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화.
* * *
데본 님은 우리에게 차와 다과거리를 내어주었다.
황족들이 내주는 좋은 차는 아니었다.
검소한 성격대로 가성비 좋은 저렴한 찻잎을 구비하고 있던 것이다.
그런데 블라썸은 너무 맛있다며 호들갑이었다.
“향기가 너무 좋아요. 이런 차를 대접받다니, 전 정말 행복한 사람이네요.”
그러자 데본님이 또다시 움찔했다.
“뭐라고?”
“전 정말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씀드렸어요.”
“…….”
“데본 님?”
“너는…… 네 이모와 비슷한 말을 하는구나.”
블라썸이 쑥스럽다는 듯 에헤헤 웃었다.
“아무래도 핏줄이니까요. 어머니도 그러시더라고요. 꼭 언니가 환생한 것 같다고.”
“…….”
나는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일부러 그 말을 한 거면서.’
아빠에게 들었다.
아카데미에서 데본 님은 학생회였는데, 아빠와 벨트리 님이 사고를 치고 방문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때 차를 내주자, 벨트리 님이 멍하니 찻잔을 바라보셨단다.
“왜 그러지?”
“아, 이런 차는 처음이라.”
“미래에 더 좋은 차를 마시고 싶다면 학칙은 지키는 게 좋을 것이다, 벨트리.”
“훈계를 들으러 와서 좋은 차를 대접받았으니, 난 이미 행복한 사람이지.”
아빠도 기억하는 두 사람의 일화다.
벨트리 님이 죽고, 벨라가 유품인 일기장을 가져갔다고 하니 아마도 거기서 봤겠지.
그러니까 그다지 좋지 않은 차에 호들갑을 떤 것일 터다.
그때였다.
블라썸이 내 팔짱을 꼈다.
“아! 그리고 저희 화해했어요. 그렇죠?”
데본 님이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냐.”
내가 입을 열려던 찰나, 블라썸이 먼저 말했다.
“제가 어머니와 직접 아스트라 제 2백작저로 가서 사과드렸거든요. 그렇죠, 영애?”
“…….”
“영애도 이해해주셨어요. 제 입장에선 그런 뜻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오해하게 만든 제가 나빴으니까.”
“…….”
“이해해주셔서 감사해요, 영애.”
나는 무미건조한 눈으로 블라썸을 쳐다봤다.
‘이게 진짜.’
제 잘못은 쏙 빼고, 나만 속 좁은 사람으로 만들고 있네.
나는 블라썸을 차갑게 보다가 말했다.
“이해하기 그리 쉽지는 않았어요.”
“……네?”
블라썸이 흠칫, 당황했다.
“리시먼드 오라버니가 양자라 재산을 상속 받을 순 없어도, 쥐고 흔들기 좋으니 결혼 상대로 그만이다.”
“……!”
“그 말에 머리가 새하얗게 될 만큼 화가 났으니까요.”
“그, 그건 제가 한 말이 아니라 피네사 양이……!”
“함께 웃고 즐기셨죠.”
내가 이 말을 저택에서 못했다고, 여기서도 못할 줄 알았냐?
‘거긴 리시먼드가 있었으니까 말하지 않은 거야.’
다른 영애들에게 말하지 않았던 이유도, 그 더러운 말이 리시먼드의 귀에 들어갈까 봐서였다.
하지만 데본 님은 다르다.
이런 말을 어디 가서 할 사람이 절대 아니거든.
데본 님이 인상을 찌푸리고 블라썸을 쳐다봤다.
블라썸은 어쩔 줄을 몰랐다.
“저는, 그런, 아니요, 그게……!”
“……벨트리는—”
데본 님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호의를 사는 녀석이었지. 남의 아픔을 우습게 여기는 법이 없었거든.”
“…….”
지금까지 벨트리 님 행세를 하던 블라썸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데본 님이 한숨을 내쉬었다.
“화해했다니 다행이군. 해서, 아스트라 백작 영애는 무슨 일로 날 찾았지?”
“지나가던 길에 인사차 들렸습니다.”
“그러냐.”
“그럼 전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래.”
나는 찻잔을 내려놓고 일어났다.
블라썸은 얼굴이 터질 듯 붉어진 상태로, 바지춤만 꽉 틀어쥐고 있었다.
‘혼자서 어색하게 있어봐라.’
데본 님에게 고개를 숙인 후 방을 나섰다.
마침 통신석이 깜빡였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고, 인적이 드문 뒤뜰로 향했다.
[나야.]
한지혁의 목소리였다.
“응. 왜?”
[바로 돌아가지 못할 것 같아. 비페리 령으로 가야 해서.]
“비페리 령엔 왜?”
[네 생각대로 벨트리는 입양이 된 게 맞는데 서류가 아무래도 이상해.]
“서류?”
[다른 서류는 모두 당시 입양 관리관의 서명이 들어가 있는데, 벨트리의 서류에만 그리미에의 후견인, 아니, 보좌관의 서명이 들어가 있어.]
“……뭐?”
[비페리 령에서 왔다고 하니까, 보육원을 뒤질 생각이다.]
“그래, 뭔가 더 알게 되면 내게 연락해.”
통신이 종료되었다.
나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손 안에서 통신석을 굴렸다.
‘대체 뭐지.’
“왜 이렇게 기분이…….”
“기분이 이상해?”
등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흠칫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세바스티아 언니였다.
“어, 언니.”
“뭐야. 왜 이렇게 놀라?”
그녀가 쿡쿡 웃으며 물었다.
“등 뒤에서 갑자기 나타나셨으니까요.”
“비페리 령 얘기가 들리길래 얼른 왔지. 누굴 조사 중인 것 같은데?”
“네, 맞아요.”
그러다가 “아!” 소리치며 언니를 붙잡았다.
“제 하인인 한이 비페리 령 보육원을 찾아다닐 건데 언니가 말 좀 해주실 수 있어요?”
“서류를 보여주라고?”
“네!”
“으음, 그건…….”
언니가 눈을 가늘게 뜨다가 활짝 웃었다.
“물론 되지. 의동생 님의 부탁인데.”
그러며 언니는 내 코를 검지로 쿡 눌렀다.
“대단한 일이란 것만 알아둬. 네 할아버지가 서류를 요청하셨을 때, 우리 할아버지가 대번에 거절하셨거든.”
“고마워요!”
“자, 그럼 팔짱 정도는 껴주시겠어요, 영애?”
“물론이지요.”
나는 언니의 팔짱을 끼고 시시덕 성안으로 되돌아갔다.
“어디 가던 길이야?”
“백기사단에요. 자금 좀 나눠 받으려고…….”
“아아, 서군은 작년 대훈련을 말아먹어서 자금이 부족하지.”
우리는 그런 얘기를 나누며 걸었다.
* * *
며칠 후, 비페리 령.
후드를 깊게 눌러쓴 한지혁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출입 절차만 이틀이 걸리네.’
아스트라 령 출신에겐 더 까다로운 것 같다.
하기야, 워낙 원수 같은 가문이니 그럴 만도 하지만.
드디어 출입 허가를 받은 한지혁이 향한 곳은 콜로노스 언덕이었다.
‘이 언덕의 보육원 출신이라고 했는데…….’
한지혁은 언덕에 있는 허름한 보육원을 둘러보았다.
“꺅!”
등 뒤에서 들린 갑작스러운 소리에 한지혁이 비명을 내질렀다.
“와아아아아악—!”
그리고 양팔로 얼굴을 막았는데…….
‘잠깐, 방금 어린애 목소리 아니었나.’
슬그머니 팔을 내리자, 무릎에 겨우 오는 아이가 양손으로 입을 막고 키득키득 웃고 있었다.
“뭐, 뭐야, 너.”
그때였다.
“아라사!”
머리가 희게 센 여인이 아이를 끌어안았다.
“해가 지고 있는데 마음대로 밖에 나가면 어떻게 된다고 했지?”
“늑대가요. 크아앙해요.”
“그래. 아주 위험하니까 그러면 안…… 그쪽은 누구죠?”
여인이 아이를 끌어안고, 한지혁을 엄청나게 경계하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한지혁이 얼른 신분패를 꺼냈다.
“아,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세바스티아 비페리 님께서 말씀해두셨다고 들었는데요.”
“아아, 네. 전해 들었습니다.”
“그것참 다행이네요.”
눈이 얼마나 무시무시했는지 모른다.
얘기를 못 들은 사람이면 망치로 머리를 깨버릴 수도 있을 만큼.
‘잔느만큼 무서운데.’
나이는 50대쯤으로 보이는데, 위압감이 엄청났다.
여인이 생긋 웃으며 말했다.
“저는 엠마라고 합니다.”
“아, 한 지헤크입니다.”
“안으로 드시죠. 자, 아라사도 가자꾸나.”
엠마는 아이를 안고 문을 열어주었다.
안은 낡긴 했어도 아늑했다.
아이들도 잔뜩이었는데, 모두 억양이 달랐다.
한지혁이 빤히 보고 있자, 엠마가 아이를 내려놓고 말했다.
“외국 혼혈이나, 외국 아이들이 많이 있답니다. 이런 아이들은 제국 보육원에선 쉽게 받아주지 않아서요.”
“아아. 그런데 직원이 안 보이는데……?”
“저 혼자서 관리합니다. 자, 서류실은 여기랍니다.”
서류실로 들어간 한지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스트라 성만큼은 아니지만, 여기도 서류가 엄청나게 빼곡하다.
‘엠마는 꼼꼼한 사람인가 보군.’
엠마가 물었다.
“말씀하신 연도의 자료는 이쪽입니다. 차라도 드릴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한지혁은 즉시 서류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꽤 많은 애들이 있었잖아.’
작은 보육원에서 이만한 애들을 데리고 있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대부분이 동제국인 라온트라 출신이었다.
“라온트라 출신이…….”
중얼거리고 있자, 엠마가 말했다.
“라온트라 내전때 망명한 난민 아이들이랍니다.”
“그렇군요.”
그러던 찰나였다.
쨍—!!
와아아아아앙—!
날카로운 파열음에 이어 아이들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엠마가 눈을 번쩍이며 순식간에 뛰어나갔다.
“무슨 일이니!”
목소리가 엄청나서 서류실 안까지 들린다.
‘뭐, 뭐야, 저 보법…….’
저 보법을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었다.
한지혁이 멍하니 눈을 끔뻑이고 있을 때, 아라사라 불렸던 아이가 문 안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선생님한테 혼났어?”
“뭐?”
“으음, 이상하다. 여기 오는 아저씨들 다 혼나. 엠마 선생님한테.”
“혼난다고?”
“이렇게, 이렇게 돼서 가.”
아이는 팔과 다리를 반대로 꺾으려 낑낑거렸다.
“안 돼, 안 돼. 그러다 부러진다.”
“하지만 아저씨들은 이렇게 되는데…….”
50대는 되어 보이는 여인이 그런 것을 할 수 있단 말이야?
한지혁이 허……, 하며 탄성을 흘리곤 다시 서류를 들춰보았다.
“이름이 없는 애는 거의 없잖아.”
“이름은 소중한 거래. 그래서 선생님은 아가들한테 꼭, 꼭, 이름을 붙여줘.”
“그러냐.”
한지혁이 픽, 웃으며 다음 장을 넘겼다.
[무명/6세/■■남아]
찾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남아의 옆에 뭔가 지운 듯한 흔적이 있었다.
‘출신도 안 쓰여 있어.’
대체 뭐야.
왜 벨트리라는 사람만 이렇게 특이한 점이 많은 거지.
그가 미간을 좁히고 있던 찰나였다.
한지혁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던 아이가 금세 흥미를 잃었는지 서랍형 책상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책상 서랍을 마구 헝클이는 아이를 보고 한지혁이 말했다.
“이 녀석, 그러다 선생님한테 혼난…… 어?”
서랍 안에서 익숙한 물건이 있었다.
‘저건 내가 사기꾼 시절에 가지고 다니던 물건이잖아.’
라온트라의 귀족 행세를 하려고 가지고 다녔던 가짜 펜던트.
한지혁이 얼른 펜던트를 뒤집었다.
쌍검이 교차한 형태.
이건, 황궁 호위부대의 펜던트다.
“……!”
그가 흠칫, 아이를 쳐다봤다.
“선생님이 아저씨들을 때려잡았…… 혼내줬다고 했지?”
“응!”
“그때, 혹시 검을 썼어?”
“선생님은 항상 검을 두 개 쓴다! 멋지지!”
“그래…… 멋지네…….”
한지혁이 서랍을 잘 닫아놓은 후, 아이와 함께 방을 나섰다.
아이들을 살피고 있던 엠마가 한지혁을 쳐다봤다.
“서류를 찾으셨어요?”
“아뇨, 너무 양이 많아서요. 아무래도 내일 다시 와야 할 것 같습니다. 밤이 늦었으니.”
“그러신가요. 그럼 살펴 가셔요.”
그러곤 엠마는 다시 아이들을 살폈다.
한지혁은 그녀에게 인사한 후, 보육원을 나섰다.
보육원과 멀리 떨어진 후, 그가 통신석을 들었다.
얼마간의 신호 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콘라드입니다.]
“라온트라의 흑요회 명단을 조사해주십시오.”
[흑요회?]
“황후를 지키는 여성 검객들로 이루어진 집단. 쌍검을 쓰는 자들 말입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아스트라는 내전에서 황후 쪽에 도움을 줬던 터라. 한데 무슨 일이십니까?]
“만약 제 추측이 맞다면…… 벨트리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엄청난 인물일 겁니다.”
한지혁의 목소리가 짙어졌다.
* * *
그날 밤, 아스트라 제 2백작저.
몸이 으슬으슬하다.
나는 카디건 자락을 꼭 끌어안고 침대에 누웠다.
유모인 잔느가 나를 걱정스러운 얼굴로 쳐다봤다.
“괜찮으세요?”
“으응, 감기 정도야 뭐.”
“오늘이 붉은 달(가호를 쓰지 못하는 밤)이라 치유사도 오지 못하니 이를 어쩔까요…….”
“괜찮아, 괜찮아. 약 먹고 자면 될 거야.”
가호를 가진 사람들은 붉은 달이 가까워지면 몹시 예민해진다.
강하면 강할수록 더.
아빠와 오라버니들도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네.’
나는 붉은 달의 영향을 많이 받지 않았는데.
잔느가 내 손에 알약을 하나 놔주었다.
“해열제예요. 먹고도 힘드시면 불러주셔요?”
“응.”
꼴깍 약을 먹자, 그녀가 후후 웃으며 내 뺨을 쓰다듬었다.
“약도 잘 드시지.”
“열한 살인걸.”
“네, 다 크셨죠.”
잔느가 내 잠자리를 봐주고 문을 나섰다.
나는 협탁의 전등을 끄고 이불을 가슴께까지 올렸다.
‘으으, 힘들어.’
왜 이렇게 힘들담.
“어서 잠을 자야…… 응?”
이상했다.
전등 위로 반짝이는 글자들이 날아다니는 것이다.
[로스모 제작 / 아그로스 샹들리에]
[물잔, 잔느 마시프의 흔적]
‘뭐, 뭐야.’
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글자들이 마구잡이로 날아다니고 있었다.
[앙테 그림 ‘초목과 꽃’]
[드레스 룸]
[황동거울]
‘그만, 그만!’
머리가 터질 듯이 아프다.
‘그렇구나. 축복의 땅에서 받은 뿌리가 끝난 줄 알았는데 아직 남아있던 거야.’
그게 영향을 미쳐서 붉은 달인데도 계속 마력이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설렁줄을 당기려던 것이었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하고 나는 주저앉아버렸다.
“잔느…… 으윽, 오라버니…… 아빠…….”
시야가 좁아진다.
그리고 나는 어둠 속에 깊이 빨려들었다.
* * *
“대체 너란 아이는!”
벼락 같은 고함에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여긴 익숙한 어둠 속이었다.
그러니까 세일론과 늘 만나던 어둠.
“강한 힘엔 강한 제약이 존재하는 법이야. 천계에서 흘러나온 힘을 쓰는데 이만한 단점이 없을 줄 알았느냐!”
‘잔소리…….’
“뭐야?!”
아, 참.
세일론은 내 속마음을 들을 수 있지.
나는 웅얼웅얼 말했다.
“잘못했어요…….”
“너만큼 수호성을 고생시키는 아이는 없을 것이다.”
그가 나를 가늘게 뜬 눈으로 쳐다봤다.
“여기 오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야. 네 생명력을 깎아먹으며 오는 곳이란 말이다.”
“네…….”
“넌 특히 신성친화력이 좋은 아이이니 다신 천계의 힘을 받지 마라. 알겠느냐?”
“알겠…… 잠깐.”
“뭐?”
“저요. 여기서 과거를 봤잖아요. 그러면 다른 과거도 볼 수 있어요?”
세일론이 뜨끔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이래서 머리가 좋은 아이는.]
“나 머리가 좋다고요?”
세일론은 더더욱 당황했다.
“빌어먹을, 천계의 힘 때문에 내 마음까지 읽을 수 있군.”
나는 음흉한 얼굴로 세일론을 올려다봤다.
“저기요, 어차피 생명력을 깎아먹고 온 거라면 이득을 봐야겠지요?”
“대체 뭐가 보고 싶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