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화.
대체 언제까지 이놈의 패션쇼를 해야 한단 말인가!
“영축절인걸요! 몇 없는 큰 행사라고요!”
“우리 아가씨가 제일 아름다워야 해!”
하녀들이 눈을 부릅뜨고 드레스를 옮겼다.
열정의 패션쇼는 두 시간이 지나서 끝이 났다.
골드 포인트가 있는 머메이드라인의 블랙 드레스로 결정되었다.
머리는 한쪽으로 묶어서 늘어뜨렸다.
완벽하게 꾸민 모습을 보고 하녀들이 물개박수를 치며 기뻐했다.
내가 챙이 넓은 모자를 쓰기 전까진.
“모자요? 세상에, 아가씨!”
“모, 모자는……!”
난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안 바꿔줘. 돌아가.”
“아가씨……!”
“충분히 꾸몄어. 모자는 양보해.”
“하지만 패션의 완성은 얼굴인걸요!”
얼굴을 드러내야 한다고 울부짖는 하녀들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모자를 더욱 눌러쓰자 베티와 하이디가 치마 끝에 매달려 소리쳤다.
“적어도 색깔은 맞춰주세요!”
“검은색……! 못해도 무채색으로……!”
하녀들이 파란색은 안 된다며 꺼이꺼이 울었다.
“하지만 이게 챙이 가장 넓은—”
하이디와 베티가 후다닥 검은 모자를 가지고 왔다.
지금 쓴 것만은 못해도 저 정도면 얼굴을 가릴 수 있겠다.
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어디서 찾았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두 사람이 울망울망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래.”
하녀들이 날 헹가레 칠 기세로 만세삼창을 불렀다.
‘하여간에 인형 놀이 참 좋아한다니까.’
덕분에 옷 잘 입는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나쁠 건 없지만.
좀 귀찮아서 그렇지.
마침 요슈아와 발자크가 날 데리러 왔다.
“이제 출발할까?”
“늦으면 또 친척들이 난리 칠거다.”
나는 “응.” 대답하고 오라버니들을 따라나섰다.
목적지는 아스트라 공작성이었다.
마차를 타고 가며 두 사람에게 요 몇 년간 영축절 행사를 어떻게 진행했는지 들었다.
내가 칸시스에 가기 전과는 진행 방법이 꽤 달라졌다.
“마도구를 띄운다고?”
“응. <탈리스만>이라고 하지.”
발자크의 말에 요슈아가 설명을 덧붙였다.
“탈리스만이 영혼을 인도해서 떠난다는 의미야. 마지막에 다다른 지역에서 터뜨리면 불꽃이 별처럼 하늘을 장식해.”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로 끝나는데?”
“매번 다른데, 올해는 서남쪽에서 시작해서 우리 관할령에서 끝날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노을이 지고 있었다.
영축절의 시작이었다.
* * *
아스트라 공작성.
성은 이미 혈족들과 가신들로 붐비고 있었다.
파티장에 들어가자, 우리 남매에게 시선이 쏠렸다.
“하여간 제일 늦는다니까.”
리앙틴이 뾰로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친척 오라버니인 파비오가 샴페인 잔을 흔들며 이죽거렸다.
“심각한 주인공병을 앓고 있는 분들이시잖냐.”
애덤도 크하하! 웃으며 동조했다.
“맞는 말이네. 주인공병!”
발자크가 헹, 코웃음 치며 말했다.
“그러는 너희나 약을 좀 먹는 게 어떠냐. 그 나이 처먹고 임무에 나가서 엄마를 찾으며 우는 건 병인 듯싶은데.”
파비오와 애덤이 새빨간 얼굴로 고함을 내질렀다.
“그, 그건 그럴 만한 사정이……!”
“그, 그래!”
“부디 다음 임무에선 그 사정이 없었으면 좋겠군.”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사촌 오라버니 중 하나인 아론이 나섰다.
“자, 자, 좋은 날에 다투지 말자고. 봐라, 마경이 가동되었어.”
아론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마경에 향했다.
마경은 한쪽 벽면을 모조리 차지할 만큼 거대했다.
화면이 일정한 속도로 바뀌고 있었는데, 각 관할령의 광장을 비추고 있는 것이었다.
요슈아가 속삭였다.
“탈리스만의 움직임을 저 마경을 통해 볼 수 있어.”
“광장은 왜 비추고 있는 거야?”
“관할령마다 탈리스만, 그러니까 영혼을 환영하는 의미로 공연을 하거든.”
“아아.”
리앙틴은 오만한 표정으로 턱을 치켜들었다.
“우리 관할령엔 국립 오페라 공연단이 왔어. 가수 브릿지를 메인으로 유명 오페라 가수들이 황홀한 노래를 부른다고.”
그러자 흑염룡 사촌 언니, 그러니까 셀레네의 동생이자 바스티나의 딸인 쥴리아나가 말했다.
“우린 기사단의 검무란다. 메인은 아퀼라지.”
그러자 초청된 방계 소녀들이 꺄악, 소리쳤다.
“‘그 아퀼라’ 말이지요?”
“멋져라~!”
그러자 발데릭의 장녀인 로레이나가 실소했다.
“고모부님이 도박에 푹 빠져서 돈 한 푼 없으니, 있는 기사들로 해결했구나.”
흑염룡 사촌 언니가 불퉁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는 언니네서도 영지민들을 모아 공연하잖아요?”
“수준이 다르지. 우리는—”
그때였다.
와아아아!
마경을 본 자들의 탄성이 흘러나왔다.
탈리스만은 막 발데릭 관할령을 지나가고 있었다.
지나는 길목마다 영지민들이 마도구를 치켜들었다.
발데릭 관할령을 수놓듯 펼쳐진 불빛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사촌들이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마도구를 대체 얼마나 사들인 거야?”
“과연 아스트라의 금맥이라 불리는 발데릭 관할령이다.”
“……그래봐야 고리대금으로 벌어들인 돈이잖아.”
흑염룡 사촌 언니가 퉁명스레 말했다.
하지만 동조하는 자는 없었다.
‘자금력을 여봐란듯이 자랑하는구만.’
조프리가 히죽히죽 웃으며 우리 남매를 쳐다봤다.
“데이몬드 관할령은 어떤 공연을 하나?”
오라버니들은 조용했다.
딱히 공연에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라버니들이 워낙 바쁘기도 했고, 관할령 상태가 엉망이라 공연을 준비하기 적합하지도 않았지.’
조프리가 간사한 표정으로 말했다.
“뭐야, 공연을 준비하지 않은 거야?”
“너희처럼 쓸데없는 데에 돈을 쓸 필요는 없으니까.”
발자크가 싸늘하게 말했다.
조프리는 “흐응.” 콧소리를 내며 샴페인 잔을 흔들었다.
“관할령이 관리가 안 됐던 건 아니고?”
요슈아가 빙그레 웃으며 조프리를 쳐다봤다.
“토지를 빼앗지 못해 속이 뒤집히는 건 알겠지만, 헛소리는 그만하는 게 좋겠어.”
“뭐야?!”
3세들의 목소리가 높아지던 찰나, 할아버지의 최측근인 드뷔시 자작이 다가왔다.
“아가씨.”
“안녕하세요, 자작. 오랜만에 뵈어요.”
“예, 장성하신 모습을 보니 감격스럽습니다.”
“감사해요.”
가벼운 인사말을 나눈 후, 드뷔시 자작이 우리 남매에게 물었다.
“이번 영축절 행사의 마지막 지역은 데이몬드 관할령입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어요.”
“본래는 지역의 주인이 탈리스만에 활을 쏘아 폭파시키지만, 데이몬드 님이 계시지 않으니 여러분들 중 한 분께서 활을 쏘셔야겠습니다.”
“예.”
“탈리스만이 데이몬드 관할령에 도달하는 건 세 시간 후이니 그 전에 이동의 가호석을 통해 돌아가셔서 자리를 잡아두십시오.”
우리 남매는 고개를 끄덕였다.
올해는 초청된 인사들이 많다.
인근 영주들부터 타국의 대사, 심지어는 바란 왕세자의 무리까지.
그래서 행사에 차질이 없도록 드뷔시 자작이 직접 챙기는 모양이었다.
나는 드뷔시 자작에게 슬쩍 물었다.
“칸시스에서 오신 손님들도 파티장에 오시나요?”
“그렇다고 전달받았습니다만…….”
드뷔시 자작이 파티장을 가볍게 둘러보았다.
“아직 오시지 않은 것을 보면 2부에 맞춰 입장하실 모양입니다.”
귀찮은 걸 질색하는 라온 성격에 아주 안 올 줄 알았더니.
‘뭐, 됐어. 2부 전에 난 관할령으로 돌아갈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잔을 잡았다.
“아! 에릴로트 술 마신다!”
이제 꼬꼬마에서 꼬마로 성장한 아르망이 나를 손가락질했다.
“오렌지 주스야.”
“에이, 재미없어. 에릴로트가 마시면 나도 마실 수 있을 텐데.”
“음주는 성년부터란다, 아르망.”
“에릴로트는 이상한 데서 도덕적이더라.”
아르망이 입술을 불퉁 내밀었다.
어른들이 그런 우리를 보며 껄껄 웃었다.
* * *
몇 시간 후.
파티장 앞에서 왕세자 무리를 기다리던 발데릭의 표정이 밝아졌다.
“오오, 전하!”
이제나저제나 라온을 기다리던 발데릭이 헐레벌떡 달려갔다.
“늦으셨습니다. 빨리 오셨더라면 제 관할령의 멋진 공연을 보실 수 있으셨을 텐데요. 하하!”
“오는 길에 충분히 만끽하였습니다.”
제3 왕자 유리가 빙그레 웃었다.
발데릭이 껄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셨다면 다행입니다. 자, 들어가시지요. 앞으로도 볼거리가 많습니다.”
발데릭이 음험하게 웃자, 헤반이 입을 열었다.
“일전에 말씀하신 ‘그 일’ 말입니까?”
“오, 공자께서도 우리 말을 하실 줄 아시는군요.”
“예, 뭐…….”
발데릭이 씩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곤 주변을 살피고 목소리를 바짝 낮추었다.
“거래해주신 화약으로 데이몬드 관할령을 터뜨릴 예정입니다.”
“장남은 유배를 갔고, 데이몬드 아스트라는 관할령을 잃는다라……. 잘만 된다면 이 성이 공의 손에 떨어지겠군요.”
유리의 말에 발데릭이 눈썹을 까딱 들어 올렸다.
“세 분의 도움이 있다면 필시 그리되겠지요.”
그러자 이전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라온이 물었다.
“마도병의 거래는 없다고 말했을 텐데.”
‘왕세자도 우리 말을 안단 말인가?’
발데릭은 깜짝 놀랐으나, 곧 표정을 정리하곤 말했다.
“아스트라는 이 대륙의 패권을 차지한 칼소이에 제국의 제 1가문입니다.”
“해서.”
“왕세자께서도 미래를 도모하시려거든 언젠가 이 아스트라의 힘이 필요하실 겁니다.”
“내가 미개한 칼소이에인의 도움이 필요할 성싶으냐?”
“바란 왕의 심중에 왕세자가 아닌 막내 왕자님이 계신다는 것을 압니다.”
헤반와 유리의 표정이 굳어졌다.
맞는 말이었다.
젊은 후처에게 푹 빠진 왕은 왕세자를 멀리하고, 막내 왕자를 각별히 사랑했다.
이대로라면 왕세자위마저 위태로울 것.
이 대륙 제일의 군사력이라는 아스트라의 힘이 필요할 순간이 올 수도 있다.
발데릭이 히죽, 웃었다.
“제 손을 잡으시는 게 여러모로 이득이지 않겠습니까?”
유리와 헤반은 굳은 얼굴로 발데릭을 쳐다봤으나, 왕세자 라온이 여상한 투로 말했다.
“두고 볼 일이지.”
“데이몬드가 실각하고 나서도 늦진 않겠지요.”
하하하!
발데릭이 유쾌한 표정으로 라온을 파티장으로 안내했다.
그들이 들어가자마자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특히 발데릭에게 밀려 왕세자 의전의 기회를 놓친 구스타프 쪽은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조프리와 로레이나가 다가왔다.
“아버지.”
“탈리스만은?”
“이제 막 바실레 관할령을 지나 아스트라 관할령에 들어갔습니다.”
데이몬드 관할령이 불바다가 되는 것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마경이 데이몬드 관할성을 비추고 있었다.
탑 밑엔 발자크와 요슈아, 그리고 가신들이 있었다.
그리고 탑 위에 활을 들고 우뚝 선 것은…….
“에릴로트가 궁수역을 맡았군.”
발데릭의 말에 조프리의 입매가 뒤틀렸다.
“하여간에 눈에 띄고 싶어 안달하는 계집이라니까요.”
그러곤 목소리를 바짝 죽여서 속삭였다.
“이대로 통구이가 되면 어찌합니까? 저 남매는 빼돌려서 창고에 넣어두고 장난감을 삼아야 하는데 말이에요.”
“하나쯤은 포기해라. 통구이가 되는 꼴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을 테니.”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하지만요.”
조프리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때, 가신 하나가 말했다.
“오오, 에릴로트 아가씨께서 탈리스만을 겨냥하는군요!”
다들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마경을 응시했다.
“맞출 수 있을까요. 활에 조예가 깊은 요슈아 도련님이 나서는 게 좋지 않았나 싶습니다.”
“자신이 있으니 나섰겠지요. 맞추지 못하면 그만한 망신이 어디 있겠습니까.”
웃음소리가 파티장을 가득 메웠다.
아스트라 공작의 시선이 막 시위를 당기고 있는 에릴로트에게 집중되었다.
“폼이 제법이구나.”
“칸시스에서 학업에만 매진하신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드뷔시 자작이 웃는 낯으로 대꾸했다.
발데릭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그간 세상모르고 까분 대가를 치러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마경 속의 에릴로트가 바짝 당긴 시위를 놓았다.
쉭!
바람을 가르고 일직선으로 날아간 화살이 탈리스만에 꽂혔다.
‘자, 지금이다!’
펑—!!
“와아아아아—!!”
화려한 불꽃이 하늘을 수놓았다.
거대한 불꽃에 낮인 양 밝아졌던 하늘이 다시 어두워지며, 작은 불꽃들이 꽃이나 별처럼 펼쳐졌다.
그 순간, 무언가 날아올랐다.
“저게 무슨…….”
“어, 어?! 늪요정이다!”
늪요정이 상공에서 휘날리는 아스트라의 문양에 돌진했다.
그들이 문양을 통과한 찰나.
“와—!”
“우와!”
사람들이 탄성을 흘렸다.
빛의 그물이 마치 베일처럼 문양을 가린 후 사라지자, 늪요정이 까마귀가 되어 하늘을 날았다.
검은 깃털이 후두둑 떨어지고 까마귀는 이윽고 오색의 불사조가 되어 무한의 기호를 그린다.
푸드덕!
불사조를 따라 새들이 날아올랐다.
영혼처럼.
물론 군계일학은 불사조였다.
귀빈들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훌륭하군요. 대체 어찌한 겁니까?”
“에릴로트 아가씨의 가호인 <마물 조련>입니다!”
가신 하나가 의기양양하게 소리치자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3세 중 하나가 뚱한 표정으로 말했다.
“뭐야, 공연을 준비하지 않았다더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콘라드가 픽 웃으며 한지혁에게 말했다.
“늪요정에게 기만을 씌워서 까마귀로 만든 것입니까?”
“까마귀에서 다시 불사조로 바꾸었고요.”
“한 시간 만에 준비한 것치고 훌륭하군요.”
“하여간에 꾀는 제국 제일이지.”
다들 웃는 와중에 굳어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발데릭과 그 자식들이었다.
“뭐, 뭐야. 왜 터지지 않은 거예요?”
조프리가 묻자 로레이나가 딱딱한 얼굴로 부친을 쳐다봤다.
“준비된 화약에 이상이 있던 것 아니에요?”
“…….”
“아버지.”
“몰라! 모르겠다고. 대체 왜……!”
엄청난 양의 화약을 준비했다.
저 폭발에 말려들어 데이몬드 관할령을 불바다로 만들었어야 했는데……!
‘대체 어떻게 된…… 아니, 문제는!’
그가 서둘러 라온 무리를 쳐다봤다.
“와, 왕세자 전하.”
“아무래도 아스트라의 도움을 받으려거든 그쪽이 아닌 다른 이를 찾아봐야겠는데.”
무심히 말한 라온이 몸을 일으켰다.
‘안 돼!’
바란 왕국은 최강의 검이자 방패였다.
그들을 잃을 순 없다.
발데릭이 다급히 말했다.
“차, 찾았습니다.”
“…….”
몸을 일으키던 라온이 멈칫했다.
“무엇을.”
“그야 물론 ‘릴’이지요.”
“……!”
“전하께서 그토록 찾던 그 여자, 제 수중에 있습니다.”
발데릭이 입꼬리를 올렸다.
“제 손, 잡아주시겠습니까?”
이 3세는 악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