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관중들은 기함했다.
“대체 몇 가지 가호를……!”
“서부 예비 원화전에선 저 외의 가호까지 사용할 수 있지 않았습니까?”
“마치…… 마치 ‘지배자의 위세’ 같군요…….”
누군가의 말에 사람들은 흠칫, 황제를 쳐다봤다.
<지배자의 위세>가 무엇인가.
어떤 가호든 간에 복사가 가능하며, 시전하면서 2, 3단계로 강화할 수 있다.
복제나, 추출 따위의 가호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최강의 가호였다.
황실이 그토록 기원했으나, 건국 황제 이후로 한 번도 발현된 바 없는 가호이기도 했다.
황제의 눈이 가늘어지자, 이시론 공작이 흠칫했다.
‘에릴로트 아스트라는 대체 무슨 생각이란 말인가.’
이런 자리에서 지배자의 위세를 드러낸다고?
황제의 핏줄임을 공인하는 꼴이 아니던가.
세 명의 공작을 등에 업은 오셀리아 황비가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저기 보세요! 백수정입니다……!”
관중이 소리쳤다.
알렉시스의 손에 백수정이 몇 개나 들려 있었다.
백수정의 크기는 새끼손톱만 한 것이 일반적인 데 비해, 저건 관중석에서 육안으로도 확인할 수 있는 크기였다.
어림잡아 어린애 손가락 지름의 커다란 백수정.
알렉시스는 가호를 발동할 때마다 색이 다른 백수정으로 바꿔 쥐고 있었다.
“복제입니다! 실린 샤토브리앙 양과 같은 복제의 가호인 모양입니다.”
“아아, 그래서 저만한 가호를……!”
“중앙 원화와는 비교도 안 됩니다. 적어도 3단계, 아니라면 데이몬드 아스트라와 같은 4단계 가호가 아닐는지요.”
“예, 저만한 능력을 몇 개나 복사하고 사용할 수 있다는 건…….”
전 세계로 따지더라도 가호를 4단계까지 발현한 자는 열 손가락 안에 꼽는다.
“대단하군……. 소년병 중 최강이란 게 아닌가.”
이시론 공작이 고개를 숙이자, 제르모 공작이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핫.”
“공?”
“하하핫! 하핫!”
이시론 공작이 드물게 폭소했다.
관중들은 물론 공작들과 황제마저 묘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이시론 공작의 눈이 날카로웠다.
‘저 아이에게 백수정을 들려준 건 에릴로트 아스트라일 것이다.’
저만큼 순도 높고, 대단한 백수정을 손에 넣을 수 있는 사람이야 뻔하지.
대륙의 백수정 유통권을 쥔 데이몬드의 딸, 에릴로트 아스트라뿐.
이 많은 귀족과 황제 앞에서 대담하게 초대 황제의 이능인 <지배자의 위세>를 사용했다.
거기다 가호 <복제>로 가장했다, 라.
‘하지만 나는 에릴로트 아스트라에게 언질 받았기에 저것이 지배자의 위세임을 알고 있다.’
황군의 능력과 출신을 속이는 것은 중죄.
즉, 자신은 에릴로트 아스트라의 약점을 쥐었던 셈이었다.
‘하지만 저것이 지배자의 위세임을 알고 있는 내가 침묵한다면, 나 또한 저 아이의 맹랑한 눈속임에 일조한 것이지.’
이로써 이시론 공작은 자신의 의사에 상관없이 한 배를 타게 된 것이다.
‘내가 같은 배를 타게 만들기 위해 알렉시스를 황군으로 들인 것이야.’
저 아이는 고작 해가 지나 열한 살이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마크는 이를 악물었다.
“어디서 잔재주를……!”
알렉시스로 인해 생긴 벽에 주먹을 휘둘렀다.
마크의 힘은 분신뿐만이 아니었다.
가호는 분신뿐이나, ‘실험실’에서 손에 넣은 능력이 있었다.
괴력과 부식이었다.
부식.
몸에 닿는 모든 것을 부식시키는 힘이다.
‘본체나 분신, 뭐라도 좋아. 닿기만 하면 끝이다.’
잘난 낯짝까지 완전히 가루로 만들 수 있었다.
쾅! 쾅! 쾅쾅! 쾅!
알렉시스가 변형하여 만든 미로가 산산조각이 나고 있었다.
관중이 술렁였다.
“미, 미로가…… 가공할 힘이오.”
“하지만 아직 결계가 있습니다.”
마크의 입매가 비틀렸다.
‘신성 결계? 웃기지 마라.’
분신 중 하나가 알렉시스의 결계에 뛰어들었다.
치지지지짓─!
엄청난 소음과 함께 분신이 격렬하게 몸을 뒤틀었다.
“끄아아아아악─!!”
이윽고 몸이 완전히 불타서 사라졌으나, 그러는 동안 결계에 틈이 생겼다.
마크의 본체가 결계의 틈에 뛰어들었다.
“결계 따위. 이쪽은 대신 죽어줄 체스 핀이 수없이 많아, 꼬맹이.”
마크가 히죽 웃었을 때였다.
퍽─!!
마크의 분신 중 하나가 본체에게 주먹을 날렸다.
알렉시스는 말했다.
“체스 핀을 움직일 수 있는 건 너뿐만이 아니라.”
육체 지배의 사슬에 묶인 분신들이 본체를 마구잡이로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방어하기 위해 분신을 늘리면, 그 분신이 사슬에 묶여 공격해온다.
알렉시스에게 다가가려면 결계를 뚫어야 했는데, 그러려면 분신을 소모해야 한다.
결국 이제 남은 건 알렉시스의 사슬에 묶인 분신뿐.
자신의 분신에게 둘러싸인 마크는 새파래졌다.
“이, 이…….”
‘빌어먹을. 이제 분신을 늘릴 마력이 없어.’
괴력과 부식을 쓰느라 마력을 너무 많이 소모해버렸다.
그 순간, 마크의 분신이 본체를 향해 뛰어들었다.
‘해제!’
다행히 분신의 주먹에 맞기 전에 분신을 없앴다.
다음 분신도.
‘해제.’
또 다음 분신도.
‘해제!’
이제 남은 분신은 셋뿐이었다.
관중이 소리쳤다.
“바보 같긴. 그냥 분신을 전부 없애면 되잖아!”
“그럼 본체 혼자 남겠지요.”
“공격당하는 것보단 차라리 혼자 남는 게 낫지 않겠소?”
“하면 1대1입니다. 분신 없이 저 엄청난 능력의 서군 2번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누군가 동조했다.
“예, 차라리 저 서군 2번이 분신을 묶어두느라 마력을 소모하게 하는 쪽이 이로울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건 저 자신도 위험한 방법이 아닙니까. 제 분신의 공격에 당해버리면…….”
그들의 말에 노클랑 선후작이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이도 저도 못 하는 것이다.”
그의 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도 저도 못 할 만큼 궁지에 몰린 것이지요.”
그 말이 맞았다.
마크의 머릿속은 엉망으로 헝클어져 있었다.
‘분신을 해제하는데도 마력이 든다. 마력은 최후를 위해 아껴두는 쪽이…… 하지만 계속 공격을 받잖아. 체력이 버텨줄까. 어떻게 해야, 대체 어떻게…….’
이처럼 궁지에 몰린 것은 처음이었다.
마치 자신이…… 자신이 약자가 된 것처럼.
‘약자라고? 내가? 이 마크가?!’
마크의 눈이 분노로 일렁였다.
“난 약자가 아냐─!!”
고함을 치기 무섭게 경기장이 일렁였다.
파바바바바밧!
빠른 수로 분신이 늘어나고 있었다.
하나, 둘, 셋…… 서른…… 쉰하나!
경기장에 마크의 분신이 빼곡하게 들어찼다.
“말도 안 돼! 마력이 부족했잖아! 대체 어떻게……!”
관중 하나가 비명을 지르듯 말했다.
제르모 공작이 데이몬드에게 물었다.
“가능한 일이오?”
“생명력을 마력으로 전환한다면 못 할 것도 없겠죠. 하지만 가호의 허용범위를 넘는다면…….”
마크의 본체가 오물처럼 뚝, 뚝,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가호의 대미지……. 대미지다!”
노클랑 선후작이 소리쳤다.
쉽게 말해 가호의 허용범위를 넘었을 때 오는 제약이었다.
예를 들어, 밀란의 <육체 지배>는 사용 시간과 횟수가 제한되어 있다.
몬스터에게 제한을 넘어 사용하면, 몸이 몬스터화 되는 것이다.
“보, 본체가 완전히 녹았습니다.”
“죽은…… 것인가?”
마크의 분신들이 한꺼번에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야, 약자가, 약자가, 아냐.”
“나, 난 약자가, 약자가…….”
“아니야. 난 약자가 아니야.”
“약자가, 약자가가, 아, 아니야.”
쉰 명이 넘는 분신들이 중얼거리며 일시에 알렉시스에게 달려들었다.
“저러다 죽겠어!”
누군가 소리쳤다.
본체가 죽고 가호만이 남아 이지가 사라졌다.
본체가 악의를 가진 상대에게 반응 중인 것이다.
알렉시스를 죽이기 전까지 분신은 사라지지 않을 터.
“이런.”
공개 전투의 총괄을 맞은 황제 직속군의 기사들이 검을 거머쥐었다.
공작들도 몸을 일으켜 황제의 앞을 막아섰다.
황가에게 오는 여파를 막아야 한다.
“폐하, 물러서 계십시오.”
제르모 공작이 특수 제작된 장갑을 착용하며 말했다. 그의 몸에서 순도 높은 마력이 일렁였다.
샤토브리앙 공작도, 트랑 공작도 가호의 시전 준비를 마쳤다.
지팡이를 쥐고 있던 아스트라 공작이 싸늘한 눈빛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쿠구구구구구…….
크로노스 아스트라의 가호 <중력>이 발동하여 관중석 앞의 땅이 쩌적, 갈라져 떠올랐다.
데이몬드가 막 몸을 일으키려던 찰나였다.
에릴로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를 보호해라.”
아이의 명이 떨어지는 순간.
쾅─!!!
엄청난 파동이었다.
마크의 파동과는 비교도 안 되게 강력한 파동.
마력의 파동이 바람의 흐름마저 뒤틀어 강력한 바람이 휘몰아쳤다.
관중들이 팔이나, 손, 부채 등으로 바람을 막으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땐…….
“어, 어……?!”
마크의 분신들이 산산조각이 되어 흩어지고 있었다.
“데, 데이몬드 아스트라의 <분해>…….”
파동에 닿는 것을 모두 분해하는 공격계 최강의 가호!
“말도 안 돼. <복제>는 자신보다 상위 단계의 가호는 복제하지 못하잖아. 그럼 정말…….”
“그래, 정말로 4단계까지 가호를 개발한 거요─!!”
황제가 관중석 아래에 우뚝 선 아이를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었다.
마크의 분신들이 분해된 가루가 북풍을 따라 흩날렸다.
그 사이에 선 알렉시스의 시선이 황제와 맞물렸다.
황제가 물었다.
“저 아이의 이름이 무엇이라고.”
이시론 공작이 황제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증명한다면, 공작님께서 제 청을 들어주셔요.”
에릴로트 아스트라의 청이 떠올랐다.
그래, 까치발을 든 그 아이가 속삭였던 말이.
“공작님께서 말씀해주세요. 저 아이의 새로운 이름을.”
이시론 공작이 천천히 입을 뗐다.
“알렉시스 이시론.”
“…….”
“제 피를 잇고 태어난, 이시론의 자손입니다, 폐하.”
훗날 그 이름 뒤에 ‘칼소이에’의 제국 명이 붙을, 황자의 등장이었다.
경기장이 터질 듯 시끄러워졌다.
“이, 이시론?”
“공작가의 영식이라고?!”
“손주? 손주인가?!”
“이시론 공작의 2세들이 저리 큰 자식을 낳았을 리 없지 않은가!”
“하면…… 사생아?”
“이시론 공작이 선언했다는 것은 저 아이를 사생아로 두지 않겠다는 뜻이겠지.”
“맙소사…….”
황궁이 뒤집어진 것은 두말할 것이 없었다.
에릴로트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에릴로트 아스트라가 찾고, 지키고, 만든 그 이름.
제국의 역사서에 사상 최강의 이름이 등장한 첫 사건이었다.
* * *
인적이 드문 곳에서 나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예뻐 죽겠네!”
그러며 알렉시스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하지 마.”
알렉시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내 손목을 잡았다.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알렉시스의 얼굴을 확, 끌어당겼다.
“엄청 잘했어. 알아? 엄청나게 잘했다고.”
“안다고요, 아가씨.”
“이제 아가씨라고 부르지 않아도 돼.”
알렉시스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말해주었다.
“알렉시스 이시론.”
“…….”
“드디어 네 이름을 찾았구나.”
“……그래.”
“이제 하나 남았어.”
알렉시스 이시론.
그 이름 뒤에 붙을 가장 고귀한 성, 칼소이에를 되찾는 것.
알렉시스가 내 손을 잡고 말했다.
“그 성이 네게 필요해?”
“물론.”
“그럼 가져온다.”
나는 킥킥 웃으며 알렉시스를 끌어안았다.
“그래, 그래. 착한 내 강아지.”
그렇게 속삭이자 알렉시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린애 취급 좀 하지 말라니까. 나보다 어린 게.”
내 강아지라는 말이 정말로 개 취급을 하는 게 아니란 건 그도, 나 자신도 알고 있었다.
이건 내가 알고 있는 가장 다정한 말이었다.
유혜민의 할머니가, 또 엄마와 새아빠가 세은이를 세상에서 제일 다정하게 부르던 말이었으니까.
순간,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나는 후다닥 떨어졌다.
“……원화?”
카진이었다.
“응.”
“다음 시합이 시작합니다.”
“그래. 가자, 알렉시스.”
“……예, 원화.”
나는 알렉시스의 손목을 잡고 룰루랄라 걸었다.
뒤에서 그런 내 손을 빤히 쳐다보는 카진의 시선이 느껴졌다.
알렉시스가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허공에서 두 소년의 시선이 얽혀들었다.
“카진? 안 가?”
“……아, 갑니다.”
다음 시합은 드디어 중앙군 3번과의 시합이었다.
그런데…….
“시합 종료! 서군의 승리요!”
시합이 꼴랑 5분 걸렸다.
중앙군 3번이 달려오자마자 알렉시스가 육체 지배의 사슬로 장외를 시켜버렸기 때문이었다.
“…….”
“…….”
사람들은 멍하니 귀찮은 표정의 알렉시스를 쳐다봤다.
실린의 얼굴이 새빨개졌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4번과의 시합에서도 엄청나게 빨리 끝나버렸다. 이번에도 육체 지배의 사슬 덕이었다.
‘뭐, 3번과 4번은 마크, 코크 형제보다도 약했으니까.’
문제는 5번인 무니르였다.
“시합이 기대되는군요.”
“예, 알렉시스는 무니르만큼 강하고, 무니르는 신성력에 잔뜩 절여졌을 테니…….”
서군의 참가자들이 킬킬 웃었다.
나도 솔직히 자신이 넘쳤다.
하지만 시합은 예상외로 흘러갔다.
“어?”
“으으응……?!”
무니르가 알렉시스의 육체 지배 사슬에 묶여서 꼼짝을 못 했다.
‘저게 뭐야?’
최강이라며?
반룡이라더니?
‘신성력에 너무 절여놨나?’
그런 것 같진 않은데.
‘마크보다도 훨씬 약하잖아?’
당황한 건 서군만이 아니었다. 중앙군과 관중들도 크게 술렁였고, 실린은 거의 기절 직전이었다.
‘뭔가 이상한데…….’
내가 모르는 뭐가 있는 걸까?
하지만 내겐 상황을 가늠해볼 시간이 없었다.
“선수 교체!”
결국 참지 못한 실린이 선수교체를 선언한 것이다.
‘헉!’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저 애의 가호는 복제잖아.’
같은 가호를 가진 실린이라면 알렉시스의 가호가 <복제>가 아니란 것을 눈치챌 수도 있었다.
이렇게 되면 하는 수 없다.
나는 어깨에 걸고 있던 로브를 벗으며 소리쳤다.
“선수 교체.”
끝은 내 손으로 내주겠다.
넌 죽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