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대알현실이 터질 듯 시끄러워졌다.
아스트라 공작과 거의 동시에 2세들이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발데릭이 꽥 소리쳤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시론이라니!
이시론 공작이 누구던가.
권력의 정점에서 군림했던 사내다.
공작들의 연합으로 수장에서 밀려난 지금까지도 권력의 한 축을 담당했다.
뿐인가. 죽은 안나마리아 황비의 후견인으로서 친황제 세력의 강력한 뒷배였다.
‘친황제파를 흡수한 지금, 이시론 공작과 혼맥까지 맺는다면……!’
4남 발데릭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다른 2세들 또한 바짝 긴장한 얼굴이었다.
‘황제와 이시론 공작이 동시에 밀어준다면 데이몬드 오라버니는 날개를 단 것과 마찬가지다.’
2녀 바스티나.
‘그렇지 않아도 벌써 데이몬드 형님을 보는 가신들의 눈빛이 달라졌는데……!’
6남 구스타프.
‘형님에겐 에릴로트까지 있지 않은가. 일국의 국군에 필적하는 엄청난 힘을 가진 그 용이 수중에 있건만.’
3남 데콘스.
그들 모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데이몬드는 장남 그리미에에게 필적하는, 아니, 웃도는 권력을 손에 넣는다.
즉, 차기 공작이 될 확률이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진다는 소리였다.
‘안 돼─!!’
데콘스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아버님의 허락도 없이 이 무슨 통보란 말입니까!”
“아비인 내가 자식의 혼인을 허락한 것이 무슨 문제란 말이냐.”
“호, 혼약은 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가문과 가문의 결합이에요.”
“이시론은 건국 공신 가문으로 가문의 역사, 명예 그 어떤 것도 흠잡을 데가 없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반대하는 것은 내게 권력이 쏠리는 것을 두고 볼 수 없기 때문이냐.”
“……!”
발데릭이 말문이 막혀 어버버거렸다.
그러자 2녀 바스티나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우려되는 면은 있지요. 모든 권력은 가주에게 향해야 한다는 것이 아스트라의 철칙이잖아요?”
“하면 관할성 군 해체에 너희가 한목소리로 반대한 이유는 무엇이냐.”
“그, 그건, 외적에 대항하기 위해……!”
“아버님께선 당시 모든 군을 공작성에서 통솔하는 대신, 직속군의 수를 두 배로 늘리고 경계군을 강화하겠노라 말씀하셨다.”
바스티나가 마른침을 삼켰다.
데이몬드는 무감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한데도 너희는 죽기 살기로 반대를 외쳤지.”
“마,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지 마세요. 그때는 어쩔 수 없이……!”
“가주 한 사람에게만 권력이 있어야 한다면 바스티나, 너 또한 항구의 지분을 포기해야 한다.”
“……!”
데이몬드가 다른 형제들을 쳐다봤다.
“발데릭, 너 또한 고리대금업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
“데콘스는 처가인 플로랑테 백작가와 은밀히 협력 중인 몬스터 핵 유통사업을 그만둬야 하고.”
“…….”
“구스타프는 마철도 사업에서 손을 떼야 하며, 바실레는 마탑 연맹 총장에서 내려와야 할 터.”
“…….”
“…….”
데이몬드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모두가 각자의 세력을 만들고 있는 지금, 누가 나를 옳지 않노라 말할 수 있단 말이냐.”
2세들이 저마다 시선을 돌리고 미간을 좁혔다.
3남 데콘스가 동생인 6남 구스타프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속삭였다.
“차라리 각자의 사업을 포기해서라도 막아야 하는 것이 아니냐……?”
구스타프가 인상을 찌푸리곤, 목소리를 바짝 죽였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십시오! 형님은 깨끗한 돈으로 사업을 하셨습니까?”
“그건…….”
다들 행정자금을 이리저리 빼돌리고, 세수를 조작해서 밑천을 마련했다.
아스트라 공작이 제일 싫어하는 ‘타가문과의 결탁’을 한 자도 많을 것이다.
그 사업을 모두 공작에게 넘기는 건 스스로 치부를 공개하는 것과 같다.
그게 아니라도 내 손의 보석을 넘기고 싶어 하는 자는 없었다.
발데릭이 이를 득득 갈았다.
“아스트라에서 어찌 형님을 믿습니까?”
“뭐라.”
“형님이 황제, 이시론과 결탁해서 가문에 해를 끼치지 않을 거란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자 다른 형제들이 옳다구나 동조했다.
“예! 그리 아끼는 딸이 이시론의 며느리가 되는 것인데, 딸을 위해 가문의 내비를 넘길지도 모릅니다!”
“그래선 안 되지요! 역시 이 결혼은……!”
바스티나가 소리치고 있을 때, 데이몬드는 여상한 표정으로 공작을 바라봤다.
“해서 데릴사위입니다, 아버님.”
“……뭐라?”
“이시론 공자를 제2백작저에서 맡을 것입니다. 공자의 교육은 공작성에서 전담하십시오.”
회장이 뒤집어졌다.
그건 볼모가 아닌가!
가신들의 눈이 떨어질 듯 커졌다.
‘사생아긴 해도 저 엄청난 능력의 아들을 데이몬드 님께 넘긴단 말인가?!’
이시론 공작 같은 사람을 대체 어찌 설득했기에……!
가신들이 잔뜩 흥분한 표정으로 공작을 쳐다봤다.
“하, 하면 우리에겐 나쁠 게 없는 이야기입니다.”
“권력 구도가 개편되고 있습니다. 이시론의 동맹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 공작님! 데이몬드 님께서 더할 나위 없는 선물을 주셨습니다!”
허락해.
허락해!
허락……!!
가신들이 노골적으로 눈을 빛냈다.
그때, 알렉시스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아스트라 공작에게 허리를 깊이 숙인 그가 말했다.
“에릴로트를 위해 살고, 에릴로트를 위해 죽을 것입니다.”
가신 중 한 사람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무엇보다 마음가짐이 훌륭하지 않습니까.”
“예, 예! 그렇지요!”
가신들은 헤벌쭉 웃고 있던 그때, 아스트라 공작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데이몬드.”
“예.”
“너는 양심이란 것이 없구나.”
“……예?”
“어디 막 걸음마를 뗀 아이를 혼맥의 도구로 이용할 생각을 하는 것이냐─!!”
……뭐라고요?
사람들은 기가 막힌 얼굴로 공작을 쳐다봤다.
이 나라 귀족의 평균 약혼 나이 7~8세.
태어나기도 전부터 약혼을 예정해두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공작 자신조차 갓난쟁이 때 약혼했고, 자식들도 대부분 에릴로트 나이 이전에 약혼했으며, 3세 또한 한참 전에 약혼한 자들이 많았다.
게다가…….
“에릴로트 아가씨께선 태어난 지 6개월부터 걸음마를 하셨다지 않았소?”
가신들이 공작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아들아이가 또래 보다 늦된 것 같다고 남편이 하도 걱정을 하여서 말입니다.”
“나이가 어떻게 된다고 했지?”
“벌써 세 살인데, 아직 ‘아버지’나 ‘유모’ 정도의 단어밖에는 말하지 못합니다.”
“가호는 발현했고?”
“다행히 대천문이 막히기 전에 발현하긴 하였는데…….”
“성장이 늦된 아이도 있으니 너무 걱정 말고 기다려보게나.”
그런 잡담을 나누고 있으니 어흠, 커흠! 헛기침하며 다가와서 슬쩍 끼어들었다.
“에릴로트는 6개월에 걸음마를 시작했고, 세 살 때 문장을 읽었지.”
─라고.
데이몬드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스트라에 양심이 어디 있단 말인가.’
자신은 정말로 걸음마를 떼자마자 거대한 숲에서 홀로 성에 돌아가야 했다.
데이몬드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아이는 걸음마를 뗀 지 오래되었습니다.”
“아직 10년밖에 되지 않았어.”
“혼맥의 도구로 이용하는 것도 아니고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에게 결혼을 강요하는 것부터가─”
“에릴로트가 먼저 청했습니다.”
“그럴 리가 없어─!!”
벼락같은 노성이 대알현실을 뒤흔들었다.
그럴 리가 없다.
에릴로트는 분명히 말했다.
“하부지 조아. 하부지랑 께속께속 가치 사꺼야. (할아버지 좋아요. 할아버지랑 계속계속 같이 살 거예요.”
그리고,
“할아버지가 제일 좋아요!”
“……제일?”
“응, 세상에서 제일이요!”
또,
“할아버지 같은 사람이랑 결혼할래요.”
“말은.”
“정말이에요. 저는 할아버지를 제일 좋아하니까요.”
그런 아이가 저런 놈을 좋아할 리 없다.
왜냐면 저 기생오라비는 듬직한 자신과 달리 키만 멀대같이 크고 덩치가 없다.
저 제비 같은 놈은 관록은커녕, 낯짝만 볼만하니까!
아스트라 공작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데이몬드는 이를 악물었다.
속이 뒤집어지는 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에릴로트는 분명히 말했다.
“아밤미 조아. 아밤미랑 맨날맨날 가치 사꺼야. (아버님 좋아요. 아버님이랑 매일매일 같이 살 거예요.”
그리고,
“아빠가 제일 좋아요!”
“나도 그래, 에릴로트.”
“응, 세상에서 제일!”
또,
“아빠 같은 사람이랑 결혼할래요.”
“말은.”
“정말이에요. 저는 아빠를 제일 좋아해요.”
─라고 했단 말이다.
그런 면에서 비슷한 사람을 고르긴 했다.
……얼굴은.
아마 딸은 자신과 닮은 사람은 없을 테니, 대충 매우 잘생겼다는 게 비슷한 사람을 고른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굳이 결혼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 시각, 공작의 뒤에 서 있던 콘라드 또한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얼굴로 허공을 보고 있었다.
‘결혼?’
대체 황도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단 말인가.
몰래 딸 키우는 기분으로 보던 자신의 아가씨께선 말씀하셨다.
“콘라두 조아. 콘라두랑 항사항사 가치 있을꼬야. (콘라드 좋아. 콘라드랑 항상항상 같이 있을 거야.)”
─이하 동문─
콘라드가 없지만, 왠지 있는 것 같은 웬 호랑말코에게 빼앗기는 기분을 느끼고 있던 그때.
데이몬드가 말했다.
“에릴로트가 먼저 결혼을 청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 한들 허락할 수 없다.”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말씀해주십시오.”
“…….”
“이유가 무엇입니까.”
“…….”
“이유를 말씀해주십시오.”
“……들어.”
“예?”
“생긴 게 마음에 안 들어! 어디 데려와도 제비 같은 놈을…….”
그러자 아스트라 공작의 바로 옆에서 거의 흐느끼고 있던 드뷔시 자작이 말했다.
“하면 못생긴 놈이면 좀 낫겠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어디 그따위 놈이.”
“그러시면서 무슨.”
드뷔시 자작이 낄낄거리자, 공작의 눈이 매서워졌다.
하지만 대꾸할 말이 없었던 터라 그는 말을 돌렸다.
“……저 녀석은 너무 어려.”
“성인이면 괜찮으셨겠습니까? 청혼장을 보낸 자 중에 성인도 꽤 많은데요.”
“나이를 그렇게 처먹고 열한 살 먹은 손녀를 노린다면 아스트라를 모욕하는 게 틀림없다. 군사를 일으켜라!”
“저 공자께선 나이도 딱 맞지 않습니까? 네 살 차이라니 나이도 어울립니다.”
“가문이……!”
“이시론 공작가입니다. 6공작가 중에 역사가 가장 오래되었지요. 하면 제르모 공작가는 어떠십니까?”
“입만 산 놈이 감히 누굴 며느리로 탐낸단 말이냐!”
드뷔시 자작이 그것 보라며 양손을 펼치고 어깨를 으쓱했다.
아스트라 공작의 눈빛이 살벌했다.
“누가 저놈을 끌어내라─!!”
드뷔시 자작은 결국 참지 못하고 으학학학학학! 웃음을 터뜨렸다.
데이몬드가 조용히 읊조렸다.
“개판이군.”
알렉시스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 * *
다음 날 아침.
식사 중이던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새벽에 리시먼드 오라버니가 장원에 갔다고?”
오늘 휴가에서 복귀한 베티와 하이디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 장원에서 새벽에 급히 연락이 와서요.”
“통신석에 불이 나는 줄 알았어요!”
나는 눈을 깜빡였다.
오라버니가 갑자기 불려갈 만한 일이 뭐가 있지?
‘주변에서 군사를 도모했나?’
그래서 병장기를 이동시켜줄 사람이 필요한 게 아니라면, 황도에 있는 사람을 왜 갑자기?
나는 포크를 놓으며 “흐음.” 신음했다.
“오라버니가 장원으로 간 지 얼마나 되었어?”
“음, 6시에 출발하셨으니 세 시간 정도 되었겠어요.”
‘누가 군사를 도모했다면, 지금쯤 긴급 경계령이 떨어질 만한 시간인데…….’
고민하던 난 한지혁에게 손짓했다.
“예, 아가씨.”
남들 앞에선 예의 바른 고용인인 그가 내게 고개를 숙였다.
“콘라드에게 연락해서 장원에 무슨 일이 있는지 알아─”
그렇게 말하던 순간이었다.
얼굴이 새파래진 2등 집사 샘이 헐레벌떡 식당으로 뛰어 들어왔다.
하이디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가씨 앞에서 이 무슨 무례를……!”
“긴급 경계령입니다!”
역시 누가 군사를 도모했나.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봉은 누구라고 하니?”
“가주님이십니다!”
“……뭐?”
“그, 그러니까 아스트라 공작님께서 이시론 공작가로 들이닥치셨다고 합니다……!”
뭐라고?!
나도 모르게 입을 떡 벌릴 뻔했다.
나만이 아니었다.
다들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2등 집사 샘에게 집중했다.
나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물었다.
“무슨 일로…….”
“그, 아가씨의 결혼 때문인 듯싶었습니다…….”
맙소사.
장원에서 황도까지 단숨에 오기 위해서 리시먼드를 불렀구나!
다들 엄청나게 굳어져서 허둥거렸다.
“저, 전쟁이 납니까?”
“겨, 결계! 결계를 펼쳐야……!”
“마법사를 부를깝쇼?!”
나는 짝! 손뼉을 쳤다.
“다들 진정해.”
그러나 나도 긴장되기는 마찬가지라, 바짝 굳은 얼굴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할아버지…… 이시론 공작가에 검을 가져가셨니……?”
“가보인 용혈검을 꺼내셨다고…….”
나는 꽥 소리쳤다.
“한지혁, 요슈아 오라버니에게 이동의 가호석을 빌려와!”
이건 진짜 큰일이다.
난 헐레벌떡 뛰쳐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