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6화. (186/390)

186화.

* * *

경기장이 터질 듯 시끄러워졌다.

관중들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 웅성거렸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그, 글쎄. 분명 중앙군의 1번이 밀리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서군의 이세즈 카람이…….”

“독이다!”

누군가 소리쳤다.

그랬다.

이세즈의 상태를 보아 저건 독이 확실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의 리암이 말했다.

“손톱에 독이 묻어 있던 건가? 저 녀석이 이세즈의 뺨을 건드렸을 때…….”

“아냐.”

내가 말하자, 기사들이 동시에 날 쳐다봤다.

“아니라고요?”

“그래. 이세즈는 그때 분명 몸을 보호하고 있었어.”

순식간에 다가와 놀라긴 했지만, 그가 건드리기 전에 신성력으로 몸을 방어했다.

난 신성계 가호를 가진 자만큼은 못해도, 신성력의 흐름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었다.

첫 번째 삶에서 무능력자였던 탓에 마력 운용자 특유의 선입견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럼 대체 어떻게…….”

‘나도 그걸 모르겠단 말이야!’

대체 언제 독을 썼지?

공기 중에 퍼뜨린 건가?

아냐, 황제와 엄청난 권력가들이 있는 자리다.

행여나 바람을 타고 저쪽까지 전파될 수도 있으니 그런 독은 못 썼을 터.

‘접촉하지 않아도 독을 주입할 수 있는 가호를 가진 건가?’

코크는 히죽히죽 웃으며 제 형에게 말했다.

“여기 사람들은 내 ‘가호’가 엄청나게 궁금한 모양이야, 형님!”

그 말에 사람들이 다시 한번 크게 술렁였다.

“역시 가호로군요!”

“닿지 않아도 독을 주입할 수 있는 가호라니……. 엄청납니다.”

“이렇게 되면 서군에선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아무리 밀어붙여도 독에 당하면 끝이니.”

“서군 원화가 아무리 서군을 잘 키웠다고 해도 저런 가호를 가진 자에겐 대항할 수 없지요.”

“중앙 원화는 대체 저런 자를 어찌 데려왔는지……. 정말로 신의 사랑을 받는 아이가 아닙니까.”

“운도 실력이라는 게지요.”

“생각해 보면 마냥 운뿐만은 아니죠. 저런 자를 알아보는 눈, 찾아낸 정보력, 손에 넣은 협상 능력. 정말이지 뛰어난 아이입니다.”

“그러고 보면 사실 종년 축제 전엔 실수 한번 없던 인재였잖습니까.”

땅에 무릎을 댄 채로 주저앉아 있던 이세즈가 비틀비틀 일어났다.

“무슨……!”

“뭐 하는 거야?!”

조윅과 리암이 기함했다.

패배 조건은 셋.

장외, 운신 불가능(기절 등), 항복 선언이다.

이세즈가 일어난 이상 우리 군은 패배하지 않는다.

즉, 시합 속행이란 뜻이었다.

리암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저 녀석, 죽어도 항복 선언은 안 할 겁니다. 저 상태로 계속 시합하다간 죽어요.”

‘저 바보가…….’

죽으려고 환장한 거야? 어떤 독에 당했는지도 모르면서.

코크는 푸하핫, 웃었다.

“팔팔하네.”

“…….”

“곱게 살아서 그런가. 목숨 아까운 줄을! 몰라!”

코크의 검이 재빠르게 파고들어 이세즈의 옆구리와 어깨를 스쳤다.

‘피하는 게 고작이야.’

제대로 피하지도 못해서 검이 지나가는 곳마다 선혈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균형을 잃은 이세즈가 비틀, 주저앉았다.

그러나 다시 일어나고.

또 일어나고.

또다시 일어나고…….

중앙군의 대기석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한심한 꼴이군!”

“어디 종년 축제 때처럼 잘난 체 해보시지!”

우리 군을 깔보는 말이 쏟아졌다.

관중석의 서군 군사들도, 참가자들도 이를 악물고 있었다.

리암은 분통을 터뜨렸다.

“왜 저기서 버티고 있는 거야!”

“아직 신성력을 퍼뜨리지 못한 거야…….”

내 말에 기사들이 흠칫, 날 쳐다봤다.

“예?”

“경기장 밖까지 신성력을 퍼뜨리려면 적어도 30분은 걸리니까.”

“그런…….”

조윅이 어두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리암은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저렇게 두다간 죽습니다. 원화가 항복 선언을 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 녀석……!”

“못 해.”

“고작 첫 시합일 뿐입니다! 이까짓 시합 때문에 이세즈를 죽일 셈입니까?! 제가 원화를 잘못 봤습니다. 잘못 봐도 한참을……!”

“저 얼굴을 봐!”

“……예?”

“사람에게 목숨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단 말이야!”

우리 군의 참가자들이 이세즈를 쳐다봤다.

혈색은 새파랬지만, 결코 눈이 죽지 않았다.

나는 아빠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매번 이렇게 다쳐 오실 거면서 왜 항상 그렇게 전장에 나가세요? 그러다 죽으면 어쩌시려고요!”

소리치는 내게 아빠는 말씀하셨다.

“목숨보다 소중한 게 있으니까.”

“목숨보다 소중한 게 어디 있어요?”

“누군가에겐 명예일 수도 있고, 또 누군가에겐 타인에게 받는 인정일 수도 있지.”

“다 쓸모없는 건데. 바보같이.”

“내겐 너희다.”

“…….”

“너희의 미래를 지키는 것이 내겐 목숨보다 소중한 일이야.”

“…….”

“하지 말라고 하진 말아다오. 내게 가장 큰 가치를, 내게 가장 소중한 네가 우습다 여기지 말아줘.”

“…….”

“부탁한다.”

나는 이세즈가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가 뭔지 알고 있다.

남에게 처음으로 받은 인정.

겨우 손에 넣은 자신의 자리.

그것을 내 손으로 부술 순 없었다.

“원화는 원화군의 엄마잖아! 부모란 말이야!”

“…….”

“우리 아빠는 항상 날 믿어줘. 기다림에 마음이 불안하고, 무섭고, 괴로워도 믿어준다고.”

“…….”

“자식은 부모의 믿음을 먹고 자라니까!”

나라고 이세즈가 소중하지 않은 줄 알아?

이세즈는 내 군에 유일한 신성 기사란 말이야!

그런데 이세즈의 부모인 내가 어떻게 이세즈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를 부술 수 있어?!

소리치는 날 보고 기사들이 고요해졌다.

관중석까지도.

* * *

서군의 군사들이 정신없이 에릴로트를 쳐다봤다.

“원화는 원화군의 엄마잖아! 부모라고!”

처음엔 그냥 재수 없는 꼬맹이라고 생각했다.

윗놈들을 죄다 잘라낸 꼬맹이.

쓰레기 서군이라 불리며 자존심이 땅에 내팽개쳐졌을 때, 저 애가 승리를 선물해줬다.

따르면 확실히 강해지니까.

용을 가진 특별한 꼬맹이가 심지어 아스트라 공작의 손녀라니까.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어서 따랐다.

그런데…….

“우리를 저런 마음으로 대하고 있었던 것인가.”

감성 충만한 병사가 울먹거리는 얼굴로 말했다.

다른 기사들까지도 감동한 표정이었다.

관중석에 서군과 함께 있던 고르고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꺼이꺼이 우는 기사들을 쳐다봤다.

‘종년 축제 이후로 왜 이래?’

감정이 무슨 태풍 맞은 바다처럼 널뛰고 있었다.

“저런 마음이셨던 겁니다, 고르고 님…….”

“알겠으니까 떨어져…….”

관중석의 군사들뿐만 아니라, 참가자들 또한 울먹울먹한 얼굴로 에릴로트를 쳐다봤다.

“원화…….”

“저희는 그런 것도 모르고…….”

제 입으로 소리친 에릴로트도 울먹이는 서군을 보며 떫은 표정이었다.

‘얘들이 왜 이래? ……설마 주인공 버프인가?’

이 세계의 메인 스토리는 <기사단의 꼬마 대장님>으로 바뀌었다.

그 때문에 제 말의 여파가 강해진 모양이었다.

‘그건 알겠는데…….’

에릴로트가 힐끔 귀족 쪽을 쳐다봤다.

서군 군사들과 함께 우는 자가 있었다.

노클랑 선후작이 손수건을 물고 흐느끼고 있었다.

“그래, 저것이 원화다. 우리가 원화에게 바라는 역할이 저것이야……! 내 너를 키울 때도 그런 마음으로 믿고 있었느니라…….”

“알겠으니까 저택으로 돌아가서 감격하시면 안 되시겠습니까……?”

“훌륭하다! 내 평생 저토록 훌륭한 원화는 본 적이 없구나!”

감성 충만한 귀부인도 “응, 응.” 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중이었다.

분위기는 한순간에 뒤집혔다.

다른 군의 병사들이 서군을 부럽게 쳐다보기도 했고, 선임 기사들은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때였다.

황태후의 잇새로 쿡쿡 웃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올해 공개 전투는 참으로 재미있군요, 폐하.”

“모후께서 즐거우시다니 다행입니다.”

“저 아이를 보세요.”

“예?”

황제가 미간을 좁히고, 에릴로트를 쳐다봤다.

아이는 자신을 끌어안으려는 리암을 밀어내고 있었다.

“아우, 왜 이래. 꺼져.”

“원화…….”

“그보다 이세즈를…….”

황제는 다시 황태후를 힐끗 쳐다봤다.

“뛰어난 아이지요. 황가에서 황자로 태어났다면 더없이 든든했을 것입니다. 용을 가진 아이이니…….”

“저 아이가 가진 가장 강력한 힘은 용이 아닙니다.”

“예?”

황태후가 빙그레 미소 지으며 황제를 쳐다봤다.

“시야입니다.”

“시야…….”

“젊은 시절의 나나 폐하, 저 아스트라 공작에게도 없는 넓은 시야를 가졌어요.”

“…….”

“해서 가장 적절한 순간에 상대가 가장 원하는 것을 알아차리지요.”

“……아스트라 공작 또한 제 손녀를 그리 평가하더군요.”

“나라를 다스리기에 저만큼 귀중한 능력이 있겠습니까?”

황제가 멈칫 황태후를 쳐다봤다.

“모후, 설마…….”

“다행히 황제께선 아들이 있으시군요.”

황태후가 관중석 한쪽에서 제 딸을 바라보고 있는 데이몬드를 쳐다봤다.

“귀부인들이 최근 무엇에 가장 집중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무엇입니까.”

“에릴로트 아스트라의 혼처.”

“…….”

“데이몬드 아스트라도 뛰어난 인물이지요. 저 부녀를 황궁에 품을 수 있다면 그만큼 좋은 일이 있겠습니까?”

“…….”

황제가 묘한 눈으로 에릴로트 아스트라를 쳐다봤다.

‘그래, 견제할 것이 아니라 품는다면…….’

게다가 저 아이는 말했다.

데이몬드 아스트라는 아스트라 공작과 뜻이 다르노라고.

‘데이몬드 부녀라면 샤토브리앙의 대체재로 괜찮지.’

머릿속의 주판을 두드리던 황제가 눈썹을 까딱 들어 올렸다.

“모후의 지혜엔 못 당하겠습니다. 다만, 마지막으로 확인해야겠습니다. 이번 시합에서 저 아이가 정말로 우승한다면…….”

“예, 그만한 인재를 폐하께서 놓치실 리 없지요.”

황제와 황태후가 쿡쿡 웃고 있던 그 시각.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떨며 감격 중이던 데이몬드가 멈칫했다.

마찬가지로 감격해서 훌쩍이던 엔조가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주군.”

“……방금 기분이 더러웠는데.”

“예? 아가씨의 저 장한 말씀을 들으시고 말입니까?”

“그럴 리가.”

그렇겠지.

조금 전만 해도 우세하던 타군 군이 갑작스러운 태풍을 만나 전멸했다는 말을 듣던 때보다 더 감격하셨는데.

“화가, 속눈썹 한 올 놓치지 말고 그려라!”

“속눈썹 한 올 놓쳐선 안 될 것이다!”

“그렇다고 솜털을 놓치면 넌 죽는다.”

데이몬드와 그의 군사들이 화가에게 윽박을 질렀다.

가여운 화가는 벌벌 떨며 붓을 들었다.

* * *

나는 내게 달라붙는 리암을 한 손으로 밀어내며 이세즈를 쳐다봤다.

‘그렇다고 저렇게 둘 순 없는데.’

내 입으로 막을 순 없지만, 그래도 죽는 것을 보고 싶진 않았다.

이럴 때면 나를 향한 믿음과 내 목숨 사이에서 갈등하는 아빠가 이해된다.

이세즈가 나를 쳐다봤다.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세즈, 너를 믿어.”

“…….”

“이겨달라는 게 아니야. 최선을 다했다는 걸 나는 안다는 뜻이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나는 양손으로 이마를 잡았다.

‘이럴 땐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목숨보다 소중한 게 있는 자식.

자식의 목숨이 더 소중한 부모.

간극을 줄이기 위해서 대체 어떻게 해야…….

“항복합니다.”

“……!”

“……!!”

나와 서군 참가자들이 항복을 선언한 이세즈를 쳐다봤다.

저 자존심에 항복을 했다고?

목숨보다 중요한 가치를 포기하고?

이세즈의 손에서 툭, 검이 떨어졌다.

그가 휘청하는 순간, 나와 조윅, 리암이 황급히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 그를 부축했다.

“이세즈, 너 어째서…….”

“아버지…… 그 주정뱅이한테는 한 번도 진 적이 없어.”

“…….”

“그런데 너한테는 도저히 반항할 수가 없네.”

그는 그렇게 힘없이 웃었다.

나는 입술을 꽉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잘했어.”

“응.”

“고마워…….”

“……응.”

조윅은 “의사!” 하고 소리쳤다. 리암이 그를 업고 서둘러 의사가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나도 그를 따라가려던 때였다.

우리 군의 2번이 내 손목을 잡았다.

나는 그를 묵묵히 쳐다봤다.

“이기고 와.”

“덤으로 승리자의 월계관까지 함께.”

그가 경기장에 들어간 순간, 북이 울었다.

제 2시합의 시작이었다.

* * *

코크는 실실 웃으며 서군의 2번을 쳐다봤다.

“로브는 안 벗으려고? 뭐, 방어구라도 되나 보지? 응? 네 ‘엄마’가 사줬나?”

“…….”

“부러운데. 난 친모도 본 적이 없는데, 서군은 이런 엄마까지 있어서!”

중앙군의 기사들이 낄낄 웃음을 터뜨렸다.

이번 시합에서 코크는 빠르게 치고 들어갔다.

피해 다니기만 하던 이세즈와의 시합 때와는 딴판이었다.

서군 2번은 그의 검을 능숙히 피했다.

그 어떤 공격도 머리카락 한 올 스치지 않는다.

“코크!”

제 형인 마크가 소리치자, 코크가 인상을 찌푸렸다.

“전혀 안 맞아주니까 형이 화났잖아. ……역시 독을 써야 하나?”

“…….”

“무섭지? 응? 내 가호가 무서워 죽겠지? 로브를 벗지 않는 것도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가리려고 한 것! 아냐!”

코크의 공격이 폭풍처럼 몰아쳤다.

서군 2번이 점점 외각으로 물러난다.

서군의 참가자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경기를 관전했다.

“역시 저 가호 때문에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는 겁니다.”

리암의 말에 카진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몸을 낮게 숙인 코크가 히죽, 웃으며 서군 2번에게 파고들었다.

“자, 이제 장외로 떨어……!”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뻐어어어억─!

엄청난 소리가 들려왔다.

서군 2번이 무언가를 발로 찬 것이다.

그런데 이상했다.

“왜 코크와 반대쪽으로 찼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대체 무슨…….”

“어? 저길 보세요!”

관중 하나가 벌떡 일어나 손가락질 했다.

분명 코크는 2번의 정면에 서있는데, 2번이 발로 찬 곳에서 무언가가 스르륵 나타나고 있었다.

코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2번은 천천히 무언가 나타나기 시작한 곳으로 걸어갔다.

후드를 벗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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