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화.
응접실에 휘잉, 바람이 불었다.
아빠를 비롯한 사내들이 말을 잃고 날 쳐다봤다.
“뭐라고?”
그전까지만 해도 조용하던 데본님이 내게 물었다.
카인로드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레오 탈로프도 어색하게 웃었고.
나는 쾌활하게 말했다.
“그러니까요. 제가 벨트리 님의 딸일 수도 있다고요.”
데본 님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네 친모가 누구인지 궁금한 마음은 이해한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야.”
“그래, 데이몬드가 시체와 그 짓을 한 것도 아— 웁, 웁!”
데본 님과 레오 탈로프가 동시에 카인로드의 입을 틀어막았다.
아빠도 살벌한 표정으로 카인로드를 노려봤다.
‘으이구.’
나는 카인로드를 한심한 눈으로 보다가 아빠를 쳐다봤다.
“아빠가 사경을 헤매던 날이요. 그러니까 엄마가 저를 가진 날.”
“그래.”
“그날 찾아온 사람이 벨트리 님일 수도 있어요.”
“에릴로트, 벨트리는…….”
“시체가 없어요.”
단호하게 말하자,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이때까지 허허실실 웃던 레오 탈로프까지도 딱딱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물론 카인로드, 데본 님, 아빠까지 마찬가지로.
“한을 시켜서 확인을 마쳤어요. 그분 무덤엔 아무것도 없어요.”
“도굴꾼이 들었을 수도—!”
데본 님이 다급하게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평민의 무덤에요? 무엇을 훔치려고요?”
“그건…….”
“아빠, 벨트리 님의 장례를 주관한 장의사를 기억하세요?”
그러자 아빠가 미간을 좁히며 대답했다.
“아스트라 공작성에 장의사를 구해달라고 말했…… 그리미에.”
역시.
‘그리미에가 장례를 돕겠다고 나섰구만.’
그때 아빠와 아카데미 동창들은 다 혼이 나갔을 터.
벨라를 비롯한 벨트리 님의 가족은 그녀에게 관심이 없었다.
해서, 장례를 주관한 사람은 따로 있을 것으로 추측했지.
아빠가 다급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벨트리의 심장은 확실히 멈췄었어. 전투에서 내가 확인했으니—”
“가사 상태로 보이는 마법이라면?”
이 말은 카인로드가 한 것이었다.
아빠와 사내들이 일시에 카인로드를 쳐다봤다.
“벨트리는 마법에 능통했으니 가능할 수도 있어.”
레오 탈로프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 정말 벨트리가 살아있고, 이 애가 그 녀석의 딸이란 말이냐?”
“확인해볼 가치는 있지. 안 그래, 데본?”
다시 모두의 시선은 데본 님에게 쏠렸다.
데본 님은 한참 동안 침묵했다. 그러나 이윽고…….
“오늘 사람을 보내 벨트리의 치아를 전해주마. 카인로드, 확인엔 얼마나 걸리지?”
“나흘. 나흘 안에 답을 주지.”
응접실은 다시 고요해졌다.
죽은 줄 알았던 친구가 살아있을지 모르니 그럴 만도 했다.
그리고 아빠는…….
‘표정이 좋지 않네.’
물론 벨트리 님이 살아있다는 안도감도 들 것이다.
하지만 그런 짓을 해서라도 제게서 멀어지려 했다는 것도 깨달았겠지.
“아빠.”
나는 아빠의 손등에 손을 포갰다.
“…….”
“만약에요. 만약에 진짜로 제가 벨트리 님의 딸이라면요.”
“…….”
“아빠가 위험해지자 만나러 와준 거예요.”
난 아빠를 보며 생긋 미소 지었다.
“멀고 먼 길을 걸어서, 자신의 사정을 돌보지 않고, 오직 아빠의 안위를 위해서. 그렇지요?”
“……하지만.”
나는 아빠의 목을 끌어안았다.
“설령 벨트리 님이 아빠를 사랑하지 않았더라도 뭐 어때요? 내가 아빠를 이 세상을 다 버릴 만큼 사랑하는데.”
아빠의 손이 내 등에 닿았다.
손끝의 떨림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아빠는 내 목에 얼굴을 묻고 속삭였다.
“그래, 맞아.”
아빠의 숨소리가 말하는 것만 같았다.
나도 그렇다고.
나도 그렇게 너를 사랑하노라고.
우리 부녀가 서로의 세계에 빠져 있을 때, 카인로드가 투덜거렸다.
“딸 없는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 그만 떨어져! 눈꼴시니까!”
레오 탈로프도 픽 웃었다.
“아아, 제기랄. 자식을 봐둘 것을.”
그리고 아빠는 친구들을 향해 아주 오만하게 웃었다.
“이런 딸을 쉽게 볼 수 있는 줄 아냐.”
데본 님이 짓씹듯 말했다.
“재수 없는 놈.”
나는 히히 웃어버렸다.
* * *
오후.
난 이제나저제나 데본 님이 보낼, 벨트리 님의 치아를 기다렸다.
창가에서 서성이고 있는데, 하녀 베티가 반가운 소식을 전해왔다.
“로체 후작저의 사람이 물건을 가져왔습니다, 아가씨.”
“그래? 어디 있어?”
“중정에 있습니다.”
나는 얼른 중정으로 향했다.
계단을 내려가 보니 갈색 재킷을 입은 남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 그 사람이다!’
첫 번째 삶에서 데본 님과 함께 아스트라 공작성에 왔던 남자.
그 때도 데본 님이 아주 신뢰하는 사람인 듯했었다.
‘그때보다 한참 젊긴 해도 한 눈에 알아보겠네.’
소탈하고 다정해 보이기 때문이었다.
어른들의 이야기를 듣고 고개 숙이고 있는 내게 체리 맛이 나는 사탕을 줬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스트라 백작 영애. 저는 로체 후작저의 헤르만입니다.”
“에릴로트 아스트라예요. 데본 님께서 물건을 전하셨나요?”
“예, 꼭 영애나 백작님께 전해야 하노라 당부하셨지요.”
헤르만이 부드럽게 웃으며 내게 상자를 건넸다.
나는 살짝 상자를 열어보았다.
붉은 천 위에 작은 병이 있었는데, 그 안에 치아가 있었다.
‘좋아, 됐다!’
난 우리 하인들에게 말했다.
“손님을 응접해라. 백작저의 귀중한 손님이니 실수가 없어야 할 것이다.”
“예, 아가씨.”
“예, 아가씨.”
“예, 아가씨.”
하인들이 일시에 고개를 숙였다.
헤르만은 얼떨떨한 얼굴로 하인들의 환대를 받았다.
그럴 만도 한 게, 고용인이 이만한 대접을 받을 일이 별로 없었을 것이다.
나는 헤르만에게 인사하고 얼른 아빠의 서재로 향했다.
서재 앞은 우리 저택의 2등 집사가 지키고 있었다.
“아빠는?”
“통신 중이십니다.”
“그럼 나중에 와야겠네…….”
“아가씨가 오시면 어느 때라도 들이라 하명하셨습니다.”
“그래?”
나는 살짝 문을 열었다.
그리고 입을 “아빠.” 하고 벙긋하자, 통신하던 아빠가 고개를 끄덕였다.
“해서 그리미에가 파견 가는 곳이 어디냐.”
아빠의 말에 소파로 향하던 나는 귀를 쫑긋했다.
‘파견? 공작가의 장남이 파견이라고?’
난 히죽 웃었다.
‘유배로구만.’
할아버지가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는 증거였다.
게다가 황제가 그리미에를 벌하기 전에 멀리 치워놓을 속셈이기도 할 것이다.
공작가의 장남이 황명으로 감옥에라도 가면 대망신이니까.
[이타카르의 땅입니다.]
아빠가 픽 웃었다.
“그리미에가 단단히 눈 밖에 났군.”
[예. 아무리 유배지라지만 장남이 갈 곳은 아니지요. 풀 한 포기 안 나는 사막, 강 하나를 놓고 1년 내내 전투가 일어나는 곳이니까요.]
“늙은이가 웬일로 마음에 드는 결정을…….”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아빠를 빤히 쳐다봤다.
내 시선을 느낀 아빠가 움찔하더니 얼른 말을 바꾸었다.
“아버님의 결정에 깊게 동의한다.”
‘좋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빠는 할아버지에게 예의를 차리는 법이 없어서, 상대방이 매우 당황한 것 같았다.
“그리미에는 언제 출발하지?”
[내일 오전입니다.]
“배웅은?”
[공작님께서 그 어떤 자도 배웅하지 말라 명하셨습니다.]
“꼴 좋군. 그래, 앞으로도 그리미에의 동향을 철저히 살펴라.”
[예.]
통신이 종료되었다.
나는 아빠 쪽으로 쪼르르 달려가서 책상에 턱을 괴고 물었다.
“그리미에가 쫓겨난대요?”
“그래. 아주 험한 곳으로. 향후 몇 년은 얼굴 볼 일이 없을 것이다.”
“신난다—!!”
내가 양팔을 번쩍 들고 환호하자, 아빠가 쿡쿡 웃었다.
“한데 무슨 일이냐.”
“벨트리 님의 치아가 도착했어요. 한에게 말해서 카인로드 숙부에게 전달할게요.”
아빠가 상자를 잠깐 매만지곤, 나를 쳐다봤다.
“에릴로트, 네가 벨트리의 자식이 아니라도 난…….”
“응! 그래도 난 아빠의 딸이에요.”
“그래.”
아빠가 나를 향해 웃었다.
커다란 창에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은 따스하고, 방 안의 공기는 선선했다.
좋은 날이었다.
* * *
그 시각, 로슈펭 제 4저택.
벨라는 통신석을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대체 이 서류는 뭐예요!”
[남의 자식을 내 자식으로 둔갑시켜 들어온 파렴치한을 내 저택에서 쫓아내겠다는 서류지.]
통신석에서 남편인 셀토 로슈펭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더러 대체 어딜 가라는 거예요. 내가 친정이 있길 해요, 갈 데가 있길 해요!”
[그야 내가 알 바 아니지.]
“사재라도 돌려줘야 할 거 아녜요!”
[헛소리! 그건 내 어머님이 내 아내가 될 사람을 위해 남겨놓은 재산이야. 그 돈으로 지금까지 네가 사치한 것만 생각하면 신물이 올라와.]
“정말 이러기예요? 아스트라 공작에게 받은 돈은 지참금으로 전부 썼고, 수중에 한 푼도 없는 걸 알잖아요!”
[말했잖아. 알 바 아니라고.]
“당신이 블라썸을 생각하면 어떻게 이럴 수 있어요? 그래도 저 아이, 10년이 넘게 당신 딸로 키워온……!”
[사흘 주지. 사흘 뒤에도 저택에 남아있다면 하인들에게 끌려 나가게 될 거야.]
그렇게 뚝, 통신이 끊겼다.
벨라는 신경질적으로 비명을 내지르며, 통신석을 집어던졌다.
‘치졸한 남자 같으니……!’
퇴거 명령서까지 왔으니, 이제 정말 여기서 버틸 수 없었다.
벨라가 하녀에게 소리쳤다.
“카인로드에게는 소식이 없느냐?!”
“예, 마님…….”
“레오 탈로프는!”
“편지조차 받지 않으셨습니다…….”
벨라는 우물쭈물 말하는 하녀에게 찢어진 서류 조각을 내던졌다.
“무능한 것들—!!”
제일 믿을만한 구석이던 데본 로체도 자신을 만나주지 않고 있었다.
‘데이몬드 오라버니만 사로잡았다면 이깟 저택에서 얼마든지 나갈 수 있었는데!’
이게 다 그 맹랑한 데이몬드의 딸 때문이었다.
에릴로트 아스트라, 그 재수 없는 계집애만 아니었더라면…….
그때, 방문이 벌컥 열리고 블라썸이 들어왔다.
“어머니! 드레스를 사려고 했는데, 상단에서 제 인장을 받아주지 않아요. 돈을 가져오라지 뭐예요?!”
블라썸이 씩씩대며 “미친 거 아냐?”하고 소리쳤다.
“이제 네가 네 아버지의 딸이 아니란 게 소문이 난 게지…….”
“뭐, 뭐라고요? 그럼 이제 어떻게 해요? 아직 원화가 되지도 못했는데……!”
“…….”
벨라가 한 손으로 이마를 쥐었다.
모녀에겐 돈 한 푼이 없었다.
블라썸의 출생을 알고 잔뜩 분노한 시아버지가 사재는 물론, 물건까지 압수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하냐니까요, 엄마! 이제 다른 영애들이 저를 얼마나 무시하겠……!”
“시끄러워—!! 생각 중이지 않니!”
차라리 벨트리가 살아있었다면 네 남자 모두 이렇게 무시하지 않았을 텐데.
‘아니지, 그 계집애가 우쭐해하는 꼴을 다시 어떻게 두고 봐.’
애라도 두고 갔으면, 그 애 핑계를 대서 네 남자 중 누구에게 지원을 받았을 수도…….
벨라가 흠칫, 블라썸을 쳐다보았다.
블라썸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제 엄마를 쳐다봤다.
“왜, 왜요?”
“너는 키가 크니 네 나이보다 두어살 많다고 해도 믿어지겠지?”
“네?”
“네가 12년 전에 태어난 것을 아는 건 산파뿐이고…….”
만약 딸을 벨트리의 자식으로 둔갑시킨다면?
‘그 계집애는 전장에서 죽기 직전에 여덟 달 가까이 어딘가 다녀온 적이 있어.’
그 시기에 자신은 데이몬드에게 접근하기 위해 기를 썼기에, 기억하고 있다.
벨트리는 죽었다.
지금 와서는 블라썸이 그 계집애의 친자인지 확인할 길이 없다.
‘내가 블라썸을 낳는 건 그 늙은 산파 하나만 보았어. 게다가 이 애가 남편의 자식이 아니란 건 이미 다 소문이 났겠지.’
블라썸을 벨트리의 딸로 둔갑시킨다면, 자신이 로슈펭 가를 기만했다는 말조차 잠재울 수 있었다.
벨라의 눈이 욕망으로 타올랐다.
“벨트리의 딸이 되어야겠다, 블라썸.”
“네?!”
“그러면 데이몬드 아스트라를 비롯해 데본, 레오, 카인로드까지 모두 네가 안타까워 어찌할 바를 모를 게야.”
“하, 하지만……!”
“생각해보려무나. 첫사랑의 딸이 실수로 낳은 더러운 피보다 못할까?”
블라썸의 눈이 커다래졌다.
벨라는 요요히 웃었다.
“벨트리의 딸만 될 수 있다면, 네 사람 모두 그 재수 없는 계집애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다.”
“정말요? 하지만 산파가 또 어머니가 저를 낳았다는 것을 말한다면…….”
“산파야 처리하면 그만이지. 어미를 믿으려무나. 내가 널 아스트라 영애로 만들어줄 테니.”
모녀는 서로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블라썸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잘난 척하는 것도 이제 끝이야, 에릴로트 아스트라.’
* * *
며칠 후.
우리 저택에 레오 탈로프와 데본 님이 찾아오셨다.
오늘이 바로 카인로드가 친자 검사 결과를 알려주기로 한 바로 그 날이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한데 둘러앉아 카인로드를 기다렸다.
다들 초조한 얼굴이었다.
특히 아빠는 어딘가 긴장이 되어 보이기도 했다.
“카인로드 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한지혁이 소식을 알려왔다.
그리고 얼마쯤 후, 문이 열리고 굳은 얼굴의 카인로드가 도착했다.
데본 님이 벌떡 일어나 물었다.
“결과는?”
카인로드는 잠시 나를 빤히 쳐다보곤, 데본 님에게 양피지를 내밀었다.
아빠와 레오 탈로프도 자리에서 일어나 결과지를 확인했다.
“…….”
“하.”
네 사람은 동시에 멀뚱멀뚱 앉아있는 나를 쳐다봤다.
“너—”
레오 탈로프가 그렇게 말한 순간이었다.
다급한 노크 소리와 함께 집사가 들어왔다.
“벨라 로슈펭 부인과 블라썸 로슈펭 양이 찾아오셨습니다. 여기 세 분께서 아스트라 제 2저택에 계신 것을 알고 계시다며, 급히 뵈어야겠노라 성화입니다.”
“무슨 일이기에.”
“다급한 사안이니 직접 말씀드리겠노라 하십니다.”
아빠와 나, 그리고 아빠의 동창들은 미간을 좁히고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그리고 다 함께 중정으로 나섰다.
‘뭐야, 저건?’
벨라와 블라썸은 어디 여행이라도 가는 사람 같았다.
바닥에 그들의 짐이 한가득하였으니까.
아빠가 미간을 좁혔다.
“무례에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벨라는 숨을 깊게 들이켜며 아빠와 세 남자를 쳐다봤다.
“알고 있어요. 벌하셔도 할 말 없는 일이란 것도요.”
“한데.”
“로슈펭 저에서 나왔습니다. 남편이…… 이 아이가 친자가 아니란 걸 알았거든요.”
카인로드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젠 별……. 왜 아스트라 제 2저택에 왔지? 설마 받아주리라 생각한 거야?”
벨라는 눈물을 글썽였다.
“네 분께 부탁이 있어요. 이 아이라도 받아주세요.”
카인로드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말했다.
“우리가 왜.”
“이 아이, 언니의 핏줄이니까요.”
“……뭐?”
그러자 블라썸이 난데없이 펑펑 울며 말했다.
“제가 벨트리 님을 그리워했던 이유…… 그건 제 친모가 벨트리 님이었기 때문이에요……!”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