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7화. (207/390)

207화.

한창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열린 방문 틈으로 얼굴이 불쑥 들어왔다.

발자크였다.

“뭐해?”

쳐다보니, 발자크의 뒤엔 요슈아와 리시먼드가 있었다.

“유로생 령으로 내려갈 준비.”

“유로생 령엔 왜?”

“돈 벌려고!”

정확히 말하면, 황야의 마법사를 내 수족으로 들이고 아빠에게 동창회를 열어주기 위해서지만.

뭐, 그게 다 돈 버는 일이기도 하다.

오라버니들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떠올랐다.

발자크가 그게 무슨 뜻이냐는 듯 물었다.

“돈? 우리가 돈을 벌어야 할 일이 있어?”

“왜 없어!”

나는 큰일 날 소리를 한다는 듯이 홱, 발자크를 쳐다봤다.

돈은 원래 많을수록 좋은 거다.

아빠를 아스트라 공작으로 만들려면 천문학적 돈이 필요하다.

물론 그 후에 내가 탱자탱자 놀면서 살기 위해서도.

‘가문의 돈을 받으면, 그만큼 일을 해야 하거든.’

발자크가 방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백수정 유통비만으로도 충분하잖아?”

“그리미에는 우리보다 훨씬 부자라고.”

아마 겉으로 드러난 돈보다, 음지에 쌓아둔 돈이 더 많을 거다.

만약 <장막>을 그리미에가 운영한다면 자금은 상상을 초월하겠지.

‘그에 비해 우리 재산은 다 드러나 있어.’

역시 훗날을 대비해 잔뜩 벌어둬야겠다.

요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백수정에만 기댈 순 없긴 하지.”

그러자 발자크가 눈살을 찌푸렸다.

“왜? 남들은 못 해서 안달인 거래인데.”

“백수정은 황제가 통제할 수 있잖아.”

“어째서?”

“……넌 공부 좀 해라.”

요슈아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리시먼드가 대신 대답했다.

“수출입 승인 권한은 황제에게 있어.”

“아아.”

“게다가 제국과 알리기오사의 관계가 틀어지면, 알리기오사에선 우리에게 더는 백수정을 유통하게 해주지 않을 테고.”

“우리 자금줄이 황제 손에 있다는 거구만…….”

그렇다.

그러니까 백수정 외에 돈줄을 마련해놔야 한다.

발자크는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알겠는데, 유로생 령엔 혼자 가? 거긴 영지전이 수도 없이 일어나는 곳이라 위험하다고.”

“몬스터를 데려갈 거야.”

“강력한 몬스터는 결계에 막힐 텐데.”

“응, 그래서 강력하지 않은 몬스터로.”

“그럼 호위에 의미가 없잖아!”

“괜찮아. 알렉시스도 함께 가니까.”

알렉시스가 있는데 누가 날 건드릴 수 있겠는가?

내가 아무렇지 않게 말하자, 오라버니들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룰루, 짐을 쌌다.

“아! 아빠에게 다녀오겠다고 말씀드려야지.”

그러고 홀랑 방을 나가는 동안에도 못마땅한 시선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 * *

이튿날.

나는 황도 외곽에서 마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지혁이 후들후들하며 내 엄청난 짐가방을 겨우 끌어안고 있었다.

“넌 무슨 짐이 이렇게…… 으윽…… 마차를 타고 가든가!”

“마차를 타고 다니는 평민이 어디 있어?”

“황도에서도 그렇게 보일 필요는 없잖아!”

그럴 수 없다.

“‘에릴로트 아스트라’가 유로생 령에 갔다는 걸 남들이 알게 할 수 없는걸.”

유로생 령은 무법지대다.

약물, 노예 등의 불법 거래가 수없이 일어나는 곳이다.

‘그런 곳에 갔다는 걸 알면 별 소문이 다 돌겠지.’

그것도 사람들이 약혼자인 알렉시스와 함께 갔다는 걸 알게 되면?

역시 아스트라와 이시론 간에 밀약이 있다고 여길 것이다.

그런 것을 설명해주자, 한지혁이 인상을 찌푸렸다.

“어차피 소문일 뿐인데, 뭘.”

“황제나 할아버지가 경계하기 시작하면 큰일이잖아.”

겨우 황제의 신임을 얻었는데, 놓칠 수 없다.

“어쨌든 조심할 수 있는 것을 굳이 편하겠다고 대놓고 할 필요 없다는 거지.”

“그럼 얼굴이나 좀 어떻게 해라.”

“변장을 했는데도 나인 게 티가 나?”

한지혁이 짐가방을 벤치에 올려 두고, 다가왔다.

그리고 내 화장을 벅벅 문대기 시작했다.

“머 하능 거아. (뭐 하는 거야.)”

발음이 뭉개질 정도로 얼굴을 마구 문지르던 한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얼룩덜룩한 게 촌티가 나네.”

“이씨……. 주근깨 다시 그릴까?”

“많이. 화장품 줘 봐.”

나는 한지혁의 손에 얌전히 얼굴을 맡겼다.

사기꾼 출신인 그는 변장술에도 능했다.

염색도 그가 해주고, 이곳에선 시중에 풀리지 않는 컬러렌즈까지도 구해줬다.

거울을 보자, 확실히 나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여자아이가 보였다.

“화장은 대단하네. 마도구도 체형을 변화시키거나 콧대를 낮추고, 눈을 조금 작게 하는 정도밖에 못 했는데…….”

내가 중얼거리니, 한지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X튜브만 봐도 화장으로 전혀 다르게 변하는 사람 천지라고.”

“화장품 사업을 해볼까.”

“나쁘지 않지.”

그렇게 두런두런 떠들고 있는데, 마차 세 대가 우리 앞에서 멈추었다.

두 번째 마차에서 내린 남자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너희가 릴루와 지크냐.”

한지혁이 얼른 내 앞에 나서서 대답했다.

“예, 예, 나리! 그렇습니다요.”

“도련님의 지인께서 일자리를 부탁하셨다고 들었다. 따라와라, 짐마차에 자리를 내주마.”

“아이고, 감사합니다!”

한지혁이 손바닥을 비비며 대답했다.

나는 드라마라도 보는 기분이었다.

사기꾼인 건 알고 있었지만, 연기가 무슨 프로급이다.

‘사기꾼 말고 연기를 해도 잘 벌었을 것 같은데?’

한지혁이 반쯤 허리를 굽히고, 내 짐을 날랐다.

“이봐, 릴루! 바쁘신 분들이시니 서둘러 움직이자고!”

……역시 연기를 시켜야 했나 봐.

나는 한지혁을 따라서 짐마차로 움직였다.

두 번째 마차는 먼저 출발했다.

뒤칸에 짐을 올린 우리는 앞칸으로 이동했다.

앞칸엔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아……!”

마리와 마사 자매였다.

마사가 밝은 얼굴로 아는 체를 하려고 했다.

‘역시 날 잘 아는 사람에겐 변장을 해도 들키네.’

다행히 자매 외엔 날 아는 사람이 없다.

내가 신분을 숨기고 싶다고 해서, 알렉시스가 날 모르는 사람들로 행렬을 꾸린 모양이었다.

다른 하인들이 마사에게 물었다.

“아는 사이야?”

마사가 우물쭈물하자, 마리가 얼른 대답했다.

“지나가며 본 사이예요. 아스트라 백작 영애께서 도련님과 막역한 사이이니.”

“아아, 너희도 아스트라 백작 영애의 추천으로 들어왔지. 두 사람이 모두 아는 지인이라면 그럴 만도 하네.”

역시 마리.

하인 마차에 탄다고 전했던 것뿐인데, 신분을 숨기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다.

마사가 마리의 눈치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한지혁이 마차 내부를 보며 속삭였다.

“앞칸엔 사람이 탄다며?”

그런데 왜 앞칸에도 짐이 잔뜩이냐는 듯했다.

나는 턱짓으로 자리를 가리켰다.

“저기 자리가 있네.”

“……한 사람밖에 못 앉을 것 같은데?”

“짐꾼 하인에게 번듯한 자리를 내줄 리가 없잖아.”

“공작가 하인이 다 편한 게 아니었구만. 열악해, 열악해.”

한지혁이 먼저 자리에 앉았다.

나도 그 옆에 끼어 앉으려고 했을 때였다.

“뭐하니?”

맞은편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열댓 살은 되어 보이는 금발의 소녀가 눈썹을 까딱 들어 올렸다.

“네?”

내가 묻자, 그 애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비켜.”

“자리를 맡아둔 사람이 있나요?”

“얘가 지금 뭐라는 거야.”

금발의 소녀가 헛웃음을 흘리자, 주변의 하인들이 킬킬거렸다.

금발의 소녀는 내가 앉으려던 자리에 텁, 발을 올렸다.

그러더니 바닥을 가리키며,

“견습 자리는 여기.”

—라고 말하는 것이다.

‘바닥에 앉으라고?’

저는 남은 자리에 다리를 올리고 있으면서.

한지혁이 인상을 찌푸렸다.

“자리가 있는데 왜 바닥에 앉습니까?”

“어머.”

다른 소녀들이 한지혁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한지혁은 알아보는 사람이 얼마 없기 때문에, 마도구로 대충 염색을 하고 헤어스타일만 바꾸었다.

호감형의 외모가 어느 정도 드러난다는 것이다.

금발의 소녀는 나를 쳐다봤다.

“뭐해? 네가 앉아야 출발을 하지.”

“다리를 치워주시면 출발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마사가 당황해서 나와 금발의 소녀를 쳐다봤다.

“저, 저기, 블로니 님……!”

어떻게든 말리려는 모양이었지만, 금발의 소녀는 마사의 말을 무시했다.

“얘가 말귀를 못 알아먹네.”

금발의 소녀는 팔짱을 낀 채로 일어났다.

그러더니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견습의 자리는 바닥이라니까.”

“고용인 규칙에 그런 게 있나요?”

“암묵적인 룰이라는 게 있지.”

나는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물론 바닥이 아니라 한지혁의 옆에.

“……!”

금발 소녀의 표정이 굳어졌다.

마사는 눈을 동그랗게 떴고, 마리가 소리 없이 실소를 흘렸다.

한지혁도 픽, 웃어버렸다.

금발 소녀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너, 지금……!”

그 애가 버럭, 소리를 치려던 찰나였다.

마부석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멀었나! 슬슬 출발하지 않으면 도련님의 마차에 따라잡힌다! 먼저 가서 준비를 해놔야 할 것 아냐!”

금발 소녀가 마부석을 쳐다보고, 날 쏘아봤다.

마부는 가문의 재산인 말을 돌보는 만큼, 고용인 사이에선 서열이 있다.

그래서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것이다.

마리가 마부석에 말했다.

“출발 준비되었습니다.”

한지혁도 얼른 문을 닫았다.

마차가 출발하자, 금발 소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가는 길 내내 나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 * *

나는 창밖을 쳐다봤다.

마차가 8시간이나 달렸는데, 아직 유로생 성문도 보이지 않는다.

‘밤이 됐는데도 도착하지 못했네.’

나는 한지혁에게 속삭였다.

“얼마나 남았어?”

“앞으로 다섯 시간쯤?”

“너무 먼데…….”

“그러니까 말이야. 나도 힘든데 넌 더 하겠네. 이런 장거리는 처음이잖아.”

나야 물론 그렇지만, 다른 하인들도 다 죽어가고 있었다.

노면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하급 마차에서 8시간이나 끼어 앉아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던 찰나였다.

“휴식한다!”

마부석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차가 멈추자마자 나를 비롯한 하인들이 튀어나왔다.

“으윽, 허리가 끊어지는 줄 알았다.”

한지혁이 허리를 두드리며 신음했다.

다른 하인들도 관절을 주무르거나, 쪼그려 앉아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마사도 힘이 드는지 나무에 기대 있었다.

“마, 마차가 이렇게 힘든 거구나…….”

나는 마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애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마사를 힐끗 쳐다보고 있었다.

“이런 것도 못 버티면 어떻게 해?”

“하지만 마차로 이렇게 멀리 온 건 처음이니까…… 언니는 괜찮아?”

“아스트라 백작 영애가 분에 넘치는 것을 줬던 거야. 이제부턴 이렇게 살 테니까 익숙해져야지.”

“…….”

“그러니까 일찍 자라고 했잖아. 가뜩이나 장거리 이동인데, 새벽까지 다른 하녀들과 수다나 떠니까 그렇지.”

“…….”

“네 몸을 못 챙기면 손해 보는 건 너야.”

마리가 짜증 난 얼굴로 마사에게 멀미약을 던져줬다.

마사는 시무룩해져서 고개를 숙였다.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동생이 힘들다는데 걱정을 해주진 못하고. 하여간에 저만 잘나서…….”

“마사, 이쪽으로 와.”

마사는 우물쭈물 사람들 곁으로 갔고, 마리는 홀로 남았다.

나는 사람들에게 멀찍이 떨어져 있는 마리에게 다가갔다.

“멀미약 남은 것 있어?”

“하나뿐이었어. 덱스가 가지고 있는 모양이니까 너도 힘들면 그쪽으로 가서—”

“나 말고 너 말이야.”

“…….”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 한지혁에게 말했다.

“손수건 줘.”

“어? 어어, 여기.”

나는 근처 개울에서 손수건을 빨아왔다.

그리고 마리를 억지로 앉혀서 목에 차가운 수건을 대줬다.

“뭐 하는 거야.”

“혈색이 시체 같거든?”

“…….”

“몸도 약한 애가 왜 꾸역꾸역 여길 와. 듣자 하니까 총집사가 널 잘 보고 있는 것 같은데 빠지지.”

“신경 꺼.”

“마사가 또 사고를 칠까 봐 따라온 거지? 네가 수습해주려고.”

“…….”

“하여간에 요령이 없어.”

마리는 마사에게 혼자 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몸 약한 자신이 언제까지 살 수 있을 지 모르니까.

“좀 다정하게 말해줘.”

“난 좋은 말로 해서 바뀌는 걸 본 적이 없거든?”

“으이구.”

나는 마리의 뭉친 근육을 주물러주며 눈을 가늘게 떴다.

마리가 인상을 찌푸리고 속삭였다.

“왜 그렇게 나한테 잘해주려고 안달이야?”

“잘해줘도 난리야.”

“수상하니까 그렇지.”

"그냥 난 네가 애틋해.”

요령이 없는 것이 꼭 첫 번째 삶의 나를 떠올리게 만들어서.

마리가 나를 힐끔 쳐다봤다.

“기분 나쁘게…….”

“거짓말. 너 지금 쑥스러워서 그렇지?”

나도 첫 번째 삶에선 그런 새침부끄 캐릭터라서 잘 안다!

“시끄러워.”

“거짓말쟁이~.”

“이게 진짜.”

나와 마리가 투닥거리고 있을 때였다.

하녀들 사이에서 꺄악, 꺄악 비명이 들려왔다.

“알렉시스 도련님도 이쪽에서 쉬신다고? 정말?”

검은 머리의 하녀가 물어보자, 블로니라는 이름의 금발 머리 하녀가 생긋 웃었다.

“그렇다니까. 연락이 오셨어.”

“우리 같은 외저 하인들은 만나기도 힘든 분이신데!”

하녀들은 잔뜩 설레는 얼굴이었다.

“역시 블로니를 마음에 들어 하시는 건가?”

“3등 하인과 함께 쉬는 경우는 거의 없잖아!”

소년 하인이 히죽히죽 웃으면서 말했다.

“이제까지 헛고생한 게 아니네. 일부러 내저에 들어가려고 그렇게 기를 썼잖아?”

“내가 무슨 기를 썼다고 그래? 도련님이 그냥 날 마음에 들어 하시는 거지.”

그 얘기를 들은 마리가 헛웃음을 흘렸다.

“아니긴.”

“뭐가?”

“블로니 말이야. 어떻게든 알렉시스 도련님과 엮이려고 기를 쓴 게 맞아.”

마리가 마뜩잖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내가 봤거든.”

“뭘?”

“도련님의 세탁물을 맡고 싶어서 내저 하인에게 돈을 줬어.”

“…….”

“블로니같은 3등 홀메이드는 원래 저택 안으로 못 들어가. 그런데 내저로 들어오려고 애쓰고 있는 모양이야.”

나는 “그렇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인들은 알렉시스를 모시기 위해 눈을 빛내며 준비를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쯤 뒤.

호화로운 이시론 본가의 마차가 도착했다.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