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이시론 공작의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그러나 그 또한 피라미드 꼭대기에 군림하는 소수의 권력자 중 하나.
금세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내가 네 아비의 말을 어찌 믿느냐.”
그때였다.
휴식이 끝나감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생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저희가 증거를 대지 않아도, 공작님께서 스스로 확신하게 되실 겁니다.”
“…….”
“거래를 어찌하실지는 그 후에 결정하시지요. 그럼.”
나는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떠났다.
내 등 뒤로 이시론 공작의 짙은 시선이 따라붙었다.
* * *
이시론 공작이 좌석으로 되돌아왔다.
제르모 공작이 사람 좋은 얼굴로 말을 걸었다.
“다음 시합은 서군과 남군이랍니다.”
“…….”
“원화군은 2차전까지 부전승으로 올라가고, 1차 시합까지 올라간 팀 중에 성적이 가장 좋았던 팀을 결승 부전승팀으로 올린다고 했던가요.”
“…….”
“큰 시합 자체는 토너먼트식이라 꽤 빨리 승부가 나겠…… 이시론 공?”
그제야 이시론 공작이 그를 쳐다봤다.
‘희한한 일이군.’
이 교활한 노인이 밖에서 정신을 팔다니.
‘이시론 공작 속의 능구렁이를 세는 것보다 머리카락의 개수를 세는 게 빠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안나마리아 황비의 장례 때 외엔 이런 일을 본 적이 없었다.
“무슨 일이 있으신지요.”
“아닐세. 시합이 시작하는군.”
이시론 공작은 묵묵히 경기장을 응시했다.
‘아직 확실하지 않은 일이다.’
정말로 안나마리아가 황자를 낳았는지, 아닌지 모를 일이었다.
‘오히려 거짓일 가능성이 크지.’
제임스는 자신의 젖형제였다.
유모의 막내였던지라, 자신보다 한참 어리긴 했지만.
8형제의 막내라 농사나 지을 뻔하던 그를 의사로 만들어준 것도 자신이었다.
황궁에 들여보내서 명예를 준 것도 자신.
안나마리아를 돌보게 하며 돈이 아쉽지 않게 해준 것도 자신이다.
‘그런 제임스가 뭐하러 날 배신한단 말인가.’
도리어 오셀리아 황비의 계략을 자신에게 밀고했다면 더 큰 상을 받았을 텐데.
‘그래, 에릴로트 아스트라의 말은 신뢰할 수 없다.’
안나마리아와 비슷하게 생긴 아이를 황자라고 들이밀 수도 있지.
‘하지만…….’
이시론 공작이 이마를 쥐었다.
‘진짜일 가능성도 부정할 수는 없다.’
제임스에겐 가족이 있었다.
그 가족을 협박거리로 삼았다면, 그 정에 약한 인사가 오셀리아의 명을 거부할 수 있었을까?
제 가족을 위해 안나마리아를 죽였으나, 자신에게 받았던 은혜를 저버리지 못하고 아이를 살렸다면…….
‘그렇다면 제임스가 난데없이 사라진 것이 납득 가지.’
당시엔 제임스가 자신의 성정을 잘 알기 때문에 도주했다고 생각했다.
모두의 추측대로, 안나마리아는 제 사생아가 맞았다.
이시론 공작의 아이를 지키지 못했으니, 살해당할까 봐 도망친 거라 여겼던 것이다.
‘만약 사실이라 해도, 대체 어떻게 아이가 외손주임을 증명하겠다는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였다.
“서군과 남군, 입장!”
심판 볼프강이 소리쳤다.
서쪽 입구에선 서군, 남쪽 입구에선 남군이 등장했다.
참가 군사의 앞에 선 건 각 군의 원화였다.
마주 보고 선 원화들이 서로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그들 뒤에 나란히 선 기사들이 상대 군을 향해 허리를 굽힌다.
“관중에 선 군사부터 1, 2, 3, 4, 5번. 마지막 군사인 5번은 군을 상징하는 완장을 차고 있습니다.”
심판의 설명이 끝나기 무섭게 관중들이 떠들기 시작했다.
“남군에 못 보던 얼굴이 많군요.”
“셋이나 새로 들였다던데요. 다들 훤칠한걸요.”
“우훗, 남군은 원래 외모로 유명하잖아요. 저 마르키 슈마르 군도 그렇…… 어머나.”
쌍안경을 들고 경기장을 보던 귀족이 숨을 크게 들이켰다.
“왜요?”
“세상에나. 진짜 보석은 서군에 다 있었군요.”
“그럴 리…… 어머머!”
서군의 참가자들은 하나같이 엄청난 미소년들이었다.
중앙군의 상장군으로 원래부터 유명했던 조윅 샤토브리앙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는 원래부터 큰 키, 널따란 어깨, 친근한 분위기로 뭇 연상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한지혁은 그를 ‘스포츠맨 타입의 미남’이라고 부르곤 했다.
“저 갈색 머리는 누군가요!”
귀족 소녀가 호들갑을 떨며 물었다.
“이세즈 카람이에요. 서군의 유일한 신성 기사랍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병사였는데 원래부터 외모로 유명했지요.”
이세즈 카람도 엄청난 미소년이었다.
나른한 분위기, 날렵한 눈매를 가졌으나, 선이 부드러워서 묘한 매력이 있다.
한지혁은 이세즈를 가리켜 ‘아이돌 타입’이라고 불렀다.
“저 기사는 누구죠?!”
“어디, 어디…… 처음 보는 얼굴인데요?”
“아! 종년 축제에서 보았어요. 어머님께서 서군에서 제일 쓸만하게 움직인다고 하시던걸요.”
“아아, 기억나요. 그러니까 이름이…… 리암! 리암이에요.”
구릿빛 피부에 적발, 노란 눈동자가 매력적인 남자였다.
조윅보다 더 큰 덩치를 자랑한다.
한지혁은 리암을 가리켜 ‘많이 놀아봤을 것 같은 양아치형 미소년’이라고 말했다.
“앗! 저 사람은 카진이잖아요! 남군의 상장군이었던……!”
“맙소사, 남군의 얼굴이었던 카진님이…….”
단정한 외모에 금욕적인 분위기를 가진, 남군 최고의 얼굴.
남군이 원화군 중 가장 잘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은 건 저 외모가 한몫했다.
한지혁은 카진에게 ‘제복을 입혀놓으면 환장할 스타일’이라고 했다.
귀족 영애들은 잔뜩 들떠서 꺅꺅 소리쳤다.
영식들은 떨떠름한 표정이 되었다.
“순 기생오라비 같은 것들이구만.”
“그러게 말입니다. 얼굴이 번들거리는 놈치고 잘난 놈을 못 봤어요.”
“조윅을 빼면 사실 볼 것도 없죠. 이세즈인지 뭔지 하는 녀석은 사실상 서포터의 역할을 할 뿐이잖습니까.”
“그래. 결계나 강화, 치유 같은 능력에 특화된 것뿐이니까.”
“한데 저놈은 뭡니까?”
사람들의 시선이 서군의 2번에 집중되었다.
머리를 뒤로 넘긴 기사가 눈을 가늘게 떴다.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잖아.”
다른 군의 기사들이 흥, 콧방귀를 뀌었다.
“저놈은 기생오라비가 아닌 모양이지.”
기사들이 그의 농담에 낄낄 웃었다.
남군 원화가 말했다.
“서군 2번의 후드를 벗기세요.”
에릴로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싫은데요.”
“뭐라고요?!”
남군 원화가 입을 벙긋거렸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서군에선 우리 군사를 전부 확인하셨잖아요.”
“후드를 씌워선 안 된다는 규칙이 있나요?”
“그건……!”
남군 원화가 멈칫했다.
그녀가 심판인 볼프강을 쳐다봤다.
심판 볼프강이 “어…….” 하더니 재킷 주머니에서 책자를 꺼냈다.
페이지를 빠르게 넘겨 가며 확인한 볼프강이 말했다.
“그런 규칙이 없기는 합니다만…….”
에릴로트는 생긋 웃었다.
“그렇다고 하는군요.”
“하지만 이건 도의적으로─!”
“이 원화군 승부의 정식 명칭은 ‘공개 전투 훈련’입니다. 전투에서 상대의 정보를 모두 확인할 수 있나요?”
“하, 하지만 이건 공평하지 않아요!”
“저는 ‘공평하게’ 미리 명단을 제출하고, 황제 직속군으로부터 참가에 문제가 없는 자임을 확인받았습니다.”
“그건…….”
“모든 것은 이 승부에서 승리하기 위한 저의 전략입니다.”
“…….”
“서군의 사령탑인 제가 서군을 위해 전략을 짜는 것이 불공평한 일은 아니지요.”
공작들이 “호…….” 하며 탄성을 흘렸다.
“서군 원화가 참으로 비상합니다.”
“이제 남군은 서군의 2번 선수를 경계할 테지요.”
아스트라 공작의 입매가 오만하게 올라갔다.
“승부에선 겁먹는 순간 지는 것이지.”
귀족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역시 저 아이, 보통이 아니다.’
‘과연 아스트라 공작이 시야가 넓다고 칭찬할 만 하군.’
‘상대의 감정을 전투에 이용할 줄 안다고? 무슨 아이가…….’
그때, 황제와 함께 승부를 관람하던 황태후가 말했다.
“과연 뛰어난 아이입니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모후. 제국의 전신이라 불리는 데이몬드 아스트라의 딸답습니다.”
“그런가요? 저는 작은 크로노스 아스트라(아스트라 공작)를 보는 것 같은데요.”
사람들의 시선이 일시에 아스트라 공작에게 향했다.
황태후가 후후 웃었다.
“아스트라 선대의 11남, 아무것도 없던 소년이 꼭 저런 눈빛으로 세상에 맞섰지요.”
그때도 아스트라의 위세는 굉장했다.
특히 아스트라의 선대 공작은 선이 없던 폭군이었던 만큼, 누구도 쉽게 대항할 수 없었다.
그런 아스트라의 왕을, 고작 11남에 불과한 소년이 끌어내린 것이다.
그리하여 아스트라의 깃발을 등 뒤에 두고, 새로이 군림하게 되었다.
“마치 작은 크로노스 아스트라 같군요, 저 아이…….”
이 대단한 권력가들 사이에서 결코 겁먹지 않은 것조차.
그때, 심판이 소리쳤다.
“1번 선수는 나오시오!”
심판의 호명을 들은 서군과 남군의 1번이 경기장으로 나섰다.
“장외, 기절, 항복 선언은 패배. 몬스터나 사역마는 경기장 내로 불러낼 수 없소.”
“예.”
“옛!”
1번 선수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깊이 숙였다.
북이 울었다.
둥─, 둥─, 둥─!
승부의 시작이었다.
“서군의 1번은 카진 라비오로군요!”
“바보 같은……. 남군 출신인 만큼 상대쪽에서 카진의 정보를 잘 알고 있을 터인데.”
남군의 1번, 겜마가 씩 웃으며 카진에게 말했다.
“당신은 버리는 패로 쓰이는 겁니까?”
“…….”
“남군에게 카진 라비오의 약점은 훤한데 말입니다─!”
겜마가 바닥을 강하게 박차고 카진에게 달려들었다.
‘왼쪽 정강이!’
남군 원화는 제가 화가 날 때마다 말도 안 되는 훈련을 시키곤 한다.
종년 축제에서 꼴찌를 했을 때도 마찬가지.
다른 기사들은 원화가 볼 때나 훈련하고 요령을 피우는데, 카진은 미련하게 그 훈련을 다 하는 녀석이었다.
‘왼쪽 정강이에 계속 붕대를 매고 다닌 것을 다 봤다고.’
저 우직한 성정상, 남군 원화가 무리한 훈련을 시켰다는 것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을 터.
병동에 들르면 소문이 날 테니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거기다 카진은 키가 큰 만큼 균형이 좋지 않았다.
일부러 하체를 노리고 공격하자 카진이 흠칫, 거리를 벌렸다.
‘역시 왼쪽 정강이가 약점이다.’
겜마의 특기는 쌍검술.
화려한 초식의 검법을 자랑하며 카진을 밀어붙였다.
귀족들이 시합에 집중했다.
“카진이 계속 밀리기만 하는군요.”
“자세도 엉거주춤하고…….”
승부를 지켜보던 실린이 쿡쿡 웃었다.
“시작 전부터 잘난 척을 하더니, 꼴 좋게 됐군요.”
동군 원화, 세바스티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뭐 하는 거야, 에릴로트.’
왜 너만 한 아이가 카진을 1번으로 내놓은 거지?
남군과의 승부에선 최대한 숨겨두는 쪽이 좋았을 텐데.
“뭔가 수가 있을 수도 있죠.”
“글쎄요. 저는 서군 원화의 거품이 꺼져가는 것으로 보이는데요.”
실린이 쿡쿡 웃던 때, 반대쪽에선 황제 직속군이 떠들고 있었다.
“다리가 약점인 모양입니다. 약점을 지키기 위해 계속 물러날 밖에요.”
“……역시 카진이 1번인 건 실수였지. 남군이 카진의 약점을 잘 알고 있을 테니.”
“아쉽군. 카진은 좋은 검인데 말야. 훌륭한 주인을 만나면 빛을 발할 수 있었을 텐데.”
황제의 호위인 피에르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글쎄요.”
“너야 워낙에 뛰어나니 카진이 별 볼 일 없어 보이겠지만, 평범한 사람 눈엔 저만한 인재가 없다, 인마.”
“아뇨. 서군 원화가 그를 1번으로 지정한 것 말입니다.”
“……실수가 아니라고? 하지만 카진이 저리 밀리고 있지 않으냐.”
팔짱을 낀 피에르가 중얼거렸다.
“압니다. 알지만…… 저 표정.”
에릴로트 아스트라의 저 표정.
‘실수를 한 자의 표정이 아니다.’
무뚝뚝한 표정이지만, 결코 당황하지 않았다.
저 표정은 오히려 뭐랄까…….
‘기다리고 있는 얼굴이다. 한데 무엇을?’
대체 무엇을 기다리고 있단 말인가.
그때, 남군의 1번 기사인 겜마에 의해 카진이 벼랑까지 밀려났다.
“서군 원화가 대단하다더니 다 말뿐이었나 봅니다, 전 상장군!”
‘마지막이다!’
몸의 중심을 낮게 기울인 겜마가 빠르게 카진에게 파고들었다.
그때였다.
“지금이야, 카진!”
에릴로트가 소리쳤다.
‘뭐?’
겜마가 잠시 주춤했던 그때.
쿠구구구구구─!!
엄청난 굉음과 함께 경기장 바닥에 기하학적인 문양이 떠올랐다.
그리고 미로처럼 뒤틀리기 시작한 것이다!
카진이 튀어 오른 땅을 잡고 위로 올라갔다.
그 순간.
쏴─!!!
어딘가에서 엄청난 양의 물이 미로 안에 쏟아졌다.
“이게 무슨, 커헉!”
꼬륵…….
겜마는 마치 물이 가득한 불투명한 그릇 안에 갇힌 꼴이 되어버렸다.
강한 물살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에릴로트가 씩 웃었다.
“카진이 그냥 밀려나고 있는지 알았어?”
남군 원화가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무, 무슨……. 그럼 대체─!”
에릴로트와 카진의 시선이 공중에서 부딪쳤다.
‘잘했어.’
황제 직속군의 기사가 벌떡 일어났다.
“도망치는 척 마나를 깔아두고 있었다!”
그렇다.
결정적인 순간 카진이 이 ‘돔’의 환경을 바꿀 수 있도록 곳곳에 마나를 깔아두었다.
즉, 지금 이 돔은 남군 참가자들의 약점을 가장 잘 공략할 수 있는 무덤이 된 것이다.
작전명 ‘남군의 무덤 만들기’.
이제 다음에 어떤 선수가 나서도, 남군은 제대로 공격할 수 없다.
‘성공이다.’
에릴로트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약점을 아는 건 남군만이 아니거든요. 우리 카진도 남군 약점엔 빤하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