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한지혁이 물었다.
“이그리츠의 군사에게 연락할까?”
“왜?”
“그야 서군을 꾸려야 하니까. 이그리츠를 서군으로 데려올 생각 아니었어?”
“절대로 아니야.”
에릴로트가 딱 잘라 말했다.
그러자 한지혁이 “엥?” 하며 미간을 좁혔다.
에릴로트는 주스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서군은 엄연히 황실에 속한 군이야.”
즉, 한지혁의 말은 ‘이그리츠를 황제에게 바쳐라’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한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황군이 되면 퇴직도 마음대로 못하지. 필요할 때 데리고 올 수 없겠군.”
“거기다 퇴직하고서도 다른 귀족 가문에 들어갈 수 없고.”
황궁 정보를 그 가문에 누설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 어떻게 하려고?”
이번 기의 서군은 형편없다는 소리를 듣고 있다.
중앙 원화의 입김이 크게 작용한 남군보다도 못하다는 평.
“그런 기사들을 데리고 뭘 하려고.”
에릴로트는 음산하게 웃었다.
“그러니까 다른 군에서 빼앗아야지.”
“하여간 못돼먹었다니까.”
에릴로트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이를 보고 픽 웃은 한지혁이 말했다.
“이번 종년 축제에서 우승하면 기사들도 혹하겠지.”
“응, 다른 원화군은 이미 계급이 확정되어 있지만, 서군은 새로 꾸려질 테니까 더 높이 올라갈 기회가 있잖아.”
“게다가 아스트라 공작의 지원까지 있을 테고?”
“맞아.”
“그걸 노리고 네 할아버지가 파티에서 깽판 치게 만들었구만.”
“노린 건 그것 말고도 있었지만…….”
에릴로트와 한지혁이 서로를 마주 보고 음흉하게 웃었다.
좌우지간에 ‘아스트라 공작이 남군에 노여워한 일’로 황도가 시끄러워질 것이다.
에릴로트에게 좋은 쪽으로.
그리고 아이의 예상은 딱 들어맞았다.
제국 전역이 원화군의 이야기로 뜨거웠다.
* * *
황궁.
귀족들은 모였다 하면 연말 파티에서의 일을 떠들었다.
“남군 원화가 망신을 당했다지요.”
“어디 남군 원화만의 망신이겠습니까. 중앙 원화도 이만저만 면이 상한 게 아닙니다.”
“샤토브리앙 공작이 딸의 체면이 상한 일로 크게 화가 나서…….”
“하면 종년 축제는 어찌 되는 겁니까?”
다른 무리도 연말 파티의 일을 떠들기는 마찬가지였다.
막 복도에 들어선 랑그로 백작이 커흠, 헛기침했다.
샤토브리앙 공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사람들은 흠칫 입을 다물고, 뿔뿔이 흩어졌다.
‘하여간, 입들은…….’
랑그로 백작이 공작의 눈치를 보며 어색하게 말을 붙였다.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중앙탑에서도 연말 파티의 일을 떠들더냐.”
“뭐……. 호사가들이 다 그렇지요. 어디 남 흉을 볼 거리를 놓치더이까.”
“빌어먹을.”
그들이 황제궁으로 이어지는 통로에 다다랐을 때였다.
남군 원화의 부친인 델프르 후작이 허둥지둥 달려왔다.
“샤, 샤토브리앙 공……!”
델프르 후작은 초조한 기색이었으나, 샤토브리앙 공작은 알은체조차 없었다.
랑그로 백작은 공작의 심기를 살피다가, 델프르 후작에게 물었다.
“공께서 무슨 일이십니까.”
“샤토브리앙 저에 몇 번이나 연락을 드렸는데도 통 기별이 없으셔서…….”
“워낙 공사다망한 분이 아니십니까. 후에 기별을 주실 테니, 다음을 기약하시지요.”
“하지만—”
“공.”
랑그로 백작이 델프르 후작의 팔을 끌어당겼다.
그러곤 목소리를 바짝 낮추었다.
“이만 돌아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하지만—”
“샤토브리앙 공의 심기가 이만저만 불편한 것이 아닙니다. 수습하려다가 도리어 돌이킬 수 없게 될 수도 있으니, 자중하십시오.”
“…….”
델프르 후작이 샤토브리앙 공작을 힐끗 쳐다보더니, 난처한 표정으로 물러났다.
“저어, 하면 오늘 폐하와의 독대를 잘 마무리하시길 바랍니다.”
“자네는─”
공작이 입을 열자, 델프르 후작의 표정이 밝아졌다.
“예, 샤토브리앙 공!”
“자식을 제대로 가르치는 것이 좋을 것이야.”
“……예?”
“멍청하면 자중할 줄을 알아야 할 터인데.”
“…….”
“딸을 무식하게 키운 자네 탓이 크네.”
샤토브리앙 공작이 델프르 후작을 차갑게 지나쳤다.
홀로 복도에 남은 후작은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저는 얼마나 자식을 잘 키워서……!’
델프르 후작은 딸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이냐─!”
“…….”
“이제 어찌할 것이냐. 네가 가문에 무슨 짓을 했는지 알기나 하는 것이냔 말이야!”
“…….”
“아스트라 공작의 눈 밖에 나질 않나, 샤토브리앙 공작이 크게 화가 나질 않나……. 제기랄! 대체 이를 어떻게 해야─”
“……문을 ……어요.”
“……뭐?”
“가문을 위한 일이었다고요!”
딸은 소리도 내지 못하고 서럽게 눈물만 흘렸다.
“무슨…….”
“저도 아스트라 공작가에 밉보이고 싶지 않았다고요! 하지만 실린이 원하니까…….”
“대체 무슨 소리야.”
“실린이 그랬단 말이에요.”
“무슨 말을 했기에…….”
“에릴로트 아스트라가 있는 한 전처럼 웃지 못할 거라고 했어요. 그러면 샤토브리앙 공작이 속상해서 전처럼 아버지를 만나주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했단 말이에요…….”
“그렇다고 에릴로트 아스트라에게 그런 짓을 했단 말이야?!”
“그럼 어떻게 해요! 제가 실린의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가족들이 곤란해질 텐데!”
“너…….”
“거기다 큰 오라버니는 이제 졸업해서 임관할 시기고, 작은 오라버니도 기사 임명을 앞두고 있잖아요…….”
“…….”
“제가 실린의 뜻대로 하지 않았으면, 샤토브리앙 공작이 오라버니들에게 자리를 줄 리 없어요. 지난 번에도 그랬잖아요.”
“…….”
“저라고 죄 없는 에릴로트 아스트라에게 그런 말을 하고 싶었겠어요?!”
딸은 엎드려 누워선 숨도 쉬지 못하고 울었다.
그런 딸을 본 큰아들과 작은아들은 말을 잃었다.
아내는…….
“울지 마라, 리카. 다 어미 탓이야. 모두 부모가 부족한 탓이야……!”
딸을 끌어안고 함께 울었다.
‘그런 내 딸을 그리 깔아뭉개?’
이게 다 누구 탓인데.
가문을 생각해서 참아보려 했지만, 딸을 무식한 녀석 취급하는 말은 참을 수 없었다.
델프르 후작이 이를 갈던 찰나, 부관이 다가왔다.
“저택으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아니.”
“하면…….”
“아스트라 공작에게 연락해라. 아직 황도에서 머물고 있을 것이다.”
“어찌 전할까요.”
“바짓가랑이를 붙잡아서라도 오늘 꼭 뵈어야겠다고 전해라.”
“예?! 설마, 각하……!”
델프르 후작의 주변으로 살기가 일렁였다.
‘샤토브리앙, 절대로 가만히 두지 않겠다.’
.
.
그 시각, 황제의 집무실.
샤토브리앙 공작은 델프르 후작의 앞에서와는 전혀 다른 표정이었다.
고개를 숙인 샤토브리앙 공작이 말했다.
“송구합니다, 폐하.”
양피지를 말던 황제가 그를 힐끗 쳐다봤다.
“황군의 체면이 상했소, 공작.”
“딸이 책임을 통감하고 있습니다.”
황제는 서류를 내려놓고, 안경을 벗었다.
“남군 원화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
“…….”
“강력한 힘은 황궁의 통제를 받는 게 당연한 일이 아니겠소.”
“…….”
“하지만 이 일로 호사가들이 헛소리를 떠들더군.”
남군 원화가 에릴로트를 견제하고 있음이 세상에 드러난 것이다.
그리고 남군 원화는 중앙 원화인 실린의 충실한 끄나풀이었다.
즉, 중앙 원화가 에릴로트를 견제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번 종년 축제는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겠소.”
“폐하……!”
샤토브리앙 공작이 흠칫, 고개를 들었다.
본래 종년 축제는 샤토브리앙 공작가의 시상대나 마찬가지였다.
친황제파로 애쓴 샤토브리앙 공작에게 상을 내리기 위해 이뤄지는, 이름뿐인 대결.
그래서 황제는 몇 년간 실린을 위해 편파적인 과제를 내렸다.
함께 있던 랑그로 백작은 생각했다.
‘이번에도 중앙 원화에게 이로운 과제를 내린다면, 또 말이 돌겠지.’
원화들의 싸움에 황제가 개입했다느니 하는 말이.
샤토브리앙 공작이 당황한 어투로 말했다.
“폐하,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에릴로트 아스트라가 우승한다면 더 복잡해질 수도 있습니다.”
“원화군 내에서 그 애의 영향력이 커지겠지. 어쩌면 중앙 원화보다 더.”
“예, 아스트라의 아이가 황군의 한 축을 손에 넣게 되는 것입니다.”
“하면 그 아이가 우승자가 되지 않으면 될 일이 아니오.”
“예……?”
황제의 입매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 * *
며칠 후.
종년 축제 과제가 내려왔다.
나와 함께 황궁 서한을 본 한지혁이 중얼거렸다.
“황궁의 새로운 묘지에 있는 구울 토벌?”
서한에는 ‘공정한 대결을 위해 황제가 고심 끝에 과제를 결정했다’ 같은 개소리가 쓰여 있었다.
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고옹정~?”
공정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작년 과제는 원화들의 양궁 시합.
재작년 과제는 체스였다.
‘그런데 이번엔 웬 토벌?’
나는 이제 막 원화가 되었다.
아직 서군과 인사도 못한 상태인데, 군사 승부를 잘도 하겠다.
‘거기다 서군은 구울에게 잘 먹히는 신성계 기사들이 거의 없다고.’
특수계 기사들이 대거 포진한 건 중앙군이나 세바스티아의 동군이다.
그런데 공정은 무슨.
나는 으득, 이를 갈았다.
‘확 뒤집어 버려?’
울컥하다가 애써 마음을 진정시켰다.
‘이번에도 가문의 힘을 빌리거나, 라곤을 쓸 순 없지.’
같은 카드를 너무 많이 쓰면 나만 우스워진다.
‘에릴로트는 기분이 나쁘면 용이나, 제 할아버지를 쓴다’라며 조롱할 게 뻔하다.
한지혁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번엔 아무리 너라도 어렵겠는데?”
“어렵긴 해.”
“그럼 포기하지 그래?”
“그럴 순 없지.”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종년 축제에서 얻어낼 게 얼마나 많은데.’
한지혁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 어떻게 하게?”
“서군을 데리고 승리할 거야.”
“……뭐, 힘내라. 응원은 해주마.”
한지혁은 헹, 하고 코웃음을 쳤다.
“이번엔 네가 실패하는 걸 볼 수도 있겠네.”
“아주 지라고 제사를 지내지 그래?”
내가 그를 노려보자, 한지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더니 내 코를 가볍게 쥐고 밉살맞게 웃었다.
“역시 이그리츠가 필요하면 말하고.”
“저때 앙 해. (절대 안 해.)”
눈을 가늘게 뜬 나는 그의 손을 쳐냈다.
‘두고 보자.’
아무리 서군의 평판이 안 좋다지만 그래도 황군이다.
써먹지 못할 정도는 아니겠지.
거기다 난 불리한 상황에서 전략을 짜는 건 이골이 난 사람이라 이거야.
“과제 날까지 앞으로 열흘 남았지?”
“그래.”
“그때까지 서군을 쓸만하게 만들겠어.”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 * *
‘포기할까.’
다음 날, 서군 병영에 들어온 난 맹렬한 포기 욕구를 느꼈다.
분명히 서군의 훈련날인데, 그런데…….
‘훈련하는 놈이 없네?’
대자로 자는 놈이 두엇.
그늘에 누워서 책을 읽고 있는 놈이 하나.
몇 명이 모여 저질스러운 농담을 주고받고 있지 않나.
개판도 이런 개판이 없었다.
‘저건 또 뭐야?’
잔디 위에 웬 다갈색 머리의 남자가 누워 있었는데, 곁에 앉은 시녀의 머리카락을 매만지고 있었다.
그냥 앉아 있는 게 아니라…….
“아이, 이러지 마시라니까요. 저 화났다고요, 경.”
“너밖에 없다니까.”
“거짓말. 그럼 낸시와 데이트를 한 남자는 누군데요?”
“글쎄, 나야 모르지.”
“또 이렇게 어물쩍……. 몰라요, 이번엔 그냥 못 넘어가요.”
“그럼 이렇게 귀여운 얼굴로 화를 내면 안 되지.”
“몰라 몰라~.”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시녀는 분명히 화를 내고 있었는데, “치…….” 하며 입술을 삐죽였다.
남자와 시녀의 사이가 조금씩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아이, 여긴 너무 밝잖아요~. 사람도 있고~.”
“난 너밖에 안 보이는걸.”
“그치만~.”
“아무도 없다니—”
“뭐해?”
내가 말하니 가까워지던 두 사람이 흠칫했다.
시녀가 멈칫하자, 남자는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휘휘 저었다.
내 쪽은 쳐다도 보지 않는다.
“방해하지 말고 가라.”
“뭐 하는데?”
“보면 몰라? 꺼져.”
“그럴 수야 없지.”
“이게 진짜.”
그제야 남자가 인상을 찌푸리며 내게 고개를 돌렸다.
햇빛을 받아 윤이 나는 다갈색 머리칼.
부드러운 선으로 떨어지는 눈매.
날카로운 콧날.
딱 좋은 자리에 자리 잡은 도톰한 입술.
유혜민의 세계였다면, 거리에 나가는 즉시 기획사 명함을 잔뜩 받았을 외모의 사내였다.
‘완전히 아이돌 상이네.’
한지혁과 그룹했으면 돈을 쓸어 담았겠다.
남자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뭐야, 너.”
어린애가 병영에 있으니 기가 막힌 모양이었다.
“누구야, 너?”
“누구겠어?”
“또 어떤 멍청한 놈이 애를 연병장에 데려왔어?”
“자기 상관 몰라보는 멍청이도 있는데, 애 데려오는 멍청이쯤이야.”
“……상관?”
“응, 상관.”
시녀가 먼저 용수철 튀어 오르듯 벌떡 일어났다.
“서, 서군 원화이신가요?!”
얼마나 놀랐는지 새된 목소리였다.
그 후에야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소란에 놀란 사람들도 이쪽을 쳐다봤다.
그 사이로 키가 훌쩍 큰 20대 초반 남자가 엄청난 속도로 달려왔다.
“워, 원화!”
복장을 보아하니 이 자가 서군의 상장군인 모양이다.
“기별도 없이 여긴 무슨 일이십니까. 인사 자리는 차차 만들 생각이었습니다. 아, 일단─”
“응, 일단 머리부터 박아.”
아빠가 그랬는데, 원래 이런 상황에선 제일 윗놈을 조지라고 했다.
“그리고 풍기 문란, 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