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마사는 제 언니와 에릴로트를 쭈뼛쭈뼛 따라갔다.
골목으로 들어가 걷기를 얼마쯤.
도착한 곳은 허름한 카페였다.
카페 안에선 중절모를 쓴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아주 정중하게 에릴로트에게 허리를 숙였다.
“귀하신 분을 뵙습니다.”
“이렇게 와줘서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한데 소개하고 싶다는 사람이 이 아이들입니까?”
“맞아요. 마리, 마사 인사드려.”
대체 누구기에?
마사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마리가 먼저 치맛자락을 잡고 무릎을 굽혔다.
“저는 마리이고, 동생은 마사라 합니다. 따로 성은 없으니 이름으로 편히 불러주십시오.”
“그래. 너는 예법을 제법 아는 모양이구나.”
“부끄럽지만, 책에서 본 몇 구절로 흉내나 낼 수 있을 뿐입니다.”
“하하, 제대로 배우지도 않았는데 그 정도면 훌륭하지.”
“과찬이십니다.”
사내는 하하, 인자하게 웃곤 에릴로트를 보았다.
“과연 영애님께서 소개할 만큼 영리한 아이입—”
“하, 한데 무슨 소개를 말씀하시는 건지……!”
마사가 불쑥 끼어들자 마리가 인상을 찌푸렸다.
중절모의 사내도 힐끗, 마사를 쳐다봤다.
에릴로트는 사내의 표정을 살피곤 얼른 말을 돌렸다.
“이 아이들은 너무나 겸손하고 선량하답니다. 일자리를 소개해준다고 하면 대번에 거절할까 싶어서 따로 설명하지 않았어요.”
“이런 시대에 그만큼 선량하다니 더욱 믿음이 갑니다.”
“그렇게 봐준다니 기쁘군요.”
“제 소개는 직접 해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남자는 자매를 바라봤다.
“이시론 공작가의 황도 총집사장인 로인스 알레그레다. 너희는 집사장이라 부르면 되겠구나.”
“……!”
“이, 이시론 공작가요?!”
자매가 놀라서 쳐다보자, 이시론 공작가의 총집사장이 빙그레 웃었다.
“저택에서 고용인을 구하던 차에 아스트라 백작 영애께서 똘똘한 아이를 소개해주시겠다고 하셨단다.”
“…….”
“그, 그런……!”
마사가 감격한 표정으로 에릴로트를 쳐다봤다.
레스토랑에서 해고당하고 속상해하였더니, 이렇게 일자리까지 소개해주시는 거구나.
‘영애님은 정말로 좋은 분이셔!’
마사는 에릴로트에게 고개를 푹 숙였다.
“저,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언니의 약값을 어찌 해결해야 하나 염려하였는데……!”
에릴로트가 흠칫, 말을 잘랐다.
“그런 인사는 괜찮아.”
“아니요! 인사 정도로 이 은혜를 어떻게 보답할 수 있겠어요? 집도 구해주시고, 생활비를 지원해주시고…… 정말 저는 너무 감사해서…….”
마사가 울먹이자 마리가 황급히 동생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만해.”
“이런 건 자존심을 부릴 게 아니라 인사를 해야—”
“그만 하라니까.”
“언니! 죄송해요, 영애님. 제가 대신 사과할게요.”
하지만 에릴로트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언니도 참.’
운 좋게 이렇게나 좋은 영애님의 호감을 얻었는데.
인사 정도는 할 수도 있잖아.
자존심이 세도 너무 세다.
감사 표현을 하는 건 결코 지는 게 아니건만…….
이시론 공작가의 집사장은 시종일관 인자한 표정이었다.
‘우리를 좋게 봐주셨나 봐.’
이게 다 영애님 덕이라니까!
마사는 수줍은 표정으로 고개를 수그렸다.
남자가 말했다.
“너희가 괜찮다면 마사는 3등 홀 메이드로, 마리는 4등 하우스 메이드로 고용하고 싶구나.”
3등 메이드!
마사는 어쩔 줄 모르고 양손으로 입을 막았다.
보통 고아는 저런 대귀족가에 고용인으로 일할 수 없다.
운 좋게 자리를 구한다고 해도 최하급인 4등 메이드였다.
‘그런데 3등이라니……!’
마사는 총집사장의 손을 덥석 잡았다.
“물론이에요!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일은 다음 주부터 하면 어떨까 싶구나.”
“저희는 언제라도 좋아요!”
“그래. 자아, 하면 너희들에게 몇 가지 사항을 안내해주마.”
모두 자리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말을 하는 건 총집사장과 마리, 마사 자매뿐이었지만.
에릴로트는 차를 마시며, 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기숙도 가능하냐고요? 앗, 급료가 많다면 저는 그쪽이 더 좋아요! 언니도 그렇지? 고용인들이 아프면 저택 내의 의사 선생님이 봐주시는 것도 좋잖아! 저어, 진찰비는 무료인가요……?”
“물론이다.”
“그러면 저희는 기숙하는 편이 더 좋겠는데요…… 영애님, 괜찮을까요……?”
집까지 구해줬는데 고용인 기숙사를 이용하겠다고 하면 언짢으시지 않을까.
그러나 에릴로트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그래. 너희 생각이 그렇다면 당연히.”
“기뻐요!”
마사는 꺅! 소리치며 기뻐했다.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해요.”
“응. 일도 잘 맞았으면 좋겠다.”
마사가 울먹이며 에릴로트를 바라봤다.
‘정말이지 좋으신 분이셔.’
언젠가 꼭 이 상냥한 영애님께 보답하리라.
언니에게도 꼭 인사하라고 해야지.
그런 결심을 하며 마사는 양손을 꼭 모았다.
마리만이 한숨을 흘렸을 뿐이었다.
* * *
한 주가 지났다.
입궁한 나는 사무실에서 으그그, 하며 기지개를 켰다.
“일이 많은 것도 아닌데 엄청나게 처지네.”
“휴식 후 복귀할 때는 그런 법이죠.”
행정책임자인 고르고가 헤헤, 웃으며 내게 찻잔을 내밀었다.
나는 찻잔을 받아들며 눈을 가늘게 떴다.
“내가 없는 동안 무슨 일 없었어?”
감시할 사람이 없다고 또 뇌물을 주고받고 있었으면, 넌 죽었다.
말뜻을 알아차린 고르고는 펄쩍 뛰었다.
“저는 그저 오직 원화를 향한 충심으로 훈련, 또 훈련, 그리고 훈련을……!”
“흐음, 그렇다면야. 달리 내가 알아야 할 얘기는 없어?”
“원화군의 조사가 끝났습니다. 샤토브리앙 공작가의 부정과 얽힌 군사가 수도 없이 많았지요. 직속군도 꽤 얽혀있었고요.”
고르고의 말에 따르면 정말로 엄청난 숫자였다.
‘다 쫓아내면 원화군을 싹 갈아엎어야겠구만.’
그렇다면 차라리 묻어두는 쪽이 낫다.
가뜩이나 권력이 개편되는 중이다.
권력에서 밀려난 자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데, 원화군까지 써먹을 수 없다면 위험했다.
‘결국 고위직 몇 명이 독박쓰고 쫓겨나겠구만.’
아니나 다를까 고르고는 비슷한 말을 했다.
“위에서 눈치싸움 중입니다. 누가 책임을 지는가에 대해서.”
“유력한 자는?”
“에즈록 장군, 비케인 장군, 시오벨 장군…… 아, 혹시 원화께 도움이 될까 싶어서 제가 황군 영향력을 순위로 매겨봤는데 말입니다.”
“일 잘한다, 너?”
고르고가 손을 싹싹 비비며 헤헤, 웃었다.
“순위 매기기, 정보 취합은 특기지요. 여론 조작도 제법 합니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났으면 주가 조작 계의 샛별이 되었겠다.
‘어쨌든 써먹을 데가 많겠는걸.’
나는 고르고가 건넨 명단을 확인하면서 말했다.
“다른 일은 없어?”
“그 외엔 뭐 서군의 일이니 별로 아실만 한 게 아니라…….”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자 고르고가 흠칫, 나를 쳐다봤다.
“제, 제가 무슨 실수라도……?”
“서군 일이 제일 중요한데 그걸 내가 몰라도 돼?”
하여간 권력에만 눈이 벌게서.
‘쓸모는 있지만, 경계는 해둬야겠어.’
고르고가 어색하게 웃으며 내게 서류를 건넸다.
“서군의 훈련일지입니다. 그리고 그 공개 훈련에서 2번이었던 분 말입니다만…….”
알렉시스의 얘기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부대장들의 만장일치로 올해 서임 명단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그렇겠지.
시합에서 그렇게 엄청난 실력을 보였으니.
“응.”
“명단에 성을 무엇으로 기재해야 할는지요……?”
그러자 다른 군사들이 이쪽을 힐끔힐끔 쳐다봤다.
이시론 공작가에서 그를 인명록에 올릴지 궁금해 죽겠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공작가의 아들이 일반 군사로 들어오는 경우는 없으니까.’
나는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다.
“알렉시스 이시론. 그렇게 적어둬.”
“이, 인명록에 본가의 영식으로 이름이 오르는 겁니까?!”
그렇다.
이시론 공작은 시합이 있었던 날 바로 알렉시스의 이름을 인명록에 올렸다.
‘그러고 보니까 알렉시스에게 며칠 소식이 없네.’
이시론 가문의 일로 인해서 며칠 황군에 휴가까지 냈는데.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였다.
“원화, 온실에서 사람을 보내셨습니다.”
원화들이 날 찾는 모양이었다.
하긴, 중앙 원화가 공석이 되어서 처리할 일이 한둘이 아니지.
‘으, 이제 다시 일상에 복귀한 기분이 드네.’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 몸을 일으켰다.
내가 온실로 들어가자 거대한 테이블에 있던 원화들이 나를 반겼다.
“어서 오렴.”
“안녕하세요, 세바스티아 언니.”
“그래.”
나는 자리에 앉아서 남군과 북군 원화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목소리에 기운이 없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얼굴이 어둡네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북군 원화가 울상이 되어 말했다.
“사태가 정리되면 저는 곧 자리에서 물러날 듯해요…….”
“네?”
“이번 일에 얽힌 것 때문에 북부 귀족들에게 신뢰를 잃어서…….”
“북부에선 부친이신 몬테규 백작님의 영향력이 상당하실 텐데요?”
“저를 쫓아내려고 하는 사람들의 구심점이 저희 언니랍니다…….”
북군 원화는 “이번 일로 맞아 죽을 뻔했어요…….” 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겨우 횃불의 궁 생활이 즐거워지려고 했는데…… 제가 원화가 아니게 되어도 종종 만나 주실 거지요?”
북군 원화가 반짝거리는 눈으로 날 쳐다봤다.
내가 실린 사건에서 발을 빼도록 도와준 일로 엄청난 호감이 생긴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남군 원화는?’
북부보다 남부 쪽이 더 원화에게 반감이 크다고 들었다.
‘음, 저쪽도 상황이 안 좋구나.’
거무죽죽한 안색이었다.
세바스티아 언니가 짝, 손뼉을 치며 말했다.
“그럼 급한 건부터 해치울까요. 공석인 중앙 원화 자리 말인데요. 서둘러 원화 중에 차출하라는 명이 내려왔어요.”
북군 원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음, 중앙군을 이대로 비워둘 순 없긴 하지요.”
그러자 세바스티아 언니가 말했다.
“서군 원화를 추대할까 싶은데요.”
찻잔에 각설탕을 넣던 난 흠칫했다.
‘뭐라고?’
절대 싫어!
중앙 원화가 되면 얼마나 일이 많은데!
실린처럼 다른 원화들에게 떠넘길 수도 없을 거 아냐.
‘난 이미 원화가 된 목적을 이뤘다고.’
아빠가 중앙탑에 들어갔으니까.
게다가 그렇게 되면 서부에서 새로운 원화가 올 거다.
애써 키워놓은 알토란 같은 서군을 홀라당 새로운 서군 원화에게 바치게 되는 거다.
나는 다급히 말했다.
“저는 동군 원화를 추천하고 싶은데요!”
“……나를?”
“네. 아무래도 저는 초임이라 아직 배울 게 많으니까요.”
“하지만 역량으로 보나, 공으로 보나 네가…….”
제발 중앙 원화의 인맥만 이용해 먹을 수 있는 자리에 있게 해줘.
간절한 표정으로 쳐다보니, 세바스티아 언니가 픽 웃었다.
팔짱을 낀 언니가 말했다.
“뭐, 도움을 많이 받았으니 귀찮은 자리 정도는 떠맡아줄까.”
북군 원화는 헤헤 웃었다.
“저는 두 분 중 누구라도 좋을 것 같네요. 남군 원화 생각은요?”
“저는 결정에 따르겠어요.”
난 이때다 싶어서 대화를 정리했다.
“그럼 동군 원화를 추대하는 것으로 결정하지요.”
“냉큼 말하긴.”
세바스티아 언니는 쿡쿡 웃었다.
그 후로 몇 가지 일을 결정하고, 가벼운 한담이 이어졌다.
남군 원화의 표정은 풀릴 줄을 몰랐다.
자리가 파할 때까지도.
세바스티아 언니와 북군 원화가 가장 먼저 일어났다.
“그럼 난 결정된 사항을 대장군께 전하러 가지.”
“아, 저도 퇴직 신청을 해야 하니 함께 가실까요?”
“그래요, 그럼.”
두 사람이 떠나고, 온실이 조용해졌다.
남군 원화는 떠날 생각도 하지 않고, 멍하니 테이블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찻잔을 코스터에 달칵, 내려놓았다.
“리카.”
“……네? 방금 저를 이름으로 부르셨나요?”
“이쯤 되었으면 많이 친해진 듯해서요. 불편하셨나요?”
“아뇨, 뭐…….”
“남부에선 이하드 백작님의 세력이 강하지요?”
“……네.”
“표정이 안 좋은 것을 보니 이하드 백작님께서도 남군 원화의 퇴직을 종용하시나 보군요.”
“…….”
“이하드 백작님의 장남에게 찾아가보세요.”
“무슨…….”
“그리고 말씀하세요. ‘백수정을 왜 그렇게나 많이 사들이셨나요? 혹시 이하드 백작님께서도 그 일을 아시는지요.’ 라고요.”
“……!”
백수정은 보통 군사들을 몰래 키우고 있을 때 필요하거든.
그 아들을 협박해서, 이하드 백작의 마음을 돌리라는 말이다.
‘우리 아빠가 백수정 유통의 총책임자라서 그런 정보는 쉽게 알 수 있지.’
이하드 백작이 편을 들어주면 남부 귀족들은 조용해질 것이다.
남군 원화의 눈이 가늘게 떨렸다.
“왜, 왜 제게 그런 조언을 해주세요?”
“친하다면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싶고, 아니라면 친해지고 싶어서요.”
“어째서…….”
나는 깍지 낀 손에 턱을 걸치고 말했다.
“애완견이 하나쯤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난 예의는 집어치우고 빙그레 웃었다.
“무슨……!”
“네가 내게 한 일을 잊은 건 아냐. 하지만 겁 모르고 실린에게 충성하던 건 좋게 보았지.”
“…….”
“어때, 이번엔 내 개가 되어보겠니?”
아무리 황제의 명이라지만 친황제파의 꼬장꼬장한 귀족들이 이렇게 쉽게 아빠를 받아들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아빠의 뒤에 할아버지가 있으니까.’
할아버지는 델프르 후작이 넘긴 친황제파의 치부를 모두 쥐고 있었다.
그렇게 델프르 후작이 내 할아버지의 개가 되었으니, 내게 후작의 정보를 넘겨줄 남군 원화가 필요하다.
말뜻을 알아차린 남군 원화가 마른침을 삼켰다.
갈등하는 게 역력했다.
한참 말이 없는 그 애를 보고 난 몸을 일으켰다.
“싫으면 말─”
그러자마자 남군 원화가 허둥지둥 일어나 내게 달려왔다.
내게 고개를 숙인 그 애가 말했다.
“지금까지의 방종을 용서하셔요. 여, 영애에게 소속되고 싶습니다.”
나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리고 남군 원화, 아니, 리카의 턱을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나는 내 아이를 아주 귀여워한단다.”
“예…… 영애…….”
리카가 몽롱한 표정으로 날 올려다보았다.
난 네가 원하는 걸 알고 있어.
너는 다시 권력의 맛에 취하게 되겠지.
그리고 결코 제 발로는 날 떠날 수 없을 것이다.
“자, 첫 번째 명이다. 볼프강 듀만스의 멱을 따와.”
실린과의 시합에서 심판 주제에 날 방해했던 것, 잊지 않았다.
난 뒤끝이 아주 길단 말이지.
리카 델프르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네, 영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