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화.
“아빠가 저주에 걸렸을 때요.”
어떻게 저주에 걸렸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아빠는 평소에도 마력으로 결계를 두르고 다니는 사람인데, 저주라니.
‘그리미에가 뭔가 술수를 쓴 거야.’
그걸 알아내야 가족들과 내 몸을 지킬 수 있었다.
‘안 그래도 그리미에의 약이 바짝 오른 상태니까.’
난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세일론을 쳐다봤다.
세일론이 흠칫, 물러섰다.
“그렇게 봐도 안 돼.”
“부탁해요…….”
양손을 모으고 눈을 반짝였다.
아빠가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못하는 필살의 포즈였다.
세일론이 으윽, 신음했다.
“안 돼! 아직 내 힘이 회복되지 않았다. 과거를 <열람>하는 건 인과율에 어긋나는 일. 나는 또 얼마쯤 네 곁을 비우게 될 것이다.”
“그런 거예요?”
“그래. 가뜩이나 사고뭉치인 녀석이 수호성까지 없으면 얼마나 위험한지 알기나 하는 것이냐?”
“세일론이 위험한 건 아니에요?”
“위험해.”
[아니, 천계에 묶여있는 정도지.]
“아하, 천계에 묶여 있는구나.”
“……빌어먹을.”
나는 세일론의 팔을 잡고, 한지혁이 아카데미 감이라 칭찬하던 서러운 연기를 시작했다.
“보여주지 않으면 불안해서 어차피 다른 위험에 스스로 들어갈걸요?”
“너 이 녀석…….”
“그러니까, 네? 네? 세일론 님…….”
‘이 짓까지 해야 하나.’
무심코 생각해버리자 세일론이 헹, 콧방귀를 뀌었다.
“내 공간에서 나를 속이려고? 어림없지.”
“이씨…….”
“이씨?”
세일론이 내 뺨을 가볍게 꼬집었다.
“입.”
“으윽.”
“고운 말을 써야지.”
“우이 아아가 가끙 헝한 마도 해야 항대써요! (우리 아빠가 가끔 험한 말도 해야 한댔어요!)”
“……!”
세일론이 흠칫, 손을 떼었다.
“너, 그걸 기억…… 아니, 그럴 리 없지. 데이몬드 아스트라가 그러더냐.”
“네.”
뭐야? 저 반응은?
나는 뺨을 문지르며 세일론을 쳐다봤다.
세일론은 생각에 잠긴 것처럼 조용했다.
‘방심하고 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 나 혼자 과거로 갈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나 정말 아빠가 저주에 걸렸을 때가 궁금한…….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어딘가에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세일론이 흠칫 소리쳤다.
“너!”
“왜, 왜요? 나 아무것도 안 했는데!”
“빌어먹을 천계의 힘! 하필 내 아이가 신성 친화율이 좋은 바람에……!”
세일론이 빛을 사그라뜨리려 노력하는 것 같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점점 우리에게까지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이거…… 혹시?’
축복의 땅의 뿌리.
그러니까 세일론이 말하는 ‘천계의 힘’ 때문에 내가 그의 공간에서 힘을 발휘한 건가.
‘그래, 이 빛에 휩싸이면 과거로 데려가 주는구나!’
나는 홀랑 빛 속으로 뛰어들었다.
세일론이 꽥, 소리쳤다.
“저, 천둥벌거숭이!”
나는 팔랑팔랑 손을 흔들었다.
“나중에 봐요.”
“빌어먹……!!”
세일론이 말을 끝내기 전에 눈부신 빛이 내 온몸을 휘감았다.
나는 눈을 꽉 감았다.
그 언젠가 과거를 보았을 때와 같은 부유감이 느껴진다.
그리고 빛이 사라진 후, 다시 눈을 떴을 땐…….
“오잉?”
—전쟁터였다.
* * *
홀로 남은 세일론이 이마를 쥐었다.
“제기랄.”
그러자 누군가 그의 어깨에 툭, 손을 올렸다.
미카엘이었다.
세일론은 빙그레 웃고 있는 그를 흘겨보았다.
“네 아이를 위해 과거로 갔다니 기쁜 것이냐, 미카엘.”
“그럴 리가. 단지 난…….”
그는 에릴로트가 사라진 자리를 보며 중얼거렸다.
“에릴로트가 ‘우리의 아이’였을 때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 기껍다.”
“…….”
허구한 날 신전을 부숴 먹고 다니던 사고뭉치.
영겁을 살아 무료한 자들에게 저만큼 생명력이 넘치는 아이는 없었다.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던 우리 모두의 아이.
고대인의 손으로 만들었던, 가장 첫 번째 생명.
세일론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무사히 다녀와라, 일로테(가장 고귀한 존재)…….”
* * *
이게 뭐야! 대체 뭐냐고!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맹수 같은 사내들이 험악한 표정으로 날 노려보고 있었다.
“넌 어디의 첩자냐.”
내게 말을 거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이런 뜻이었다.
사람들이 날 볼 수 있었다는 것…….
‘지난번엔 못 봤잖아!’
그때는 세일론의 힘으로 내 존재를 가려버렸기 때문인가.
그나마 다행인 건, 여기가 아빠의 군 막사라는 것이었다.
나를 노려보고 있는 저 남자도 바로 아빠의 부관인 엔조다.
“아이야, 나는 두 번 묻지 않는다. 어디서 온 누구이냐.”
엔조가 이렇게 무서웠구나…….
나한테는 촐랑이 아저씨 같은 느낌이라 몰랐네.
다른 군사들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뭘 그런 걸 물어보슈. 전쟁터 한복판에 어린애가 있는 게 말이 되우?”
“그래! 적의 첩자인 것이지!”
나는 펄쩍 뛰며 말했다.
“첩자 아니에요!”
엔조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하면.”
“저는, 어, 그러니까, 전…….”
그때였다.
열여덟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 말했다.
“아! 치유사인 것 아닙니까?”
“치유사?”
“왜, 대장님의 병을 치유하기 위해 아스트라에서 보내온 치유사일 수도 있잖습니까?”
“하지만 이런 아이가 무슨…….”
옳거니.
그거다!
나는 냉큼 대답했다.
“응! 치유사예요!”
“거짓말할 생각은 마라. 아스트라에 전령을 보내서 확인하면 금세 알 수 있는 일이니.”
“그럼 확인해보세요.”
전령이 도착하기 전에 나는 사라지고 없을 테니까.
‘마력량으로 보아 하루 이틀이면 되돌아갈 것 같은데.’
나는 행여나 더 의심하기 전에 말했다.
“아스트라에서 온 게 맞아요. 증거도 댈 수 있어요. 공작성의 내부나, 가신들의 조직도 같은 것도 전부……!”
“…….”
엔조는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곧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대장님의 회복이 급하니, 믿어보지. 하지만 철저히 감시할 것이다. 혹여라도 허튼 짓을 한다면 즉시 목이 달아난다는 것을 기억해라.”
“네!”
“대장님 막사로 가자.”
그런데 대장님이 누구지?
‘설마…….’
그렇게 생각하며 엔조를 따라 커다란 막사 안으로 들어갔을 때였다.
‘윽!’
뭐야 이 역한 냄새는.
나는 코를 막고 침상 쪽을 쳐다봤다.
“아빠…….”
“뭐?”
엔조가 무슨 말이냐는 듯 묻자마자, 몸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이 멍청한! 이미 인과율을 어기고 있는데, 얼마나 더 위험해질 생각이냐!]
세일론의 목소리였다.
[나는 그쪽에선 힘을 쓸 수 없어! 그쪽에도 ‘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결코 과거를 바꿔선 안 돼.]
‘으, 으응. 알겠어요.’
나는 엄청나게 뛰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며 말했다.
“우, 우리 아빠랑 비슷한 상태인 것 같아서요.”
“그래? 네 아버지는 어찌 되었느냐? 대장께선 살 수 있겠느냐? 대체 무슨 병인 것이야!”
엔조가 다급하게 캐물었다.
나는 일단 주변을 조용히 둘러보았다.
‘아빠가 저주에 걸리기 전으로 가고 싶었는데, 저주에 걸렸을 때로 와버렸네.’
아빠의 말로는 죽기 직전에 엄마가 찾아왔다고 했다.
‘저주의 근원을 찾기만 하면 돼.’
그럼 엄마가 아빠를 구해줄 거야.
나는 엔조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도울 수 있을 것 같아요.”
엔조는 크게 기뻐했다.
그가 내 두 손을 잡고 몇 번이나 고개를 숙였다.
“필요한 건 뭐든! 뭐든지 시켜라. 아니, 시키십시오!”
충성심 깊은 사람이라니까.
나는 빙그레 웃고서 말했다.
“일단 마스크로 쓸 수 있는 천과 따뜻한 물과 수건, 아, 그리고 삼색초도 있으면 가져다주세요.”
“삼색초 말입니까?”
“예.”
“얼른 구해오지요. 거기 너! 천과 따뜻한 물, 수건을 내와라!”
막사를 지키고 있는 경비병에게 명한 엔조가 뛰쳐나갔다.
경비병은 서둘러 내가 요청한 것들을 가져왔다.
나는 따뜻한 물을 수건에 적셔서 아빠의 이마를 닦아주었다.
‘아빠…….’
이렇게 괴로워했구나…….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아빠를 보니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땀으로 끈끈해진 피부를 닦았다.
얼굴과 손, 셔츠를 벗겨서 목을 닦고 있을 때였다.
탁!
아빠가 내 손을 잡았다.
“누……구냐.”
하마터면 ‘아빠!’ 하고 소리칠 뻔했다.
말을 삼키느라 입을 꾹 다물자, 아빠가 몽롱한 눈으로 말했다.
“벨트리?”
“…….”
죽어가면서 부를 정도로 소중한 사람이었구나.
나는 아빠의 손등을 잡고 말했다.
“응.”
“……벨트리.”
“으응.”
아빠가 커다란 손을 뻗어서 내 목을 잡고 가슴에 끌어당겼다.
“이제 어디도 가지 마.”
“…….”
그리고 아빠는 다시 의식을 잃었다.
‘벨트리 님이 살아계셨으면 좋았을걸.’
그녀는 아빠의 딸인 나를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괜찮다.
내가 더 많이 좋아하면 되니까.
아빠가 행복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나는 코를 훌쩍 들이켰다.
[울보로구나.]
“시끄러워요, 세일론.”
나는 손바닥으로 눈을 벅벅 닦고 일어났다.
‘저주의 근원을 찾아야 해.’
나는 아빠의 막사를 뒤졌다.
보통 저주는 매개가 있다.
심지어 아빠는 가호를 4단계로 끌어올린 강자.
‘그런 아빠가 당했을 정도의 저주라면 주변에 매개가 있어야 해.’
음, 보통은 옷에 많이들 저주를 거는데…….
나는 아빠의 짐을 마구잡이로 뒤졌다.
‘없어.’
다음은 몸.
몸에 저주인을 새겨둘 수도 있지.
나는 아빠의 양말을 홱홱, 터프하게 벗겼다.
바지도 쭉! 끌어당겼다.
‘없어.’
물잔이나 찻잔인가?
자리끼로 침상 옆에 둔 물을 확! 부어버리고 바닥을 살폈다.
‘없어, 없어!’
대체 어떻게 저주를 건 거지?
저주엔 나도 일가견이 있었다.
첫 번째 삶에서 무능력자였던 탓에 마법을 배웠기 때문이었다.
공격형 마법은 방어 가호에 쉽게 막히기 때문에 저주를 중점적으로 공부했다.
‘그래서 달리아가 저주에 당했을 때 다 내가 한 짓이라고 했지…….’
생각하니까 열받아서 으득, 이를 갈았다.
“어?”
피부에 저주의 인은 없다.
옷에도, 물건에도.
그렇다면 혹시…….
나는 아빠의 턱을 콱! 잡아서 입을 벌렸다.
“아으…….”
아빠는 혼수상태인데도 아픈지 신음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입 안을 유심히 살폈다.
‘어두워서 안 보여!’
내가 열심히 입 안을 보고 있던 찰나였다.
“뭐 하는 겁니까……?”
엔조의 목소리였다.
돌아보니, 삼색초를 들고 온 엔조가 당황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입 안에 저주의 흔적이 있는지 보고 있어요. 몸엔 없어서.”
“아아.”
“그런데 어두워서 안 보여요.”
“잠시 기다리십시오.”
엔조가 얼른 밖으로 나가서 무언가를 가져왔다.
랜턴용으로 쓰이는 마도구였다.
거대하긴 하지만 마도구인 만큼 빛이 강해서 쓸모 있어 보였다.
“비출까요?”
“응!”
아빠는 눈이 부신 지 오만상을 찌푸렸지만, 나와 엔조는 강경했다.
“입! 입!”
“더 벌려! 더!”
그리고 우리는 결국 찾아내고 말했다.
“어금니에…….”
“예, 있군요…….”
저주의 인이 어금니에 새겨져 있었다.
엔조가 미간을 좁혔다.
“데이몬드 님처럼 강한 분이 이런 저주에 당하시다니…… 대체 어떻게 된 걸까요.”
“강한 사람이라 어금니를 매개로 쓴 거예요.”
이건 과거에 흔히 쓰이던 저주다.
이성을 이용해서.
‘입을 맞출 때 쉽게 저주를 걸 수 있지.’
아무리 강자라도 입 맞출 때, 입에까지 결계를 발동하지 않을 테니까.
“문란해.”
나는 뚱한 얼굴로 아빠를 쳐다봤다.
“예?”
“이상한 여자랑 입을 맞춰서 저주에 걸린 거예요.”
“그럴 리가요!”
엔조가 펄쩍 뛰었다.
“제가 알기로 데이몬드 님의 입술은 순결합니다……!”
“이상하다. 입맞춤 없이 할 수 있는 저주가 아닌데.”
‘대체 어떻게 된 거지?’
게다가 아주 오래전에 당한 저주다.
적어도 3년, 아니 4년은 된…….
그런데 그때였다.
막사 안으로 병사가 뛰어 들어왔다.
“웬 여자가 병영을 찾아왔소!”
“하면 잡아두면 될 것이 아니냐. 바쁘니, 일단 간이 옥사에—”
“본인이 대장을 살릴 수 있다고 하오!”
“……뭐?”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직감했다.
‘엄마야.’
엄마가 온 거야.
엔조는 손을 휘휘 저었다.
“헛소리하지 말고 옥사에 가둬놔. 쫓아내거나.”
그러자마자 이상한 일이 생겼다.
내 몸이 뿌옇게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엄마가 아빠랑 만나지 못해서 내가 태어날 수 없게 된 거야.’
나는 얼른 엔조에게 말했다.
“들여요!”
“예?”
“그 분이요! 제 치유사 동료예요!”
“아…… 하지만…….”
“저주의 매개도 제가 찾아냈잖아요. 정 이상한 일이 생길 것 같으면 저 어금니를 뽑아버려요!”
사실 어금니를 뽑는다고 해서 다 되는 건 아니다.
워낙 오래된 저주라 이미 온 몸에 퍼져 있으니까.
‘하지만 엔조는 그걸 모르겠지.’
역시나 엔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병사에게 말했다.
“들여라.”
“그리하지, 아… 그리고 전투 신호가 올랐소.”
“뭐? 왜 그걸 지금 말해! 이 멍청한……!”
“대장이 죽을지 살지도 모르는 판에 전투를 할 생각이오?”
“카멕 산을 넘어오면 진지까지 금방이다. 대장이 회복하시기 전에 우리 군이 몰살 당할 수 있어!”
엔조가 후다닥 뛰쳐나갔다.
나도 눈치를 보다가 막사 뒤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살짝 막사를 올려서 안을 확인했다.
얼마쯤 후.
또각, 또각, 발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꼴 좋구나. 데이몬드.”
검은 머리가 물결 같이 일렁이는 웨이브를 가진 여자가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