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3세는 악역입니다-270화 (271/390)

270화.

* * *

헤반은 뻔뻔하게 웃고 있는 악독한 여자를 바라봤다.

“너, 정말…….”

못돼먹어도 이렇게 못돼먹을 순 없었다.

제 감정을 알면서…….

친구이자 주군이 마음에 담은 여인에게 빠져 어찌할 바를 모르는 자신을 뻔히 알았으면서.

처음 릴을, 이 못된 계집애를 먼저 발견한 것은 자신이었다.

당시에 릴은 브리크트 가에서 운영 중인 상단의 일꾼으로 일하고 있었다.

릴이 들어온 이후, 부상단주의 얼굴엔 웃음꽃이 폈다.

라이벌 상단이 법령을 어긴 죄로 영업이 정지되었다.

큰손이던 라이벌 상단의 몰락으로 값비싼 자원을 헐값에 들여오기도 했다.

“제 인생에 운이 트이나 봅니다, 도련님! 으하하!”

부상단주는 아무것도 모르고 기뻐했지만, 헤반에겐 다른 것이 눈에 띄었다.

‘난데없이 영업 정지라고? 덕분에 녹수정을 헐값에 들여왔다는 것도 수상한데.’

가만 지켜보니, 저 애가 눈에 띄었다.

상단의 창고에서 제 오라비라는 남자와 속닥이는 것을 보기도 했고.

“뭘 이렇게 열심히 일해. 이러다 정말 칸시스에 눌러살려고?”

“설마.”

“그런데 라이벌 상단을 영업 정지까지 시킬 필요는 없잖아.”

“잘 생각해보라고. 나는 이 브리크트 상단의 비밀을 알고 있어. 즉, 약점을 쥐고 있는 거지. 그런데 브리크트 상단이 녹수정 판매의 중심이네?”

“칼소이에로 돌아갔을 때, 브리크트 상단을 통해 녹수정을 싸게 구매하려고 작업을 쳐놨다는 거구만.”

“그래!”

“하여간에…….”

‘뭐? 저게……!’

처음엔 어이가 없었다.

대 브리크트 가문이 고작 열몇 살 계집애의 손에 놀아나게 둘 것 같은가.

혼쭐을 내줄까 하다가 그냥 두었다.

영리해 보이니 이용할 대로 이용한 뒤에 쳐내도 될 듯했다.

그런데.

“도련님! 이, 인어들이 거래를 제안했습니다! 마도병의 기반인 푸른 산호와 식량을……!”

“도, 도, 도련님! 11대 대왕께서 개발하시던 바닷길의 입구를 찾았습니다! 이 나라 무역의 내일이 우리 손에 떨어진 겁니다!”

“도, 도, 도, 도련님……! 바닷길을 막고 있던 크라켄이 자취를 감췄습니다……!!”

‘굉장하잖아.’

물건은 물건이었다.

소녀는 엄청나게 약아서, 평범한 사람은 생각해낼 수 없는 꾀로 브리크트 상단을 정점으로 올려놓았다.

지켜보고 있으면 재미가 있었다.

이번엔 또 어떤 약아빠진 방법으로 자신을 놀라게 할까.

“헤반.”

“예, 아버지.”

“네 호위인 리겔을 1왕자궁의 시종으로 들여야겠다.”

“라온이 또 시종들을 내쫓았습니까?”

“돈을 상자째 준다고 해도 1왕자궁에서 일하겠다는 자가 없으니 사람 구하는 게 이만저만 힘든 일이 아니건만…….”

“리겔은 융통성이 없는 녀석이라 일주일도 못 가 쫓겨날 텐데요. ……아버지, 괜찮은 녀석이 있는데 추천해도 되겠습니까?”

“괜찮은 녀석이라고?”

“상단 청소부로 일하는 녀석인데 제법 똘똘합니다. 눈치도 빤하니, 가르쳐서 1왕자궁으로 보내시죠.”

릴이 제 부친의 눈에 든 계기는 자신이었다.

그 애는 예상대로 부친의 마음에 쏙 들었다.

릴은 1왕자 궁엔 가지 않겠다고 했다.

“저, 저는 상단에서 일할 거예요. 왕궁엔 들어가고 싶지 않아요!”

지금 생각하면 처음에 왕궁에 가기 싫어했던 건 정체 때문이었던 것이다.

아스트라 공녀가 왕궁에 신분을 숨기고 들어갔다면 큰 문제가 될 테니까.

절대로 가기 싫다고 하는 릴을 협박한 것도 자신이었다.

“아쉽네. 똑똑한 아이인 줄 알았거든. 네게 선택권이 있다고 생각해?”

“뭘 어떻게 하려는 거예요?”

“네 오라버니라는 남자, 한이라고 했던가.”

“…….”

“릴, 지키고 싶은 건 말이야. 소중하다는 티를 내선 안 되는 거야.”

“한에게 손가락 하나만 대봐. 용서하지 않아.”

“뭐, 좋아. 하나만 알아둬. 네가 복수하기 전에 네 오라비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거다.”

영리하긴 했지만, 결국 평민이었다.

협박당한 릴은 왕궁에 들어갔다.

생각대로 그 애는 도움이 되었다.

라온의 가장 큰 상처까지 해결해주었으니까.

“이야, 우리 왕자님의 얼굴에서 괴물 가죽이 뜯겨나갔다고 하더니 정말이군. 아주 근사하신데?”

“시끄러워, 헤반.”

“신께서 천사의 존재를 들키지 않으려고 악귀의 가면을 씌워서 인계에 널 내려보내셨노라 떠들던걸.”

“…….”

“축하한다, 라온. 이제 고생은 끝났어.”

“…….”

“그러니까 이제 스승도 들이고, 네 사람도 만들어서…… 사람 말하는데 뭘 그렇게 보냐? 뭐야, 시녀잖아.”

“릴이다.”

“……뭐?”

“그냥 시녀가 아니고, 릴이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정신없이 그 애를 쳐다보는 라온의 시선에서…….

라온의 정원에서 투덜거리며 꽃을 꺾다가, 라온과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웃는 그 애의 얼굴에서…….

그 날의 공기, 햇살, 분위기…… 또 자신이 느끼는 미묘한 감정.

모든 것에서.

하지만 처음엔 별것 아니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도…….

“뭐예요. 사람 앞길을 가로막고. 비키세요, 늦으면 전하께서 또 난리 칠 거라고요.”

“넌 공자님을 뵙고도 인사를 할 줄 모르냐?”

“예, 예, 안─녕하십니까, 공자님.”

“말버릇하곤.”

차갑게 지나치자 “저기요!” 불렀다.

그러곤 무언가를 휙, 던졌다.

“뭐야, 이건.”

“보면 알 것 아니에요. 약이요.”

“……왜 주는데?”

“그야 다쳤으니까 주지, 왜 주겠어요?”

“…….”

“하여간에 남자애들은 아픈 걸 숨기면 알아서 낫는 줄 아나 봐. 꼭 누구 생각나게…….”

“누가 생각나는데.”

“있어요. 고집불통 검은 머리. 하여간에 발라요.”

자꾸 신경 쓰이고.

“악! 깜짝이야! 왜 이 밤에 거기 숨어있어요!”

“시끄러워. 갈 길이나 가.”

“뭐야. 라온 님과의 검술 시합에서 진 게 그렇게 분했어요?”

“아니니까 그냥 가라 좀.”

“아니긴.”

옆에 앉긴 왜 앉아.

“시합에서 한 번 패했다고 공자님이 노력한 것이 없어지는 게 아니거든요?”

“네가 뭘 알아.”

“알아요. 뒤에서 엄청나게 노력하는 거.”

“……매번 날 훔쳐보냐?”

“그냥 알겠던데요. 뒤에서 엄청나게 노력하면서 앞에선 타고난 천재인 척하던 친구가 있어서. 그 친구도 손이 꼭 공자님 같거든요.”

“…….”

“봐요. 엉망이잖아요.”

네가 그걸 왜 알아줘.

“으악! 뭐야!”

“아우, 진짜…… 뭐 이렇게…… 걸음이 빨라…….”

“뭔데 그렇게 쫓아와.”

“라온 님, 광장에 있어요. 빨리 가요.”

“……안 가. 그런 재수 없는 놈에겐.”

“애들이 다 치고받고 싸우면서 자라는 거지. 한 번 싸웠다고 되게 꽁하네.”

“뭐야?”

“빨리 가요.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 녀석은 안 기다려. 나 같은 건 도구일 뿐이니까.”

“웃기고 있네.”

“이게 공자님께─”

“도구의 생일 선물을 직접 골라요? 라온 님이 어디 선물 고르는 사람이에요?”

“……뭐?”

“빨리 좀 가요. 퇴근 시간 지났다고, 난.”

왜 손을 잡고 끌고 가고.

“공자님이 어디 도구로 쓰일 사람이에요?”

“…….”

“공자님 같은 사람을 겁나서 어떻게 도구로 써요? 태생적으로 불가능하니까 그런 거로 꽁하지 마요.”

왜 듣고 싶은 소리를 네가 해주는 거야.

자꾸만 시선이 갔다.

천방지축에 사고뭉치.

하지만 꼭 좋은 방향으로 끌고 가고, 마지막에 가선 ‘성공했다’는 표정으로 킬킬 웃는다.

“이봐요.”

이봐, 라는 호칭에서…….

“공자님.”

공자님이 되고.

“악! 내 빨래! 도와줘요, ……헤반 님!”

이름이 불리기까지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억지로 이름을 부르게 하며 장난인 척했지만,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내내 귓불이 붉어져 있었다.

손이라도 스치는 날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네가 도와줘, 유리.”

“뭐?”

“릴이 1왕자궁에 감금되었어. 서둘러.”

“잘된 일이네. 형님껜 릴이 필요하잖아. 릴도 왕비가 된다면 더없이 좋은─”

“……제발.”

“헤반……?”

“제발, 유리.”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라온의 손에 떨어지는 그녀를 멀리 떠나보내면서.

그녀를 위한 일이라 지껄였지만 거짓이었다.

사실은 라온의 곁에서 웃는 그녀를 보고 싶지 않아서.

바보처럼 칼소이에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은 것도 그랬다.

‘널 다시 보고 싶었기에.’

헤반이 이를 악물었다.

“너는 그런 내 마음을 다 알고 있었다고.”

“…….”

“……나쁜 년.”

에릴로트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친구가 사랑하는 여자를 좋아하는 건 좋은 일이고?”

“너……!”

“처음부터였잖아. 상단에서 만난 순간부터 넌 날 마음에 품고 있었잖아.”

“…….”

“내가 평민 계집애를 좋아할 리 없어. 결혼은 장사다. 내가 손해 보는 장사를 할 리가. 그렇게 나를 우습게 여기고 라온에게 넘겼지.”

“…….”

“잊었어? 1왕자궁이 부담스러워서 가지 않겠다는 내게 웃으면서 협박하던 것도 너야.”

“……그만해.”

“뭐라고 했더라. 아, ‘바란에서 지내면서 브리크트 가의 눈 밖에 난다라. 똑똑한 녀석이라면 결코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을 텐데. 내가 널 잘못 봤나?’ 라고 했었─”

“그만해!”

“라온에게 도움이 되어서 존재 가치를 증명하라고 했던 것도 너야!”

에릴로트가 굳은 얼굴로 헤반을 노려봤다.

“나는 그때 고작 열몇살 여자애였어. 타지에서 짐을 모두 잃고, 언제 정체가 들통나서 잡혀갈까 떨던 여자애.”

“…….”

“그런 내게 유일한 정붙일 구석이었던 한을 두고 협박하던 너야.”

“…….”

“그런 남자가 나를 사랑하게 되었으니, 그 마음을 알아주고 다독여줘야 해?”

“……회해.”

헤반이 젖은 눈으로 에릴로트를 정신없이 쳐다봤다.

“후회해…… 후회하고 있어.”

“그래서?”

“돌이키고 싶어…….”

“그럼 가져와, 마도병.”

“…….”

“가져온다면 네가 그토록 그리워하는 릴과 같은 얼굴로 웃어줄 테니.”

* * *

헤반이 소응접실을 나섰다.

그를 스쳐 한지혁이 안으로 들어왔다.

“하여간에 대단해.”

“뭐가.”

“처음엔 엄청나게 오만하던 놈이 네게 푹 빠져 어쩔 줄 모르는 거? 넌 그 얼굴을 물려준 네 아버지에게 삼보일배해야 해. 알아?”

“아빠를 닮아서 도움이 되긴 하지만, 이 일엔 딱히 상관없는데?”

“뭐?”

“도움 된 건 <열람>이었지.”

언젠가 라온이 날 칼소이에로 돌아가지 못하게 할 거란 건 알고 있었다.

라온과 절친한 헤반이 그걸 도우리란 것도.

‘사직하려면 왕궁의 허가가 있어야 하잖아?’

허가 없이 도망치면 군사들이 날 쫓았을 거다.

왕궁의 비밀을 알고서 잠적하는 건 중죄니까.

그래서 안전핀이 필요했다.

날 도와줄 안전핀.

“헤반이 가호의 레벨을 한 단계 더 올리기 전까진 속내가 다 읽혔거든.”

“설마…….”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준 거야. 그런 면에서 <열람>은 최고의 무기잖아?”

내가 뻔뻔한 표정을 짓자, 한지혁이 입을 떡 벌렸다.

“이 못된…….”

“넌 헤반이 좋은 사람인 것 같아?”

“그건 아니지…….”

“쟤가 내게 좋은 사람인 건 나를 좋아하기 때문이야. 그렇지 않았다면 타인에게 그랬듯 악독했겠지.”

“내 목숨으로 널 협박한 것만 봐도 그렇긴 하다.”

한지혁을 죽이겠다고 협박한 건 진심이었다.

나는 <열람>으로 헤반의 마음을 읽고 있었으니까.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의 목숨으로 협박하는 건 되고, 그 남자의 마음을 이용하는 건 안 돼?”

“……이렇게 보니 자업자득이군.”

“그런 거지. 발자크와 요슈아는?”

한지혁이 씩, 웃었다.

“돌아왔지. 큰 선물을 들고.”

“발데릭이 납치를 사주했다는 증거를 갖고 왔구나!”

한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얼른 소응접실을 달려 나갔다.

성의 광장에 무릎 꿇은 자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서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건 우리 오빠들이다!

“오라버니들!”

내가 다가가자 발자크가 씩 웃으며, 무릎 꿇고 있던 자의 복면을 확 끌어 내렸다.

광장에 있던 혈족들과 가신들이 흠칫했다.

“조프리?!”

“조, 조프리 도련님…….”

발자크가 막 도착한 할아버지에게 말했다.

“이 멍청이가 우리를 죽이는 일만은 빼앗길 수 없다고 살수들 사이에 끼어 있었습니다.”

조프리가 희멀건 얼굴로 고개를 수그렸다.

그 아버지인 발데릭이 마른침을 삼켰다.

“아, 아, 아버님…… 이건…… 이, 이건 그러니까 하, 함정에 빠진…….”

변명하려고 해도 소용없다.

‘살수들 사이에 제 아들이 있는데 어떻게?’

발데릭 관할령의 가신들도 느꼈는지, 다 틀렸다는 듯 눈을 꽉 감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해결책은 딱 두 개뿐이다.

인정하고 관할령을 통째로 넘기든가.

‘아니면…….’

나는 로레이나를 힐끗 쳐다봤다.

올해로 스물둘이 되어 발데릭 관할령의 주축이 된 발데릭의 장녀.

로레이나가 황급히 달려 나와 할아버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죄를 청합니다, 조부님!”

“로, 로레이나!”

발데릭이 이게 무슨 짓이냐는 듯 딸에게 소리쳤다.

할아버지는 무릎 꿇은 채로 고개를 푹 수그린 로레이나를 힐끗 쳐다볼 뿐이었다.

“부친의 황망한 계획을 말리지 못한 죄, 처벌해주십시오.”

“로레이나!”

“누, 누님!”

로레이나가 할아버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세 시간 전, 관할성의 군사들이 에릴로트와 요슈아, 발자크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저와 모친을 주축으로 가신들을 소집하였습니다.”

“뭐?”

“뭐, 뭐?! 누님!”

“주범은 조프리입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도 조프리를 지원하셨으니, 벌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픽 웃었다.

‘그렇지. 이렇게 꼬리 자르기로 나와야지.’

이게 해결책의 두 번째다.

영리한 로레이나는 깨달은 모양이었다.

아버지와 동생을 버려야만 발데릭 관할령이 살 수 있음을.

할아버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영리하구나. 로레이나.”

“……죄를……청합니다.”

“어떤 벌을 내려야 할까.”

“저희 관할령의 장원 대회의 의결 권한을 회수하셔도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또…….”

로레이나가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다시 나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네가 무슨 벌을 내리든 겸허히 받으마.”

나는 생긋 웃으며 로레이나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녀를 일으켰다.

“그러지 마세요. 언니에게 무슨 죄가 있겠어요?”

로레이나가 흠칫했다.

나는 살짝 몸을 기울여서 그녀에게 속삭였다.

“인명록에 이름을 지우는 것으로 끝내려고요?”

“너…….”

난 다시 자세를 바로 하고 말했다.

“죄 없는 언니까지 벌을 받기를 바라지 않아요. 다만, 이 일을 선례로 남기지 않기 위해선 몇 가지 보상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할아버지?”

“무엇을 바라느냐.”

“발데릭 관할령의 항만, 황궁에서 요구한 세수의 전량, 그리고…….”

발데릭은 이를 악물고 있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내가 발데릭 명의의 재산을 요구할 거라고 생각하나 보지?’

발데릭은 조프리만큼 멍청한 놈은 아니었다.

그러니 아스트라에서 제일 재물을 많이 그러모았지.

혹시나 일이 틀어질 경우를 대비해 재산을 옮겨놨을 거다.

난 소리쳤다.

“납치의 주범, 조프리 아스트라의 명의로 된 토지와 재물의 전부를 요구합니다!”

“……!”

“그, 그건 마, 말도 안 되는……!”

로레이나와 발데릭이 흠칫, 굳어졌다.

나는 로레이나의 귓가에 다시 속삭였다.

“동의하세요, 언니.”

“내가 왜……!”

“발데릭 숙부가 조프리의 명의로 재산을 죄다 옮겨놓은 이유를 모르시겠어요?”

“…….”

“후계 계승 준비를 겸한 거예요. 자신이 공작이 된 후, 발데릭 관할령을 조프리 관할령으로 바꾸기 위한 준비.”

“…….”

“알토란 같은 재물은 모두 아들에게 내주고, 언니는 이름뿐인 뭔가로 달래려 한 거겠죠.”

“…….”

“억울하지 않나요? 이제껏 발데릭 관할령을 온 힘을 다해 지켜온 언니가 아니라 멍청한 동생이 그걸 다 가져가는 것이니.”

“…….”

“고작 남자일 뿐인 멍청한 동생이 그걸 전부 가져가게 두시겠어요?”

로레이나의 시선이 발데릭에게 향했다.

그녀가 소리쳤다.

“발데릭 아스트라의 장녀, 로레이나 아스트라는 긴급령이 떨어졌을 시 부친의 모든 것을 위임받습니다. 성문에 적오기가 선 지금, 법령에 따라 선언합니다.”

“네 이년, 닥치지 못해─!!”

“데이몬드 관할령의 요구를 승인합니다.”

“로레이나─!!”

나는 언니에게 다시 한번 손을 내밀었다.

“한 배를 타게 되어 기뻐요, 언니.”

악을 내지르는 부친을 힐끗 쳐다본 로레이나가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로레이나는 속삭였다.

“연합은 깨지지 않을 거다. ……데이몬드 관할령이 에릴로트 관할령이 되는 그 날까지.”

“예. 발데릭 관할령이 로레이나 관할령이 되는 그 날까지.”

목적은 모두 이루었다.

발데릭 관할령의 재물 빼앗아 오기.

더불어 로레이나 같은 인재를 손에 넣기도.

나는 “아.” 하고 말했다.

“빼내 간 우리 관할령의 재물도 돌려주세요.”

로레이나가 픽 웃었다.

“물론.”

그러면 이제 일이 모두 끝났으니…….

나는 휙, 등을 돌렸다.

성문 앞에 서 있는 남자를 향해.

그리고 불퉁, 인상을 쓰며 소리쳤다.

“답장, 어디 있어, 답장!”

“…….”

“편지를 보내면 답장을 해야 할 것 아냐!”

“…….”

“이씨!”

나는 그 어린 날처럼 우다다닥 달려가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잘 왔어, 알렉시스.”

“……그래.”

그가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나는 좀 더 힘을 주어 그를 끌어안았다.

보고 싶었다는 말조차 못 하는 이 바보를.

그런데 등 뒤에서 살벌한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나온 라온과 헤반이 알렉시스를 찢어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

그 순간.

“떨어지지 못해!?”

“떨어져!”

“떨어지는 게 좋겠어, 에릴로트.”

우리 가족들의 험악한 목소리까지 들려왔다.

이 3세는 악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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