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3화. (224/390)

223화.

나는 사람들에게 인사한 후, 방을 나섰다.

한지혁이 내 뒤를 쫓아왔다.

“그리미에는 현재 황도에 있어.”

“위치 확인해.”

“그래. 카인로드와 마딜로 후작 부인은 어찌할까.”

“이곳에서 지낼 수 있게 준비해줘. 숙부의 짐도 옮겨오고.”

한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목에 걸고 있던 이동의 가호석을 꺼내며 말했다.

“저택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을 테니까 위치 확인 되는대로 연락해.”

한지혁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본 뒤, 가호석을 조작했다.

희뿌연 빛이 온몸을 감쌌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저택의 중정이었다.

귀가한 나를 본 하이디와 베티가 얼른 다가왔다.

“오셨습니까, 아가씨.”

“응. 별일 없었지? 아빠는 귀가하셨고?”

“예, 귀가하셨는데…….”

하이디와 베티가 미묘한 표정으로 말꼬리를 늘렸다.

나는 “응?” 하며 그들을 쳐다봤다.

“무슨 일인─”

“오랜만이구나, 에릴로트.”

익숙한 목소리에 멈칫, 고개를 돌렸다.

백색의 로브를 걸친 사내가 다정히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하녀들에게 말했다.

“하이디.”

“예, 아가씨…….”

“한에게 확인은 중지하라고 전해줘.”

그 인간, 여기 있으니까.

그리미에가 가신 몇과 함께 제 2백작저에 있었다.

* * *

씻고 옷을 갈아입은 나는 응접실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리미에 일행과 아빠, 요슈아가 있었다.

소식을 듣고서 리시먼드와 발자크도 도착해 있었다.

나는 그리미에에게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백부님.”

“그래, 그간 있던 일은 들었다. 원화가 되어 명성을 떨치고 있다지. 훌륭하구나, 에릴로트.”

그는 사람 좋은 낯으로 하하, 웃었다.

“과찬이세요.”

나는 빙그레 웃으며 아빠의 곁, 그러니까 그리미에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미에의 곁에 앉은 가신들이 껄껄거리며 말했다.

“겸손이 지나치십니다. 공작님께서 몹시 흡족해하셨다지요. 과연 아스트라의 보물이십니다.”

[네이선 키트리 남작(51세, 원로원 소속)

‘멍청한 데이몬드의 머리 꼭대기 위에 있다는 계집이 저것인가. 어른을 손아귀에서 주무를 수 있을 것이라 믿는 멍청한 계집애.’]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자 가신, 아니, 키트리 남작이 어색하게 물었다.

“혹시 제 말이 불편하셨는지요.”

“민망함에 어찌할 바를 모른 것이에요. 어른의 칭찬이 어디 불편하겠어요? 부끄러울 따름이지요.”

내가 아무렇지 않게 말하자, 키트리 남작이 하핫! 웃음을 터뜨렸다.

다른 가신도 연신 미소 짓고 있었다.

“복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스트라의 보물을 뵙는 영광을 얻었군요. 반갑습니다, 영애.”

[아달로 드구아 자작(33세, 원로원 소속)]

이들 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두 명의 가신에게도 ‘원로원 소속’이라는 단어가 붙어있다.

원로원 소속이라 밝혀지지 않았던 자들마저도.

‘그리미에가 원로원을 손에 넣었구나.’

아빠가 그리미에에게 물었다.

“무슨 일로 제 저택을 찾아오셨습니까.”

그리미에는 민망한 듯 웃으며 말했다.

“부탁이 있다. 하하, 동생에게 부탁하는 처지가 민망하긴 해도 말이지.”

“부탁?”

아빠의 말에 키트리 남작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리미에 님의 중앙탑 출입 표결이 있을 겁니다. 데이몬드 님께서 당파에 찬성표를 던져주라 넌지시 말씀해주십시오.”

요슈아가 미간을 좁혔다.

“중앙탑엔 이미 조부님과 아버님이 계십니다.”

“그렇지요.”

“한 가문의 사람이 셋씩이나 중앙탑에 들어가는 경우는 이제껏 전무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해서 분가를 세울 생각입니다.”

키트리 남작의 말에 오라버니들이 표정을 굳혔다.

“분가라고요?”

“예, 분가를 세워 대귀족 임명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 한 가문 출신이 중앙탑에 들어간 선례는 있지 않았습니까.”

“조부님의 동의는 얻으셨고요?”

“공작님은 물론 황제 폐하와도 이야기가 된 부분이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분가를 세운다고 해도 본가의 가주가 되지 못하는 건 아니다.

분가의 사람이 공작이 되는 경우는 왕왕 있었다.

‘4대전 아스트라 공작도 분가 출신이었지.’

아빠가 그리미에를 빤히 쳐다봤다.

“황제와 거래가 있었겠군요.”

“그래. 아주 어려운 일을 부탁하시더구나.”

그리미에는 쑥스러운 표정으로 목을 주물렀다.

“하지만 동생들이 모두 가문을 위해 애쓰고 있는데, 장남이라는 놈이 아무것도 안 할 순 없지 않겠느냐.”

“…….”

“애써 봐야지, 뭐.”

“무슨 거래입니까.”

아빠가 묻기 무섭게 키트리 남작이 끼어들었다.

“거래는 저희가 애쓸 테니, 표결 쪽만 잘 부탁드립니다.”

“…….”

“공작님께서 기대가 크십니다, 하하!”

키트리 남작은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말하다가, 벽시계를 보고 “아!” 하며 그리미에를 쳐다봤다.

“황제 폐하와의 약속 시간이 곧이군요. 서둘러 움직이셔야겠습니다.”

“아아, 그래.”

가신들과 그리미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미에는 나와 오라버니들, 그리고 아빠에게 인사했다.

“다시 볼 때까지 몸 건강히 지내도록 해라. 그럼─”

“분가의 이름은 정하셨나요?”

내가 찻잔을 들며 물었다.

순간, 응접실이 고요해졌다.

그리미에의 시선이 뒷머리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무거운 침묵 후, 그리미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팔로스토.”

“…….”

“팔로스토란다, 에릴로트.”

순간, 첫 번째 삶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이제 아스트라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땅에 꽂힌 깃발의 문양은 오직 팔로스토 공작가의 문양이지─!”

딱딱하게 굳어진 우리 가족들이 일시에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찻잔을 매만지며 대답했다.

“주신이 이 땅의 악을 섬멸할 때 쓰였다던 창의 이름이 팔로스토였던가요.”

“그리 거창한 뜻은 아니지만, 하하…….”

“한데, 백부님.”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아세요? 결국 그 창도 인간에 의해 부러졌답니다.”

내가 생긋 웃자, 그가 눈썹을 까딱 들어 올렸다.

키트리 남작이 인상을 찌푸렸다.

“가문을 세우기도 전에 그 무슨 악담이십니까, 영애.”

“뜻을 두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실례였다면 죄송해요.”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던 가신들이 무어라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을 때였다.

그리미에가 한 손으로 그들을 가로막고 말했다.

“조언을 새겨두마. 그런 변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아주…… 깊이.”

“가주가 되고 싶으세요?”

응접실이 얼어붙었다.

“……!”

“……!!”

“……!”

가신들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들까지 나를 쳐다봤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리미에에게 다가갔다.

“되고 싶으세요?”

“영애, 어찌 후계를 입에 담으십니까!”

키트리 남작이 버럭 소리쳤다.

나는 무감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네게 묻지 않았다. 어디 감히 본가의 대화에 끼어드느냐.”

“……!”

키트리 남작은 당황해서 입을 뻐끔거렸다.

가신들도 감히 말하지 못하고 마른침을 삼켰다.

아빠만이 픽, 실소를 흘릴 뿐이었다.

그리미에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글쎄. 너무 먼일이라.”

“하면 가문을 무너뜨리고 팔로스토의 깃발을 아스트라 장원에 세우고 싶으신가요?”

“여, 영애─!!”

“그만하십시오!”

“에릴로트…….”

가신들과 가족들이 당황하였으나, 그리미에는 나를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조카님께서 무슨 일로 그리 위험한 말씀을 하실까. 혹 큰아비가 네 속을 상하게라도 한 것이냐?”

“설마요. 백부님은 좋은 분이시죠.”

“그렇게 봐주니 고마울 따름인데…….”

“너무 좋은 분이라 당해도 당한 줄 모를 거예요.”

드디어 그리미에의 재수 없는 가면이 벗겨졌다.

사람 좋은 체하던 표정이 사라지고, 그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이제 그만─”

“욕심내지 마세요, 백부님.”

“……욕심이라.”

“모든 비극은 욕심에서 기인하지요.”

그리미에가 고개를 숙이고 하하, 낮게 웃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없을 테지만…… 낸다면.”

“…….”

“내가 욕심을 낸다면 네가 어찌하겠느냐.”

나는 또 한 번 생긋 미소 지었다.

“제가 어찌하겠어요? 그저 백부님께 비극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드리는 조언이었지요.”

“…….”

“혹시 기분이 상하신 건 아니지요? 백부님께선 인자한 분이시니, 어린애의 조언도 잘 받아주실 거라 생각했는데…….”

내가 순진한 척 손을 모았다.

그리미에는 싸늘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역시 기분이 상하신 걸까요? 어떡하지…… 죄송하다고 말씀드리면 될까요?”

“……그럴 필요 없단다. 조카의 조언에 어디 기분이 상하겠느냐.”

“다행이에요! 역시 백부님이시라니까…….”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비웃음을 지었다.

“또 보자, 에릴로트.”

“네, 다음에 뵈어요. 아! 그런데 백부님은 너무 먼일이라 가주의 자리를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하셨잖아요.”

“그래.”

“저는 생각해봤거든요.”

나는 뒷짐을 지고 사뿐사뿐 걸어 아빠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아빠의 목을 끌어안고서 그리미에를 쳐다봤다.

“저는 아빠가 가주가 되길 바라요.”

“…….”

가신들이 마른침을 삼키며 그리미에를 쳐다봤다.

그리미에의 표정이 완전히 차가워져 있었으니까.

저들로선 처음 보는 얼굴일 것이다.

나는 아빠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서 그리미에를 빤히 쳐다봤다.

아빠가 그런 나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귀여운 딸이 그렇다니 노력해볼까 싶습니다, 형님.”

“…….”

“도와주시겠습니까?”

“……응원하지.”

그렇게 말한 그리미에가 휙, 등을 돌리고 문으로 향했다.

가신들도 허둥지둥 그의 뒤를 따랐다.

나는 그런 가신들에게 소리쳤다.

“그러니까 이쪽으로 오고 싶으신 분들은 언제든 찾아오세요!”

푸핫!

발자크가 터지자, 요슈아와 리시먼드까지 쿡쿡 웃었다.

발자크는 빙글거리며 내게 말했다.

“속 뒤집는 데엔 천재라니까. 아아, 이쪽도 중앙탑에 가시는 것을 응원은 합니다!”

‘도와주진 않겠지만’ 이라는 뜻이었다.

가신들의 얼굴이 터질 듯 붉어졌다. 그리미에도 여전히 차디찬 기세였다.

나는 그들의 뒤에서 베, 혀를 내밀었다.

‘너도 도와준다는 말은 없었잖아.’

그리미에와 가신들이 나가고 쾅! 문이 닫혔다.

요슈아가 픽, 실소를 흘리며 내게 말했다.

“왜 그렇게 놀려?”

“저쪽도 사람 좋은 척 놀리는데, 이쪽이 못 놀릴 게 뭐야.”

발자크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근데 속 읽었어?”

“속을 읽어?”

요슈아가 물었다.

나는 남은 자리에 앉으며 속삭였다.

응접실은 결계로 철저히 소음이 새어 나가지 않게 되어 있지만, 혹시 모르기 때문이었다.

“진짜 축복의 땅의 뿌리를 열고 내 열람이 강해졌어. 모든 정보가 읽히더라고. ……속마음까지.”

요슈아와 아빠는 놀란 얼굴이었다.

요슈아가 말했다.

“그거 굉장하네……. 그리미에의 속은 어떤데?”

“잘 안 읽혀. 노이즈가 낀 것처럼 글자가 순 흐리지 뭐야.”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가호의 단계가 높은 사람은 안 읽히나 봐. 아빠의 속도 그리미에와 비슷하게 보이거든.”

“4단계 이상부턴 읽기 힘들다는 뜻이네.”

“하지만!”

나는 검지를 척! 들고서 말했다.

“흥분하니까 조금씩 읽히긴 하더라고.”

“그래서 일부러 흥분시켰구나.”

리시먼드의 말이었다.

‘열받게도 하고 싶었지만.’

나는 헛기침 하고서 말했다.

“황제와 한 거래가 뭔지 알겠어.”

내가 ‘아빠가 가주가 되었으면 좋겠다’ 라고 말한 순간, 보였다.

[────────결코────서둘러서────선황의 보구를 찾아야────]

─라는 것이.

“선황의 보구예요. 황제가 그리미에에게 선황의 보구를 찾아오라고 한 거예요.”

“선황의 보구라면…… 미친!”

발자크가 벌떡 일어났다.

그럴 만도 했다.

‘선황의 보구는 해룡 요르문간드의 거처에 있으니까.’

선황은 황자 시절 황궁의 보물을 훔쳤다.

그것으로 황제와 형제들을 죽이고, 황좌에 올랐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그렇게 황제가 되어 아무도 손댈 수 없는 요르문간드의 거처에 그것들을 숨겨놨다고 한다.

제 자식들이 똑같은 방법으로 자신을 죽일까 봐서…….

요슈아가 말했다.

“무리야.”

리시먼드도 고개를 끄덕였다.

“고대의 100만 병사로도 요르문간드를 쓰러뜨리지 못했다는데 어떻게 손에 넣겠어?”

발자크가 씩 웃었다.

“그럼 좋은 것 아냐? 분가를 만들지 못할 거 아냐.”

난 고개를 끄덕였다.

발자크는 신이 나서 소리쳤다.

“그렇지 않아도 요르문간드가 네 라곤의 등장으로 사나워졌다면서!”

“……방법이 있긴 해.”

“뭐?”

나는 짜증 섞인 표정으로 팔짱을 끼었다.

“첫 번째 삶에서 달리아가 선황의 보구를 찾아왔거든.”

“뭐?! 어, 어떻게……!”

“그러니까 달리아가 괴물이라는 거지. 걔는 못 하는 게 없었다니까.”

오라버니들이 조용해졌다.

“그 정도라고?”

“소문으로는 요르문간드에게 ‘사랑하는 나의 아이’라는 소리까지 들었다던 걸.”

발자크가 마른침을 삼켰다.

“요르문간드와 네 라곤이 붙으면 어떻게 되는데?”

“다른 용들에 비하면 라곤은 아직 새끼 용이잖아? 질 거야. 아니, 지기 전에…….”

내가 중얼거리니, 요슈아가 말을 이었다.

“그 전에 대륙이 박살 나겠지.”

“응…….”

발자크가 굳은 얼굴로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해?”

“하지만 다행인 게 있어.”

“뭔데?”

“첫째는 아직 그리미에에겐 달리아가 없다는 것.”

“그렇지.”

“둘째는…… 우리가 보구를 찾아야 하는 게 아니라 방해만 하면 된다는 것.”

나는 히죽 웃었다.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