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5화. (165/390)

165화.

나와 서군 군사들을 바라보던 대장군이 말했다.

“들어와라.”

서군 군사들이 먼저 집무실로 들어가고, 나는 한숨을 흘렸다.

‘원화가 직접 고발하러 왔으니 헐렁하게 처리하진 못하겠지.’

부정 서임의 관련자들은 국법의 철퇴를 맞을 것이다.

나도 막 방에 들어가려던 참이었다.

등 뒤에서 실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생각보다 멍청하군요.”

“…….”

돌아보자 실린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나 모르게 중앙군의 자금을 빼돌려서 구울 토벌에 나서려 한 일. 제대로 처벌하려고 했는데, 그럴 필요 없겠어요.”

“하려거든 하세요. 처벌당할 일은 없겠지만.”

“뭐라고요?”

실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중앙 상장군이 합의해서 결정했으니 문제가 없잖아요.”

“중앙군의 총책임자인 내 인장이 들어가지 않은 결정이었어요!”

“그럼 어디 군법에 맡겨보시든가.”

“아뇨. 그럴 필요가 없어졌어요.”

실린이 내게 천천히 다가왔다.

그러곤 생긋 웃으며 내 어깨를 살짝 털어주었다.

“구울 토벌은 군사들의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한 과제랍니다.”

“…….”

“서군은 가뜩이나 수가 부족할 텐데 ‘서군 원화가 직접 기사를 고발’하는 기막힌 짓까지 했어요.”

“…….”

“서군이 가엽네요. 군사를 지켜야 하는 원화라는 자가 제 등을 지켜줄 동료마저 없애버렸으니.”

내 패배는 예정되어 있다는 말이었다.

실린은 다정한 체 속삭였다.

“중앙군에게 훔쳐 간 자금은 서군 군사들의 장비에 쓰셔요. 가여운 서군을 위해 적선한 셈 칠 테니.”

실린이 오만한 미소를 머금으며 내게서 떨어졌다.

나는 그녀의 손을 확, 잡아챘다.

“뭐 하는 거예요!”

“자꾸 필요 없는 말씀을 하시는 걸 보면 조언을 정말로 좋아하는 것 같아서, 저도 조언을 하자면요.”

“이봐요.”

“남의 몸은 함부로 만지지 마세요. 그러다 어떤 상장군처럼 약점이 잡혀서 쪽박 차면 어쩌시려고.”

“무슨 그런 천박한 말을……!”

나는 실린의 손을 놓고, 그녀에게 바짝 다가갔다.

“참자 참자 하니까 삐─가 삐─은 상황이 삐─해서 기분이 삐─같잖아. 이 삐─같은 삐─아.”

“무, 무슨……!”

원화들과 기사들의 표정이 새파래졌다.

다들 좋은 집안에서 귀하게 자란 아가씨, 도련님들이다.

이런 쌍욕은 들어본 적이 없을 터였다.

북군 원화가 귀를 씻고 싶다는 듯, 떨리는 손으로 귓불을 매만졌다.

동군 원화인 세바스티아도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저들 중 가장 곱게 자랐음이 분명한 실린은 뻣뻣해져 있었다.

나는 두 손을 모으고 해맑게 웃었다.

“천박한 말이라면 이런 거죠?”

“……!”

“아이, 무서워라.”

나는 “그럼.” 하고 생긋 웃고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 걸린 거울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실린 샤토브리앙이 보였다.

* * *

부정 서임에 관련된 자들이 모두 투옥되었다.

어찌나 수가 많은지, 남은 사람을 모아놓자 휑해 보였다.

연무장을 달리던 군사들이 단상 위에 있는 에릴로트를 힐끔거렸다.

“이래도 되는 거야?”

“뭐가?”

“구울 토벌이 앞으로 일주일도 안 남았는데 사람이 얼마나 빠졌냐고. 가뜩이나 위험한 토벌인데.”

“그렇기야 하지…….”

“대체 생각이 있는 거야? 칫, 마스코트면 얌전히 광고판이나 되어줄 것이지 별 헛짓을 해서─”

사내들이 투덜거리고 있을 때였다.

앞서 달리던 사내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계속 부정 서임 받는 자들이 판을 치면 좋겠다는 거냐.”

이세즈였다.

수군거리던 사내들이 흠칫 앞을 바라봤다.

“아니, 내 말은 꼭 지금이어야 했느냐는 거지. 구울 토벌이 끝나고 고발했어도 될 일이잖아.”

“그랬다면 우리가 원화의 진심을 의심했겠지.”

“……어?”

“구울 토벌 전에는 가만히 있다가, 토벌이 끝나고 기사를 고발하는구나. 제 입맛에 맞는 기사들을 데려오려고 그러는 거겠지.”

“이세즈.”

“─그렇게 생각할 것 아냐?”

수군거리던 사내들이 헛기침했다.

다른 군사들도 이세즈와 사내들을 힐끔거렸다.

이세즈는 묵묵히 달리며 말했다.

“구울 토벌 전이니까 믿을 수 있는 거다.”

“그야…….”

“저 어린 원화가 자신의 이익을 포기해서라도 이 군을 바꾸기로 했다는 것을.”

“…….”

“…….”

투덜거리던 사내들이 조용해졌다.

가장 앞에서 달리던 부대장들이 소리쳤다.

“위로 열 자리가 비었다! 실력을 증명하기만 하면 너희 중 누군가는 서임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지금 실력을 증명하면 너희들의 인생에도 위로 향할 계단이 열린다!”

병사들의 눈에 이채가 깃들었다.

* * *

‘좋아.’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썩은 동태 같던 병사들의 눈에 의지가 엿보인다.

아빠는 군의 사기를 무엇보다 우선했다.

모스코가 소속된 정예대에게 늘 선봉을 맡긴 이유가 그것이었다.

적군과의 엄청난 격차를 아군에게 증명하기 위해.

그건 곧 사기로 연결되어, 아빠의 군은 패배를 몰랐다.

내 곁에 있던 한지혁이 씩, 웃었다.

“실력도 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던 놈들을 빼내고, 군의 사기를 얻어왔구만. 역시 대단한데?”

“하지만 사기가 다는 아니지.”

“뭐?”

“의지가 넘쳐도 실력이 못하다면 승리할 수 없잖아.”

“……설마 너 진짜로 우승을 노리는 거야?”

나는 무슨 말을 하느냐는 듯 한지혁을 쳐다봤다.

“당연하지.”

“맙소사, 난 네가 포기해서 기사들을 고발한 줄 알았다고.”

“왜?”

“부정 서임한 기사들이 빠져서 수적으로 너무 열세잖아!”

“부족한 머릿수는 채워 넣으면 되지.”

“다른 군에서 벌써 기사들을 단속하고 있을걸.”

“뭐든 방법은 있어. 그걸 생각해내는 게 사령관의 역할이고.”

일단 신성 기사인 이세즈의 실력을 끌어올려야 한다.

이세즈가 어느 정도까지 실력을 향상할 수 있느냐에 따라서, 필요한 신성 기사의 수가 줄어드니까.

나는 확성용 마도구를 들고 소리쳤다.

“훈련은 여기서 마무리한다. 모두 단상 앞으로 모여라!”

이글이글한 눈으로 달리던 병사들이 멈추었다.

그들은 재빨리 단상 앞에 열을 짓기 시작했다.

‘첫날과는 비교도 안 되게 빠르네.’

나는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고르고.”

부르기 무섭게 고르고가 흠칫 튀어나왔다.

‘뭐야, 길이 바짝 들었네.’

하기야 내 특기가 고발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저 비리의 결정체 같은 고르고가 긴장할 만도 했다.

나는 고르고에게 양피지를 건넸다.

“그대로 부대를 새로 편성해. 앞으로 나흘간 부대마다 훈련을 다르게 진행할 거야.”

고르고가 양피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확성용 마도구로 병사들을 호명했다.

병사들은 이름이 불릴 때마다 당황스러운 얼굴이었다.

궁병이던 자가 창병으로 가기도 하고, 마도병이던 자가 기마병으로 이동하기도 했으니까.

“내, 내가 궁병이라고?”

“말도 안 돼! 난 마도병이라고, 그런데 저 엄청난 장비를 착용하고 선발에 서란 말이야?”

다들 황당한 모양이지만, 내가 더 황당했다.

‘마법은 엄청나게 약해서 중간에 마법이 사라지는 주제에, 명중률이 90퍼센트가 넘는 놈이 대체 왜 마도병으로 빠진 거야?’

이전엔 누가 부대를 편성했는지 기가 막힐 따름이다.

부대 편성을 마친 고르고가 물었다.

“훈련 내용은 새로운 부대장들에게 맡기면 되겠습니까?”

“아니, 훈련을 지휘할 게스트는 섭외해놨어.”

“예?”

내 말에 고르고는 물론, 병사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씩 웃고서 말했다.

“들어오세요!”

연무장 안으로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아스트라의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진 로브를 두른 소년, 소녀들이!

“전 부대의 몬스터학을 교육할 리앙틴 아스트라다.”

리앙틴이 롤빵처럼 돌돌 말린 머리를 휙, 넘기며 말했다.

“기마 부대의 교육은 내가 맡게 되었다. 로레이나 아스트라다.”

수인화의 가호를 가져서 동물과 소통이 가능한 로레이나.

그녀는 짜증 나서 죽을 것 같은 표정이었다.

“아아, 바람의 숨결도 느끼지 못하는 궁병들을 교육한다니. 이것도 조부님이 내게 주신 시련이겠지……. 크리스티 아스트라란다.”

흑염룡 사촌 언니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창병은 내가 맡는다. 난 아스트라에서 가장 근력이 강하다고! 으하하! 엘먼 아스트라다!”

“디오네라 다음이겠지. 마도병은 내가 맡게 되었다. 밀란 아스트라야.”

“카라, 리지 아스트라. 우린 쌍둥이고 보병에게 보법을 가르칠 거야. 그렇지, 리지?”

“그렇지, 카라!”

제국의 미성년 가운데 최강들만 모아두었다는 아스트라의 직계 3세들.

그들이 이 나흘간 서군을 쓸만하게 만들어줄 거다.

그리고…….

“헉!”

“저, 저 사람……!”

마지막으로 들어온 사람을 본 병사들이 눈을 크게 떴다.

아스트라의 직계 3세들은 많이 드러나 있지 않지만, 이 사람은 다르니까.

마지막 사람이 이세즈에게 다가갔다.

“네가 이세즈 카람?”

“……그렇습니다.”

“내가 전담 교육하게 되었어. 에릴로트가 하나뿐인 신성 기사에게 기대가 크다고 했거든.”

“…….”

“셀레네 아스트라야.”

최강의 신성계 가호 <모성애>의 소유자.

신관들마저 상대가 안 되는 신성 가호의 최강자.

셀레네 아스트라였다.

때마침 중앙군이 서군의 연무장을 지나고 있었다.

무구를 착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가호 훈련을 위해 결계존으로 이동 중인 모양이었다.

중앙군이 크게 술렁였다.

“아, 아스트라의 문양입니다.”

“저들이 서군에 들어오는 거야?”

“설마. 아스트라 공작이 미치지 않고서야 직계들을 황군에 내줄 리 없잖아.”

가장 앞에서 그들을 이끌고 가던 중앙 원화 실린이 날 노려봤다.

“가문의 사람을 사사로이 황궁에 들이다니요.”

나는 생긋 웃고 말했다.

“황궁의 허가는 얻었답니다. 앞으로 나흘간 훈련을 도울 게스트들이에요.”

실린의 입매가 우그러졌다.

“잘해보세요.”

그러더니 “아.” 하며 고개를 모로 꼬았다.

“직계 간에 그리 사이가 좋은 줄은 몰랐네요. 가주의 명에 어쩔 수 없이 나선 분들이 얼마나 대단한 가르침을 주실진 모르겠지만.”

아스트라의 직계들이 한데 모여 중앙 원화를 바라봤다.

팔짱을 낀 로레이나가 맨 앞으로 나와서 말했다.

“가문 내부에서 서로를 견제하는 건 사실이죠.”

“부디 황군을 교육할 땐 가문의 사사로운 일은 잊으셨으면 좋겠네요.”

실린의 말은 딱 이런 뜻이었다.

사이 나쁜 너희들이 얼마나 대단한 교육을 해주겠어?

직계를 써먹도록 허가한 아스트라 공작도, 그걸 요청한 에릴로트 아스트라도 멍청하긴 마찬가지구나.

─라는 뜻.

로레이나의 피부에 짐승의 털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다른 직계들의 눈에도 아스트라 특유의 날카롭고 어두운 살기가 감돌았다.

로레이나가 말했다.

“우린 아스트라.”

“…….”

“가문 안에서 그 어떤 복마전이 일어나더라도, 우리 아스트라는 적에겐 단 하나의 태산입니다.”

그래, 우린 아스트라.

크로노스 아스트라가 지휘하는 마물이다.

그 언제라도 가주가 명할 때면 우린 하나의 마물이 되어 적의 목덜미를 물어뜯는다.

나는 단상에서 내려와 사뿐사뿐 직계들에게 향했다.

나를 둘러싼 직계 3세들이 흡사 마물과 같이 새빨갛게 빛나는 눈으로 실린을 쳐다봤다.

내가 말했다.

“그리고 아스트라는 결코 적에게 진 적이 없지.”

실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입술을 꽉 깨문 그녀가 휙, 고개를 돌리고 걷기 시작했다.

중앙군이 떠난 뒤, 로레이나가 말했다.

“재수 없는 샤토브리앙 따위에게 지지 마라.”

“당연히.”

“……백수정도 약속대로 절반가에 거래해주고.”

“물론이에요.”

그렇게 훈련이 시작되었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병사들의 곡소리를 음악 삼아 나는 차를 마셨다.

“흐으응~.”

흥얼거리며.

‘겨우 며칠로 병사들이 엄청난 실력을 갖추게 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아.’

내 지휘에 제대로 움직일 수만 있게 되면 된다.

그리고 난 이번 종년 축제에 나와 내 성(Family name)을 우승자의 깃발에 박아넣을 것이다.

* * *

쨍─!

챙강─!!

원화들이 모이는 1층 온실에서 소란스러운 마찰음이 들려왔다.

중앙 원화인 실린이 씩씩대며 잔을 마구잡이로 내던진 것이다.

“아스트라를 끌어들였어! 아스트라를! 내 원화군에……!”

북군 원화는 어쩔 줄을 모르고 실린을 쳐다봤다.

이럴 때면 실린을 진정시키는 남군 원화가 조용했다.

남군 원화 리카 델프르는 여상하게 찻잔을 들었다.

북군 원화가 우물쭈물 중앙 원화에게 말했다.

“아무리 아스트라가 도운다 한들 고작 나흘이에요.”

“하지만……!”

“나, 나흘로 뭘 할 수 있겠어요? 오합지졸에서 조금 나아질 뿐이겠죠.”

“크로노스 아스트라가 제 손녀에게 미쳐서 직계들을 황군으로 들여주면?”

“설마 그럴 리가─”

“그럴 수도 있겠죠.”

남군 원화의 말이었다.

북군 원화가 당황해서 남군 원화를 쳐다봤다.

‘뭐하는 거예요! 진정시키진 못할망정.’

남군 원화가 우아하게 찻잔을 내려놓으며 중앙 원화를 힐끔 쳐다봤다.

“에릴로트 아스트라에게 말 한 마디 잘못했다고 연말 파티에서 저를 완전히 깔아뭉갰다고요. 저만 깔아뭉갰나요? 중앙 원화인 실린, 당신도 망신을 줬죠.”

“그래서요?”

“뭐……. 정말 말씀대로 아스트라의 직계 3세들이 서군에 들어온다면, 이번 종년 파티 우승자는 서군 원화가 될 거라는 뜻이에요.”

“델프르 영애……!!”

남군 원화는 쿡쿡 웃으며 일어났다.

“망신을 당하기 전에 종년 축제 과제에서 물러나는 게 어떠세요?”

“나, 남군 원화, 그만하세요…….”

북군 원화가 우물쭈물 말리자 남군 원화는 흥, 콧방귀를 뀌었다.

남군 원화가 자리를 나서자 북군 원화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군이 적으로 돌아서면 더 무섭다더니…….’

“저, 실린 양…….”

“그럴 순 없어. 그따위 계집애에게 질 순 없어. 절대로. 질 수는 절대…… 그 계집애가 없으면?”

“……네?”

중앙 원화의 눈이 음울하게 짙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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