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2화. (213/390)

212화.

삐딱하게 서서 나와 블로니를 쳐다보는 건 발자크였다.

그 뒤로 요슈아와 리시먼드가 있었다.

리시먼드는 블로니가 치켜든 손을 보고 있었고, 요슈아는 눈썹을 까딱 올리고 있었다.

블로니의 패거리들이 당황한 표정으로 그들을 쳐다봤다.

“어, 그러니까…….”

“도, 동생?”

“아스트라의 문양인데…….”

몇몇 하인들이 수군거렸다.

그러자 한지혁을 걷어찼던 덩치 큰 사내가 소리쳤다.

“아아, 제 오라비가 아스트라의 상급 고용인이라고 그리 뻗댔던 모양이구만.”

그러며 헛웃음을 흘렸다.

“아무리 동생의 일이라도 신경 꺼야 할 거요. 감히 이시론의 정보를 팔아먹은 계집을 처벌하는 것이니까.”

‘얘는 진짜 눈치가 없네.’

아무리 상급 고용인이라도 저만큼 호화로운 옷을 입겠니.

아스트라 성의 총집사인 알버트도 외부에서 저런 차림을 하진 않는다.

발자크와 요슈아가 동시에 말했다.

“계집?”

“감히?”

성향도, 외모도 비슷한 구석이 없지만 이럴 때 보면 쌍둥이인 게 티가 난다.

‘이럴 때가 아니지!’

발자크의 몸에서 사나운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

요슈아도 미소 짓고 있지만, 발밑에서 어두운 기운이 뻗쳐 나오고 있다.

하인들은 가호가 없는 평민이라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지만, 나는 알고 있다.

‘이러다 한 놈은 죽는다!’

“오라버니……!”

소리쳤으나, 발자크는 성큼성큼 덩치 큰 사내에게 다가갔다.

덩치 큰 하인이 움찔했다.

그런 사내를 하인들이 불안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팜…… 저쪽은 상급 고용인인데…… 겁이 나면…….”

“거, 겁은 무슨……! 내가 아무리 3등 고용인이라도 이시론 가문의 사람이라고!”

“그, 그래도…….”

“상급이어도 다른 가문의 사람에게 손을 대선 안 된다는 건 기본이야, 기본!”

덩치 큰 사내가 헹,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가문의 정보를 내다 파는 동생을 두둔하려고, 공작가의 고용인에게 주먹을 휘두르면 저도 함께 쫓겨날 거라고!”

“쫓겨나? 내가?”

발자크가 말하자, 덩치 큰 사내가 가슴을 들이밀며 말했다.

“유로생의 하녀장도 우리에겐 별말을 못 했단 말입니다! 우린 말이야, 그 ‘이시론’의 고용인이니까!”

그 말에 다른 하인들도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그건 저들을 데려온 사람이 알렉시스이기 때문이었다.

유로생은 장남인 아델리크를 지지하지 않으니까.

그건 아델리크의 외가와 관련이 있는데…… 아니, 여기까진 알 필요가 없지.

‘외저의 하급 고용인들이 그런 알력을 알 리가 없고.’

그것도 17세 미만의 어린애들이.

중고생들이 A자동차 회사와 A케미컬의 관계를 잘 알지 못하듯 말이다.

‘거기다 이쪽은 그냥 고용인도 아니라고.’

블로니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그만해, 팜.”

“하지만……!”

“그만하라지 않니.”

블로니는 뻔뻔한 얼굴로 오라버니들을 쳐다봤다.

“오해가 있으신 모양인데, 저희는 이유 없이 같은 고용인에게 손을 올리지 않는답니다.”

“하면.”

발자크의 말에 블로니는 한숨을 내쉬었다.

“가족들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일이라 되도록 말씀드리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군요.”

요슈아가 물었다.

“무엇이기에.”

“이시론의 정보를 팔았답니다.”

블로니는 손을 모은 채로 시무룩한 표정을 가장했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소리쳤다.

“아냐, 난 그런 적 없어!”

“계속 거짓말을 할 참이니?”

“내가 무슨 이유로 이시론의 정보를 판단 말이야?”

“그야 돈 때문이겠지.”

“돈 때문에 정보를 판 건 너잖아.”

블로니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그 애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제발 거짓말은 그만해!”

“그 말에 책임질 수 있어?”

“당연하지! 내가 정보를 훔치는 널 직접 목격했어! 게다가 증거까지 있다고—!!”

흥분한 블로니를 누군가 붙잡았다.

리시먼드였다.

“너는 분명히 말했다. 그 말에 책임을 지겠노라고.”

“그, 그래요! 책임질 수 있어요. 그러니까 아무리 가족이라도 이번 일엔 끼지 않는 게 신상에 이로울……!”

그때였다.

오라버니들의 뒤에서 누군가 종종걸음으로 달려왔다.

알렉시스와 이시론의 다른 하인들, 그리고…….

“무슨 일이십니까, 도련님.”

베티와 하이디를 비롯한 우리 아스트라 백작저의 고용인들이었다.

그의 말에 주변이 고요해졌다.

이시론의 하급 고용인 중 한 사람이 중얼거렸다.

“도련…… 님?”

그러자마자 베티와 하이디가 비명을 지르며 내게 달려왔다.

“아가씨!”

“아니, 아가씨, 이게 무슨……!”

나는 인상을 쓰며 말했다.

“족쇄 풀어.”

“예, 예. 이시론의 족쇄인데, 열쇠…… 열쇠가……!”

이시론의 집사가 당황한 얼굴로 열쇠 꾸러미를 들었다.

베티가 그를 노려보고, 홱! 열쇠 꾸러미를 빼앗아 왔다.

절그럭 소리와 함께 족쇄가 풀렸다.

나는 짜증 섞인 손길로 목에 차고 있던 분장용의 마도구를 내던졌다.

순식간에 머리칼이 본래의 황금색으로 변했다.

“……!”

“……!!”

이시론의 하인들이 입을 떡 벌린 채로 나를 쳐다봤다.

“못 해 먹겠네.”

말하자, 알렉시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무슨 일이 있던 거야, 에릴로트.”

이시론의 상급 고용인인 중년의 여성이 처신도 잊고 중얼거렸다.

“에, 에릴로트?”

나는 블로니와 그 패거리를 둘러보며 말했다.

“내가 돈이 궁하다고 하던데.”

“무슨 헛소리야.”

나는 팔짱을 낀 채로 블로니에게 다가갔다.

“대륙의 백수정 유통의 총책임자, 심지어 아스트라의 후계 중 첫 번째라 불리는 아버지를 둔 내가.”

“어, 어…… 어?”

블로니가 희게 질린 얼굴로 나와 사람들을 번갈아 보았다.

악몽이라도 꾸는 표정이었다.

그래도 변하는 건 없었다.

발자크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된 건데?”

나는 눈을 가늘게 좁히며 말했다.

“알렉시스와 할 일이 있어서 내가 하녀로 분장했어.”

“그런데?”

“그런데 쟤들이 날 괴롭혔어.”

내가 블로니를 척, 가리키며 말하자 오라버니들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괴롭혀?”

발자크의 목소리가 음산해졌다.

블로니 패거리는 새파래져서 “그, 그게! 그게, 그러니까……!” 하고 중얼거렸다.

“저들은 게으름을 피우고 내가 전부 일하게 시켰어!”

“뭐!?”

“내가 한 일을 전부 제가 했다고 하고!”

“뭐라고?!”

“이마를 밀고!”

“저것들이……!”

“아빠가 직접 수 놓아준 손수건을 밟고!”

“미쳤잖아!”

“내가 대항하니까 따돌리고!”

“이……!”

“누명을 씌워서 밀치고 때리려고 했어!”

“죽었어!!”

발자크가 고함을 내질렀다.

가호가 실린 고함이 우렁차게 퍼지자, 땅이 크게 진동했다.

겁을 잔뜩 집어먹은 블로니 패거리의 몇몇이 털썩 주저앉았다.

“아, 아니, 저, 저희는……!”

“오, 오해가…….”

요슈아와 리시먼드가 벌벌 떨며 엉금엉금 뒤로 가는 패거리를 막아섰다.

“오해라……. 글쎄.”

“그렇다고 하기엔 우리가 너무 자세하게 봤는데.”

발자크가 덩치 큰 사내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어디 얘기를 더 자세히 들어봐야겠어.”

덩치 큰 사내는 그대로 발자크에게 끌려갔다.

이시론의 집사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곤 서둘러 다른 하인들에게 눈짓했다.

블로니 패거리가 죄다 하인들에게 제압당해서 끌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블로니를 빤히 쳐다봤다.

“내가 말했지.”

“…….”

“아직 시작도 안 했다고.”

“……!”

하인들은 기어이 털썩 주저앉고만 블로니까지 질질 끌고 갔다.

나는 블로니 패거리를 따라 이동하는 오라버니들에게 말했다.

“죽이진 말고!”

죽이는 건 내가 할 테니까.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내 눈이 살벌하게 불타오르고 있음을.

* * *

이시론의 상급 고용인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베티와 하이디가 그들 앞을 거닐며 말했다.

“해서 우리 아가씨가 그 꼴을 당하도록 동조했다?”

“저, 저희는 감히 아스트라 백작 영애이실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하고…….”

중년의 여성 고용인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시론에선 정보를 팔아넘겼다는 말만 믿고 징벌방을 엽니까?”

“그, 그건…….”

“전후 사정을 살피지 않고, 허투루 일한 탓에 우리 아가씨께서 그 무서운 곳에 끌려가게 되었다고요!”

“…….”

“아가씨인지 몰랐다고 해도 이시론 공자께서 직접 일자리를 만들어주고, 우리 아가씨께서 부탁하신 아이들이 줄곧 험한 꼴을 당했습니다.”

“…….”

“저택의 총집사께선 이 일을 알고 계십니까!?”

하이디와 베티가 돌아가며 고함을 내질렀다.

나는 의자에 앉은 채로 그들을 힐끗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친 집사가 얼른 고개를 수그렸다.

“하이디, 베티.”

“예~ 아가씨~”

“말씀하셔요~”

이시론의 하인들을 드잡이하듯 소리치던 것이 언제냐는 듯 꿀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였다.

“그만하렴. 아스트라에선 이시론의 일에 끼어들 수 없다지 않니.”

이시론의 상급 고용인들이 흠칫! 고개를 들었다.

“아, 아가씨, 그게 아니라……!”

알렉시스의 약혼자가 된 이후로 난 저들에게 ‘공녀님’이 아닌 ‘아가씨’였다.

알렉시스가 서늘한 표정으로 집사를 쳐다봤다.

집사가 얼른 변명했다.

“전후 사정을 살피지 않은 것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아가씨.”

“…….”

“타가문에 초청된 상황상 최대한 소란을 조심해야 했고, 또…….”

“유로생의 하녀장이 지난 소란을 알렸을 것이다.”

“……!”

표정을 보아하니, 정말로 유로생의 하녀장으로부터 싸움의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었다.

“블로니와 하인들이 떼로 하녀 하나를 괴롭혔다는 것쯤은 추측할 수 있었겠지.”

“그, 그건…….”

“한데도 블로니의 말만 믿고 나를 황도로 보낸 것은 공을 탐한 것이겠지.”

“그, 그게, 그러니까, 그건 말입니다……!”

“서열이 높은 집사가 아닌 네가 이 행렬의 책임자가 되었어. 이번 기회에 더 높은 자리를 탐하기 위해 가문의 반역자를 잡아내려 한 것이 아니냐.”

“…….”

“내가 아스트라 백작의 딸이 아니었다면, 죄 없이 죽을 뻔하였겠구나.”

집사의 얼굴은 시체처럼 파리해졌다.

다른 상급 고용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저것들도 집사가 승진하면 콩고물을 얻어먹으려 한 거겠지.’

특히 저 중년의 하녀는…….

“넌 블로니에게 얼마나 받은 거니?”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영애!”

“맹세할 수 있느냐.”

중년의 하녀가 얼어붙었다.

나는 팔짱을 낀 채로 알렉시스를 힐끔 쳐다봤다.

“어쩔 거야?”

“네 뜻대로 할게.”

“팔다리를 끊어달라고 하면?”

“원하는 대로.”

상급 고용인들이 와들와들 떨었다.

그들이 일시에 무릎을 꿇고 목놓아 소리쳤다.

“사,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아가씨!”

“부디 자비를……!”

나는 한숨을 내쉬고 반대쪽을 힐끗 쳐다봤다.

블로니 패거리는 이미 한 시간 전부터 무릎을 꿇고, 손 모아 빌고 있었다.

“요, 용서해주세요, 용서를…… 제발, 아가씨……!”

내게 처음으로 손을 올렸던 하녀까지 엉엉 울고 있었다.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걱정하지 마. 죽일 생각 없어.”

상급 고용인과 블로니 패거리의 얼굴이 밝아졌다.

나는 생긋 미소 짓고서 말을 이었다.

“이시론 공작님께 알려드리기만 할 테니 염려하지 마라.”

“아, 아가씨……!”

아무리 외저에서 도는 고용인들이라도 그렇지.

제 일신의 영달을 위해서 주인의 계획이 망가졌다.

그 어떤 가문이라도 결코 용서하지 못할 일이었다.

이시론 공작도 분노하겠지.

“공자님은 아스트라 백작저의 고용인들이 보필할 것이다. 너희는 즉시 황도로 올라가라.”

너희가 그렇게 사랑하는 징벌방이 열릴 테니까 말이야.

물론 당하는 건 내가 아니라 너희가 되겠지만.

“아, 아가씨,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징벌방에 들어간 것이 알려지면 저희는 그 어떤 가문에도 발붙이지 못할 것입니다!”

난 골 아픈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러면 여기 계속 있을래?”

안 올라가면 너희는 죽어.

오라버니들이 진짜로 손을 대기 전에 빼 와서 그나마 사지 멀쩡한 거지.

아스트라에서 자란 우리 오라버니들은 선을 모른다.

그리고…….

“오라버니들이 방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

상급 고용인들이고, 하급 고용인들이고, 블로니 패거리까지 와들와들 떨기 시작했다.

이시론의 총집사가 죄 있는 것들만 징벌방에 데려가는 게 낫겠지?

내 표정을 본 집사가 눈을 꽉 감으며 고개를 숙였다.

“오, 올라가겠습니다.”

베티와 하이디가 빽! 소리쳤다.

“어서 아가씨의 눈앞에서 사라지세요!”

“사라지세요!”

고용인들은 흐윽, 흑, 울며 몸을 일으켰다.

그들이 방을 나가는 중에 내가 말했다.

“넌 남고.”

블로니가 흠칫, 나를 쳐다봤다.

베티와 하이디가 눈치 빠르게 블로니의 앞을 가로막았다.

고용인들이 모두 나간 뒤, 나는 블로니에게 다가갔다.

“넌 대체 왜 그렇게 내가 싫었니?”

“그게, 그러니까…… 그게…….”

“뭐, 됐어. 이제 와 그게 뭐 그리 중요하겠니.”

블로니는 벌벌 떨며 무릎을 꿇었다.

“자, 잘못했, 잘못했…….”

“황도의 이시론 저택에서 징벌방이 열리는 건 확실하지. 아마 셋은 확실히 그 방에 들어갈 거야.”

“아, 아가씨…….”

“내 하인을 구타한 덩치 큰 남자, 공을 탐하기 위해 네 말이 거짓이란 것을 알면서도 징벌방을 열려고 한 집사, 그리고…….”

너.

말을 잇지 않아도 자신임을 아는지 블로니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들 덕에 주인의 계획이 화려하게 망가졌거든.”

“사, 살려주세요.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황도의 그 어떤 가문에도 발붙이지 못하는 건 당연할 거야. 시골로 내려가야 할 텐데, 그것도 내가 그냥 지켜보진 않을 테고.”

“아, 아가씨!”

“징벌방에 들어간 하인이나, 이시론에서 쫓겨난 하인이나 전부 널 원망하겠지.”

“……!”

“원래 나쁜 놈들은 항상 누굴 탓하고 싶어 하더라고.”

나는 블로니와 눈을 마주치고 생글생글 웃어줬다.

“그런데 살아날 방법이 있어.”

“……예?”

“네가 날 좀 도와준다면 말이야.”

“어, 어떻게…….”

나는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고, 무감한 표정으로 블로니를 쳐다봤다.

“네게 정보를 산 사람, 누구야?”

“그게…… 저어, 그건…….”

“기회는 한 번뿐이란다, 블로니.”

블로니가 눈을 꽉 감았다.

그리고 떠듬떠듬 말을 잇기 시작했다.

“귀, 귀족이세요…….”

“귀족?”

“아가씨께서도 아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아는 분?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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