 찼다.
“아, 그럼 밀란은?”
“알렉시스에게 빚 하나 진 거다, 너.”
“무슨 소리야?”
“아일라가 결계를 깨고 달아나자마자 지하 옥사로 가서 밀란 모자를 구해냈어. ……네가 깨어나기 전에 하나만은 지켜야 한다고.”
“…….”
“그 불 속에 뛰어들어서 카나리아 부인과 밀란을 업고 나왔어, 인마.”
한지혁은 아무런 말도 못하는 나를 보고 픽, 웃었다.
그러곤 내 정수리를 손바닥으로 푹, 눌렀다.
“알렉시스는 네 전담 호위였잖아.”
“응.”
“네가 괴물이 된 아일라에게 공격당해서 쓰러진 거로 되었으니, 당연히 호위인 그가 추궁당했지.”
“…….”
“혀를 내두를 정도로 지독한 벌을 받았는데도, 한마디의 변명도 하지 않았어.”
“…….”
“길길이 날뛰는 네 아버지와 오라버니들에게조차.”
“……어째서?”
아빠와 오빠들에겐 말해도 됐을 텐데.
그의 잘못이 아니라고.
모든 건 혼자서 움직인 내 탓이라고, 날 탓해도 되었을 텐데.
한지혁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자신이 널 지키지 못한 것을 용서할 수 없어서.”
“…….”
“꼭 사과해라.”
“……알렉시스를 불러줘.”
“그래.”
한지혁이 서둘러 문을 나섰다.
방 안엔 고요가 내려앉았다.
나는 침대 헤드에 기대서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가슴에 무언가 묵직한 것이 얹어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죄책감이 드는 것도 같고, 슬픈 것 같기도 한 이상한 감정이었다.
그리고 얼마쯤 지났을까.
똑똑, 노크가 들리더니 한지혁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데려왔다.”
“응.”
문이 열리고 알렉시스가 혼자 방으로 들어왔다.
한지혁이 자리를 피해주려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나서 보는 알렉시스는…….
“너, 왜 이렇게 말랐어!”
난 버럭 소리쳤다.
소리치는 것에도 힘이 드는 모양이다. 몸에 쿵, 충격이 와서 난 미간을 좁혔다.
알렉시스가 서둘러 내게 달려왔다.
“괜찮아?”
“…….”
“의사를 부를까?”
“……나 말고, 너.”
“뭐?”
“너 왜 이렇게 말랐냐고.”
“…….”
알렉시스가 날 빤히 쳐다봤다.
투명한 청안에 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내가 비쳤다.
“왜 네가 마음고생을 하느냔 말……! 윽.”
“소리치지 마. 내가 잘못했으니까, 뭐든 다 내 잘못이니까…… 소리치지 마.”
“네가 뭘 잘못했는데…….”
“…….”
“네가 뭘 잘못했는데 변명도 없이 그 벌을 다 받아. 왜 불합리한 일을 당해.”
“…….”
제비꽃 머리핀을 주었던 순간을 기억한다.
사실은 네가 상처받을 것을 난 다 알고 있었다.
알고 있으면서도 했다.
혹시라도 먼 미래에 내가 상처받는 게 싫어서.
‘내가 다칠까 봐 널 다치게 만들었잖아.’
언제나 내 등 뒤를 쫓던 시선을 알고 있다.
짙고, 깊고, 애처로운 그 시선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외면했다.
어리니까, 어려서 뭘 모르니까 병아리가 어미 닭에게 각인되듯 네 ‘처음’인 나를 좋아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네 마음을 하찮게 여겼잖아.’
“네가 날 좋아하는 걸 알아.”
“…….”
알렉시스의 눈이 흔들렸다.
나는 이불을 힘주어 잡고 중얼거렸다.
“알면서도 모른척했어. 비열하게.”
“…….”
“계속, 계속 모르는 척하고 널 이용했어. 날 좋아하면 배신은 못하겠다고 생각하면서 안심도 했어.”
“…….”
“너는 나처럼 못된 애가 왜 좋아?”
너처럼 착한 애가.
그렇게 강하고 눈부신 애가 왜 나 같은 애를 좋아해?
‘그러니까 내가 무섭잖아.’
나는 엉망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울었다.
알렉시스는 내 상처를 돌아보게 하는 애였다.
겨우 덮어놓고 있던 첫 번째 삶과 유혜민으로서의 상처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아무것도 없던 나를.
사랑받고 싶어서 동동거리던 나를.
애정에 목말랐던 나를.
죽어라 애써도 결코 돌아보지 않던 사람들에게 잔뜩 상처받고 주눅 든 나를.
그래서 깨닫게 되고 마는 것이다.
‘아, 나는 아직 첫 번째 삶을 극복하지 못했구나.’
─하고.
알렉시스는 조용히 나를 쳐다봤다.
“넌 잘못되지 않았어.”
“……뭐라고?”
“내가 널 좋아한다고 해서, 네가 보답할 필요는 없어.”
“확실하게 거절하지 않고 여지를 주는 것도 나쁜 짓이래.”
“누가 그러는데.”
“남들이 다 그래!”
“넌 남들이 죽으라고 하면 죽을 거냐?”
알렉시스가 눈살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나는 엉망으로 울다가 멈칫했다.
“……아니?”
“그래. 내가 괜찮다는데 남들이 뭐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놈들만 여지를 주지 말라고 해.”
“…….”
“난 널 기다리는 시간이 좋아. 네가 또 무슨 말로 복장을 터뜨릴까 생각하는 것도 꽤 재밌어.”
“……변태야?”
“그런가 보지.”
그가 짓궂게 웃고 말했다.
“내 마음은 내가 알아서 챙기는 거지, 네가 챙겨줄 필요 없다는 말이야. 근데 너─”
“응.”
“─그 표정 못생겼네. 손수건 줘?”
“이씨.”
나는 벽에 걸린 거울을 쳐다봤다.
오만상을 찌푸리고 울고 있어서, 정말로 못생겨 보인다.
다른 남자애들은 내가 예쁘다고 좋아했는데, 생각해보면 얘는 줄곧 흉한 표정만 봐왔다.
계략을 꾸미느라 흥분한, 능글맞은 표정.
엉망으로 엉엉 우는 표정.
의연하려고 허세 부리는 재수 없는 표정.
알렉시스가 내게 협탁에 놓여있던 손수건을 건넸다.
나는 콧물이 삐죽 나온 코밑을 닦으며 말했다.
“넌 내가 왜 좋아?”
“못생길 때가 좀 재밌어.”
“씨이…….”
그를 흘겨보다가 코를 흥, 풀었다.
그러다가 허리가 아파서 허리를 숙여야 했지만.
“으윽.”
“일어나자마자 우니까 그렇지. 의사를 불러올게.”
그가 재빨리 일어나서 문으로 향했다.
나는 방을 나가려는 그에게 소리쳤다.
“식사해! 또 말라서 오기만 해!”
“하여간 저 잔소리.”
“꼭 먹으란…… 으윽.”
“알겠으니까 소리치지 마라.”
그렇게 알렉시스가 나갔다.
그리고 얼마쯤 후, 쿵쿵쿵! 엄청나게 다급한 발소리가 여럿 들려왔다.
쾅!
문짝이 날아갈 듯 열리고, 등장한 건 아빠와 오빠들이었다.
“…….”
“에릴로트…….”
“하.”
“…….”
2차 눈물의 상봉이었다.
이렇게 되면 깨닫고야 마는 것이다.
이 삶엔 내가 아무리 못된 애라도 괜찮다는 바보 같은 남자애가 있다는 걸.
내 기침 하나에도 가슴이 오그라드는 가족들이 있다는 것도.
나를 위해서 밤을 하얗게 지새우며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그래서 자연스레 알게 된다.
나는 내 불운을 훌륭하게 바꿔왔고, 더 이상 그 어떤 것에도 겁낼 필요가 없었다.
세 번째 삶에서 10년이 지나고, 드디어 묵은 상처가 아물었다.
* * *
재활은 2주가 넘게 걸렸다.
고작 한 달 누워있었던 것뿐인데, 근육이 돌아오기까지 그렇게나 오랜 시간을 소모해야 했다.
‘심지어 마법으로 보조받기도 했는데…….’
내가 공작성에 들어간 건, 깨어나고 나서 딱 17일이 지난 날이었다.
“에릴로트!”
“으으, 에릴로트…….”
내가 왔다는 소식을 들은 리앙틴과 디오네라가 뛰어나왔다.
디오네라는 날 보자마자 펑펑 울면서 무언가를 한 아름 안겨줬다.
“윽! 이게 다 뭐야?”
“근육보조제랑 영양제. 이건 눈에 좋고, 이건 허리에 좋고, 또……!”
“괜찮아.”
“아냐, 넌 엄청 약한 것 같아. 이렇게 의식을 잃은 게 몇 번이나 되잖아.”
3살 때 한 번, 올 해 한 번뿐인데?
하지만 디오네라는 날 바람만 불어도 날아가는 약골처럼 바라봤다.
“넌 약해…… 엄청 약해…….”
“진짜 괜찮거든?”
리앙틴까지 옆에서 거들기 시작했다.
“줄 때 받아. 마탑에서 출시하기도 전에 디오네라가 훔쳐온 거니까.”
“이런 걸 출시해?”
“길라르 사건이 있은 후로 마탑을 엄청나게 뒤졌거든. 그리고 알았지. 굉장한 마법을 개발해놓고, 본성엔 보고 안한 게 많다는 걸.”
“그렇구나.”
그런 얘기들을 하고 있었을 때였다.
“에릴로트.”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는 소름이 끼치는 그 목소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