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 * *
유로생 성으로 돌아왔을 땐 저녁이 다 되어 있었다.
알렉시스의 방으로 들어온 나를 보고 세 오라버니들이 몸을 일으켰다.
“……왜 오라버니들 방에 안 있고, 여기 있어?”
“그야 네가 우리 방엔 안 오니까!”
방주인의 허락도 없이 뭉개고 있으면서도 매우 당당한 태도였다.
“……말 안 되는 소리인 거 알지?”
“알아!”
“……다행이네.”
그것까지 몰랐으면 큰일날 뻔 했다.
나는 테이블에 있는 서류를 챙기며 말했다.
“계속 여기 있을 거야?”
“네가 있으면.”
“이제 나 없을 테니까 돌아가.”
그러자 발자크가 듣던 중 반가운 소리라는 듯 밝아졌다.
“이제 끝난 거야?”
“잠깐 황도에 다녀오려고. 요슈아 오라버니의 이동석을 좀 더 써도 돼?”
묻자 요슈아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야 상관없는데, 황도엔 무슨 일로?”
“응, 잠깐 축복의 땅 좀 사오려고.”
내가 해맑게 얘기하자 오라버니들이 멈칫했다.
“……뭐?”
“어?”
“……?”
한지혁과 알렉시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과자 사러 상점에 다녀오겠다는 것처럼 가볍게 얘기하니 어이가 없는 모양이었다.
한참 침묵하던 발자크가 물었다.
“축복의 땅이란 상품이 새로 나왔어? 마도구야?”
“아니. 말 그대로 축복의 땅을 말하는 건데.”
그러자 이번엔 요슈아가 애써 웃으며 물었다.
“축복의 땅이란 건 그렇게 쉽게 매매할 수 없는 거야, 에릴로트.”
“알아!”
“기존에 축복의 땅을 가진 매수자들은 결코 팔지 않을 뿐더러, 만에 하나 매물이 나왔더라도 천문학적 금액일 텐데.”
“응.”
“그런 걸 어떻게 잠깐 사오려고?”
나도 어려운 일이란 건 안다.
‘하지만 축복의 땅이 필요해.’
그것도 ‘진짜 축복의 땅’이.
36기 중앙 원화 출신이었던 헤라 레비쟈가 그랬다.
진짜 축복의 땅에서 나오는 기운은 목숨만 붙어 있다면 그 어떤 병도 치유할 수 있노라고.
내가 이동의 가호석을 챙기고 있자, 알렉시스가 다가왔다.
“공자들의 말이 맞아. 축복의 땅을 대체 어떻게 찾겠다는 거야.”
“방법이 있어.”
“뭐?”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겐 방법이 있다.
‘나에게는 세상의 모든 일을 알 수 있는 가호인 <열람>이 있으니까.’
“한지혁 따라와.”
“예…….”
한지혁이 매우 피곤한 얼굴로 다가왔다.
나는 가호석을 발동하며 오라버니들과 알렉시스에게 손을 팔랑팔랑 흔들어줬다.
“잠깐, 에릴로트!”
“에릴로—”
오라버니들의 말이 끝나기 전에 시야가 환히 빛나며 몸이 부유했다.
* * *
다시 눈을 떴을 땐, 완전히 다른 곳이었다.
한지혁은 비틀거리며 이마를 쥐었다.
“이동의 가호석은 편하긴 한데, 도착할 때 엄청나게 어지럽단 말이지…….”
“마력으로 제대로 몸을 보호하지 않으니까 그렇지.”
“내가 귀족인 줄 아냐? 마력을 어떻게 쓰는 줄 알고 몸을 보호해?”
한지혁이 이마를 쥔 채로 투덜거렸다.
“하여간 가호가 있는 것들은 그게 엄청난 능력인줄 모른다니까.”
“가호 없는 평민 중에도 마법사는 있거든? 게다가 마력 운용법을 배우라는 게 아니라 보호용 마도구만이라도 제대로 가지고 있으라는 뜻이었어.”
“챙길 게 얼마나 많은데 마도구까지 매번 챙기고 다니…… 근데 여긴 어디야?”
한지혁이 주변을 둘러봤다.
주변은 온통 어두웠다.
꼭 어디서 귀신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한지혁이 바짝 긴장한 얼굴로 내 곁에 철썩 붙었다.
“저택으로 가는 것 아니었어?”
“아니었어. 그보다 너무 붙지 마. 걷기 불편하니까.”
“몬스터도 제대로 데려왔지? 비상시에 지켜줄 수 있게? 응?”
하여간에 이 겁쟁이.
괄시하는 눈으로 쳐다보니, 한지혁도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말했지. 가호를 가진 괴물들은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의 심정을 이해 못한다고.”
한지혁이 내 등에 붙어선 주변을 휘휘 둘러봤다.
“어딘지 익숙한데…….”
“그렇겠지. 네가 일 년에 한 번은 오는 곳이니까.”
“어?”
“여긴 ‘내가 가진 축복의 땅’ 인근이야.”
그렇게 말하며 나는 성큼성큼 숲을 벗어났다.
숲을 벗어나자마자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마등 하나 없는 허름한 곳.
바로 내가 세 살 때 사서 열심히 가격을 높여둔 그 축복의 땅 인근이었다.
한지혁이 “으…….” 신음하며 말했다.
“여긴 갈수록 인적이 드무네.”
“그렇겠지.”
여긴 본래 판자촌이나 다름없어서 주변에 여관 하나가 없다.
그런데 축복의 땅이 있다는 소문을 잔뜩 내둔 덕에 발전 없이 땅값만 폭등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살 수 없고, 돈 있는 사람들은 살려고 할 수 없는 아이러니한 곳이란 뜻이다.
“살던 사람들이 불쌍하지도 않냐?”
한지혁이 날 악당 보듯 하면 말했다.
“왜? 여기서 살던 사람들은 엄청나게 큰돈을 받아서 떠났는데.”
거의 인생 역전급이었고.
“그럼 동네가 불쌍하네. 사람도 없이.”
“무생물에게도 마음을 써주고 멋지네?”
“하여간에 한 마디를 안 져.”
나와 한지혁은 시시껄렁한 말을 하며 거의 무너지다시피한 성당 안으로 들어왔다.
‘오랜만에 오네.’
여기가 바로 내가 회귀 전의 기억으로 찾아낸 축복의 땅이었다.
한지혁이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
“그런데 여긴 대체 왜 온 거야?”
“여기가 진짜 축복의 땅인지 확인하고, 아니라면 진짜 축복의 땅을 찾으려고.”
“뭐?”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는 얼굴이었다.
“축복의 땅엔 진짜와 가짜가 있대.”
“지난번에 해준 얘기잖아. 그런데?”
“여기가 진짜라면 ‘뿌리’를 열었을 때 가벼운 상처쯤은 순식간에 나을 거야. 가짜라고 해도 가호를 강화시켜주겠지.”
“……너 설마.”
“응, 가짜라면 강화시킨 내 가호 <열람>으로 진짜 축복의 땅을 찾을 거야.”
한지혁이 인상을 썼다.
“1단계 <열람>을 쓸 때도 다 죽어가잖아. 위험할 수도 있어.”
“황야의 마법사 같은 보석을 얻는 일이야. 어느 정도의 위험은 감수해야지.”
나는 한지혁에게 말하며 ‘축복의 땅’의 중심으로 걸어갔다.
‘중심은 부서진 신상 아래라고 했지.’
중심에 이르러서 한지혁에게 말했다.
“자, 뿌리를 연다.”
한지혁은 유사시를 대비해 통신석을 손에 쥐고 있었다.
미리 아빠의 코드까지 입력해둔 상태였다.
‘하여간 일은 잘한다니까.’
나는 씩 웃으며 땅의 중심에 마력을 쏟아 부었다.
<열람>이 워낙에 엄청난 가호라 그렇지, 내가 마력량이 부족한 건 아니다.
아빠의 딸인 만큼 마력량엔 자신이 있다.
하지만 엄청나게 많은 마력을 쏟아냈는데도 주변이 잠잠했다.
‘뭐지?’
백합 정원에서는 마력을 조금만 흘려보내도 금세 뿌리가 시작되었는데?
혹시 축복의 땅이 아니었나?
‘아닌데, 한지혁이 신관을 통해 확인을 받았다고 했…….’
그렇게 생각하던 때였다.
번쩍—!!
엄청난 빛이 분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온 몸이 분해되는 것 같은 감각이 밀려왔다.
“으악!”
“악—!!”
나와 한지혁은 휘청거리며 양 팔로 눈가를 막았다.
백합 정원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힘이었다.
‘그렇구나.’
백합 정원은 거의 매해 뿌리를 열었다.
하지만 나의 축복의 땅은 오랜 시간 뿌리를 열지 않고 계속 묵혀 놨다.
해서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엄청난 힘이 밀려오는 것이다.
난 마치 공기가 가득차서 터지기 직전의 풍선이 된 것 같았다.
‘큰일이야! 힘을 밀어내야 해!’
마력이 영향을 미치지 않는 일반인인 한지혁이라면 몰라도 나는 위험했다.
‘가호…… 가호를 시전해서 마력을 분출해야 해!’
나는 허둥지둥 가호를 시전했다.
그런데, 그 순간……!”
“에릴로트!”
한지혁이 비명 같은 고함을 내질렀다.
콰드드드드득—!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천지가 요동쳤다.
시야가 뿌옇게 변하며 발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허리가 호처럼 휘고 머릿속이 터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에릴로트는 어디로 간 거야?”]
[“황도 저택이 아니겠어?”]
[발자크는 심통이 난 얼굴로 티테이블에 다리를 걸쳤다.]
[“매너가 나쁘다, 발자크.”]
[리시먼드의 말에 발자크가 힐끗 알렉시스를 쳐다봤다.]
[“그렇다고 생각하냐?”]
[“아니겠냐?”]
[발자크가 울컥 몸을 일으켰다.]
머릿속에서 글자들이 휘몰아친다.
나는 한지혁을 쳐다봤다.
뺨에 난 상처는 치유되지 않는다.
‘여긴 가짜 축복의 땅이란 뜻이야.’
[“데이몬드 님……!”]
[여자의 말에 데이몬드 아스트라의 걸음이 멈추었다.]
[고개를 돌리자, 담청색의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희게 질린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가 부담스러우리란 것을 알아요. 이런 행동이 데이몬드 님께 밉보이리란 것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래도…….”]
[“…….”]
[“이 마음을 전하지 못하면 가슴이 터져 죽을 것 같아서 그래요. 이런 제가 밉고, 싫지만…….”]
[“해서.”]
[“……사랑합니다.”]
[온통 젖은 눈에 비치는 것은 오직 그였다.]
머리…… 아, 머리가 터질 것 같아……!
‘아빠……!’
[데이몬드는 흠칫, 뒤를 돌아보았다.]
[‘방금…….’]
[쇄골께를 붙들고 다가온 여인이 흐느끼며 그를 잡았다.]
[“제발 제게 기회를 주세요…….”]
[“…….”]
[시선을 멀리 두던 데이몬드가 여인의 손을 뿌리치고 달려가기 시작했다.]
[“데이몬드 님……!”]
[여인이 그의 등을 끌어안고 말하자, 데이몬드가 사납게 여인을 밀어냈다.]
[“그리 원하면 번호표라도 받아서 기다리지 그래.”]
[번호표?]
[그건 어디서 받을 수 있는 것이란 말인가?]
[“어, 어디 가면 받을 수 있는…… 데이몬드 님! 데이몬드 님!”]
[여인은 급히 뛰는 데이몬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아, 뒷모습마저도 소름이 돋도록 아름다운 나의 늑대여.]
[등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여인의 보좌인들이 소름 돋도록 진절머리 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채로…….]
아빠는 오늘 파티가 있다.
묘사로 보아 시간은 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구나!’
[오셀리아 황비가 찻잔을 매만졌다.]
[황태후는 한참을 말없이 찻잔을 매만지는 황비를 지그시 응시했다.]
[“해서, 무슨 용무로 나를 찾은 게요.”]
[“그 아이, 공작가 사생아의 짝으론 아깝지 않으십니까.”]
[“서군 원화를 말하는 거요?”]
[“폐하께서 도와주신다면 우리 황자의 짝으로 만들 수도 있을 텐데요.”]
이 아줌마가 또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람.
하여간에 쓸데없는 일엔 대장이라니…….
‘으악! 머리야!’
저런 쓸데없는 것 말고, 다른 걸 보여줘, 망할 가호야!
[이시론 공작저.]
[가신을 마주 보고 앉은 아델리크 이시론은 분개했다.]
[“해서 돈을 내줄 수 없다는 것이냐?!”]
[“가주께서 도련님의 이름으로 된 모든 재산을 운용할 수 없도록 막아두셨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찌…….”]
[흥분한 아델리크가 가신을 향해 재떨이를 내던졌다.]
[캉!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벽에 처박힌 재떨이가 파편이 되어 후두둑, 떨어졌다.]
[하마터면 머리에 맞을 뻔했던 가신이 흠칫,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고, 공자님……!”]
[“내가 이시론의 장자다. 이시론 가문을 물려받을 장자란 말야!”]
[“하지만 가주께서…….”]
[“무능한 것들 같으니! 네 집을 팔든, 저당을 잡든 해서라도 돈을 마련해왔어야지!”]
[아델리크 이시론이 떨리는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마닌 금융에서 최후 통첩한 날짜는 내일 오전이었다.]
[약과 술을 사들이느라 썼던 고리대금이 불고 불어 숨통을 조여왔다.]
[가뜩이나 부친의 눈 밖에 난 와중에 이 일까지 밝혀진다면 후계위가 멀어진다.]
[‘그 더러운 사생아 놈이 후계가 될 수도 있을 터.’]
[제게 있는 것은 돌아가신 모친이 남긴 별 볼 일 없는 땅 하나였다.]
[‘빌어먹을. 쓸모 있는 것을 남겨주시든가 하셨어야지……!’]
[초조한 기색으로 손톱을 물어뜯던 아델리크는 몰랐다.]
[작고한 친모가 남긴 땅의 가치를.]
[그 땅이 이 제국에서 몇 없는 천계와 연결된 땅으로, 이 세계선 축복의 땅이라 불리는 엄청난 재산이었음을 알게 되는 건 7년 뒤의 일이었다.]
‘저거다!’
저게 축복의 땅인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천계와 연결되었다고?’
그게 대체 무슨 뜻일까.
‘어쨌든 서둘러서 아델리크의 땅을…….’
그렇게 생각하며 마력의 분출을 끊으려 했는데, 이상했다.
“에릴로트?”
“아…… 으윽, 으그극…….”
한지혁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내게 달려왔다.
“이봐, 에릴로트…….”
한지혁이 내 몸에 손을 대려던 그 때, 엄청난 스파크가 일었다.
“아악!”
“뭐, 뭐야. 괜찮아? 어?”
한지혁에겐 느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끊어질 듯 신음하며 말했다.
“……지지, 흑, 마.”
“뭐?”
“만지지 마, 이 자식아……!”
죽을 것 같다고!
“그, 그럼 어떻게 내리라는 거야?”
“아, 알렉, 시스한테, 가호를, 끄, 끊어달라고 해. 빨리, 빠, 빨리……!”
그 애가 가진 <지배자의 위세>로 가호를 복사하면 끊어줄 수 있을 것이다.
‘아파 죽겠네……!’
한지혁이 허둥지둥 미리 입력해둔 코드를 지웠다.
그러다 흠칫 나를 쳐다봤다.
“알렉시스의 코드가 뭐였지?”
“이씨……!”
“아! 어어, 기억났다. 어!”
한지혁이 코드를 입력하는 동안 나는 억지로라도 마력을 분출하고 있었다.
‘그만! 그만!’
한지혁의 상처가 낫지 않는 거로 보아 여긴 가짜 축복의 땅이다.
‘그럼 진짜 축복의 땅은 대체 얼마나 대단하다는 거야?’
내가 울상을 짓고 있던 찰나였다.
[하여간에 겁 모르긴.]
머릿속으로 직접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일론의 목소리?’
내가 핫, 숨을 들이키자 천장에서부터 반투명의 거대한 천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천이 내 몸을 감싸자마자 주변이 일그러지며 기이한 풍경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에릴로트.]
달콤한 미성을 가진 남자가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나는 무심코 그의 손을 잡고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
“뭐, 뭐야.”
“뭐긴 뭐야. 빨리 일어나지 못해!”
또 다른 남자가 울컥 인상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미성의 남자는 픽 웃고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혼란스러울 것이다.”
그래, 난 혼란스럽다.
왜냐면 여긴 내가 아는 곳이 아니며, 주변엔 온통 모르는 사람 천지.
심지어 벽거울에 비추는 나조차 다른 사람이었으니까.
‘아, 이거 혹시 그건가?’
“나 지금 전생을 보고 있는 건가요…….”
보통 이럴 땐 그렇더라고.
내가 엄청나게 대단한 인물이었던 게 틀림 없구만.
‘혹시 신의 동생 같은 건가…….’
내가 한숨을 푹 내쉬고 있자, 남자들 사이로 걸어온 자가 내 코를 콱 잡았다.
“악!”
“신의 동생은 무슨.”
“세, 세일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