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4화. (154/390)

154화.

에릴로트는 천천히 중정으로 내려왔다.

친절하게 인사했는데도, 소년들은 말이 없었다.

“공자님들?”

에릴로트가 어색하게 물었다.

그러자 가장 앞에 서 있던 아쳐 클럽의 소년이 움찔, 대답했다.

“아, 어, 반가웍! ……요.”

삑사리가 나버렸다.

아쳐 클럽 소년의 얼굴이 벌게졌다.

그제야 소년들이 정신을 차리고, 킥킥거리기 시작했다.

에릴로트가 생긋 미소 짓자 다시 얼어붙어 버렸지만.

“밖이 많이 추운가 봐요.”

“어? 아니, 예?”

“밖과 안이 온도 차가 심하잖아요. 그러면 딸꾹질을 하게 된대요.”

“아…… 그, 그렇죠…….”

아쳐 클럽의 소년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같은 클럽의 소년들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하이고?’

‘다혈질에 목소리가 크기로 유명한 놈이…….’

발자크는 인상을 찌푸렸다.

에릴로트를 쳐다보는 표정이 심상치 않다.

발자크가 소년과 에릴로트 사이로 파고들었다.

“어디 나가, 에릴?”

“입궁 전에 준비할 것들이 있어서.”

“황도 상점가?”

“응.”

발자크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마침 황도의 약골들과 어울리기 귀찮던 참이다.

거기다 에릴로트와 둘만의 나들이라니.

머릿속에서 행복회로가 가동했다. 

“오다버니, 에리로뚜 요기 무더떠.”

“하하, 정말 넌 덜렁이라니까.”

이미 아이스크림이 잔뜩 묻은 에릴로트의 손을 닦아주는 상상까지 끝냈다.

“그럼 내가 호위를─!”

“괜찮아. 오라버니들은 손님들과 좋은 시간 보내.”

“응…….”

초청된 소년들은 놀란 얼굴로 발자크를 쳐다보았다.

‘저 발자크 아스트라가 이렇게 얌전하다고?’

황도에선 아스트라 직계들이 장원 안에서 어떻게 생활하는지 모른다.

다만, 아스트라와의 협동 전투에서 발자크의 성격은 알 수 있었다.

거칠기 짝이 없는 녀석.

실력이 근거가 되어서 오만해도 귀족 어른마저 제재하지 못했다.

그런데 저 발자크 아스트라를 한 마디로 쥐락펴락해?

‘우와…….’

소년들이 놀란 얼굴로 에릴로트를 쳐다봤다.

에릴로트는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그럼 부디 좋은 하루 보내시길.”

“예…….”

“크흠, 예.”

소년들이 뻣뻣하게 인사했다.

아스트라 백작저의 삼 형제는 에릴로트를 배웅하러 잠시 자리를 비웠다.

“와……. 저 발자크 아스트라가.”

“요슈아 아스트라와 리시먼드 아스트라도 마찬가지지. 강아지처럼 쫓아가잖아?”

“배웅이라니. 그게 아스트라 혈족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단어인 거였냐고.”

“제 숙부님이 사령관으로 전장에 오셨을 때도 제대로 인사조차 안 하던 사람들입니다.”

“에릴로트 아스트라라……. 대체 얼마나 엄청난 아이인 거냐?”

한 소년의 말에 다른 소년들이 침묵했다.

“실력이야, 뭐.”

“그 용이 아니더라도, 저 나이에 지휘력이 상당하다지.”

“지혜롭고, 권세가들에게도 인기 좋고. 처신을 잘한달까.”

“그 까다로운 파앙테나, 트랑 영애도 에릴로트 아스트라라면 좋아죽잖아. 그런 걸 보면 확실히?”

“응. 확실히─”

“……그리고 예쁘지.”

어느 소년의 멍한 한 마디에, 다른 소년들이 다시 침묵했다.

‘정말 엄청나게.’

‘저런 애는 처음 본다.’

아스트라의 직계들은 원래도 화려한 미모로 유명했다.

그런데 에릴로트 아스트라는 정말로…….

뭇 레이디들뿐 아니라, 일국의 황녀까지 밤잠 설치게 만들었다는 그 데이몬드 아스트라의 딸 다운 외모였다.

아주 비슷하지만, 또 묘하게 다르기도 했다.

데이몬드 아스트라의 금발이 사막에 작렬하는 빛 같다면, 에릴로트는…….

‘황금을 한 방울, 한 방울 정제시킨 달콤한 꿀 같달까.’

데이몬드 아스트라의 적안이 붉은 피 같다면, 에릴로트는…….

‘급 높은 보석 같아.’

분위기는 완전히 다르다.

데이몬드는 살기 때문에 위압적인데, 에릴로트는 그 고귀한 분위기 때문에 압박이 느껴진다.

“예뻐…….”

알이 큰 안경을 쓴 미소년이 멍하니 말했다.

학자 집안의 장남이자, 황궁 마도 연구회의 최연소 입성자인 테드 마딜로였다.

“조, 좋은 향기…….”

키가 훌쩍 큰 갈색 피부의 미소년이 마른침을 삼켰다.

아쳐 클럽의 회장이자, 황도에서 최연소 기사 임명을 받은 위엘 랑그로였다.

“목소리가 티티새 같은데…….”

무뚝뚝한 표정의 미소년도 중얼거렸다.

토끼를 따뜻하게 지켜보기 모임의 회장인, 카시안 제르모였다.

소년들은 방에 도착해서도 한동안 얼이 빠져 있었다.

삼형제가 에릴로트를 배웅하고서 돌아올 때까지도.

‘뭐야, 이 새끼들.’

발자크가 인상을 찌푸리며 형제들을 쳐다봤다.

리시먼드는 한숨을 흘렸고, 요슈아는 싸늘하게 웃었다.

“귀찮아지겠네.”

“많이.”

요슈아의 말에 리시먼드도 동의하자, 발자크가 울컥 미간을 좁혔다.

“그러니까 뭐가!”

─하며.

삼 형제의 심기가 불편해진 것과 별개로 모임은 화기애애하게 끝났다.

그리고 며칠 후부터 모임에 참가했던 소년들이 묘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 * *

며칠 뒤.

나는 황궁에 들어갔다.

나를 따라온 한지혁은 선물 상자를 산처럼 끌어안고서 투덜거렸다.

“으윽, 뇌물 주러 왔냐? 무슨 상자가 이렇게 많아.”

“선임 원화들에게 인사해야 해서 그래.”

“원화들은 선물을 나눠 받는 게 인사인 모양이지? 잘 봐달라는 뇌물과 뭐가 달라?”

“첫인사 자리에선 마음을 담은 편지와 머리 끈을 선물하는 게 관례래.”

왜 머리 끈인지는 모르겠지만.

‘귀찮긴 나도 마찬가지란다.’

인사 자리만 귀찮은 게 아니라, 다른 것도 다 귀찮다.

며칠 전부터 계속 황궁을 들락날락해야 했다.

원화가 되기 전에 교육을 받아야 해서.

‘이렇게 된 이상 종년 축제에서 무조건 상을 받아내야지.’

귀찮은 일을 잔뜩 했으니까, 그 보상으로.

나와 한지혁은 황궁의 북쪽으로 향했다.

황군 병영이 있는 곳이었다.

“원화들에게 인사 간다고 하면 네 사촌들이 비웃을 텐데?”

“그렇겠지.”

“아스트라가 다른 가문 영애에게 고개를 숙이냐고 한껏 헐뜯을 거다.”

“안 할 수도 없잖아? 사촌들도 내 상황이면 다 인사를 갈 거면서. 내가 원화가 된 게 꼴 보기 싫어서 트집을 잡는 거겠지.”

“열받지도 않아?”

“어차피 당분간 장원엔 안 갈 텐데 뭐.”

“혈족 교육 때문에 한 달에 4번은 내려가야 하잖아?”

나는 씩 웃고, 그를 돌아봤다.

“그건 당분간 중지.”

“왜?!”

“할아버지가 황도에 익숙해질 동안은 중지해주셨어. 오라버니들도.”

“데이몬드 관할령만 대놓고 특별 취급이네.”

“그게 부러워서 조프리는 이미 몸져 누웠다던 걸.”

나와 한지혁은 히죽거리며 걸었다.

한지혁은 내 하인으로 되어 있어서, 조프리가 나 몰래 괴롭히기도 했다.

조프리에게 유감이 있는 건 나나 한지혁이나 마찬가지라 우리는 비열하게 웃었다.

막 횃불의 궁에 도착했다.

사령관들이 업무를 보는 궁이었다.

그리고 이 횃불의 궁 1층 온실이 바로 원화들의 본거지다.

문 앞에 선 궁인이 나를 반겼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서군 원화.”

나는 웃는 것으로 인사하고, 그를 따라 온실 안으로 들어갔다.

온실엔 글라디올러스가 화려하게 피어있었다.

그리고 질 좋은 나무로 만든 짙은 색의 테이블이 중앙에 있었는데, 그곳에 원화들이 모여 있었다.

“늦었네요, 서군 원화.”

남군 원화인 리카 델프르.

“아, 우린 한 시간 전에 도착해 있었거든요.”

북군 원화인 벤야 몬테규.

“어서 와.”

동군 원화인 세바스티아 비페리.

그리고…….

“잘 왔어요, 아스트라 양.”

흰 드레스를 입고, 자리에서 일어나 날 맞이하는 저 사람이 바로 중앙 원화.

그 유명한 실린 샤토브리앙이다.

“반갑습니다. 횃불의 궁에서 고귀한 분들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에릴로트 아스트라예요.”

고개를 숙이자, 실린 샤토브리앙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듣던 대로 총명해 보이는 숙녀로군요. 중앙 원화인 실린 샤토브리앙이에요.”

“말씀 많이 들었어요.”

“앉아서 얘기하실까요.”

실린이 곧 의자에 앉아서 내게 끝자리를 가리켰다.

“예. 아, 여러분. 이건 여러분께 드리는 작은 성의예요.”

내가 쳐다보자, 한지혁이 자리에 하나씩 상자를 놔두었다.

사람마다 각 군의 상징색으로 포장해두었다.

남군 원화가 제일 먼저 포장을 뜯었다.

상자를 열어본 그녀의 입매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어머.”

당황스럽다는 듯 작게 실소를 흘리면서.

검지와 엄지로 머리 끈을 살짝 들어 올린 남군 원화가 중얼거렸다.

“아스트라엔 제국 제일의 상점 지구가 있죠?”

“그렇습니다, 남군 원화.”

“그래서 중앙 귀족들은 우스갯소리로 아스트라의 센스는 제국 제일이라고들 해요.”

“감사합─”

“이제 보니 정말 우스갯소리였나 봐요.”

남군 원화가 쿡쿡 웃자, 북군 원화도 “헤헤?” 하며 따라 웃었다.

남군 원화가 말했다.

“물론 영애의 센스가 그렇다는 건 아니고요.”

“…….”

“오히려 전 아스트라 백작 영애에겐 특별한 게 있다고 기대했답니다. 하지만 좀…… 뭐, 그렇네요.”

남군 원화가 상자에 머리 끈을 톡, 떨어뜨리며 눈을 찡끗했다.

“아스트라 상점 지구의 물건을 너무 기대한 탓이니, 실망하게 했다고 상심할 건 없어요.”

“아스트라 상점 지구의 물건이 아닌데요.”

“……네?”

난 생긋 웃었다.

‘네가 내 선물은 뭐든 트집 잡을 줄 알았지.’

그래서 일부러 황도에서 샀다.

황도에서 귀족에게 파는 물건 가지고 핀잔을 주면, 다른 사람도 열받도록.

“황도에서 구매했어요. 유명한 디자이너의 작품이라고 해서요.”

“……유행만 마냥 따르는 그런 분이었나요?”

“지역마다 특색이 있잖아요. 제가 있던 서부와는 보는 눈이 다를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일부러 황도에서 구매하였어요.”

그때였다.

“중앙 원화, 각 군의 기사님들이 도착하셨습니다.”

“들여라.”

문이 열리고, 십여 명이나 되는 기사들이 들어왔다.

각 군 원화들의 대표기사들로, 새로운 원화인 내게 인사시키기 위해서였다.

‘대표기사들인 만큼 하나같이 화려한 외양이네.’

황군 기사들은 동화나 로망스 소설의 주요 등장인물들이다.

실제로 존재하는 황군 기사로 망상 소설을 쓰는 경우도 있었다.

‘황궁을 대표하는 만큼 외양도 멋지고, 실력도 뛰어나거든.’

그러니까 남성이든, 여성이든 모두 동경하지.

하지만 기사들이 내게 인사하기도 전에…….

“황도에서 산 물건이라. 게다가 그저 유명 디자이너의 작품이라면, 선물을 고민하지 않았다는 말이군요.”

남군 원화는 일부러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뺨을 감싸 쥔 채로 “저런…….” 하고 중얼거리던 그녀가 날 쳐다봤다.

“그래서 지난 파티에서 조언을 해주겠다고 한 거예요.”

“…….”

“이렇게 잘 모를까 봐서.”

남군 원화가 눈썹을 늘어뜨리며 다른 원화들을 쳐다봤다.

“안 그래요?”

“네? 아, 네.”

“…….”

북군 원화는 어색하게 동의했고, 동군 원화인 세바스티아는 침묵했다.

남군 원화가 오만한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첫인사 자리는 아주 중요하답니다. 원화로서의 센스, 배려심, 속이 얼마나 깊은지…… 뭐, 이런 것들을 선배 원화들이 알 수 있는 자리거든요.”

“…….”

“그런데 생각 없는 선물이라니.”

“…….”

“뭐, 이제라도 배우면 되죠.”

“…….”

“많이 가르쳐줄 테니까 잘 지내봐요?”

남군 원화가 우후후, 웃었다.

기사들의 분위기가 묘했다.

저들이 봐도 이건 남군 원화가 나를 깔아뭉개는 거니까.

남군 원화는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제아무리 아스트라라고 해봐야, 네가 더러운 피를 가진 열 살짜리지.

─딱 그런 표정으로.

한지혁의 얼굴이 점점 굳어지고 있었다.

이 많은 사람 앞에서 망신을 당하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남군 원화가 중앙 원화인 실린을 쳐다봤다.

“그래서 말인데요. 원화로서 아직 미숙한 때에 너무 큰 짐을 지고 있으면 안 되지 않나요?”

“무슨 말씀이실까요?”

“에릴로트 아스트라 양의 용 말이에요.”

“용이라……. 계속 말씀해보세요.”

“잠깐이라도 황궁에 귀속시켜놓는 게 어떤가요?”

세바스티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는 들고 있던 찻잔을 소서에 달칵, 내려놓았다.

“그 용은 아스트라 백작 영애가 본인의 가호로 테이밍 한 몬스터예요.”

“누가 아니라고 하던가요?”

“그런 몬스터를 어떻게 귀속시킨다는 거죠?”

“중앙 원화라면 가능하죠.”

남군 원화가 “안 그래요?” 하며 중앙 원화를 쳐다봤다.

그러곤 나를 보며 눈썹을 까딱 들어 올린다.

“중앙 원화의 가호는 ‘복제’니까요.”

그렇다.

이것이 바로 실린이 황도 최고의 레이디로 불리는 까닭이다.

알렉시스의 ‘지배자의 위세’와 같은 가호 복제 능력.

하지만, 그의 하향 버전인 가호였다.

‘지배자의 위세처럼 몇 개나 되는 가호를 복제하진 못하지.’

엄밀히 말하면 가호를 복제한다고 하기에도 그렇고.

‘실린은 마도구에 추출해서 사용하니까.’

그리고 한 번에 딱 하나만을 사용할 수 있으며, 시동 제약도 엄청나게 까다롭다.

남군 원화가 말했다.

“제 생각이 어때요? 영애,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가호가 잘 조절되지 않잖아요.”

“…….”

“실린 님은 몇 년이나 최연소 중앙 원화로 엄청난 능력을 갖고 계시죠. 황제 폐하의 신임도 굉장하고요.”

“…….”

“미숙한 영애보다는 안전할 것 같은데.”

“…….”

“영애도 그렇게 생각하죠?”

나는 남군 원화를 빤히 쳐다봤다.

‘내가 용을 가지고 위세를 떨치지 못하게 하려고?’

거기다 내 능력을 뺏어서 실린의 위세를 높이겠다는 뜻이다.

남군 원화가 생글생글 웃었다.

“다 나라를 위한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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