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1화. (201/390)

201화.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아빠를 비롯해 리시먼드, 발자크, 요슈아는 아무런 말 없이 우는 나를 바라봐주었다.

* * *

해질녘.

잔뜩 지친 에릴로트를 올려보낸 데이몬드와 삼 형제가 서재에 모였다.

데이몬드는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발자크가 손목을 꽉 말아쥐었다.

“죄송…… 합니다.”

발자크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데이몬드는 그런 아들을 힐끗 쳐다보았다.

“무엇이.”

“에릴로트를, 그러니까, 첫 번째 에릴로트요. 그 애를 지켜주지 않고 도리어 괴롭혔어요.”

“…….”

“에릴로트는 가족에겐 바보 같은 애니까, 그래서 말은 못 해도…….”

엄청나게 상처를 줬겠지.

다른 친척들이 괴롭히는 것을 모른 체했을뿐더러, 가문의 망신이라 힐난하면서.

아스트라의 오점.

상냥한 달리아를 괴롭히는 버러지.

양심이 남아있다면 제발 꺼져줘라.

……그런 말들을 수도 없이 하면서.

‘그런데 넌 어떻게 손을 내밀 수 있었어?’

그렇게 못돼먹은 자신에게 왜 손을 내밀어준 거야?

첫 번째 삶에서도, 세 번째 삶에서도 상처만 주던 바보 같은 형제에게 어떻게 손을 내밀 수 있었지?

고개를 푹 수그린 발자크가 말했다.

“죄송해요.”

“……발자크.”

“죄송합…….”

“발자크 아스트라!”

벼락같은 노성에 발자크는 흠칫, 위를 올려다보았다.

데이몬드가 인상을 찌푸린 채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예, 아버지…….”

“네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니다. 그러나…….”

데이몬드가 발자크 앞에 한쪽 무릎을 굽혔다.

그리고 금세라도 무너질 것 같은 아들의 뺨을 감쌌다.

“그때의 너와 지금의 너는 다른 사람이다. 그렇지 않으냐?”

“……예.”

“에릴로트가 우리에게 다른 삶을 살 기회를 주었다. 나를 전장에서 끌어내 이 삶이 이어지게 해주었고, 너와 형제들에게 가족이라는 안심할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

“그리하여 저 애의 첫 번째 삶의 바보가 되지 않도록 해준 것이다. 그러니 너는 후회할 게 없다.” 

“…….”

“단지 필요한 것은, 지금의 너는 그때의 너와 같은 아둔한 짓을 하지 않으리란 맹세야.”

“예…….”

“고개 숙이지 마라. 나는 내 자식에게 죄없이 고개 숙이는 법을 가르친 적이 없어.”

“예…… 예, 아버지…….”

발자크가 이를 악물며 눈물을 참았다.

제 형과 나란히 앉아있던 요슈아가 휙, 고개를 돌렸다. 북받치는 감정을 참으려는 것이 역력했다.

리시먼드는 형제들의 모습을 보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블리젠, 아니, 리시먼드 오라버니는 늘 잘해줬어요. 그때는 겁이 많아서 저의를 의심했는데요, 지금은 알아요.”

“무엇을……?”

“오라버니가 좋은 사람이라 그렇다는 거. 나, 이제 조금은 선의를 의심하지 않게 되었어요.”

“…….”

“아빠랑 오라버니들, 그리고 한지혁이랑 미켈란, 콘라드, 또 잔느의 덕이야.”

에릴로트, 너는 우리의 덕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우리가 너의 도움을 받았어.

“저요. 작년에 엄청 많은 생각을 했어요.”

“생각이라고?”

“응. 내가 관계에 굉장히 두려움이 많다는 걸 알게 됐어.”

“……그런 일을 겪었으니까 그럴 수밖에.”

“내가 겪었던 일을 말하는 건 알렉시스와의 약혼을 지지해주길 바라기 때문만이 아니에요.”

“…….”

“모든 걸 말해도 아빠와 오라버니들은 내가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거라고, 저의를 의심하지 않을 거란 믿음이 있기 때문이에요.”

“…….”

“그래서 결심할 수 있었어.”

너는 우리 중 가장 강한 사람이었다.

상처를 입고 겁쟁이가 된 우리를, 가장 많이 다친 네가 일으켜주었다.

너는 그만큼 아프고도 또 사람을 믿었다.

두렵고 고통스러울지언정 결코 피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우리는 믿음직스러운 아버지를, 결코 서로를 버리지 않을 형제들을 손에 넣은 것이다.

네 덕에.

네가 있어서.

리시먼드가 말했다.

“그 애의 첫 번째 삶에서도, 지금도 변하지 않은 악인은 있습니다.”

발자크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그리미에.”

“그래.”

요슈아는 드물게 무표정한 얼굴과 고저 없는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 쓰레기는 결코 용서하지 않습니다.”

리시먼드와 데이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몬드가 방 한 켠에 자리를 잡고 있던 총집사, 미켈란에게 말했다.

“오늘 밤, 관할령으로 간다.”

“예. ……한데 주인님.”

그러자 데이몬드가 그를 힐끗 쳐다봤다.

미켈란은 조심스러운 어투로 물었다.

“아가씨의 말을 믿으십니까.”

“무슨 뜻이냐.”

“아가씨께서 이시론 공자와의 약혼을 위해 거짓말을 하셨을 가능성도 있지 않겠습니까.”

“…….”

“때로 아이들은 비극적이고도 특별한 삶을 꿈꾸기도 합니다. 아가씨께서 그런 치기심에 말을 꾸며내었을 수도 있습니다.”

발자크가 울컥 인상을 찌푸렸다.

“에릴로트는 그런 어리석은 거짓말을 하는 녀석이 아니야!”

리시먼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식으로 우리를 속일 수 있는 아이가 아니고.”

요슈아가 몸을 일으켰다.

“설혹 속는다 해도 괜찮아.”

영리한 그 애가 거짓말의 여파를 모를 리 없다.

그런 여파를 알면서도, 손길을 바란다면 얼마든지 내밀어주겠다.

데이몬드가 미켈란의 눈을 지그시 응시하며 말했다.

“이러하여서.”

“…….”

“너와 콘라드 마르시알은 8년 전부터 모든 것을 알고 그 아이의 사람이 돼주었다지.”

“그렇습니다.”

“너희는 어째서 그 아이의 말을 믿었느냐.”

미켈란은 빙그레 웃었다.

“주인님, 그리고 도련님들과 같은 마음이었지요.”

나를 구원해준 그 아이를 믿었기에.

설혹 속는다 하여도 그 아이라면 괜찮아서.

에릴로트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보세요, 아가씨.

당신이 이제껏 해온 모든 일들엔 의미가 있었습니다.

당신이 그 어떤 말을 하든 신뢰하고, 설혹 속는다 하여도 괜찮다는 이들이 이렇게나 잔뜩 있지 않습니까.

데이몬드가 몸을 일으켰다.

“오늘 밤, 관할성의 가신들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집결시켜라.”

그 어떤 험난한 전장에서도 패배를 모르던 사내의 눈에 날카로운 이채가 떠올랐다.

“이 아스트라, 내 손에 넣어야겠다.”

해가 완전히 몸을 숨기고, 밤이 펼친 어둠이 장막처럼 세상을 뒤덮었다.

까마귀 몇이 푸드덕, 날아올랐다.

본격적인 가주위 쟁탈전의 시작이었다.

* * *

이튿날.

아침 일찍 1층으로 내려온 나는 2등 집사의 말을 듣고 미간을 좁혔다.

“아빠와 미켈란이 관할성으로 내려갔다고?”

“예.”

“내게 따로 얘기를 전하진 않으셨고?”

“그렇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어제 울다 지쳐서 일찍 잠든 바람에 관할성에 내려갔는지도 몰랐다.

“그럼 언제 오신다는…….”

말하던 중에 어깨 위로 텁, 하고 턱이 올라왔다.

발자크가 하품을 쩍, 하며 말했다.

“리시먼드 형님의 이동의 가호석으로 오실 거니까 하루 이틀이면 된다셨어.”

요슈아가 발자크의 뒤에서 웃으며 걸어왔다.

“좋은 아침이야, 에릴로트.”

“응, 좋은 아침. 그런데 무슨 일로 내려가신 건지 몰라……?”

“데이몬드 관할령의 체계 정비랄까.”

“체계?”

“응, 그리고 이걸 너에게 전해달라고 하셨어.”

요슈아가 내게 무언가를 건넸다.

그의 손바닥을 들여다본 나는 깜짝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거……!”

“그래, 인장이야.”

아스트라의 까마귀 문양이 아니었다.

중앙엔 초승달, 그 주변엔 별 세 개가 자리 잡고 있고, 그 달과 별들을 정원형의 테두리가 감싸고 있는 형태였다.

“아스트라 제2백작가, 데이몬드 관할령의 새로운 문양이다.”

“새로운 문양이라고?”

요슈아가 빙그레 웃고 내 귀에 속삭였다.

“적과 같은 문양을 쓸 순 없잖아. 여러모로 귀찮은 일이 생길 테니까.”

그야 그렇긴 하다.

보통 대금 결제는 인장으로 한다.

한데 아스트라의 문양을 쓰면 그리미에가 그 돈을 쓴 건지, 우리가 쓴 건지 알지 못하지.

요슈아는 내 검지에 반지형의 인장을 끼워주었다.

그리고 셔츠 안에서 금줄에 걸린 펜던트 형의 인장을 보여주었다.

“나도, 발자크도, 리시먼드 형님도 받았어.”

“그렇다는 건…….”

“보좌단을 꾸리고 장원 정치에 뛰어들어도 된다는 의미지.”

계단을 내려오던 리시먼드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오늘부터 혈족 교육에서 빠져도 된다는 아버님의 전언이 있으셨어.”

“어?”

“그리고…….”

리시먼드가 말을 잇다 말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내 어깨에 턱을 걸치고 있던 발자크가 으득, 이를 갈았다.

“네 약혼을 진행하시겠단다.”

“정말?!”

“벌써 그 새…… 알렉시스 이시론을 데리고 장원으로 가셨다. 조부님께 보여주려는 모양이지.”

나는 뛸 듯이 기뻐했다.

‘다행이야!’

친척들이 알렉시스와 내 약혼을 엄청나게 반대할 거다.

이시론 공작가와 데이몬드 관할령이 혼맥을 맺으면, 아빠의 위세가 더 높아질 거니까.

용을 가진 나를 이시론 공작가에 빼앗길 수도 있다는 핑계로 길길이 날뛰겠지.

‘할아버지도 반기진 않겠지.’

이시론 공작은 6공작의 거두였던 사내.

심지어는 친황제파다.

아빠가 가문을 등지고 황제와 손을 잡는다고 의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내 친권자인 아빠가 허락하면 어쩔 수 없지.’

천군만마를 얻게 된 거나 다름없다 이거다.

……물론 오라버니들의 표정은 좋지 않았지만.

“걱정하지 마. 난 이시론 공작에게 말리지 않을 거니까.”

내가 씩 웃자, 오라버니들이 일시에 살벌한 표정이 되었다.

발자크가 나를 휙, 돌려서 어깨를 잡고서 말했다.

“절대로, 절대로 말리지 않는 거다. 응? 그놈들이 아무리 결혼까지 가자고 애걸복걸해도……!”

“발자크.”

요슈아가 발자크를 쏘아보곤, 나를 향해 미소 지었다.

“에릴로트, 이건 기억해야 해.”

“……뭘?”

“누구든 감히 네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건드리려고 한다면, 즉시 라곤을 불러. 그 누구든 말이야. 응? 그, 누구, 든.”

특히 알렉시스가 건드리면 꼭 라곤을 부르라는 말로 들렸다.

리시먼드가 말했다.

“이것도 기억해, 에릴로트.”

“……?”

“약혼한다고 꼭 결혼해야 하는 법은 없어.”

“…….”

“만에 하나, 정말 만에 하나 일이 틀어지고 온갖 재해가 생겨서 결혼한다고 해도 이혼이란 게 있어.”

“…….”

내가 떨떠름한 표정이 되자, 세 오라버니가 동시에 소리쳤다.

“알겠지?!”

“알지?”

“알고 있겠지.”

발자크가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고, 요슈아는 달콤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물었으며, 리시먼드가 무표정한 얼굴로 채근했다.

“……으응.”

“그래!”

“좋아.”

“맞아.”

“……그래도 어디 가서 그런 얘기는 하지 않기로 해.”

‘약혼은 찬성이나, 결혼까지 간다면 상대를 죽여버리겠다 위원회’의 바보 셋이 헤벌쭉, 생긋, 빙그레 웃었다.

‘어휴.’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계단을 올라갔다.

출근 준비나 해야겠다.

* * *

그 시각, 공작성.

성에 들어갔던 엔조가 데이몬드의 마차로 달려왔다.

“이시론 공자의 입궁 허가가 떨어졌습니다.”

“혈족들은.”

“대알현실에서 공작님과 함께 기다리고 계십니다.”

고개를 끄덕인 데이몬드가 마차에서 내렸다.

그가 마차 안에서 호화로운 로브를 걸치고 후드를 깊게 눌러쓴 알렉시스를 돌아봤다.

“출발한다.”

“예.”

데이몬드와 알렉시스가 함께 아스트라 공작성으로 들어갔다.

지나는 곳마다 벽 가에 양쪽으로 늘어선 고용인들이 고개를 숙였다.

공작성에 있을 때는 몰랐지만, 타가문을 거치고 나니 알겠다.

‘위세가 보통이 아니군.’

고용인 하나, 병사 하나조차 평범한 기세가 아니었다.

앞서 걷던 데이몬드가 조용히 말했다.

“턱을 당기고, 시선을 멀리해라. 결코 아래를 내려봐선 안 될 것이다.”

“예, 각하.”

“어깨를 펴고, 허리에 힘을 주어라. 그 누구도 네게 위해를 가할 수 없음을 기세로 보여야 하는 곳이 아스트라 공작성이다.”

“예.”

인적 드문 곳에 이르러 데이몬드는 물었다.

“두려우냐.”

“아닙니다.”

걸음을 멈춘 데이몬드가 알렉시스를 돌아보았다.

“하면 어째서 시선이 떨리지?”

“감정이 요동칠 뿐입니다.”

“어째서.”

“이 제국의 모든 것이 내 것이 될 테니까. 이 대단한 아스트라마저도 말입니다.”

데이몬드의 입매가 비틀렸다.

“내 딸은 사람 보는 눈이 있지.”

과연 황제가 될 오만함이다.

데이몬드가 관문의 앞을 비켜서며 말했다.

“아스트라의 혈족과 황족 외엔 그 누구도 허가 없이 침입하지 못하는 곳이다.”

“예.”

데이몬드의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황재(皇材)를 모시겠습니다.”

알렉시스가 관문을 통과했다.

전쟁의 시작이었다.

* * *

아스트라의 혈족들이 미간을 좁히고, 알렉시스를 뜯어보았다.

발데릭이 오만한 표정으로 알렉시스에게 물었다.

“이시론 공자가 아스트라 공작성엔 무슨 일입니까, 형님.”

데이몬드는 상석에서 무료한 표정으로 알렉시스를 바라보는 아스트라 공작에게 말했다.

“에릴로트와 이시론 공자의 약혼을 허락한 참입니다, 가주.”

“……뭐?”

그때까지만 해도 귀찮은 표정이던 아스트라 공작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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