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화.
“어찌된 일이오.”
“즉시 확인하겠습니다.”
황제는 매서운 표정으로 오셀리아 황비를 노려보았다.
“어미나 자식이나 마음에 드는 구석 하나가 없으니.”
“폐하……!”
황비가 흠칫, 황제를 쳐다봤다.
황제는 인상을 찌푸리며 냅킨을 탕! 소리나게 내려놓았다.
“식사는 이만 파하지.”
황제가 자리를 떠나자, 시종들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자리에 남은 황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런 황비를 본 황태후가 입가를 톡톡 닦으며 중얼거렸다.
“욕심이 과했네.”
“서운합니다.”
“무엇이?”
“자세한 내막을 모르시면서 어찌 말씀을 그리 쉽게 하십니까.”
황태후는 입술을 꽉 깨문 황비를 흘낏 쳐다보았다.
“살바토레와 그 애를 짝지어주기 위해 무리수를 두었다는 것을 모를 성싶은가.”
“……!”
“아르칼 장군과 비첸 장군은 왜 만났나.”
“제 뒷조사를 하십니까!”
“굳이 뒷조사까지 할 필요는 없지. 늙은이라고 해서 소문을 물어다 주는 자들이 없진 않거든.”
오셀리아 황비가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황태후가 자리에서 일어나 황비를 바라보았다.
“황군에 자네 손이 닿은 것을 알면 폐하께서 어찌 나오실는지.”
“……말씀드리실 겁니까?”
“당분간은 쉬시게. 내궁의 일을 내가 맡지.”
“모후……!”
황태후가 싸늘한 표정으로 황비를 바라보았다.
“자네가 천지 분간을 제대로 할 때까지 황후의 인장은 내가 맡고 있겠네.”
그 말을 끝으로 황태후까지 자리를 떠났다.
오셀리아 황비가 신경질적으로 식기를 내던졌다.
곁에 앉아있던 살바토레가 쯧, 혀를 찼다.
“꼴이 우습게 되었습니다.”
“너까지 어미를 힐난하는 게냐! 난 모두 너를 위해……!”
“저를 위해 겨우 황후궁에서 앗아온 인장을 할마마마께 빼앗기셨군요.”
“살바토레─!”
“앞으로 진정 저를 위하신다면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오셀리아 황비가 입술을 꽉 짓씹었다.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었다.
* * *
며칠 후, 황태후궁.
황태후는 내가 응접실에 들어오자마자 몸을 일으켰다.
“그래, 아가가 와주었구나.”
“황태후 폐하를 뵙습니다.”
“우리 사이에 그런 격식은 되었다. 앉으려무나. 아가를 위해 내 궁의 요리사들이 솜씨를 발휘했단다.”
황태후의 눈에선 꿀이 뚝뚝 흘렀다.
어찌나 나를 살갑게 대하는지, 황태후 궁의 시녀들까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시녀들도 나를 엄청나게 대우하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석류즙을 맛보셔요, 원화.”
“올해 가장 잘 익은 석류로 장인이 한 알 한 알 즙을 낸 것인데……!”
“레몬 파이는 어떠신가요?”
“원화께서 렌시 제과점의 초콜릿을 좋아한다는 말씀을 듣고 시녀장님께서 직접 가서 구매해오신……!”
시녀들은 나를 둘러싸고 어화둥둥이었다.
눈에서 호감 광선이 마구마구 흘러나온다.
‘으윽, 좀 부담스러운데.’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시녀장이 챙겨준 레몬파이 접시를 들었다.
“황태후 궁의 간식은 늘 맛이 좋아서 오늘도 엄청 기대하고 있었어요!”
“어머나, 기쁘네요.”
시녀장이 우후후 웃었다.
시녀들이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초콜릿도, 레몬파이도 모두 시녀장께서 직접 챙기셨어요. 업무가 과중한 중에도 말이지요.”
“업무가 과중하신가요?”
“황태후 폐하께서 황후의 인장을 맡게 되시어, 황태후 궁의 모두가 눈코 뜰 새 없답니다.”
바빠죽겠다면서도 시녀들은 오호호호홋! 웃고 있었다.
‘아하, 황태후 궁의 권위가 엄청나졌다고 돌려 말하는 거구만.’
그러고 보니까 며칠 전부터 오셀리아 황비궁의 시녀들이 기도 못 폈다.
원래는 오셀리아 황비가 아픈 황후 대신 황후의 업무를 보고 있어서, 매우 콧대 높았는데.
‘나한텐 잘된 일이지.’
황비보다 황태후가 득세해야 귀찮은 일이 적거든.
나는 활짝 웃었다.
“감축드립니다, 폐하!”
“모두 아가 덕이지. 오셀리아 황비가 아르칼 장군, 비첸 장군과 접촉한 것을 언질 준 덕에 일이 쉬웠단다.”
나는 속으로 히죽 웃었다.
그랬다.
난 오셀리아 황비가 황군과 접촉해서 일을 꾸몄다는 걸, 황태후에게 홀라당 일러바쳤다.
“저야 조금 속상하면 될 일이지만, 황비님이 염려돼요…….”
“황비가?”
“네. 황제 폐하께서 아시면 얼마나 화를 내실까요?”
즉, 황비가 황군과 접촉한 일은 그녀의 약점이니 이용해 먹으라는 뜻이었다.
황태후는 예상대로 아주 잘해줬고.
“한데 말이다, 얘야.”
“예, 폐하.”
“백기사들이 황비를 보는 눈이 몹시 싸늘하더구나. 어찌 된 일이지?”
“그게…… 그것도 저 때문인 것 같아요…….”
나는 속상한 체 웅얼거렸다.
“원화 자리에서 쫓겨나면 동경하는 백기사님들께 인사드릴 기회가 없잖아요?”
“그랬을 테지.”
“해서 백기사님들께 편지와 작은 선물을 준비해서 갔어요.”
“그래?”
“네. 그리고 ‘앞으로 뵐 일이 없겠지만, 언제나처럼 그 자리에서 빛나주시라’ 말씀드렸지요.”
“그러니까 백기사들이 무슨 일인지 물었겠구나.”
“네. 황비님께서 장군들을 들쑤신 것을 눈치채신 듯해요.”
황태후가 웃음을 터뜨렸다.
어찌나 유쾌한지, 체통도 잊고 의자 손잡이까지 탕, 탕! 두드리면서.
시녀들도 키득키득 웃었다.
시녀장이 말했다.
“잘된 일이군요. 오셀리아 궁이 유일한 황자의 모후라며 얼마나 으스댔습니까?”
“못 하는 말이 없구나.”
황태후는 시녀장에게 핀잔을 주는 척했지만, 입가엔 기분 좋은 미소가 매달려 있었다.
황태후가 내 뺨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늘 본궁에게 기쁨을 주는 네게 어찌 보답해야 할까.”
“보답은요!”
나는 펄쩍 뛰는 척, 황태후의 손에 가볍게 뺨을 문질렀다.
“폐하의 기쁨이 제 기쁨인걸요. 저는 폐하의 편이니까요!”
황태후의 생일에 라곤이 상공을 날게 한 일.
황후의 인장을 빼앗는 데에 한몫한 일 등.
나는 정말로 황태후가 세상 최고인 것처럼 굴었다.
황제와 황비에게 미움을 사는 일도 마다하지 않은 채.
‘물론 황제는 아스트라를 무너뜨린 놈이고, 황비는 거기 일조한 놈이니까.’
유감이 있어서 ‘당해봐라’ 하는 마음에 한 일이지만, 황태후 입장에선 내가 엄청나게 귀여울 만도 했다.
황태후가 내게 손을 뻗었다.
내가 냉큼 그 손을 잡고 일어나니, 그녀는 나를 창가로 데려갔다.
황도가 한눈에 다 보인다.
“아가야.”
“예, 폐하.”
“젊은 날 선황제의 후비로 입궁하며 나는 이 나라를 내 손에 넣는 상상을 했단다.”
“……네?”
나는 깜짝 놀랐다.
‘황제가 버젓이 있는데 그런 말을 한다고?’
황태후가 다정히 웃으며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만일 내 상상이 이루어지는 날이 온다면 말이다.”
“……네.”
“아가가 아닌 그 누구도 내 옆자리를 차지하지 못할 것이다.”
“……!!”
시녀들이 일시에 무릎을 굽혔다.
황태후가 말했다.
“약속하마.”
“…….”
“새로운 암막의 대제가 탄생하는 날, 너는 나와 함께 모든 영광과 권위를 누릴 것이다.”
“폐하!”
“하여 네 충성에 보답하리라.”
나는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황태후는 흡족한 얼굴로 또 한 번 내 손을 끌어당겼다.
내 손끝에 가볍게 입 맞춘 황태후의 눈이 열망으로 일렁였다.
“가장 위대한 칼소이에께 천 년의 광영을.”
황제에게만 하는 인사말이었다.
시녀들이 나를 따라 고개를 숙였다.
“가장 위대한 칼소이에께 천 년의 광영을.”
“천년의 광영을.”
나는 고개 숙인 채 음험하게 웃었다.
‘드디어 황태후가 내 손에 들어왔어.’
황제와 맞설 최고의 카드!
이제 남은 건 황제를 폐위하고, 그녀의 힘을 빌려 알렉시스를 등극시키는 일이다.
‘고마워, 오셀리아.’
네가 멍청한 짓을 벌여서 황후의 인장을 빼앗겨준 덕이야.
* * *
서군 감사는 일주일 만에 끝이 났다.
물론 결론은 무혐의.
내가 횡령하지 않았다는 결과장을 들고 온 건, 아르칼 장군과 비첸 장군이었다.
집무실에서 짐을 싸던 나는 그들을 힐끗 쳐다봤다.
아르칼 장군이 커흠! 헛기침했다.
“이리되었으니, 이제 업무에 복귀하게.”
“왜요?”
“횡령이 아니라 결론이 나지 않았나!”
“그거랑 짐 싸는 게 무슨 관계가 있는데요?”
두 사람이 당황해서 어버버거렸다.
“아니, 혐의가 벗겨졌는데도 사직하겠단 말인가?!”
“네!”
비첸 장군이 버럭 소리쳤다.
“그만큼 난리를 쳤으면 이제 자네가 억울한 것은 모두가 알았을 게야!”
“장군님들은 남에게 보이려고 사직하세요?”
“뭐, 뭐?”
“저는 그저 깨달았을 뿐이에요. 황군의 발전을 위해 몸이 부서져라 열심히 해도 남는 건 오욕뿐이란 것을요.”
나는 짐 상자에 마지막으로 시계를 던져넣었다.
그리고 아스트라의 고용인에게 말했다.
“챙겨. 가자.”
“예, 아가씨!”
고용인이 싱글벙글한 얼굴로 짐 상자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내가 막 책상을 벗어나려던 때였다.
“잠깐, 잠깐!”
비첸 장군이 날 막아섰다.
“서군의 전원이 퇴역신청서를 쓰고 자리를 이탈했어! 자네가 이리 떠나면 모두 벌을 피하지 못하네!”
“그런데요?”
“원화는 소년병들의 어미야! 어미가 자식을 두고 이리 떠나는 경우가 있겠나?!”
“저도 그런 줄로 알아서 최선을 다했지만, 황비님조차 명예직이라던 걸요? 그래서 그냥 명예를 내려놓으려고요.”
“이렇게 책임감이 없는 사람이었나!”
비첸 장군이 버럭 소리쳤다.
표정이 오만했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자존심이 상해서 그만두겠어?’ 하는 얼굴.
그러나 나는 픽 웃었다.
‘웃기고들 있네.’
“네. 별로 책임감 같은 거 없어요, 저.”
그러자 두 장군이 또다시 당황했다.
“자네 아비도 아는가? 자식을 이렇게 책임감 없이 키웠다는 것을?”
어쭈, 부모님을 끌어들여?
‘그냥 속 뒤집는 거로 끝내려고 했는데.’
지구, 이세계를 막론하고 ‘느이 부모가 그렇게 키웠어?’ 라는 말에 태연한 사람은 없다.
나는 생긋 웃었다.
“장군들, 생각해보셔요?”
“뭐?”
“무슨…….”
“저는 아스트라 공작가의 아이랍니다. 그것도 3세 중 서열 1위.”
“……!”
“……!”
“아시지요? 아스트라는 재산도 서열에 따라 차등 지급되는 거요. 그러니까 이미 전 돈방석에 앉아있답니다.”
두 장군이 마른침을 삼켰다.
“게다가 저희 아버진 후계 서열 1위라는 데이몬드 아스트라예요. 한 당파의 지도자시고요.”
두 장군의 얼굴이 샛노래졌다.
“또, 저는 이시론 공작가의 삼남과 혼약했지요. 장남은 쫓겨났고, 차남은 제발 가문을 물려주지 말라고 애원한다는 그 이시론 공작가요.”
두 장군이 흠칫했다.
“이미 돈, 권력, 지위까지 모두 있는 제게 꼭 책임감까지 있어야 할까요?”
“아, 아무리 그래도…….”
“혀, 협박하는 것이냐!”
난 “어머!” 하며 손끝으로 입술을 가볍게 막았다.
“설마 제가 협박을 이렇게 성의 없이 할까 봐요?”
“뭐, 뭣?”
“제가 만약 협박한다면…….”
나는 비첸 장군에게 바짝 다가서서 말했다.
“이 문을 나가면 이제 저는 황군이 아니니 장군의 아랫사람이 아닙니다.”
“너─!”
“일단 할아버지께 가서 울어볼까 해요. 비첸 장군님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
“시아버님께 가는 것도 좋겠지요. 저를 아주 귀여워하시거든요.”
“너, 너, 이, 이렇게 협박하고도 무사할 줄 알면……!”
“아! 그럴 것도 없겠네요. 저는 아직 아이라 가호를 조절하는 게 어렵거든요. 용이 제 분노에 감화하여 비첸 가의 상공에 나타날지도 모르겠어요.”
비첸 장군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하얘졌다.
“협박은 이렇게 하는 거지. 안 그래?”
“워, 원화…….”
“계속 길을 막으시네요?”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하자, 비첸 장군이 흠칫 몸을 물렸다.
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다시 문으로 향했다.
문고리를 잡으려던 난 “아.” 하고 덜덜 떨고 있는 두 사람을 쳐다봤다.
“아, 이시론 공작님의 전언인데요. 비첸 장군님 돈 갚으시래요.”
“뭐?!”
“또 전하신 말씀이 있어요. ‘내 가문에 빚을 져놓고, 내 며느리를 핍박한 자신감을 높이 사겠다.’ 고요.”
비첸 장군이 비틀거리며 회의 테이블을 잡았다.
나는 아르칼 장군에게 슬쩍 시선을 돌렸다.
아르칼 장군이 펄쩍 뛰었다.
“나, 난 저 자만큼 핍박한 적이 없지?!”
“그렇긴 한데요. 황태후 폐하께서도 장군께 한 마디 전하셨어요.”
“화, 황태후 폐하?”
“네. ‘지켜보고 있겠다’ 고요.”
“그, 그게 무슨…….”
마침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자 황태후의 시녀들이 내게 고개를 숙였다.
“가시는 길을 살펴 드리라는 황태후 폐하의 명을 받고 왔습니다.”
“괜찮은데…… 가뜩이나 바쁘신 와중에 귀찮게 되어서 어쩌죠?”
“아가를 살피는 게 기쁨이라는 말씀을 전하셨답니다. 어서 가시죠.”
시녀들이 싱글벙글 웃으며 과하게 나를 대접했다.
아르칼 장군이 허둥지둥 내게 다가왔다.
“나라고 서군 원화의 기특한 마음을 몰랐겠나. 나는 그저 비첸 장군에게 협박당해서……!”
“그거 안 되셨네요.”
“마차까지 동행하며 자세한 이야기를 하게 해주게. 아, 아니, 해주십시오. 영애.”
“흐음, 어쩔까.”
“이,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뭐, 그럼 잠시만…….”
아르칼 장군의 얼굴이 화색이 돌았다.
비첸 장군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아르칼 장군으로부터 별별 얘기를 다 들었다.
황군의 알력 싸움.
대장군의 퇴직을 앞두고, 새로운 대장군이 되기 위해 비첸 장군의 마음이 급했던 일 등등.
아르칼 장군은 내게 싹싹 빌었다.
“어르신들껜 부디 말씀을 잘해주십시오.”
“그럼요.”
“가, 감사합니다, 영애!”
“그런데 서군은 어떻게 되나요?”
“서군…… 아, 물론! 이번 일을 잘 덮을 수 있도록 힘써보겠습니다.”
그래, 그래.
미래를 대비해서 황군에 내 사람들을 심어놔야 하거든.
내게 도움을 많이 받은 서군이 딱이다.
“염려하지 마세요. 시아버님께도, 할아버지께도 아르칼 장군은 관련이 없다고 말씀드릴─”
그때였다.
“여전히 세치 혀 놀리는 솜씨만큼은 제일이군.”
기분 나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황자님. 무슨 일이신지요?”
“모든 일을 덮어주마.”
이건 또 무슨 헛소리래?
“덮을 일이 있었던가요?”
“지금이야 세상에 두려운 게 없겠지만, 미래엔 다르지. 너를 봐주지 않는 황제가 등장할 테니까.”
지가 황위에 오르면 날 가만두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그래서요?”
“지금이라도 태도를 달리해라.”
“무슨 말씀이신지요.”
“파혼하고 내 황자비가 돼.”
……이게 뭘 잘못 먹었나.
이 3세는 악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