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 * *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난 나는 하녀들에게 몸단장을 받았다.
나는 드레스를 입혀주는 하녀에게 물었다.
“알렉시스는?”
“방에 계십니다. 시중 하인을 들여보냈는데, 스스로 준비하시는 것이 편하시다고 하여 돌아왔습니다.”
“방이 불편하다고 하진 않아? 서쪽 끝방은 안 쓴 지 오래되었잖아.”
알렉시스의 방은 서쪽 끝 귀빈실로 정해졌다.
원래 내 옆방을 주려고 했는데, 아빠와 오라버니들이 그것만은 안 된다고 뒤집어졌기 때문이다.
알렉시스가,
“난 상관없어.”
─하고 말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녀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미켈란 님께서 꼼꼼히 살피셨습니다.”
“미켈란이라면 안심할 수 있겠네.”
그렇게 말하고 드레스룸을 나왔는데, 미켈란이 고개를 숙였다.
“식사 준비가 되었습니다.”
미켈란은 정말로 지혜로운 사람이란 말이야.
드레스룸은 방음이 좋지 않아서 하녀와 나눈 이야기가 다 들렸을 텐데도, 모른 체 한다.
주인의 말을 엿듣는 하인은 불편한 법이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방을 나섰다.
계단을 내려가던 중에 미켈란에게 물었다.
“알렉시스에게도 아침을 먹으러 내려오라고…… 아니다. 아침은 방으로 올려보내.”
어제 이래저래 일이 많아서 저녁도 대충 때웠는데, 아침은 편하게 먹어야지.
불편한 자리에서 먹으면 체하기나 할 거다.
“예.”
대답한 미켈란이 식당의 문을 열어줬다.
그런데…….
“어?”
나는 깜짝 놀라서 다이닝 테이블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쳐다봤다.
아빠와 오라버니들이 한 사람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알렉시스?”
“응.”
“어떻게…….”
“아침 식사하러 왔는데.”
그야 그렇겠지만.
‘안 불편한가?’
그러고 보면 눈치를 보는 스타일은 아니다.
그래도 우리 가족이 저렇게 죽일 듯이 노려보는데도, 홀로 태연히 식사하다니.
아빠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래도 어제 못을 박아놔서 알렉시스에게 성질은 부리지 못했다.
“와서 식사해라, 에릴로트.”
“네.”
나는 대답하고서 자리에 앉았다.
알렉시스의 옆자리에.
어딘가에서 으득, 이 가는 소리가 동시다발적으로 들려왔다.
미켈란이 물었다.
“양고기 포타주와 옥수수빵, 아스파라거스 샐러드, 에그 베네딕트, 계절과일 와플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포타주와 샐러드만. 음료는 됐어.”
“차를 함께 내올까요.”
“아이스티가 좋겠는데…… 음, 다즐링으로.”
말하고 있는데, 알렉시스가 내 앞에 잔을 내밀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루이보스티였다.
“마셔.”
“아이스티가 좋은데.”
“속이 안 좋을 땐 찬 음료를 피하는 게 상식이다.”
나는 뚱한 얼굴로 알렉시스가 내민 찻잔을 들었다.
‘어제는 사람 심란하게 하더니, 오늘은 또 챙겨주네.’
하여간에 종잡을 수 없는 애다.
“안 좋은 줄은 어떻게 알았대.”
투덜거리자 알렉시스가 에그 베네딕트를 포크 옆면으로 자르며 말했다.
“그러니까 빵순이가 빵을 안 먹고 따뜻한 포타주를 먹겠지.”
“눈치는…….”
“투덜거리지 말고 차나 마시지?”
“투덜? 어제부터 툭툭댄 게 누군데 그─”
말하고 있는데 앞에서 쿠드드득, 하는 소리가 들렸다.
발자크가 부술 기세로 테이블 끝을 꽉 쥐고 있었다.
“지들끼리 얘기하고…… 부부야, 뭐야.”
혼잣말이라고 하는 것 같은데, 기세가 너무 흉흉해서 고용인들까지 흠칫했다.
내가 잘못 생각했다.
다 같이 식사했을 때 불편한 건, 알렉시스가 아니라 우리 가족들이었다.
가족들은 정부를 집에 들여앉힌 남편을 보는 듯한 눈으로 날 쳐다봤다.
어딘가에서 ‘네가 어떻게 이럴 수가……!’ 같은 환청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슥, 시선을 피하고 있는데 마침 식사가 나왔다.
‘속이 안 좋아서 그런가. 오늘은 양고기 냄새가 역하게 느껴지네.’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알렉시스가 후추 그라인더를 내밀었다.
“이건 또 어떻게 알았어?”
알렉시스가 손을 닦으며 가볍게 말했다.
“항상 널 보고 있으니까.”
“어?”
알렉시스는 내 말에 대답하지 않고 끼익,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
그리고 내게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저, 이─!”
“……!”
“…….”
발자크가 벌떡 일어났고, 리시먼드의 얼굴이 굳어졌으며, 요슈아는 드물게 무표정한 얼굴로 알렉시스를 쳐다봤다.
미켈란은 눈치 빠르게 하인들을 내보냈다.
하인들이 전부 식당을 나서는 중에도 알렉시스는 신경 쓰지 않고 내게 말했다.
“난 줄곧 널 보고 있었어.”
“……그래. 고마…… 워?”
“이제부턴 너도 날 봐야 할 거야.”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알렉시스가 아빠에게 고개를 숙였다.
“가보겠습니다. 훈련장에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래.”
그렇게 말한 알렉시스는 식당을 나섰다.
난 기가 막힌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저게 진짜 뭘 잘못 먹었나?’
어제부터 왜 저러는 거야.
그러다 알렉시스의 나이를 다시 헤아렸다.
열다섯.
사춘기가 왔을 시기이긴 했다.
내가 평범한 여자애였다면 엄청나게 휘둘렸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탕!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아빠가 살벌한 표정으로 식기를 거칠게 내려놓은 것이다.
“마저 식사해라.”
으득, 이를 갈 듯 말한 아빠가 몸을 일으켰다.
발자크도 아빠를 따라 자리를 벗어났다.
“훈련장에 가시려는 거죠? 저도 함께 갑니다.”
아빠와 발자크의 몸 윤곽을 타고 거친 기세가 일렁였다.
발자크가 막 식당의 문고리를 잡았다. 나는 서둘러 말했다.
“아빠, 드릴 말씀이 있어요.”
“나중에 하자.”
식당 문이 막 열리려고 했을 때였다.
“그리미에 백부가 절 죽일 거예요.”
“……!”
“……!!”
“무슨…….”
포크로 샐러드를 뒤적거리던 요슈아, 문을 박차고 나갈 태세의 발자크, 슬쩍 아빠와 발자크를 따라가려던 리시먼드까지 눈을 크게 떴다.
아빠가 멈칫, 날 돌아보았다.
“……뭐라고?”
“제가…… 시간을 되돌아왔다면 믿으시겠어요?”
“대체 무슨 말을…….”
“그리미에 백부의 손에 비참하게 죽었고, 과거로 돌아왔어요.”
“…….”
미켈란은 눈을 꽉 감았다.
그런 미켈란을 본 발자크가 억지로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 표정은 뭐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장난이 진짜…… 같잖아.”
“…….”
나는 대답하지 않고, 아빠를 빤히 쳐다봤다.
아빠는 내 동공을 지그시 응시했다.
아주 오래.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진심이로구나.”
“그래서 알렉시스가 우리에게 필요해요. 그는 숨겨진 황가의 진짜 장남이니까.”
창밖에서 까마귀 떼의 날갯짓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가 그 좁고 허름한 감옥에서 죽어가던 그 순간처럼.
* * *
아빠와 발자크가 자리에 앉았다.
몸을 일으켰던 리시먼드도 착석했고, 요슈아는 은 식기를 내려놓았다.
가족들의 지긋한 시선 한가운데에서 나는 입을 뗐다.
“아빠가 돌아가신 건 제 나이 서너 살쯤의 일이었어요.”
전쟁 중에 적군에게 사망했다고 알려졌으나, 내가 본 과거 속에서 아빠는 금제 당해 있었다.
전투 중에 움직일 수 없게 되어서, 적군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보호자 없는 더러운 피. 그게 사람들이 저를 부르는 말이었지요.”
이번 삶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비참한 일생이었다.
훨씬 커서야 공작성에 들어갔다.
들어가서도 온갖 손가락질을 받고, 온몸은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매번 꼴찌였거든요. 전투 훈련 중에 죽을 뻔한 게 몇 번인지도 몰라요.”
“가호가 있잖아! 마물 조련이라는 엄청난 가호가 있으니까─”
“거짓말이야, 발자크.”
“……뭐?”
“그런 가호는 내게 없어. 내게 있는 건 다른 가호야. 그마저도 태어나자마자 그리미에에게 금제 당해서 있는 줄도 몰랐고.”
“…….”
“가호가 없는 무능력자, 부모가 없는 더러운 피. 그게 나였어.”
리시먼드가 눈을 꽉 감았다.
아스트라에서 그렇게 살았다면 내 취급이 얼마나 끔찍했을지,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발자크가 다급히 말했다.
“왜 백부님이 네가 태어나자마자 금제한 거야? 말이 안 되잖아. 그때 아버지는 후계 구도에 들지도 못했고, 넌 갓난쟁이였을 뿐인데!”
“내가 죽어갈 때 그리미에는 이렇게 말했어.”
“그러니까 뭣 하러 그런 가호를 가지고 태어나. 거슬리게.”
그리미에가 내게 했던 말을 해주자, 요슈아가 미간을 좁혔다.
“‘그런 가호’라고?”
“가호는 고대인의 영혼이 우리 인간에게 나눠준 힘이야.”
“무슨…….”
“그리고 나의 가호는 고대인의 제사장, 그러니까 왕과 같았던 세일론이 주었지.”
<열람>.
세계의 모든 정보를 알 수 있는 가호.
처음엔 그것뿐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열람>을 이용하면 내가 대충 ‘주인공 버프’라고 이름 붙인 그 엄청난 힘을 이용할 수 있다.
강철 까마귀에 불과했던 라곤을 무려 용으로 탈피시킨 엄청난 힘.
그게 그리미에가 두려워한 힘이 아니었을까.
그런 얘기를 해주자, 리시먼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두려워할 만도 했겠군…… 그렇게 죽어서 지금의 네가 된 거야?”
“아니.”
“하면…….”
“다음 생은 다른 세계에 있었어. 그때의 내 이름은 유혜민이야.”
나는 그때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어려서 친부가 죽고, 홀어머니 손에 자랐던 일.
어머니가 재혼하고 아버지가 다른 동생이 태어나자, 집안의 천덕꾸러기가 되었던 일.
집안의 ATM기가 되었던 어린 날.
“그만. ……그만해.”
요슈아가 한 손으로 눈가를 가리고 끊어질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웃었다.
“그래도 좋은 건 있었어! 나 보좌관으로 일했다. 지금으로 따지면 정치인의 참모 같은 거야!”
“…….”
“거기서 중요한 것들을 다 배웠다고! 멋지지?”
“…….”
“그때 <빙의했는데 흑막의 손녀였다>라는 소설을 읽었어.”
“소설?”
“응. 유혜민의 세계에 살던 소녀가 지금 우리 세계에 빙의했는데 알고 보니까 흑막 공작님의 손녀였다는 얘기야.”
“…….”
“그 아이의 할아버지의 이름은 크로노스 아스트라.”
“……!”
오라버니들의 눈이 커졌다.
나는 싸늘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리미에의 친딸의 이야기였지. 내게 있던 가호가 우리 세계의 이야기를 소설로 보여준 거야.”
“그럼…….”
“주인공은 달리아라는 아이야. 밝고, 사랑스럽고, 따뜻한 아이였어. 오빠들도 아주 좋아했어.”
“……우리가?”
“발자크가 얼마나 아꼈는지 몰라. ‘내 동생이라고! 살려줘. 살려달라고, 제발─!’ 막 이러면서 할아버지 앞에서 필립보의 멱살도 잡았다고.”
“…….”
“요슈아는 고대 몬스터에게서 달리아를 지키려고 대신 공격을 받은 적도 있어.”
“…….”
“다들 좋아할 거야. 착한 아이거든.”
요슈아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우리가 그 애 때문에 너에게 상처 줬어?”
“아니야!”
“…….”
앗. 너무 빨리 대답했다.
‘요슈아는 눈치가 빠른데 거짓말인 걸 알아챈 거 아냐?’
나는 머쓱해져서 찻잔을 들었다.
‘솔직히 상처는 받았지. 그때 나는 여린 애였으니까.’
달리아와 나는 생일이 비슷했는데, 그 애는 쌍둥이가 어렵게 구해준 생일선물을 끌어안고 몹시 기뻐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발자크와 요슈아가 달리아를 감싸며 소리쳤다.
“또 무슨 계략을 꾸미려고 달리아를 보는 거야!”
“부탁인데, 너 이 성에서 좀 꺼져줘라.”
‘생각하니까 열받네.’
난 그냥 부러워서 쳐다본 거다.
그야 그때 난 생일선물 같은 거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으니까.
고등학생 나이 정도였다고. 그런 일, 부러워할 수 있잖아.
‘하지만 경계할 만도 했어.’
달리아는 나랑 얽히면 이상하게 다치거나 아팠으니까.
그것도 3세들 사이에서 날 고립시키기 위한 그리미에의 계략이었을 거다.
“달리아가 빙의할 육신을 가진 아이를 제가 보호하고 있어요.”
“그건…… 다행이네.”
발자크가 중얼거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알렉시스는요. 그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이었어요.”
“황가의 진짜 장남이니까.”
“네. 그것도 건국 황제의 가호로 최강이라 일컬어지는 <지배자의 위세>를 가진 아이거든요.”
“하지만 그리미에만 없으면 굳이 알렉시스까지 필요하진 않잖아.”
나는 코스터에 찻잔을 달칵, 내려놓고 말했다.
“이제 이 얘기를 해야 할 것 같아요.”
내 말에 아빠가 나를 지그시 쳐다봤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스트라는 제 나이 열아홉에 무너집니다.”
가족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무슨……! 그리미에가 공작이 되었다면서!”
“그리미에 팔로스토 공작.”
“……팔로스토?”
“그리미에가 이 제국의 모든 귀족들과 합심하여 아스트라를 무너뜨린 공로로, 아스트라의 장원에 세운 새로운 가문의 이름이에요.”
“미친.”
발자크가 벌떡 일어났다.
“조부님이 계시는데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없……!”
“할아버지를 죽이는 게 황제예요.”
“……뭐라고?”
“직접 아스트라 장원까지 와서 할아버지를 죽이죠.”
“…….”
“모든 게 현 황제의 손에서 이뤄졌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알렉시스를 황제로 만들어야 해요.”
“…….”
나는 눈을 꽉 감고서 말했다.
“……지 않아.”
“…….”
“나, 죽고 싶지 않아.”
“…….”
“아빠, 나요……. 나, 살고 싶어요.”
“…….”
“아빠랑, 오빠들이랑…… 계속 같이 살고 싶어.”
기어이 눈물이 흘렀다.
내가 홀로 눌러 삼킨 나의 비극이, 우리 가족의 비극이, 또 단지 살고 싶다는 소원이 너무나 가슴 아파서.
아빠가 나를 끌어안았다.
“그래.”
“아빠…….”
“그래, 살자.”
나는 아빠의 옷깃을 잡고 엉엉 울었다.
아빠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결코 너를 죽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 무엇을 걸어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