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2화. (152/390)

152화.

* * *

‘쉽네.’

나는 새파랗게 질려 있는 사내들을 쳐다봤다.

하나 같이 서부의 가문들이 보낸 사자들이다.

“우, 우르톨 백작께서 서부 예비 원화전에 불참한다는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리셔우 후, 후작가에서도…….”

“이스볼 백작가 또한……!”

각 가문의 사자들은 모두 사색이 되어 있었다.

물론 이유는,

“크르륵.”

—나의 용인 라곤 때문이었다.

라곤이 가볍게 목울음을 흘리자, 심부름꾼들이 흠칫 물러났다.

금방이라도 잡아먹히기라도 할 것처럼.

가주들이 왔다고 하더라도 아마 저들과 비슷한 표정이겠지.

심부름꾼을 맞이한 우리 가신들은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올리고 있었다.

‘서부의 다른 가문들을 아주 괘씸해 하고 있었으니까.’

제비 꼬리 같은 콧수염을 가진 가신이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며칠 전만 하더라도 언제 서부 예비 원화전을 하느냐고 닦달하시던 분들이 무슨 일들이신지.”

다른 가신들도 입꼬리를 실룩이며 동의했다.

“예, 우리 아가씨의 몸이 회복도 되지 않은 상태인데도 하도 닦달을 하셨지요.”

그랬다.

서부의 다른 가문들이 거드름을 피운 건 다 내 몸 상태 때문이었다.

난 쓰러졌다가 회복한 지 얼마 안 된 상황이었다.

‘거기다 치료를 받느라 필립보의 도움도 받고 있지.’

내 상태가 엄청나게 심각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원화전을 한다면 저들이 승리할 거라고 판단했겠지.

타가문의 사자들이 불편한 듯 헛기침을 했다.

사자라곤 하지만, 다들 가문의 중책을 맡고 있는 높은 권신들이니.

‘노골적으로 이죽거리니 불쾌할 만도 하지.’

가신 중 가장 상석에 앉아있던 드뷔시 자작이 빙그레 웃었다.

그러곤 우리 가신들을 둘러봤다.

“너무 그러지 말게.”

그러자 제비 꼬리 수염을 가진 가신이 눈살을 찌푸렸다.

“다른 가문에서 먼저 너무들 하셨지요. 굳이 이러한 때에 원화전을 요구하신 건 말입니다.”

“하하, 비약이 심하군. 설마 일부러 아가씨의 몸 상태를 노리고 원화전을 닦달했겠는가?”

“모를 일이지요.”

“격 높은 가문에서 설마 어린아이가 아픈 것에 기뻐했으려고.”

그렇게 말한 드뷔시 자작은 눈썹을 까딱, 들어 올렸다.

다른 가문을 옹호하는 척하지만, 다들 속내를 알고 있었다.

‘너희 더럽게 치졸하더군.’

딱, 그 뜻이었다.

그러니까─

어디 애가 몸이 안 좋을 때를 노려?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군.

그 주제에 용트림 한 번에 뒤집어져?

옹졸하고, 치사한 것들.

─이라는 뜻 말이다.

타 가문의 사자들은 어색한 표정이었다.

반면에 우리 가신들은 신이 났다.

‘그럴 만도 하지.’

몇몇 사건으로 아스트라의 위명은 바닥에 떨어졌다.

공작성에 가짜 실의가 나타나고, 아일라가 날 공격한 뒤 탈주한 일 말이다.

그 일로 다들 ‘아스트라가 예전만 못하다’라고 떠들었다.

그런데 라곤이 용트림을 한 일로 전국이 깨닫게 된 것이다.

‘아스트라의 위험성’을.

가신들이 히죽히죽 웃고 있을 때, 내가 말했다.

“하지만 정말로 아쉽게 되었네요.”

그러자 타 가문의 사자들이 날 쳐다봤다.

“예?”

“다들 훌륭한 분들이시라, 예비 원화전을 한다면 배울 게 많았을 거예요.”

“아…….”

“성품도 얼마나 훌륭하신지요! 아픈 저와 겨루면 공정하지 않으니 물러나 주신 거지요?”

“예?”

“이런 게 귀족의 품격인가 봐요!”

난 눈을 동그랗게 뜨며 순진한 척 말했다.

‘체면은 좀 차리게 해줘야지.’

다들 자존심이 목숨 같은 사람들인데.

‘이럴 때 자존심을 챙겨주면 다른 가문들과 돈독해질 수 있거든!’

난 속으론 음험한 생각 중이었지만, 타가문 귀족들은 표정이 풀어졌다.

“뭐……. 그렇지요!”

“예, 하하하.”

“어린 나이에 영애들의 마음을 이렇게나 헤아려주시다니, 역시 훌륭하십니다.”

날 보는 눈에 호감이 가득하다.

“예비 원화전 없이 원화가 되셨지만, 그 누가 영애의 실력을 의심하겠습니까?”

“저희 가주께선 서부가 뛰어난 원화를 배출한 데에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분위기를 풀어주니, 칭찬도 잔뜩 나온다.

우리 가신들의 눈에선 꿀이 뚝뚝 흘렀다.

“저는 그냥 할아버지에게 배운 대로 한 것뿐이에요!”

그러자 내 옆에 있던 할아버지의 손등이 움찔했다.

할아버지는 커흠, 헛기침했지만 흡족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난 슬쩍 말을 보태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빠를 따라 하기도 했어요. 아빠는 아스트라의 훌륭한 무장이니까요!”

그러니까 다들 잊지 마.

아스트라에서 가장 훌륭한 무장이 누군지 말이야.

그리미에는 무력에선 아빠한테 상대도 안 된다고.

그러며 할아버지의 팔을 양손으로 잡고 활짝 웃었다.

가신들은 기특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그리고 멀리서 대기하고 있던 콘라드와 한지혁은…….

“역시.”

“하여간 잔머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혀를 내두르는 중이었다.

물론 난 씩, 심술궂게 웃어줬고.

‘자, 그럼 서군 원화의 자리는 내 것이 되었다.’

이제 황도로 복귀할 수 있겠다.

본격적으로 상승할 시간이 되었다.

* * *

황도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우리에겐 순간이동 택시가 있었으니까.

“리시먼드 형님, 괜찮아?”

“……그래.”

순간이동 택시보다 능력이 좋은 리시먼드가 말이다.

‘내 이동의 가호석이 깨져서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이야.’

리시먼드는 내가 쓰러져 있는 동안 가호 <이동>을 진화시켰다.

<이동>이 2단계까지 개발된 것이다.

이제 2톤 무게를 200km 정도는 이동시킬 수 있었다.

이동은 아주 특별한 가호라 별로 자료도 남아있지 않은데.

‘역시 천재라니까.’

그래도 황도까지는 짐과 사람을 여러 번에 나누어 이동시켜야 했다.

리시먼드는 녹초가 된 얼굴로 이마를 쥐었다.

“하아아…….”

“하아─!”

나는 주변에서 들려온 엄청난 한숨 소리에 깜짝 놀랐다.

내가 주변을 보자, 하녀들이(웬일인지 몇몇 남자 하인들까지) 황홀한 표정을 짓다가 얼른 고개를 돌렸다.

‘저 많은 사람이 동시에 한숨을 내쉬니까 압박이 엄청나네.’

난 모른 척해주었다.

그러자 하녀들이 속닥였다.

“리시먼드 님은 갈수록…….”

“응, 갈수록 선이 굵어져서…….”

“매력적이야…….”

리시먼드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나는 좀 쉬어야 할 것 같아.”

“많이 힘들어?”

걱정스러워서 양손으로 얼굴을 잡자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쉬면 회복될 거야.”

“치유사가 필요하진 않고?”

“괜찮아. 넌?”

“나? 뭐할 거냐고?”

“응.”

“밖에 잠깐 다녀와야 할 것 같은데. 황도의 영애들이 초대해줘서.”

그러자 소파에 늘어져 있던 발자크가 인상을 찌푸렸다.

<강화>의 가호를 가진 그도 황도행에 힘을 썼다.

리시먼드의 가호를 강화해줬기 때문이다.

“그런 게 어딨어! 황도에 온 첫날인데 가족끼리 식사해야지!”

“첫날은 지난번이었지. 다시 온 거잖아?”

“그럼 다시 온 첫날 기념으로 가족과 식사하자.”

“영애들과 선약인걸. 그리고 아빠도 바로 나가셔서 가족 식사는 못해.”

“그럼 남매의 식사로 해.”

“요슈아도 오늘 일정이 있댔어. 뭐였지?”

내가 쳐다보자, 짐가방에서 책을 꺼내던 요슈아가 고개를 들었다.

“클럽 모임이야.”

“클럽? 클럽에 들어갔어, 오라버니?”

“응. ‘토끼를 따뜻하게 지켜보는 모임’이야.”

그러자 발자크와 나, 그리고 소파에 앉으려던 리시먼드의 표정이 묘해졌다.

“오라버니, 토끼를 따뜻하게 지켜보는 걸 좋아했어?”

“뭐, 동물은 좋으니까?”

그러자 발자크가 혐오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너 토끼 스튜 좋아하잖아. 넌 좋아하는 걸 먹냐? 너 설마……!”

그리곤 나를 뒤에서 확 끌어안았다.

“에릴로트를 좋아하는 이유가─!”

“헛소리 하지 마, 발자크.”

“이 녀석도 다람쥐를 닮았잖아. 토끼만큼 귀엽다고!”

“기껏 머리가 달려 있으니까 생각이라는 걸 해보지 그래.”

“에릴, 저 변태 자식에겐 가까이 가지마. 널 스튜로 만들어 먹을지도 몰라.”

나는 발자크에게 끌어안긴 상태로 생각했다.

‘토끼를 따뜻하게 지켜보는 모임?’

요슈아의 취향은 정말로 아니다.

취향에도 안 맞는 클럽에 가는 이유라면…….

‘아하.’

머리 위의 전구가 번쩍거려서, 난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 공작 영식들이 둘이나 있지, 참.”

요슈아의 눈이 약간 커졌다.

“알고 있었어? 극비 정보인데.”

‘아직까지는 극비인가.’

호랑이처럼 무서운 공작 영식이 있는데, 사실 은밀히 토끼 같은 소동물을 좋아한다.

그래서 그 클럽의 숨겨진 호스트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응, 뭐. 나도 주변에서 황도 소식이 들어오니까.”

“아아, 지난번에 트랑 공작 영애와 친해졌었지.”

발자크는 우리의 대화에 금세 흥미를 잃었다.

그가 내 머리카락을 가지고 놀며 말했다.

“하여간 귀족들이란 무리 짓는 일에만 눈이 벌겋다니까.”

“…….”

“…….”

“…….”

나와 요슈아, 리시먼드는 흐리게 뜬 눈으로 발자크를 쳐다봤다.

발자크가 “응?” 하며 우리를 돌아봤다.

“발자크 오라버니도 좀 남들만큼 무리 짓는 일에 관심을 가지면 좋을 텐데.”

“저 바보가 왜 다들 무리 짓는 데 관심이 있는지 알기나 할까.”

“발자크는 무리지.”

리시먼드까지 한숨을 내쉬자, 발자크가 인상을 찌푸렸다.

“귀찮잖아!”

“왜 다들 황도로 가고 싶어 하겠어? 황도에서만 가질 수 있는 인맥 때문이라고.”

난 발자크의 손을 떼어냈다.

그리고 허리춤에 손을 올린 채로 발자크를 쳐다봤다.

“특히 우리처럼 후계 싸움에 치열한 가문이면 인맥이 아주 중요하단 말이야.”

“아기, 화났어?”

“요슈아를 본받아. 발자크는 전혀 형 같지 않아.”

“뭐?!”

“형 자리는 요슈아가 갖는 게 좋겠어. 이제 요슈아 오라버니를 둘째 시켜줘.”

발자크는 엄청나게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요슈아가 쿡쿡 웃으며 내 어깨에 팔을 걸쳤다.

“그렇게 되면 ‘차남의 권익을 도모하는 클럽’에도 갈 수 있겠네, 에릴로트.”

“요슈아는 정말 훌륭해!”

“나가는 길에 영애들의 선물로 스콘이라도 사러 가는 게 어때? 좋은 제과점이 있거든.”

“좋아.”

나는 요슈아와 사이좋게 방을 나섰다.

등 뒤로 발자크의 당황스러운 시선이 달라붙었다.

* * *

발자크는 이글이글한 시선으로 창밖을 쳐다봤다.

요슈아가 에릴로트를 에스코트하며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그런다고 요슈아의 등이 뚫어지지 않아, 발자크.”

리시먼드의 말에 발자크가 분통을 터뜨렸다.

“형은 화도 안 나?”

“뭐가.”

“저 비열한 놈이 몇 마디로 에릴로트를 쏙 빼앗아 갔잖아!”

“맞는 말을 한 거지.”

리시먼드는 다리를 꼬며, 힐끗 발자크를 쳐다봤다.

아버지인 데이몬드는 자식을 위해 애쓰고 있었다.

자식들의 안온한 미래를 위해 번번이 사지로 나선다.

자식들도 아버지를 위해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이다.

‘클럽 모임에 나가는 정도라면 싼 일이지.’

날붙이가 난무하며,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전장보다야 훨씬.

하지만…….

‘최근에 요슈아가 유난히 에릴로트와 친한 건 사실이다.’

아닌 척하지만, 리시먼드의 눈도 가늘어져 있었다.

요슈아만큼 영리하진 않아도, 감이 좋은 발자크는 금세 속내를 알아봤다.

“에릴로트가 치료 중일 때도 장원의 상황을 알려준다면서 몇 시간이나 시시덕거리다가 나왔다고.”

“과하긴 했다.”

“내가 대신 말해주겠다고 해도, ‘발자크 녀석이 뭘 알겠어? 내가 설명할게.’ 하면서 자리를 뺏어갔단 말이지.”

리시먼드에게도 그랬다.

제가 설명하겠다고 하니 ‘바쁜 형님보다 내가 설명하는 게 낫겠지, 에릴로트?’ 하면서…….

‘영악하긴.’

“생각해보면 어릴 때부터 요슈아에게 자리를 빼앗겼던 것 같단 말이지.”

“…….”

“형이 입양된 뒤에도 그렇지 않았냐고.”

“…….”

“이대로 두면 ‘에릴로트가 가장 사랑하는 오라버니’는 요슈아가 될 거야.”

“……그건 안 되지.”

에릴로트가 귀여운 건 발자크와 리시먼드도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오라버니가 셋씩이나 되어서, 치고 나갈 기회가 없는데…….

‘번번이 영악한 녀석에게 빼앗기기까지.’

리시먼드의 눈빛이 일렁거렸다.

“그래서? 어쩌자는 거지?”

“밀어내자고.”

“네 쌍둥이 동생인데? 네가 배신하지 않을 거란 보장은?”

“형.”

발자크가 후, 한숨을 내쉬며 리시먼드의 양어깨를 잡았다.

잠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발자크가 가볍게 얼굴을 들었다.

눈빛이 마치 전투에 막 나섰을 때처럼 맹렬하게 불타고 있었다.

“쌍둥이라는 이름 따위가 ‘에릴로트가 가장 사랑하는 오라버니 자리’보다 중요해?”

“아니지. ……절대로.”

“그럼 동맹하겠어?”

발자크가 손을 내밀었다.

리시먼드는 비죽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탁.

두 사람이 손을 맞잡았다.

이것이 바로 ‘에릴로트가 가장 사랑하는 오라버니 자리’를 두고 일어난 1차 소년 대전의 개막이었다.

그들은 몰랐다.

에릴로트에겐 다른 오라버니들도 있었다는 것을…….

* * *

마차의 바퀴가 멈췄다.

마차에서 내린 난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여기가 바로 파앙테 후작 영애 명의의 살롱이구나.’

미성년자 영애들의 놀이터 같은 곳이었다.

달리아는 자주 갔지만, 난 지난 삶에선 꿈도 못 꾸던 곳이다.

“영애! 어서 와요!”

루멜리사 파앙테가 밝은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영애.”

“오랜만이지요?”

“네.”

“자, 어서 올라가세요. 영애를 보려고 특별한 분들이 오셨답니다.”

“특별한 분들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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