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7화. (177/390)

177화.

에릴로트는 들은 체도 않고 마차에서 내렸다.

다른 원화들도 마찬가지였다.

부들부들 떨던 실린은 이를 악물었다.

‘내가 가만둘 줄 알아?’

주먹을 꽉 말아쥔 실린이 마차를 나섰다.

황궁은 밤이었음에도 화려했다.

종년 축제의 하이라이트, 원화군의 과제를 마치고 돌아온 이들을 맞이하기 위해서였다.

황제궁의 시종장이 원화군을 맞이했다.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원화들과 각 군의 1등급 기사 계급(각 군마다 최정예 10명)까지 대연회장으로 함께 가시지요.”

에릴로트가 물었다.

“다른 병사들은 어찌하나요? 이들 모두가 구울 토벌에 크게 기여를 한 제국의 동냥인걸요. 영광을 함께 할 수 없나요?”

실린은 상냥한 척 말했다.

“이 용맹한 병사들은 이 축제가 끝날 때까지 제국 전역의 마경을 통해 중계될 거랍니다.”

그러고 보니 황궁 공중에도 송신용 마도구가 잔뜩 깔려 있었다.

“물론 병사들도 순위식을 지켜볼 수 있게 마경이 설치된 곳으로 옮겨갈 것이고요.”

에릴로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북군 원화는 실린을 힐끔거리며 다른 원화들에게 속삭였다.

“황궁에 오자마자 태도가 돌변하네요.”

“한두 번 보는 일도 아니잖아요? 저 모습에 다들 속는 거죠.”

세바스티아도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중계 중입니다. 조심들 하세요.”

“예…….”

“네.”

원화들과 각 군의 1등 기사 계급, 총 55명이 외궁으로 이동했다.

나라의 큰 축제가 열릴 때만 개방되는 황궁의 대연회장.

700명을 수용할 수 있다는 거대한 대연회장은 사람으로 북적였다.

귀족들은 원화군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저 자가 이세즈? 그 엄청난 신성력의 기사지요?”

“예……. 실제로 보니 상당한 미소년이로군요.”

“조윅 샤토브리앙이에요, 어머니!”

“그래, 그의 무예가 굉장했지.”

“세바스티아 비페리! 기사보다 용맹한 원화! 소녀의 몸으로 구울을 얼마나 많이 쓰러뜨렸는지 보셨습니까?”

“중앙군의 딕페로는 고대 몬스터를 혼자서 잠재웠다고 하더니…… 허풍이었나 봅니다.”

“카진 라비오! 저기 카진 라비오입니다! 혼자서 구울 열을 쓰러뜨렸다고요. 보셨어요?!”

귀족들은 이번 종년 축제 과제에 크게 흥분했다.

고대 몬스터급의 크림슨 구울을 무너뜨리고 토벌에 성공한 소년병들!

위기를 뚫고 타국의 귀빈들과 백성들에게 제국의 국력을 훌륭히 증명했다.

원화군이 황제의 앞에 무릎을 굽혔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곤 입을 열었다.

“힘든 과제를 잘 이겨내 주었다, 제국의 동냥들이여.”

가장 앞에 있던 실린이 생긋 미소 짓고 외쳤다.

“모든 것은 제국의 광영을 위해.”

그러자 원화군의 모두가 재창했다.

“제국의 광영을 위해!”

황제의 뒤에 있던 오셀리아 황비가 생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크림슨 구울과 같은 강력한 몬스터에게도 지지 않는 용기를 보였습니다. 이 아름다운 폐하의 군사들을 치하하여 주시지요.”

“그래. 대장군은 들으라. 원화군에게 음식을 아낌없이 베풀고, 신관들로 하여금 그들을 치유케 하며, 군사마다 마정석을 내릴 것이다.”

와─!!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병사들의 환호가 들렸다.

대연회장 내부에 있는 송신 마도구를 통해 황제의 말을 들은 것이다.

에릴로트는 속으로 픽 웃었다.

‘황제가 통 크게 쐈네. 마정석이라니.’

마정석은 마물의 시체에서만 얻을 수 있는 특별한 자원이었다.

마물이 가진 마력의 결정체 같은 것이라 손톱만 한 것도 어마어마하게 고가였다.

원화들이 웃는 얼굴로 시선을 나눴다. 

‘황제 폐하께서 이번 결과가 몹시 흡족하신가 봐요.’

북군 원화.

‘하긴, 원화군은 소년병들로 황제 직속 기사단의 후보나 마찬가지인데 크림슨 구울의 지휘를 받는 구울들을 물리쳤으니.’

남군 원화.

‘할아버님께서는…… 흡족하신 모양이군.’

세바스티아까지 소리 죽여 쿡쿡 웃었다.

실린만이 초조한 듯 황제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성과가 큰 과제에서 1위를 빼앗기다니.’

이렇게 되면 내년엔 중앙 원화 자리를 장담할 수 없다.

다시 남군으로 내려가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현 남군 원화, 리카는 물러나게 할 수 있다.

하지만…….

‘꼴찌를 한 남군을 지휘하라고? 절대로 싫어.’

이시론 공작이 허허, 웃으며 황제에게 말했다.

“하면 원화에게 과제의 감상을 들으시지요, 폐하. 이번 과제의 현장 감상을 귀족들 모두가 기대하고 있습니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짐 또한 매우 흥미롭구나.”

중앙 원화는 이때다 싶어 나섰다.

“중앙군의 원화인 저 실린 샤토브리앙이 설명하겠나이다, 폐하.”

그녀는 재빨리 일어나 귀족들을 둘러보고 고개를 숙였다.

“아시다시피 위험한 순간이 있었으나, 원화들의 기지와 군사들의 포기를 모르는 정신력으로 무사히 타파할 수 있었습니다.”

승부 내용 설명이야 자신 있다.

작년, 재작년 때도 맡은 일이었으니까.

늘 똘똘하게 상황을 설명하고, 공을 군사들에게 돌리는 현숙한 모습을 보였다.

그때마다 귀족들은 언제나 흐뭇한 얼굴로 실린을 지켜봤다.

“여러분께선 아마도 원화들이 크림슨 구울에게 잡혀갔던 상황을 궁금해하시겠지요. 그때만큼은 중계되지 않았을 테니까요.”

실린은 위풍당당하게 말을 이었다.

“상황은 긴박했습니다. 크림슨 구울은 인간화까지 할 수 있는 엄청난 몬스터였지요. 하지만 저는 이때야말로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실린이 에릴로트를 힐끔 쳐다봤다.

‘내가 가만두지 않는다고 했지?’

지금은 뻔뻔한 표정이지만, 두고 봐라.

곧 새파랗게 질려서 허둥거리게 될 테니.

“다만 아쉬운 것은 제 예측과 달리 원화들이 제대로 화합하지 않았다는 것이었지요…….”

실린이 부러 씁쓸한 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귀족들이 궁금해서 어쩔 줄 모르겠지?

그렇게 생각한 실린이 주변을 둘러봤다.

‘어?’

뭐지.

분위기가 이상했다.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자신을 볼 거라고 생각했는데…….

‘뭐, 뭐야. 저 눈빛은.’

자신을 보는 귀족들의 눈빛이 싸늘했다.

혀를 차는 사람도 보였다.

어느 귀족은 완전히 불쾌한 표정이었다.

원화군을 지나 황제 직속 기사까지 지냈던 모 백작이었다.

“그래서요.”

‘저 자는 중앙군 출신이었지. 늘 1위였던 중앙군이 이번엔 3위밖에 못해서 감정이 상했나?’

실린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체 대답했다.

“예, 상관의 명을 어긴다거나 인간으로서의 자긍심을 버리고 감히 몬스터와 거래하려는 원화가 있어서 당황했지만, 저는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위기를 헤쳐나가기 위해선…….”

하.

이번엔 공자들이 실소를 터뜨렸다.

실린은 그들의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밖에서 군사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 생각 하나로 두려움을 이겨내고…….”

어느 귀부인이 다른 귀부인의 귓가에 무어라 속삭였다.

그러자 이야기를 들은 쪽의 귀부인이 키득키득 웃었다.

“황궁의 지원군을 기대하지는 않기로 했습니다. 군의 위기를 이겨내도록 하는 것이 원화이고, 저는…….”

실린과 자주 만났던 또래의 영애가 한숨을 내쉬었다.

주변 영애들까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몇몇 소년들은 실린을 비웃고 있었다.

실린은 점점 더 불안한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해서 저는…….”

“하여 고귀한 목숨을 지킬 수 있다면 원화군 군사들의 죽음은 영광이라 하셨소─!!”

노클랑 선후작이 참지 못하고 고성을 내질렀다.

……뭐?

순간, 크림슨 구울의 동굴 속에서 자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까짓 군사들 알 게 뭐야!! 고귀한 나를 위해 죽을 수 있다면 영광이잖아─!!”

‘무슨…… 어떻게 그 일을…….’

실린은 얼른 부친과 모친을 쳐다봤다.

샤토브리앙 공작 부처는 모두 희게 질려서 굳어 있었다.

정말로 실린이 그런 말을 한 걸 들은 사람처럼.

‘아, 아냐. 그럴 리가 없어.’

그곳엔 송신용 마도구가 없었잖아.

그러니까 사람들이 들었을 리도 없는…… 설마.

‘부서진 송신용 마도구 더미가 있었어. 혹시 거기 멀쩡한 것도 섞여 있던 건가?’

에릴로트가 분명 그것을 확인했다.

그럼 혹시 그걸 알고 자신에게 그런 말을 이끌어 낸 것인가?!

온몸에서 핏기가 싹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순식간에 손발이 차가워진다.

실린은 샤토브리앙 공작 부처처럼 새하얗게 질려서 말했다.

“여, 여러분, 혹시 어떤 장면을 보셨다면…… 아니, 보셨을 것 같은데 그건 다 오해예요!”

“…….”

“…….”

실린이 절박하게 외쳤으나 사람들은 차디찬 표정이었다.

“에릴로트 아스트라가, 아, 아니, 서군 원화가 다 꾸민 일이라고요! 저를 압박하려고 일부러……!”

“…….”

“…….”

“다들 생각해보세요! 일부러 저를 궁지로 몰아서 그런 말을 하게 하려고, 제게 송신용 마도구가 고장 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주지 않은 거라고요!”

황제 곁에서 호위하던 기사가 입을 열었다.

피에르.

최연소로 황제 직속 기사단에 들어가, 역대 최단기간으로 황제의 호위를 맡게 된 실력자였다.

“폐하, 제게 그녀에게 질문할 기회를 주십시오.”

흑발과 단정한 외모의 미소년 풍이었음에도 위압감이 상당했다.

피에르는 중앙군 상장군 출신으로, 이전 기의 뛰어난 원화에게도 밀린 바 없는 자였기 때문이다.

‘어, 언제나 정중하게 날 중앙 원화로 불러주셨던 피에르 님이…….’

샤토브리앙 공작이 얼른 나섰다.

여기서 더 딸이 망신을 당하게 둘 순 없었다. 가문의 위신이 달린 일이었다.

“폐─”

그때, 황제의 호위대가 일시에 무릎을 굽혔다.

“폐하, 질문의 기회를 주십시오!”

귀족들과 타국의 귀빈들까지 모인 자리에서, 원화군 출신의 기사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황제로선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허하노라.”

황군의 최고참인 황제 직속 기사단이 실린을 싸늘하게 쳐다보았다.

피에르가 말했다.

“중앙 원화는 화면이 송출될 때와 아닐 때를 구분하여 기사들을 대하는 태도가 다른 것입니까?”

“원화의 역할은 소년병들을 지키고, 성장시키는 것. 중앙 원화께선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셨다고 보십니까?”

“언제나 그런 마음가짐으로 군사들을 대한 것이오?”

실린은 당황해서 입만 뻐끔거렸다.

‘왜, 왜 백기사님들(황제 직속 기사단의 또 다른 명칭)께서…….’

황제 직속 기사단의 서열 높은 기사들은 모두 실린을 귀여워했다.

엉망인 원화군을 그나마 사람처럼 보이게 해준다고, 고생이 많다고…….

“저, 저는…… 저는…….”

새파랗게 질린 실린이 주춤, 주춤, 뒷걸음질 치며 중얼거렸다.

“새, 생각해보세요! 이건 모두 서군 원화의 술수예요. 그렇지 않고서야 왜 크림슨 구울을 테이밍할 수 있으면서 저를 그 깊은 곳으로 끌고 갔겠어요?”

실린은 점점 더 다급해졌다.

늘 우아한 체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아, 그래! 서군이 크림슨 구울을 넘어뜨렸을 때가 테이밍하기 적기였을 거예요. 그런데 그때 안 하고 굳이 동굴까지 가서 했어요. 이상하지 않으세요?”

그 말에 귀족들이 술렁였다.

“그건…… 그렇기는 하지요.”

“예, 저도 그게 좀 의아했지요.”

분위기가 다른 쪽으로 바뀌려 하자, 실린이 재빨리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또 굳이 서군 원화는 굳이 세 원화가 보지 않는 곳에서 크림슨 구울을 테이밍했어요. 참으로 이상하지요?”

“그랬단 말인가……? 어째서?”

“예, 이상하기는 합니다.”

실린은 남몰래 씩 웃고 에릴로트를 힐끔 쳐다봤다.

“어쩌면 이미 테이밍했던 것이 아닐까요?”

소란이 커지기 시작했다.

“뭐라고?”

“설마……!”

실린이 황제를 바라보며 말했다.

“폐하! 저는 서군 원화의 수상한 모습에 극심한 공포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하여 다른 원화들의 뒤엔 다른 원화군이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부러 속내와 다른 말을 한 것입니─”

“그만 좀 하세요!”

남군 원화가 벌떡 일어나 말했다.

실린은 흠칫, 그녀를 쳐다봤다.

“중앙 원화인 제가 원화군을 대표하여 폐하께 사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자중하세요.”

“중앙 원화는 원화군의 의견을 대변하고 있지 않습니다.”

“남군 원화!”

“폐하, 서군 원화가 그 동굴에서 크림슨 구울을 테이밍할 수밖에 없던 이유는 중앙 원화에게 있습니다.”

남군 원화가 앞으로 나서며 고개를 숙였다.

실린이 비명 같은 고함을 내질렀다.

“그만하지 못하겠어요?!”

“중앙 원화는 서군 원화가 겨우 만든 크림슨 구울과의 거래 기회를 자존심 때문에 날렸어요.”

“리카 델프르─!”

“무시당한다고 생각해서 그 긴박한 상황에서도 자존심을 부렸지요. 군사들을 생각지 않고요! 결국, 크림슨 구울에게 공격당해서 죽을 뻔한 중앙 원화를 구한 것은 서군 원화입니다!”

“그만 하랬잖……!!”

“몇 번이나 서군 원화에게 도움을 받아온 그녀가 어째서 은인에게 거짓 누명을 씌우는지는 자명합니다.”

남군 원화가 실린을 노려보며 말했다.

“제게 그랬거든요. ‘자신보다 관심을 받는 자는 거슬린다’라고 말이에요.”

“……!”

파티장이 터질 듯 소란스러워졌다.

“하기야 그렇습니다. 서군이 크림슨 구울을 쓰러뜨릴 뻔하였는데, 굳이 중앙군을 끌고 와서 위기를 만든 것도 중앙 원화입니다.”

“솔직히 전투를 쭉 지켜본 저는 중앙 원화의 말을 전혀 신뢰할 수가 없습니다.”

“크림슨 구울 같은 강력한 몬스터는 곁에 두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힘인데 굳이 왜 이런 과제를 위해 소비하겠습니까?”

황제는 이마를 짚었다.

소란을 지켜보던 타국 귀빈들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려 있었다.

‘하다 하다 이제는…….’

그의 시선을 느낀 실린은 흠칫했다.

“폐, 폐하…….”

황제의 눈이 차가워져 있었다.

“아버지……!”

샤토브리앙 공작이 허둥거리며 어떻게든 딸을 도우려 했다.

“폐하, 딸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주십시오! 제 딸이 얼마나 충성스러운 아이였는지는 폐하께서도……!”

“더는 들을 필요가 없겠소.”

“폐, 폐하……!”

“잠시 휴식하지.”

황제가 샤토브리앙 공작을 사납게 노려보곤 자리를 나섰다.

오셀리아 황비는 실린을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고, 에릴로트에게 다가갔다.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하였구나.”

실린은 주먹을 꽉 쥐고 파르르 떨었다.

‘왜! 왜 일이 이렇게 된 거야!’

오전까지만 해도 최고의 원화로 칭송받던 자신이…… 어째서 자신이……!

주변에서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정~말이지 대단하더군요.”

“정말 대단한 건 이제까지 본성이 밝혀지지 않았던 거지.”

평소엔 말도 못 붙였을 것들이 히죽거리며 자신을 조롱했다.

실린은 도망치듯 연회장을 뛰쳐나갔다.

사람 없는 구석에 숨은 그녀가 주저앉았다.

“이게 다 에릴로트 아스트라 때문이야. 그 더러운 피가 날 망쳤어……!”

남군 원화, 그 비열한 계집애도!

그때였다.

근처에서 군화 소리가 들려왔다.

실린이 홱, 고개를 들었다.

어둠에 몸의 윤곽이 반쯤 흐려져 있긴 하지만,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에릴로트였다.

실린이 고함을 내질렀다.

“네가 이겼다고 생각하지 마! 다 운일 뿐이니까! 이 비열한 계집애!”

“그래, 난 비열하지.”

“알긴 아는─”

“남군 원화가 왜 그런 말을 했다고 생각해?”

“……뭐?”

에릴로트는 슬쩍 허공을 쳐다보곤 노래하듯 감미로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네게 앙심이 있긴 해도 이런 자리에 나설 성정은 아니잖아.”

“너, 설마, 네가!”

벌떡 일어난 실린이 에릴로트를 노려봤다.

“네가 꾸민 일이야?! 대체 뭘 거래하겠다고 한 거야!”

“난 뭘 준다고 한 적이 없어. 그저 한마디 했을 뿐이거든.”

“……뭐?”

에릴로트가 실린의 귓가에 속삭였다.

“리카, 중앙 원화가 세치 혀를 놀려서 이 위기를 넘기면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제게 반항한 리카를 처리하려 했겠지.

실린이 분노로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

그녀가 에릴로트에게 달려들었던 그때였다.

“무슨 짓인가!”

“서군 원화, 괜찮습니까?”

백기사, 그러니까 황제의 직속 호위들이 서둘러 에릴로트에게 달려왔다.

“……!”

실린은 당황했다.

에릴로트는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백기사들이 얼른 에릴로트를 부축했다.

“크림슨 구울 같은 몬스터를 테이밍 했으니 힘이 하나도 없겠지.”

“내가 안아서 옮길 테니 서군 원화를 이쪽으로.”

실린이 점점 더 시체 같은 얼굴이 되었다.

‘저, 저게…… 저게……!’

에릴로트는 백기사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실린을 향해 웃어 보였다.

‘내가 혼자만 왔겠니, 바보야?’

장막이 습격한 일은 이렇게 갚아주마.

‘빚은 절대 잊지 않는 사람이거든,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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