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9화. (189/390)

189화.

선수 교체를 선언하자 관중들이 잔뜩 흥분했다.

“드디어 원화 대결이로군요. 올해는 못 보는가 싶었습니다, 하하!”

“중앙 원화와 떠오르는 서군 원화의 대결이니 볼만 하겠군요.”

터질 듯 시끄러워진 가운데, 중앙군과 서군의 군사들이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쿵! 쿵! 쿵! 

“횃불을 들어라!”

“횃불을 들어라! 우리의 어머니가 밤길을 수호하신다!”

“횃불을 들어라!”

군사들의 목소리가 황궁에 널리 퍼지고, 심판이 선수 교체의 허가를 선언했다.

나는 실린보다 먼저 경기장으로 나섰다.

그러는 동안 실린은 중앙군의 4번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저쪽은 마물을 사용할 수 없…… 다만…… 그러니 원화께선…….”

4번으로부터 경기의 조언을 받는 모양이었다.

나를 노려보고 있던 실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경기장을 쭉 둘러봤다.

이윽고 실린도 경기장으로 올라왔다.

심판 볼프강이 우리를 둘러보며 물었다.

“준비는 되셨습니까?”

나는 흘끗, 그를 쳐다봤다.

‘뭐야. 태도가 공손하잖아.’

경기 내내 관중들만 신경 쓰더니 지금은 몹시 친절한 표정이다.

실린이 고개를 끄덕이니 그가 “예.” 하고 말하곤 번쩍 팔을 들었다.

“시합을 재개합니다!”

둥─, 둥─, 둥─!

북이 울었다.

시합이 시작되고 나서도 나는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실린은 빙그레 웃으며 옷 안에 있던 목걸이를 빼냈다.

내가 알렉시스에게 주었던 백수정보다도 훨씬 커다란 백수정이 셋이나 엮인 호화로운 목걸이였다.

‘저게 복제한 가호를 넣어둔 백수정이로구나.’

실린이 백수정을 매만지며 물었다.

“아쉽게 되었군요.”

“…….”

“서군 원화의 가호를 상대할 수 있다면 제 발전에 도움이 되었을 터인데.”

중앙군이 키득키득 웃었다. 비열하기 그지없는 웃음이었다.

저건 내가 이 시합에서 <마물 조련>의 가호를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비웃는 것이다.

세간에 알려진 나의 가호는 둘이다.

<마물 조련>.

<고대어 읽기>.

그 어떤 것도 이 시합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실린과 중앙군은 그 점을 비웃고 있었다.

하지만 나한테는 웃기는 일이었다.

‘어차피 그런 가호는 없거든? 그건 다 뻥이야.’

그런 능력 없이도 나는 여기까지 왔다.

그때였다.

파짓, 파지지지지짓─!

가까이에서 소음이 일더니 내 주변으로 원형의 불길이 일었다.

“염화…….”

가호 <염화>가 분명했다.

중얼거리자 실린의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불꽃의 근원이라는 의미의 원화에게 이보다 더 어울리는 능력이 있을까요.”

그녀가 말한 순간 불이 순식간에 커졌다.

나는 팔로 입가를 가리며 황급히 주변을 둘러봤다.

‘옷에 불이 옮겨붙으면……!’

실린이 나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왔다.

몸엔 결계를 두르고 있었다.

‘저 세 개의 백수정이 각각 다른 가호를 담고 있구나.’

즉, 쓸 수 있는 가호는 셋인 것이다.

나는 굳은 얼굴로 물었다.

“가호의 단계를 올렸나요? 1단계의 <복제>는 한 번에 하나의 가호만 복제할 수 있는 것으로 아는데.”

“글쎄요. 대답할 의무는 없죠.”

실린은 빙글빙글 웃었다.

뒷짐을 진 그녀가 나를 향해 살짝 허리를 굽혔다.

“으음, 힌트 정도는 드릴까요. 너무 일방적인 대결은 가여우니까.”

“…….”

“군사들의 앞에서 우두머리가 형편없이 당하는 건 보기에 좋은 일이 아니죠. 어때요, 지금이라도 항복하시겠어요?”

“…….”

나는 실린의 뒤를 힐끔 쳐다봤다.

서군 군사들이 잔뜩 굳은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반면에 중앙군은 킬킬 웃으며 신이 났다.

나는 고개를 수그리고 중얼거렸다.

“……복을 ……아.”

“뭐라고요?”

항복을 선언하려나 싶었는지 실린이 내게 조금 다가왔을 때였다.

나는 불 밖으로 확! 손을 뻗어서 그녀의 머리채를 잡았다.

“아악─!”

“항복을 선언할 리 없잖아, 멍청아.”

원화가 직접 참가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실린과의 대결을 염두에 뒀다.

저게 불을 사용하리란 것도 예상 범위 내였다.

‘보여 주기 좋아하는 애니까 불꽃의 근원이라는 말에 어울리는 가호를 준비해뒀겠지.’

작년 시합에서도 그런 이유로 불의 가호를 사용했다.

그러니까─

“내가 화염 공격에 대항할 준비를 안 해뒀겠어?”

화염 공격에 특화된 결계석은 이미 소지하고 있었단다, 이 멍청아.

“이거 놓지 못해?!”

머리채를 잡힌 실린이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결코 손을 놓지 않았다.

불 속에서 빠져나올 때까지도.

실린은 내 손을 마구 할퀴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 와중에도 가호를 사용할 생각을 못 해.’

역시 가호를 담아둔 백수정과 피부가 직접 접촉해야 사용할 수 있는 거야.

그렇다면 쉽지.

쾅─!

나는 순식간에 실린의 어깨를 꺾고 머리를 바닥에 처박았다.

그리고 잽싸게 등에 올라타서 움직이지 못하도록 짓눌렀다.

완전히 내게 찍어눌러진 실린이 벌레처럼 꿈틀거린 건 당연한 일이었다.

관중석에서 헉! 허억─! 하는 숨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저런…….”

“세상에나, 몸이 무슨 수리처럼 날래군요.” 

이번에 얼굴이 새파래진 것은 중앙군이었다.

중앙 원화의 꼴이 너무나 추했으니까.

반면에 서군은 신이 나서 북이나, 심벌즈 따위를 마구 쳤다.

“에릴로트 아스트라!”

“와아아아아─!! 에릴로트 아스트라! 서군 최강─!”

멀리서 제르모 공작이 슬쩍 고개를 숙이는 것이 보였다.

어깨가 가늘게 떨리는 것이 몰래 웃고 있는 모양이었다.

샤토브리앙 공작이 노려보자 헛기침하며 표정을 가다듬었지만.

실린 샤토브리앙이 고함을 내질렀다.

“이거 놓으란 말야─!”

나는 우아하게 팔을 걷고서, 그 애의 머리칼을 손가락에 휘감았다.

그리고 쾅!

한 번 더 머리를 바닥에 처박아줬다.

“어때? 지금이라도 항복할래?”

─하고 말하며.

내가 바로 아스트라 개싸움의 최강이야, 인마.

* * *

제르모 공작은 웃음을 참으려고 애썼다.

에릴로트 아스트라가 실린의 머리채를 우아하게 손가락에 휘감고서,

“어때? 지금이라도 항복할래?”

─라고 묻기 전까진.

푸핫!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자, 샤토브리앙 공작이 그를 무시무시하게 노려봤다.

제르모 공작이 다시 한번 헛기침했다. 표정만 보면 금세라도 사람 서넛쯤은 죽일 것 같았다.

그는 샤토브리앙 공작의 시선을 피하며, 아스트라 공작에게 물었다.

“서군 원화는 몸 쓰는 것이 익숙하군요. 특수계 사용자들은 좀…… 둔한 편이잖습니까.”

아스트라 공작의 입매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훨씬 어릴 때부터 저보다 열 살이 많은 사촌 오라비에게도 결코 지지 않았지.”

아스트라의 3세 사내아이 중 가장 덩치가 큰 애덤에게마저.

애덤마저 저 애와 육탄전 훈련을 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에릴로트는 진짜 악바리란 말이에요…….”

조프리도 육탄전 훈련 때마다 쌍코피를 줄줄 흘리며 울었다.

“저, 저, 독한 계집애가…… 허어어어엉, 아버지……!”

머리채를 잡는 건 예삿일이었다.

힘으로 안 되니까 온갖 방법을 다 썼다.

죽어라 피하고, 모래를 뿌리고, 할퀴고, 물어뜯는다.

낭심을 걷어차였던 조프리가 거품을 물고 기절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기함한 드뷔시 자작이 물어본 적이 있었다.

“아니, 뒷골목 싸움도 아니고 어찌 그리…….”

“지는 고 시르니까. (지는 건 싫으니까.)”

머리가 산발이 되고, 눈에 멍을 매달고도 저 애는 흥! 콧방귀를 뀌었다.

아스트라 공작이 픽, 실소를 흘렸다.

어릴 때부터 그런 아이였다. 육탄전이라면 곱게 자란 실린 샤토브리앙은 상대도 안 되는 게 당연했다.

“어어, 저기 보십시오!”

관중 중 하나가 소리쳤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시에 에릴로트 아스트라에게 집중되었다.

에릴로트가 실린의 백수정 목걸이를 휙, 잡아 뜯은 것이다.

“……!”

샤토브리앙 공작과 중앙군의 4번, 그리고 실린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너, 너어…….”

실린이 중얼거리자 에릴로트는 생긋 웃었다.

그러곤 냅다 던져버렸다.

백수정 목걸이가 경기장 끝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아유, 아쉬워라. 난 힘을 좀 길러야겠어.”

“너─!!”

실린이 비명을 내지르며 크게 버둥거렸다.

그런데 이상했다.

갑자기 에릴로트의 움직임이 둔해진 것이다.

남들이 보기엔 실린을 우습게 보고 장난을 치는 것처럼 보였다.

“뭐지?”

“왜 갑자기……?”

에릴로트는 실린이 빠져나갈 때까지도 움직이지 않았다.

실린은 그 틈에 에릴로트를 발로 차서 빠져나왔다.

“바보 같긴……! 저기서 밀려나면 어쩌자는 거야!”

“이런. 중앙 원화가 다시 백수정을 찾으면…….”

“에릴로트 아스트라가 시합을 너무 우습게 여겼군요. 저기서 멍청하게 밀려나다니요.”

시합을 지켜보던 서군 참가자들도 당황했다.

“무슨…….”

리암이 당황해서 중얼거리자, 카진이 미간을 좁혔다.

‘뭔가 이상한데.’

에릴로트는 몸이 날랜 아이였다. 그런데 실린의 둔하기 그지없는 발길질에 저렇게 맥없이 당한다고?

분명히 무언가 이상했다.

에릴로트는 실린에게 맞은 배를 쥐고 신음하는 중이었다.

허겁지겁 일어난 실린은 백수정 목걸이를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이런─!”

“원화! 일어나십쇼!”

……실린의 손에 다시 백수정 목걸이가 들어왔다.

실린의 입가에 오만한 미소가 떠올랐다.

* * *

나는 배를 잡고 끙, 신음했다.

어찌나 거세게 찼는지 배가 뚫리는 기분이었다.

‘방금 누가 나한테 가호를 썼어.’

실린이 걷어차기 전에, 누가 나를 ‘제약’했다.

몸이 둔해지더니 종국엔 실린이 빠져나갈 때까지 움직일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은 멀어서 보지 못했다지만, 심판은 봤을……!’

심판 볼프강을 쳐다본 나는 이를 악물었다.

볼프강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슥, 시선을 돌린 것이다.

‘시합에 다른 사람이 개입했다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했구나.’

어쩐지 과하게 친절하더라니.

저 심판은 샤토브리앙 공작에게 붙어 있는 금붕어 똥들 중 하나였던 거다.

‘잠깐만, 저 심판의 가호가 뭐였지.’

나는 흠칫했다.

‘저 쓰레기가…….’

볼프강의 가호는 <육신의 통제>.

상대의 움직임을 제한하는 가호였다.

‘저게 모른 척만 한 게 아니라, 직접 내게 가호를 쓴 거야!’

내가 상황을 파악하는 동안 실린은 목걸이를 쥐고 걸어왔다.

그러곤 살벌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이런 모욕은 처음이에요, 서군 원화.”

“…….”

“그리고 난 내게 모욕을 준 사람을 결코 그냥 두지 않아요.”

실린이 푸른색이 도는 백수정을 손에 쥐었다.

경기장의 땅이 부서지며 조각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무수히 많은 조각이 나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나는 피하는 데에 정신이 없었다.

“저런……! 저러다 위험하겠어요!”

“워, 원화…….”

실린은 고고하게 서서 엉망으로 피하는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난 조각들을 완전히 피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무수히 많은 것 중 몇 개는 팔, 다리, 얼굴 등에 잔뜩 맞았으니까.

점점 장외로 밀려갔다.

“얼마나 더 추하게 버틸 수 있을까요, 서군 원화.”

“…….”

“가호도 없이 말이에요.”

가호가 없어?

‘헛소리.’

그 순간, 나는 모아두고 있던 마력을 한 번에 방출했다.

‘보여줘, 세일론.’

기사단의 꼬마 대장님으로 세계의 스토리가 바뀐 덕에 난 한 단계 상승한 가호를 사용할 수 있었다.

눈앞이 뿌옇게 변하며 글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저러다 죽겠어.’]

[‘원화……!’]

[‘차라리 패배를 선언하지. 공작가 영양쯤이나 되는 아이가 추하구나.’]

[‘마물 조련의 가호를 사용할 수 없으니 상대가 되지 않는군.’]

[‘역시 원화로서는 실린 샤토브리앙 쪽이 더 수준 높다.’]

[‘결국 가호를 쓰지 못하게 하면 쉽게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이지.’]

.

.

[‘타인에게 복제한 가호를 시전할 수 있는 시간은 5분이 고작. 그 후엔 틈이 생기니…….’]

저거다.

‘5분.’

이미 4분은 훌쩍 지나가고 있으니, 공격에 틈이 생길 터.

나는 시간을 가늠하며 실린과 그 주변을 둘러봤다.

“이만 항복하세─”

나는 실린을 향해 빠르게 뛰어갔다.

이제 파편을 피하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온몸이 후들후들 떨렸으나, 결코 속도를 떨어뜨리지 않았다.

그리고.

“어? 어어, 어?!”

“뭐야, 공격하려던 게 아니었어?!”

관중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내가 실린을 지나쳐서 뛰어간 것이다.

“뭐야, 미친 건가?”

누군가 그렇게 중얼거렸을 때였다.

마침 딱 5분.

실린의 지배에서 벗어난 거대한 파편이 실린의 뒤에 있는, 솟아오른 기둥에 맞았다.

알렉시스가 카진의 가호를 이용하여 변형하였던 기둥이었다.

쾅─!!

기둥이 무너지며 실린의 몸에 직격했다.

“꺄아아아아아악─!!”

실린이 기둥에 깔려 쓰러졌다.

“……!”

“……!!”

몇몇 사람들이 벌떡 일어났다.

그 중엔 샤토브리앙 공작도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그래, 에릴로트!”

아빠가 난간을 잡고 내게 소리쳤다.

실린이 벌레처럼 버둥거렸다.

“으극, 그그긋…….”

나는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올렸다.

“내가 올라오면서 결심한 게 있거든.”

“…….”

“너 죽여버리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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