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한순간에 머릿속이 차가워졌다.
하지만 고개를 돌렸을 땐, 언제나처럼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세요, 그리미에 백부님.”
그리미에는 걱정 어린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래. 몸 상태는 어떠니.”
“염려해주신 덕에 건강해졌어요!”
정말 어찌나 염려를 해주던지.
내가 의식을 찾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선물이 많이 들어왔다.
황도에서도 그렇고, 친척들이나 방계, 가신들도 선물을 보냈다.
이 그리미에마저도.
그가 보낸 건 꽃다발이었다.
‘소름이 다 끼쳤지.’
첫 번째 삶에선 내 인생을 수렁에 빠뜨리고, 이번 삶에서도 날 죽일 생각이 가득한 자가 보낸 선물.
내게서 전말을 들은 한지혁은 꽃다발을 불태우자고 했다.
하지만 난 그걸 화병에 장식해두었다.
원수를 결코 잊지 않으려고.
“보내주신 장미는 마법을 걸어서 화병에 꽂아두었어요. 감사합니다, 백부님!”
“그럴 만한 선물이 아니었는데 민망하구나.”
“아녜요. 공사다망하신 와중에 선물까지 챙겨주셔서 얼마나 기쁜데요.”
그리미에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욕지기가 올라왔으나, 나는 유순한 조카처럼 헤헤 웃었다.
디오네라는 순진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미에 백부님과 에릴로트가 친했구나.”
그러자 리앙틴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백부님과 에릴로트는 황도에서 사니까 이래저래 가깝게 느껴지시나 보지.”
“보기 좋다, 그치?”
“뭐……. 그리미에 백부님이야 워낙 성격 좋기로 유명하고, 에릴로트도 혈족들과 잘 지내는 편이니.”
지나가던 고용인들이나, 가신들도 흐뭇한 눈길로 우리를 쳐다봤다.
서로를 어떻게 쳐다보는지 모르고.
이제 보니까 알겠다.
‘저 뱀 같은 눈빛.’
그리미에도 내가 달라졌다는 걸 느꼈을 거다.
조심성 많은 성격이니만큼, 달라진 내가 수상하겠지.
평소에는 늘 다정하게 휘어져 있던 눈이 오늘따라 매섭다.
“백부님은…….”
내가 고개를 갸웃하고 말하자, 그리미에가 “응?” 하고 물었다.
“백부님은 항상 안경을 쓰고 계셔서 몰랐는데, 자세히 보니까 아빠와 많이 닮으셨어요!”
“그래?”
“네. 똑같아요. ……눈빛이 아주 싸늘한 게.”
그리미에의 눈썹이 미미하게 움칠거렸다.
그러자마자 나는 다시 아이답게 해맑게 웃었다.
“싸늘해 보이시지만 사실은 다정한 것도 똑같네요! 아빠는 다들 무서워하지만, 사실은 아주 따뜻하시거든요.”
“하하, 데이몬드는 네게 유난히 다정하지.”
“네!”
“귀엽구나. 나도 너 같은 딸이 있다면 세상 누구보다도 다정해질 테지.”
그래서 달리아를 데려왔니?
‘달리아는 대체 누구일까.’
처음엔 마리의 몸에 현대인이 빙의된 것이 달리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젠 그것마저 의심스럽다.
‘마리의 몸에 일부러 현대인을 빙의시켰을 수도 있지.’
그때, 멀리서 누군가 소리쳤다.
“그리미에 님, 여기 계셨습니까. 대회의가 곧 시작합니다.”
그리미에는 종종걸음으로 다가온 가신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와 리앙틴, 디오네라를 돌아보며 말했다.
“또 보자꾸나.”
우리 셋이 인사한 후, 그는 떠났다.
리앙틴은 그리미에의 뒷모습을 보며 뺨을 감쌌다. 그리고 하아아, 앓는 한숨을 터뜨렸다.
“2세들 중엔 그리미에 백부가 최고야. 우리 엄만 항상 말씀하셔. 그리미에 백부 같은 남자를 만나라고.”
“응! 우리 어머니도 그러셨어. ‘외모는 데이몬드 오라버니가 최고지만, 성격까지 합치면 그리미에 오라버니가 약간 앞선다’라고.”
그렇게 말하던 디오네라가 “앗!”하며 양손을 흔들었다.
“데이몬드 외숙부도 멋지셔! 그냥 우리 어머니 생각이 그렇다는 거야.”
“괜찮아. 그리미에 백부님은 누구나 좋아하는 분이잖아.”
내가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자, 리앙틴과 디오네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참 대단하지.”
“맞아. 외숙들이나 이모는 다들 엄청 서로를 싫어하잖아. 근데 그리미에 큰 외숙 앞에선 좀 누그러지지?”
“그리미에 백부님이 이래저래 많이 도와주셨으니까. 또 자식도 없고.”
“자식이 없는 게 왜?”
“그리미에 백부님이 공작이 되면, 조카들 중에 하나를 후계로 들일 수도 있잖아.”
후계 싸움에 졌을 때를 대비한 보험이라는 말이다.
자신이 공작이 못 되어도, 자식이 그리미에의 후계가 되면 되니까.
장남인데도 동생들이 적대하지 않는 이유가 그것이었다.
‘달리아를 일찌감치 데려오지 않은 이유도 이거겠지.’
견제당하지 않으려고.
그래야 움직이기 쉽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한지혁이 시계를 확인하고서 내게 말했다.
“아가씨, 공작님의 치유사가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오늘 내가 성에 들어온 이유는 치유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할아버지가 내게 직속 치유사를 내준 것이다.
그러자 지나가던 로레이나와 다른 사촌들도 눈을 홉떴다.
“말도 안 돼. 조부님의 치유사라고?”
리앙틴도 “으윽…….” 하며 부러운 표정을 지었다.
‘공작의 몸 상태를 아는 자들은 타인과 접촉할 수 없으니까.’
그게 직계라고 하여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내가 치유사를 만나는 건 특별한 일이란 것이다.
“하여간 부럽다니까…….”
리앙틴이 한숨을 푹 내쉬며 내 등을 살짝 밀었다.
“치료 잘 받아. 또 쓰러지지 말고.”
“응.”
사촌들과 인사를 한 후에 본성으로 들어왔다.
한지혁이 슬쩍 주변을 살피고서 말했다.
“그리미에가 대단하던데. 눈 하나 깜짝하질 않아.”
“응.”
“공작에게 말해야 하는 거 아냐?”
“뭘?”
“그야 그리미에가 이 모든 일의 수괴라고. 네 할아버지는 널 귀여워하잖아. 그러니까 믿어줄지도—”
“나는 7년 간 귀여운 손녀였지만, 그리미에는 30년이 넘도록 믿음직한 장남이었어.”
“그건 그래도…….”
“증거도 없이 할아버지에게 말할 순 없어. 그랬다간 애써 쌓아 올린 것들까지 무너질 테니까.”
“…….”
“처세술로는 저쪽이 이겨. 무려 30년이 넘게 연기한 사람이니까.”
“그럼 이제 큰일 난 거 아냐?”
한지혁이 희게 질린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아스트라 내부의 영향력도, 황도에서의 영향력도 모두 그리미에가 우위에 있잖아.”
“응.”
“아일라 때 보아하니까 이미 엄청난 힘을 갖게 된 모양이고.”
“그래. 아일라 같은 병사가 열 명만 있어도 장원 경계벽이 무너질걸.”
“그, 그래도 넌 용이 있으니까……!”
“하지만 황궁에서 용을 허가받고 움직이라고 했잖아. 그리미에를 치려면 국가의 허락이 필요하다는 소리야.”
“네 할아버지가 장남을 치기 위해서 황제의 허가를 받아오는 걸 두고 볼 리가 없지.”
“응! 그러니까 이 상황은 완—전히 망한 거지!”
발데릭만 되어도 붙어볼 만 했는데.
하필 그리미에가 상대라서 사면초가가 되었다.
한지혁은 흐린 눈으로 날 쳐다봤다.
“그게 그렇게 신나서 할 얘기가 아닐 텐데…….”
나는 까치발을 들고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걱정하지 마. 그래도 다행인 점이 있으니까.”
“뭔데?”
“그리미에가 날 공격하기 전까지 아직 10년이란 시간이 남아있다는 것.”
“뭐?”
첫 번째 삶을 생각해보라.
그때의 나는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비참한 신세였다.
보호자 하나 없는 천더기.
그리미에가 간단히 해치울 수 있었단 뜻이다.
“그리미에는 굳이 나를 스무 살일 때 죽였어. 이유가 뭘까?”
“뭐, 그때까지 살려둔 거 아냐?”
“왜? 내가 말했잖아. 그리미에가 두려워하는 건 내 수호성이라고. 수호성이 언제 저주를 깰지도 모르는데 살려둘 이유가 있어?”
“음, 아니다. 불안해서라도 살려두지 않겠어.”
“응. 내 생각엔 말이야. ……스무 살 때까지 살려둘 이유가 있었던 거야.”
“그게 뭔데?”
“이제부터 찾아봐야지.”
대체 그리미에가 왜 나를 못 죽이는지를.
난 치유사를 만나기로 한 방 앞에서 멈추어 섰다.
그리고 한지혁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건 네가 찾아.”
“그걸 내가 어떻게……!”
“그리미에의 저택에 하인으로 들어가든, 정보 길드에 잡무원으로 들어가든. 뭐라도 해서.”
“넌 정말 최악의 상사야.”
“맞아. 그래서 그만둘까 봐 급료를 많이 주지.”
나는 한지혁에게 무언가를 툭, 던졌다.
흠칫 놀라서 그것을 받은 한지혁이 인상을 찌푸렸다.
“……열쇠?”
“황도 2구역 저택 열쇠. 네 거다.”
“주인님—!!”
나는 열쇠에 눈이 돌아간 한지혁을 보고 픽 웃고선, 방문을 열었다.
* * *
방엔 아직 아무도 없었다.
‘내가 먼저 왔나 보네.’
나는 소파에 앉아서 주변을 둘러봤다.
‘공작성에 이런 데가 있었구나.’
여긴 처음 본다.
본관과 신관에서만 살다시피 했지만, 그래도 7년이나 성에 있었는데.
‘하기야 할아버지의 몸 상태를 아는 치유사가 기거하는 곳인데.’
얼마나 각별히 관리되겠는가.
작은 주방까지 딸려있는 걸 보면, 식사도 여기서 다 만들어 먹는 모양이다.
‘하인들과도 접촉을 최대한 줄이나 봐.’
나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주방이니, 물약 제조 기구니 하는 것들을 구경했다.
‘와, 좋은 냄새.’
물약 제조기는 아직 향이 배어있었다.
쌉싸름하고도 달콤한 허브향이 아주 좋다.
책상 한쪽에 쌓여 있는 책에선 오래된 냄새가 났다.
‘우와, 진짜 오랜만이다.’
유혜민 시절에 도서관에서나 맡아보던 냄새다.
공작성의 책들은 다 마법으로 관리하고 있어서 항상 새 책 냄새가 난다.
나는 코를 킁킁대며 책 냄새를 맡았다.
‘초등학교 때 도서관에서 이런 냄새를 많이 맡았는데.’
후후, 웃다가 책이 펼쳐진 부분을 쳐다봤다.
‘응?’
이건 고대어였다.
그러니까 한글 말이다.
‘그러고 보면 이상하지.’
전에는 이곳이 책 속의 세계고, 작가가 한국인이라 고대어가 한글인 줄 알았다.
그런데 여긴 사실 내 전생인, ‘진짜 이세계’다.
어떻게 한글이 고대어가 된 걸까?
고개를 갸웃하며 생각하다가, 무심코 글을 읽었다.
“살아있는 인간을…… 가사 상태로 만드는 법?”
치유사가 이런 걸 왜 읽고 있는 거지?
눈을 끔뻑거리고 있는데 방 밖에서 인기척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황급히 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벌컥, 문이 열렸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오늘 치료를 맡아주셔서 감…… 아?”
나는 깜짝 놀라서 후드를 뒤집어쓴 남자를 쳐다봤다.
“치유사 필립보!”
갓 태어난 나를 엄마의 독기에서 구해줬던 그 치유사 노인이었다.
필립보가 사람 좋게 웃으며 말했다.
“저를 아십니까?”
“아…….”
수호성이 과거를 보여줬다고 할 순 없었다.
“유명하시잖아요. 황궁 수석 치유사 출신으로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치유사라고.”
“그거 듣기 좋은 소리로군요. 그런데 정말 그게 다인가요?”
그가 눈을 가늘게 떠서 나는 속으로 움찔했다.
‘설마 뭘 알고 있나?’
뛰어난 치유사라는 건, 엄청난 신성계 가호 소유자라는 것.
빈센트처럼 상대의 과거를 읽는 가호가 있을 수도 있다.
내가 긴장한 표정을 지었을 때, 그가 말했다.
“공작님이 제 흉을 보신 게 아니고요?”
“네?”
“이럴 줄 알았지. 이 고약한 늙은이하곤.”
‘뭐야, 그런 뜻이었어?’
나는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얼마 후, 쿡쿡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할아버지는 흉보지 않으셨어요.”
“정말이십니까? 공작님에 관한 한 믿음이 안 가는지라.”
“할아버지와 필립보 님은 매우 친한 친구 사이로군요.”
“악연이지요.”
필립보가 내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
손목에서 따뜻한 온기가 퍼져나가며 곧 편안해졌다.
‘와, 엄청 기분 좋다…….’
햇볕에 바싹 말린 시트에서 뒹굴거리는 기분이다.
“최근에 저주를 파훼하셨군요.”
“……네?”
“꽤 강한 저주인 듯 한데요.”
과연 황궁 수석 치유사 출신.
그런 것도 알 수 있단 말야?
‘이럴 줄 알았으면 필립보를 만나둘걸.’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일라 언니에게 저주당한 모양이에요. 자면서 저주가 파훼된 것 같고요.”
“음, 뭐…… 이렇게 훌륭한 수호성이 있다면야 그럴 수도 있겠군요.”
“네?”
그걸 안다고?
난 흠칫, 굳어져서 필립보를 쳐다봤다.
“하하, 사이비 종교에 심취한 것으로 보이십니까?”
“…….”
“뭐, 젊었을 때는 그 종교에 심취하긴 했었지요. 제가 그 곳의 13사도 중 하나일 정도였으니까요.”
“종교요……?”
“아, 모르십니까?”
필립보가 눈을 크게 떴다.
“아가씨께서 태어나기도 전에 있던 사이비 종교 중 하나입니다.”
“어떤 종교인데요?”
“이 세계엔 수호성이 존재고, 우리 인간은 수호성으로부터 만들어진 자라고 주장하는 종교였지요.”
“……!”
나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맞는 말이잖아.’
그걸 대체 어떻게 아는 거지?
* * *
아스트라 공작은 초조한 표정으로 시계를 쳐다봤다.
“필립보에게선 왜 이렇게 소식이 없는 것이냐.”
“예?”
“에릴로트를 치유해주기로 하지 않았어!”
“아아, 그랬지요.”
드뷔시 자작이 수첩을 펼쳐서 일정을 확인했다.
“약속 시간이 된 지 아직 20분도 안 되었습니다.”
“그 애 몸에 큰 이상이 있는 게 아니냐?”
한 달이나 못 일어나다니.
‘세 살 때도 아주 오래 의식이 없던 적이 있었고.’
데이몬드, 그 빌어먹을 놈이 막지만 않았어도 공작성에 바로 데려왔을 텐데.
그 놈이 세상을 다 잃은 것 같은 눈으로 협박하는 통에 보지도 못했다.
공작이 “에잇!” 하며 몸을 일으켰다.
‘눈에 아른거려서…… 아니, 이건 아무래도 수상하니까 가보는 것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