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4화. (235/390)

234화.

데본 님은 인상을 찌푸렸고, 레오 탈로프는 하하 호탕하게 웃었다.

황제는 그런 두 사람을 묘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데본 님이 황제에게 고개를 숙였다.

“하면 그 건은 명하신 대로 처리하겠습니다.”

“믿겠네.”

명해?

뭘?

‘엄청 궁금하네.’

혹시 그리미에나, 아빠와 관계된 일인가?

데본 님과 레오 탈로프는 황제에게 인사한 후, 뒤돌아 걸었다.

문을 향해 걷는 동안 두 사람과 시선이 마주쳤다.

특히, 데본 님과 시선이 오래 맞물렸다.

그러자 ‘그때’가 생각난다.

첫 번째 삶의 내가 가장 외로웠을 때.

아무리 노력해도 비웃음을 사던 그 시절에 데본 님이 아스트라에 오셨다.

앙상하게 말라서 내 몸에 맞지 않게 큰 드레스를 입은 날 보고 그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숙부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렇게 키울 거라면 왜 성에 두는 거요.”

“뭐? 그게 당신과 무슨 상관이라고 난데없이 성에 찾아와 행패요?!”

“우리가 저 녀석에게 못 해준 게 뭐가 있다고. 굶겼어, 못 가르쳤어!”

꽥꽥거리는 숙부들에게 데본 님은 드물게 고함을 내질렀다.

“고작 열몇 살밖에 안 된 아이가 사람과 눈을 못 마주쳐! 이게 제대로 큰 아이의 반응인가─!!”

“무, 무슨…….”

“혈색은 엉망이고, 물어도 대답을 못 한다. 평생 질문받지 못하고 산 아이처럼!”

“…….”

“한데 어찌 제대로 양육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리고 휘장 뒤에서 잔뜩 굳어져 있는 내게 성큼성큼 걸어왔다.

“나와 가자.”

“…….”

“미혼에 자식도 없는 몸이라 너를 잘 키울 수 있다고 확언은 하지 못한다.”

“…….”

“그러나 나는 네게 질문할 것이다.”

“…….”

“잘 잤느냐고, 식사는 어땠느냐고, 또 밤을 새운 건 아니냐고. 그 정도라도 괜찮다면 나와 가자, 에릴로트.”

그때의 나는 아스트라를 벗어나면 죽는 줄 알던 아이라, 가겠노라고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하지만…….

‘당신은 알까.’

그 말이 내게 얼마나 힘이 되었는지.

이 세상에 한 명쯤은 내게 질문해줄 사람이 있다고.

버티다, 버티다 죽을 것 같은 때 어쩌면 기대도 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달리아가 왔을 무렵, 저 분이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난 아마 그에게 갔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상하지.’

나를 데려가겠다고 한 건 내가 ‘데이몬드의 딸’이기 때문이었다.

아빠와 인연이 있어서.

데본 님이 이렇게 말하기도 했는걸.

“로체 후작님께선 어째서 저를 데려간다고 하시는지…….”

“……내가 네 아비에게 빚이 있다.”

“네?”

“그렇게만 알아두어라.”

그렇게 말하면서 머리를 쓰다듬고 가셨는데.

‘왜 저렇게 질색을 하시지?’

내가 고개를 갸웃하고 있을 때였다.

“그래, 귀한 몸이 황궁까지 오느라 고생이 많았겠구나.”

황제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명백하게 빈정거리는 말이었다.

심지어는 열한 살인 나를 앞에 두고 파이프까지 물었다.

그가 성냥갑에서 성냥을 꺼내며 말했다.

“네 조부는 짐의 호출에도 답이 없고. 아비는 중앙탑에 들어가 나오질 않으니 만날 방법이 없지.”

“…….”

“감히.”

탁, 소리와 함께 성냥이 부러졌다.

황제가 “젠장.” 중얼거리며 파이프와 성냥을 테이블에 쾅! 내려놓았다.

‘얼씨구.’

혼자서 북치고 장구까지 치네.

‘대단하게 화가 났다는 말이겠구만.’

하기야, 황제는 친황제파의 황궁 관료들이 반대하는 ‘그리미에의 보물선 원정’에 사재를 들여 지원했다.

선황의 보물을 찾기 위해서지만, 명분은 ‘보물선 원정’.

웬만한 귀족들은 속내를 알고 있어도 백성들은 다르다.

벌써 황제를 보물선 같은 것에 눈이 벌게서 백성을 죽인 폭군 보듯 하고 있었다.

‘그 손해를 다 봤는데 대실패, 대망신이니 열이 받을 만도 했겠네.’

심지어 그런 황제를 조롱하듯, ‘황태후는 명군~ 황태후가 짱이야~’ 하고 라곤이 황태후 궁을 날았으니.

“네 아비가 모후와 무슨 거래를 했느냐?”

“저어…….”

“대체 무슨 거래를 했기에 나와 척을 질 것을 알면서 용을 불러냈느냔 말이다.”

“그게…….”

나는 일부러 입술을 꽉 깨물고 고개를 숙였다.

“폐하, 사실 제 아버지께선 이 일을 모르셨습니다…….”

“뭐라?”

“제 짧은 생각으로 폐하의 심기를 거스르게 되어, 아버님께서도 크게 당황하셨습니다…….”

황제가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소리냐.”

“그게…… 그러니까…….”

나는 차마 말할 수 없다는 듯 45도로 고개를 숙였다.

한지혁이 이 자리에 있었더라면,

“이야, 오스카 수상감이다. 대단한 열연이야!”

─라며 박수를 쳤을 것이다.

황제가 쾅! 테이블을 내려치곤 노성을 내질렀다.

“짐이 묻지 않느냐!”

나는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흠칫, 어깨를 모았다.

“그, 그것이…….”

그러며 넙죽 무릎을 꿇고 황제를 올려다봤다.

사극에서 보니까 간신들이 다들 이렇게 하더라고.

“백부님의 보물선 인양이 실패할 것을 미리 눈치채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시선을 돌리려고……!”

“……뭐라고?”

“저, 저는 이렇게 하면 사람들이 모두 황태후 폐하를 칭송하느라 보물선 이야기는 잊을 줄로 알았습니다…….”

나는 울먹울먹 황제를 올려다봤다.

“해서 그렇게나 황태후 폐하의 탄신제에 제 라곤을 데려오려 한 것입니다…….”

내가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술술 하자, 황제의 얼굴이 굳어졌다.

“무슨 소리냐. 인양이 실패할 것을 알고 있었다니.”

“저어, 저…….”

황제는 매우 조급하게 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와선 어깨를 잡았다.

“확실하게 말해야 할 것이다.”

나는 이때다 싶어서 웅얼거렸다.

“그게…… 백부님께서 다른 생각을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뭐?”

“제 아버님께서 말씀해주셔서, 인양이 사실 선황 폐하의 보구를 찾으러 가는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르문간드라는 무서운 용이 있는 바다라고 해서 걱정이 되었어요…… 저는 친척들 가운데 백부님을 제일 좋아하거든요.”

말하다가 토할 뻔했다.

‘아…….’

아무리 거짓말이라도 그리미에를 가장 좋아한다고 하니 속이 울렁거린다.

황제가 소리쳤다.

“그래서!”

“…….”

내가 깜짝 놀란 척하자, 황제는 가까스로 화를 참으며 물었다.

“그리미에 아스트라가 네 친척들과 달리 성품이 훌륭하다는 것은 짐도 들어 알고 있다. 그보다 계속 이야기하여 보아라.”

“사실은 몰래 라곤을 도우러 보낼 셈이었어요. 혹시 백부님께서 다치기라도 할까 봐…….”

“…….”

“왜 몰래 하려고 했냐면, 라곤을 마음대로 쓰면 황제 폐하의 진노를 살 수 있다고 요슈아 오라버니가 가르쳐주었거든요.”

“…….”

“백부님의 성품으로는 조카에게 위험한 일을 시킬 수 없다고 거절하실 것 같아서, 그 분도 모르게 움직였지요.”

“해서.”

“원정 일정만 알아보려고 했는데…… 이상한 얘기를 들었어요.”

나는 잔뜩 겁에 질린 아이처럼 손을 꼼지락거렸다.

“선황 폐하의 보물을 찾는 게 아니라, 요르문간드에게 일직선으로 쭉 간다는 거예요…….”

“뭐라고?”

황제가 들어도 이상한 이야기일 것이다.

죽기로 작정한 것도 아닌데, 왜 요르문간드에게 가겠는가.

선황이 설마 요르문간드의 입에 보구를 물려놨을 것도 아니고.

나는 계속해서 웅얼거렸다.

“그리고 제가 정보책으로 보낸 아이가 이상한 말을 들었다고…….”

“이상한 말이라니.”

황제가 제대로 미끼를 물었다.

나는 속으론 히죽히죽 웃었지만, 겉으로는 잔뜩 겁에 질린 척 중얼거렸다.

“‘사구를 열려면 요르문간드가 필요하다’라고.”

“……!!”

황제가 벌떡 일어났다.

나도 황제를 따라 일어나며 말했다.

“사구는 전설 속에 나오는 문이지요? 세상을 바로 세운다는 그 문이요.”

“말도 안 돼! 그리미에 아스트라가 무슨 연유로 사구를 연단 말이냐!”

“하지만…… 정말로 사구는 열렸어요…….”

“……열렸다고?”

“이시론 가문 근처에서 라곤이 사구를 느꼈거든요. 그래서 저희 가족이 이시론 가에 있던 거예요.”

나는 있던 일도 거짓말을 마구 섞어서 그럴듯하게 꾸며냈다.

‘마력의 흐름을 조사해봐.’

그럼 알 수 있을걸.

사구가 정말로 열렸고, 당신은 그리미에에게 이용당했단 것을.

황제는 당장에 통신석을 들었다.

“황도의 이시론 저택을 조사해라. 마력의 흐름을 샅샅이 훑어 사구의 흔적을 찾아. 그래, 사구 말이다, 빌어먹을!”

황제가 통신석을 내던졌다.

쨍!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통신석이 박살 났다.

‘아이고, 사실은 성질이 대단히 사나운 사람이었구만?’

나는 입술을 모으고 눈썹을 까딱 들어 올린 채로 그 꼴을 구경하고 있었다.

“만약…….”

황제가 입을 열자, 얼른 겁먹은 척을 다시 했지만.

“만약 그리미에 아스트라가 내게 그따위 손해를 입히고, 제 목적을 이룬 것이라면 결코…… 결코 용서치 않을 것이다.”

그래!

그거지!

네 돈을 다 처먹고, 널 바보로 만들었다니까!

절대 용서해주지 마!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지만, 겉으론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물론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려고.

“폐, 폐하……!”

나는 다시 넙죽 무릎을 꿇고 황제에게 매달렸다.

“백부님을 용서해주셔요! 백부님은 좋은 분이세요! 사구를 연 것도 나라를 위해서……!”

“네가 누구이냐.”

“예?”

“짐이 네게 무슨 이름을 주었느냐!”

나는 얼른 고개를 수그렸다.

“폐하의 서군을 책임지고 있는 원화입니다.”

“네 아직 어리다고 하나, 짐의 군을 책임지는 황궁의 관료이다!”

얼씨구.

원화는 단지 아이돌 같은 역할이란 걸 다들 안다.

나나 세바스티아 언니가 너무 열심히 하는 거지.

하지만 나는 깨달은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어찌 사사로운 감정으로 짐의 앞을 막으려는 것이냐, 서군 원화.”

“송구합니다. 폐하의 서군 원화, 비통한 심정으로 사사로운 감정을 외면하겠습니다.”

나는 어느 사극에서 들어본 말을 흉내 내며 고개를 조아렸다.

황제는 방문을 가리켰다.

나가보라는 뜻이었다.

난 정말로 비통한 얼굴로 인사한 후, 황제의 집무실을 나섰다.

복도 밖의 분위기가 얼어붙어 있었다.

황제가 그렇게나 고함을 내질렀으니, 시종들까지 분위기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나는 어두운 얼굴로 말없이 걸었다.

그런 내 뒤를 한지혁이 쫓아왔다.

마차 대기소로 가서, 마차에 올랐다.

그리고 주변이 고요해졌을 때…….

“으랏차!”

나는 허공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한지혁이 흥미진진한 얼굴로 물었다.

“성공? 그리미에 엿먹이기에 성공한 거냐?”

“완전 성공. 황제가 노발대발!”

“이야, 역시 이간질엔 선수라니까!”

한지혁이 내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평소라면 인상을 썼겠지만, 오늘은 헤벌쭉 웃어줬다.

그야, 이제 그리미에는 똥 됐으니까!

‘사구가 열렸다는 것만 밝혀지면 넌 죽었다.’

할아버지가 어떻게든 살리긴 하겠지만, 먼 나라로 유배형이 떨어지겠지.

그럼 나는 그리미에의 눈을 신경 쓰지 않고 세력을 넓힐 수 있다는 뜻이었다.

“가주의 로브를 입은 아빠가 그려지는 것 같지 않니?”

나는 황홀한 표정으로 허공을 쳐다봤다.

한지혁도 나와 같은 방향을 쳐다보며 황홀한 듯 눈을 반짝였다.

“네 아버지의 후광을 등에 업고 호의호식하는 너와, 그런 네 곁에서 같이 호강하는 내가 보이는 것 같긴 하다…….”

“아빠가 가주만 되면 일 같은 건 다 때려치우는 거야. 평생 놀고먹고 살자.”

“환상적이다…….”

한지혁과 나는 양손을 깍지 낀 채로 시시덕거렸다.

“아, 카인로드 숙부를 좀 만나봐.”

“왜?”

“황제의 기분을 풀어줘야지.”

“저렇게 화가 났는데 방법이 있겠어?”

“있지요.”

“어떻게?”

나는 내 눈가를 톡, 두드렸다.

“내 가호가 뭐야.”

“그야 <열람>…… 설마, 너!”

“슬슬 뿌리의 효과가 떨어지는 것 같아서 미리 지도를 확인해서 알아놨지. ……선황의 보구가 있는 곳!”

게다가 지금은 요르문간드가 사구를 여느라 힘이 빠져있을 것이다.

지금 쏙 가서 선황의 보구만 빼 오면 되겠다.

“이그리츠 군에게 말해서 곧장 준비해. 열 명…… 아니, 일곱으로도 충분해.”

“그래, 그걸 가져다주면 황제가 네 앞에서 녹긴 하겠다.”

얘가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나는 괄시하는 눈으로 한지혁을 쳐다봤다.

“보구를 왜 황제에게 줘? 선황이 제 아버지를 죽일 수 있었을 만큼 대단한 보물인데.”

“황제의 화를 풀어준다며. 보구를 찾아주는 게 아니면, 어떻게?”

난 히죽, 웃었다.

“이그리츠 군이 보구를 가져오면, 카인로드에게 복제시켜.”

가품은 황제를 주고, 진품은 내가 갖는다.

한지혁이 펄쩍 뛰었다.

“그러다 들키면 어쩌려고!”

“안 들켜. 황제는 그걸 못 쓰거든.”

달리아가 황제에게 엄청난 귀여움을 받았던 것도, 보구를 가져다줘서다.

그런데 황제는 보구를 쓰지 못했다.

‘선황이 보구의 사용법이 적힌 문서를 없애버렸으니까.’

보구는 성물인 만큼 사람의 힘으로 없앨 수 없어서 요르문간드의 거처 근처에 놔둔 거다.

그러나 미래의 황제는 사용법을 아는 것처럼 보구를 자랑했다.

‘과시한 것만으로도 황제의 적들은 입을 다물었지.’

그 어떤 결계도 깰 수 있는 엄청난 성물.

황제에게 밉보이면 자신이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

한지혁은 혀를 내둘렀다.

“넌 정말…….”

“대단하게 지혜롭지?”

“부정적인 시선이었다, 방금.”

“난 긍정적으로 느낄래.”

그러며 흥얼거렸다.

그런데 그때였다.

히이이이잉─!

상점가에 접어들던 우리 마차가 덜컹! 소리를 내며 멈춘 것이다.

마부가 급히 차에 연결된 창을 열고 말했다.

“송구합니다, 아가씨. 난데 없이 다른 마차가 튀어나와서……!”

다른 마차?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