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2화. (162/390)

162화.

서군 기사 중 하나가 발끈하여 입을 열었다.

“무슨 말씀을─!”

“틀린 말이라도 했나?”

다른 중앙군 기사가 히죽거리며 물었다.

소리치던 서군 기사가 움찔, 입을 다물었다.

그 꼴을 본 중앙군의 기사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중앙군 기사들은 죄다 유명한 사람들이네.’

무예로는 정평이 난 자들이었다.

고대 몬스터를 잠재웠다는 신성 기사, 딕페로.

창술의 귀재, 샴.

타 대륙 황제 직속 기사로 그 실력을 인정받아 망명 후 작위를 받은, 서호.

아직 원화군 임에도 ‘1등급 판정’을 받은 대단한 기사들이다.

당연히 서군 기사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실력이었다.

서군 기사들은 중앙군의 위세에 고개를 수그렸다.

중앙 원화는 그들 사이에서 은근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중앙군의 상장군이 쯧쯧, 혀를 차며 말했다.

“다른 곳에 정신 팔 시간에 정진하여라. 거적때기 같은 갑주를 걸쳤어도 ‘진짜’는 태가 나는 법이거든.”

서군의 표정이 점점 더 일그러졌다.

‘서군은 가짜라 거적때기를 걸치면 뒷골목 건달 나부랭이로 보인다?’

노골적으로 서군을 낮잡아 보는 말이었다.

중앙군 기사들이 실린과 함께 우리를 지나쳤다.

그때,

“중앙군은 멈추시오.”

─내가 말했다.

중앙군 기사들과 실린이 나를 돌아봤다.

나는 서군의 사이로 걸어 나와 실린과 마주 보았다.

“인사는?”

내 말에 중앙군의 상장군 조윅 샤토브리앙이 “아아.” 중얼거렸다.

그리곤 대충 허리를 굽혔다.

“서군 원화를 뵙습니다. 원화로 임명된 첫해부터 실로 고생이 많으십니다.”

그러며 서군을 쳐다보고 픽, 실소를 흘린다.

서군 같은 쓰레기들을 맡은 게 가엾다는 뜻이었다.

그러고 중앙 상장군은 고개를 다시 들었다.

아니, 들려고 했다.

내가 그의 머리를 잡고 누르지 않았더라면.

“……!”

중앙 상장군이 흠칫했다.

중앙군의 다른 기사들도, 실린도 굳은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한 손으로 중앙 상장군의 머리를 꾹, 누르며 말했다.

“기억해. 인사를 할 때 허리의 각도는 이 정도야.”

“……!!”

중앙 상장군의 귓불이 새빨갰다.

모멸감에 떨리는 것 또한 선명하게 느껴진다.

중앙 상장군인 조윅 샤토브리앙은 실린의 친척 오라비였다.

실린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무례를 그만두세요!”

“중앙군이 서군에게 무례할 적에도 지적해주셨다면 좋았을 텐데요.”

“뭐, 뭐라고요?”

나는 중앙 상장군의 머리를 놓고, 중앙 기사들을 쭉 돌아봤다.

“입들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서군은 이런 모욕에 참았을지 몰라도─”

“…….”

“…….”

“…….”

“나는 아니야.”

중앙군의 기사들이 흠칫했다.

나는 크로노스 아스트라의 손녀.

아스트라의 간판만으로도 저들의 입을 다물게 하기엔 충분했다.

실린은 날 냉랭한 눈으로 쳐다봤다.

“제 기사들의 말이 그리 불편하셨는지 몰랐어요. 으레 있는 조언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요?”

“네. 용서하세요. 제 기사들은 서군의 성장을 위해 한마디 했을 뿐, 별다른 감정은 없었답니다.”

그러곤 서군을 힐끗 쳐다보고 말을 잇는다.

“앞으론 조언할 일이 없으면 좋겠군요.”

서군이 개판만 아니었더라면 그런 조언을 할 필요도 없었을 거라는 뜻이었다.

난 빙그레 미소 지었다.

“네.”

“정리되었으면 이만.”

“아, 저도 ‘조언’ 하나 하죠.”

“아뇨, 저희는 따로 조언을 듣지 않아도 될 실력인지라. 조언은 넣어두시는 게─”

“암만 값비싼 갑주를 걸쳐도 ‘진짜’는 태가 나는 법이랍니다.”

“거적때기 같은 갑주를 걸쳤어도 ‘진짜’는 태가 나는 법이거든.”

실린과 중앙군 기사들의 표정이 확 굳었다.

나는 생긋 미소 짓고 말했다.

“그만큼 고가의 갑주를 걸쳤는데도 태는 안 나는군요. ……안타깝게.”

그러고 나는 홱, 몸을 돌렸다.

등 뒤로 매서운 시선이 느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뜬 서군 기사들을 쳐다봤다.

“뭐해?”

“……예?”

“가자.”

“……예.”

기사들이 하핫! 웃으며 나를 쫓아왔다.

등 뒤에선 여전히 실린이 날 찢어 죽일 것처럼 노려보고 있는 것 같았지만, 난 무시하고 걸었다.

코너를 지나, 사무실에 도착했다.

마침 한지혁이 대기 중이어서 난 그와 함께 사무실로 들어왔다.

내 몫으로 마련된 사무실은 아직 정리가 안 되어 있었다.

‘임명식보다 이르게 들어왔으니까.’

궁인들이 정리해놨지만, 아직 책상엔 전임 원화의 물건들이 있었다.

‘좀 더 정리해야겠는걸.’

궁정 하인에게 청소를 지시하고 있는데, 뺨에 쿡쿡 시선이 박혔다.

힐끗 돌아보니 서군 기사들이 날 훔쳐보고 있었다.

“왜?”

“아, 아닙니다.”

“할 말 있으면 빨리해.”

“그…….”

부대장들이 서로 눈치를 보았다. 한참을 그러다가 고르고가 대표로 입을 열었다.

“가, 감사합니다.”

“뭘?”

“그러니까 저희를 감싸주신 점이…….”

“그럼 내 새끼들 감싸지, 남의 새끼 감싸겠어?”

서군 기사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나는 크게 한숨을 내쉬고 그들을 쳐다봤다.

“그리고 포인트는 그게 아니잖아?”

“예?”

“감사하는 것보다 무시당한 것에 분노하는 게 먼저잖아.”

“그야 그렇지만…….”

“그래, 그렇지만 어쩔 수 없지?”

나는 무감한 표정으로 머뭇거리는 기사들을 바라봤다.

“실력이 없으니까. 서군이 엉망인 건 사실이니까.”

“…….”

“…….”

“…….”

“계속 지는 게 무서운 이유가 뭔지 알아?”

내가 묻자 기사들과 고르고가 “어…….” 하며 신음했다.

고르고가 말했다.

“평판이 떨어져서?”

“틀렸어. 지는 것에 익숙해지는 거야.”

“…….”

“남들이 흉보는 소리에 익숙해지고, 자신도 못났다고 인정하는 거야. 결국 스스로 선을 긋게 돼.”

“…….”

“저 사람은 나보다 나은 사람, 나는 못난 사람. 그러니까 결코 이길 수 없다고 나 스스로 한계를 만들지.”

첫 번째 삶의 내가 그랬듯이.

달리아는 결코 이길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해버리는 거다.

“그런데 그거 자존심 상하지 않니.”

“…….”

“…….”

“…….”

“너희에겐 그런 자존심도 남은 것 같지 않다만.”

기사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대표로 말하던 고르고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나는 하인이 먼지를 닦은 테이블에 서류를 올려놨다.

“너희는 계속 그렇게 생각해. 나는 아니야.”

“……예?”

“네?”

“난 이번 구울 토벌에서 서군이 중앙군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할 거야. 너희와 달리 난 패배에 익숙해지지 않았거든.”

기사들이 조용해지자, 하인들이 우리의 눈치를 보았다.

나는 가만히 자리에 앉았고, 기사들이 말했다.

“저희는 연무장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래.”

그들이 묵묵히 연무장으로 향했다.

한지혁은 그들의 뒷모습을 힐끔거리다가 내게 속삭였다.

“너무 심한 것 아냐? 아직 스무 살도 안 된 꼬맹이들이라고.”

“글쎄.”

“뭐?”

“난 이제 타오르기 시작한 것 같은데.”

기사들의 눈에 미약한 불씨가 튀기 시작한 것을 난 보았다.

‘저들도 무인이야.’

기사라고.

지고 싶은 사람은 없다.

그저 패배에 익숙해졌을 뿐, 무인 특유의 승리를 향한 욕망은 가슴 속에 잠들어 있던 것이다.

그리고 숨겨진 불씨는 의외로 쉽게 깨울 수 있었다.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첫 번째 삶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나는 서류를 넘기며 미소를 머금었다.

한지혁이 물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건데?”

“돈 벌어야지.”

“돈?”

“응.”

“어떻게……? 대출이라도 받으려고?”

“생각해둔 게 있어.”

난 신성계 가호를 가진 원화처럼 기사들을 강하게 만들어주진 못한다.

‘하지만 좋은 무구와 좋은 지휘관을 데려올 순 있지.’

* * *

중앙군 행정관으로 들어온 실린이 테이블에 있던 물건을 내던졌다.

쾅─!

쨍……!!

날카로운 파열음이 울려 퍼지자, 중앙군의 상장군이 서둘러 그녀를 달래기 시작했다.

“워, 원화.”

“너희는 내가 저깟 더러운 피에게 무시당하는데 어째서 가만히 있는 거야!!”

실린이 비명 같은 고함을 내질렀다.

중앙군의 상장군과 기사들이 식은땀을 흘렸다.

“하, 하지만…….”

“그 얼굴에 장갑이라도 던져줬어야지! 나의 원화에게 무례한 것은 참을 수 없다고 검을 꺼냈어야지!!” 

“아무리 엉망인 서군을 맡았다고 해도 원화입니다. 원화군의 기사인 이상 함부로 대적할 수는…….”

실린이 노려보자, 상장군이 움찔 말을 삼켰다.

저렇게 흥분하면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상장군이 기사들을 향해 눈짓하자, 기사들이 조심스럽게 문을 나섰다.

문 안에선 상장군이 달래는 소리와 실린의 비명이 계속해서 새어 나왔다.

기사들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 번 터지면 감당할 수가 없으니…….”

“저런 사람을 세간에선 점잖고 우아하다고 알고 있으니 더 답답하지.”

“며칠은 난리겠구만.”

기사들이 으으, 하며 고개를 저었다.

“대체 원화에게 어떻게 검을 들이밀라는 거야?”

“정말 그랬다간 피 보는 건 우리였을 걸. 남군 원화를 봐라. 제 명에 따른 것뿐이었는데, 상황이 악화되니 자긴 홀랑 빠졌잖아.”

“됐고, 저 아가씨의 성질을 어떻게 풀어줄 지나 생각해봐라.”

“골치 아프네…….”

기사들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행정관 안.

상장군 조윅이 실린의 어깨를 끌어안고 다독였다.

실린은 그의 품 안에서 훌쩍이고 있었다.

상장군이 말했다.

“더러운 피가 아무리 날뛰어봐야 감히 중앙군을 이길 수 있겠느냐?”

“하지만 오라버니……!”

“백수정 하나 안 달린 이 빠진 검으로 구울을 몇 마리나 잡을 수 있으려고.”

“……맞아요. 아무리 잘난 척해도 결국 구울 토벌에서 들통나겠죠. 에릴로트 아스트라는 속 빈 깡통이라는 게 말이에요.”

“그래, 그래.”

조윅이 손끝으로 실린의 뺨을 문질렀다.

“울지 마라. 예쁜 얼굴이 상하겠구나.”

“으응.”

실린이 한껏 칭얼대며 조윅에게 매달렸다.

‘오라버니가 있는 한 나는 지지 않아.’

조윅의 가호는 <과거를 보는 눈>.

상대방의 과거를 볼 수 있는 가호였다.

‘이 가호로 몇 번이나 위기를 넘겼어.’

과거를 보면 상대의 전략까지 모두 읽어낼 수 있으니까.

남군 예비 원화전에서 리카를 원화로 만든 것도 조윅이었다.

그가 변장하고 참전하여 상대측의 전략을 읽어낸 것이다.

백 년에 한 명쯤 타고 태어난다는 아주 특별한 가호였다.

그러니 먼 친척으로 궁핍하게 살던 조윅을 상장군 자리에 앉힌 게 아닌가.

‘두고 봐.’

실린이 홱, 고개를 들었다.

“오라버니가 에릴로트 아스트라에게 가호를 사용해주면 안 돼요?”

“뭐?”

“그러면 그 계집애가 서군을 어떻게 움직일지 읽을 수 있을 게 아니에요?”

“황궁에선 가호를 사사롭게 쓸 수 없잖아.”

허가받은 자만이 ‘허가 범위 내에서’ 가호를 쓸 수 있다.

기사들은 훈련할 때 외엔 금제구를 달고 성내를 다닌다.

“부탁해요, 오라버니.”

“그러지 않아도 이길 수 있는 상대야.”

“혹시 모르잖아요. 게다가 서군은 돈이 급하잖아요? 혹시 몰래 제 조부에게 부탁해서 돈을 들여올 수도 있어요.”

“으음…….”

“알아내면 바로 황제 폐하께 고발할 수 있다고요. 서군은 구울 토벌에 참가하지도 못하고, 그 애는 원화 자리에서 쫓겨날 거예요.”

“실린.”

“귀여운 실린이 이렇게 부탁해도 안 되겠어요?”

실린이 양손을 모으고 입술을 삐죽였다.

조윅은 속으로 신음했다.

‘거절한다면 이 공주님이 어떻게 나올지 알 수가 없는데.’

조윅의 부모와 동생은 샤토브리앙 공작의 원조로 생활하고 있었다.

조금만 수틀려도 원조를 끊어버리겠다고 뒤집어질 게 뻔하다.

조윅은 실린의 어깨를 토닥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열일곱짜리에게 가장 노릇은 너무 어렵단 말입니다, 아버지.’

조윅이 말했다.

“기회를 노려보마…….”

“역시 제 편은 오라버니뿐이에요!”

실린이 조윅의 품에 파고들며 웃었다.

‘조윅…….’

그는 샤토브리앙 공작이 6년 전에 준 생일 선물이었다.

훤칠한 키.

아름다운 외모.

뛰어난 능력까지.

공작은 조윅이 성인이 되면 벗어나게 해주겠다고 했지만, 실린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오라버니는 평생 내 거야.’

실린이 오만한 표정으로 곤란한 듯 한숨짓는 조윅을 쳐다보았다.

* * *

이튿날, 오전.

조윅은 점심시간이라 한산한 틈을 타서 궁내로 들어갔다.

‘에릴로트 아스트라가 사무실에 있다고 했지.’

샤토브리앙 공작은 그에게 금제구를 약화시키는 특별한 마도구까지 내주었다.

어떻게든 귀여운 딸애의 소원을 들어주라는 뜻이었다.

조윅이 막 불꽃의 정원에 가까이 갔을 때였다.

안에서 물결치는 아름다운 금발의 여자아이가 나오고 있었다.

“중앙 상장군?”

아이는 책을 잔뜩 끌어안고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서군 원화.”

“네. 제게 볼 일이 있으신가요?”

“아뇨. 중앙 원화께 가던 길이었습니다만…….”

조윅이 슬쩍, 아이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실밥이 있군요.”

그 핑계로 접촉하는 순간이었다.

눈앞에 과거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무슨 방법으로 돈을 벌려는 건지…….’

생각하던 찰나.

“제게 다가오지 마세요.”

바람이 부는 밤.

조명이 은은히 펼쳐진 은방울꽃 정원에 선 스무 살 즈음의 여자가 보였다.

흩날리는 아름다운 금발.

초연한 시선.

금발이 흘러내린 가녀린 어깨.

고개를 숙일 때, 늘어진 속눈썹 한 올마저 가슴이 뛰게 고운 여자였다.

조윅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아, 아름다워…….”

“……?”

이 여자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설움을 참는 그녀의 표정에 가슴이 시린다.

‘시려? 아니.’

쿵. 쿵. 쿵. 쿵.

가슴 뛰는 소리가 엄청나게 크게 들렸다.

“어, 언니가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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