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3세는 악역입니다-274화 (275/390)

274화.

“저…….”

유리가 당황한 듯 플로렌스를 쳐다봤다.

플로렌스가 굳센 표정으로 유리를 돌아봤다.

“걱정하지 마셔요. 지켜드릴게요.”

“그게─”

“저는 신성 가호 소유자예요. 이 아스트라에서 저보다 강한 결계를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나는 인상을 썼다.

“물러나세요.”

“본가가 다시 한 번 바란인을 공격하는 일이 있어선 안 됩니다. 목숨을 걸고 막겠어요.”

“헛소리.”

“헛소리로 들리십니까?”

플로렌스 에즐로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을 이었다.

“아가씨께서 안 계시는 동안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

“가문의 역사나 본가라는 이름만으로 폭정 하는 시대는 지났어요.”

“…….”

“영주가 상인에게 백성을 구제하기 위한 상담을 하고, 황제 폐하께선 구민청을 세워 백성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습니다.”

“…….”

“아가씨께서 정 물러나지 못하시겠다면 저는 사람들을 이끌고 직접 구민청에 갈 것입니다.”

“가서?”

“가서 아가씨께서 전쟁의 시초를 제공했노라 전부 말씀드리겠다는 거예요!”

“그렇다는데, 유리?”

묻자, 플로렌스가 눈을 깜빡이며 나를 빤히 쳐다봤다.

유리를 대하는 태도가 막역해 보여서 이상한 모양이었다.

플로렌스가 흘낏 유리를 쳐다봤다.

“저어, 왕자님……?”

“예…… 릴, 아니, 본가의 에릴로트 양과는 절친한 사이입니다.”

“……네?”

“방금도 지기 간의 농담이었을 뿐이지요.”

유리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하자, 플로렌스가 멍하니 우리를 번갈아보았다.

그러더니 “어머, 어머머!” 하며 양손으로 입을 막았다.

“이런 실례를……! 죄, 죄송합니다!”

새빨개진 얼굴로 손에 얼굴을 묻더니, 빼꼼 유리를 쳐다봤다.

“어쩌죠…….”

“바란인을 지켜주시려 했던 마음만은 잊지 않겠습니다.”

“어쩜……. 실로 왕족다운 기품을 지닌 분이시군요. 정말 죄송합니다.”

유리가 빙그레 웃었다.

저 애는 바란에서도 신사적이고 다정하기로 유명했다.

그러니 플로렌스의 행동을 용인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나는 아니었다.

나는 플로렌스에게 다가갔다.

“해서 내게는?”

“아, 실례했습니다. 아가씨께서 이번에도 왕족을 위협하시나 해서요…….”

“이번에도?”

“황자 전하께도 그러시지 않았습니까…… 사실 어쩔 수 없이 지켜볼 수밖에 없었지만, 정말이지 마음이 불편해서…….”

곤란한 투로 중얼거리던 플로렌스가 “아!” 하며 양손을 내저었다.

“그러나 지금의 제 잘못이 아가씨의 탓이라는 건 아니에요. 사정을 모르고 앞뒤 없이 뛰어든 제가 나빠요.”

“…….”

“아버지께서도 자주 주의를 주셨는데, 성미가 불같은지라……. 정말 송구합니다.”

“잘못을 인정하는구나.”

“예, 용서해주셔서 정말로 감사합…… 아가씨?”

나는 통신석을 꺼내 코드를 입력했다.

수신자는 드뷔시 자작이었다.

[예, 아가씨.]

“오랜만이에요, 드뷔시 자작.”

[멀리서 장성하신 모습을 뵙고 감격했습니다. 한데 무슨 일이십니까.]

“현재 풍기 위원회는 누가 맡고 있죠?”

[바스티나 님께서 맡고 계십니다.]

“그럼 고모님께 전해줘요. 에즐로 가의 플로렌스 양을 풍기 위원회에 회부하노라고.”

“……!”

“……!!”

유리와 플로렌스가 깜짝 놀라서 나를 쳐다봤다.

“아, 아가씨……!”

플로렌스가 당황하여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드뷔시 자작과 가벼운 인사를 나눈 후, 통신을 종료했다.

플로렌스는 저를 신경도 쓰지 않는 날 보며 굳어졌다.

“이런 일로 풍기 위원회를 열 순 없습니다. 이제껏 그 어떤 본가의 분도─”

“하지 못했겠지. 공작위를 두고 다투느라 방계들을 제 편으로 끌어들이려 안달이었을 테니까.”

플로렌스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무슨 이유로 저를 회부하실 거죠? 이유 없는 벌은 본가의 폭정……!”

“첫째, 바란인의 앞에서 본가의 명예를 실추시킨 죄.”

“네?”

“둘째, 황자를 위협했다는 헛소리를 지껄이고 다닌 죄.”

“위협하셨잖아요!”

“황자님도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여쭈어볼까?”

살바토레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황자씩이나 되는 그가 공작도 아니고, 그 손녀의 말에 위협당했다고 할 리가.

자존심에 절대로 아니라 잡아떼겠지.

“너, 네 말이 어디까지 비약되어 가문을 위태롭게 할 수 있는지 생각은 하고 말하는 거니?”

“그, 그건…….”

“셋째, 번번이 별거 아닌 이유로 내 앞을 막아 일을 잘못될 뻔하게 한 죄.”

“일이 잘못된 건 아니잖아요.”

“넷째!”

나는 고함을 내질렀다.

플로렌스 에즐로가 흠칫, 나를 올려다보았다.

“감히 폭정을 입에 담은 죄!”

그때, 내가 있는 곳으로 경비병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드뷔시 자작의 지시를 받은 자들인 모양이었다.

그들이 플로렌스 에즐로를 구속했다.

플로렌스가 당황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거 놔! 대화 중이다! 아가씨께서 날 오해하고 계시니까─ 놓으라고!”

그러나 이들의 완장색은 붉은색.

공작 직속군이란 뜻이다.

본가와 공작에 대한 충성심이 병적일 만큼 강해서, 무슨 일에도 강경한 자들이다.

플로렌스는 질질 끌려갔다.

아마도 목적지는 지하 옥사일 터였다.

* * *

유리는 끌려가는 플로렌스를 쳐다보다가,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래도 되겠어?”

“뭐가.”

“나는 오기 전에 아스트라의 소식을 대충 듣고 왔어. 저 에즐로 가문은 공작성과 가장 가까운 마철도 정거장을 가진 곳이야.”

“많이도 알아봤네.”

유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방계 중 가장 부흥한 가문이란 뜻이야. 그런 가문의 장녀와 척져봐야 너희 관할령에 좋을 일은 없을 텐데.”

나는 생긋 웃었다.

“그런 얘기만 할 거야?”

“…….”

유리가 움찔하며 다시 물러났다.

“너와 할 말 없어.”

“이러다 또 내가 널 위협하는 줄 알고 누가 끼어들겠어, 유리.”

“…….”

“2년 만이잖아. 너에게도 난 첫 친구지만, 나에게도 넌 타국에서 사귄 첫 친구야. 특별한 사람이란 뜻이지.”

“……대체 뭘 바라고 이래?”

“잠깐 정원에 가자고…….”

나는 일부러 우울한 척 고개를 숙였다.

내가 속상한 표정을 짓자 신사인 유리는 쩔쩔맸다.

“아, 정원을 함께 둘러보자는 거였구나. 미안, 오해했어.”

“……내가 그렇게 네게 곤란한 부탁만 했어?”

“그런 게 아니야, 릴. 내가 속 좁게 오해를 한 거지.”

“그럼 갈래……? 네가 네 궁의 장미를 보여줬듯, 나도 우리 성의 꽃을 보여주고 싶은데…….”

내가 힐끗 쳐다보면서 말하자, 유리가 다정히 미소 지었다.

“물론이지.”

아, 정말 유리는 착한 애다.

‘나이대 비슷한 딸이 있어서 사위 삼으면 딱이겠는데.’

참, 딸은 없지만 과년한 언니들은 있지.

‘리앙틴이나 셀레네 언니, 아, 디오네라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칸시스 대륙에서 떠나기 전에 잠깐 중매쟁이 시늉을 해야 했다.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그 때 너무 몰입했던 탓인지 별 생각이 다 든다.

어쨌든 나는 유리를 데리고 정원으로 향했다.

정원은 마도구의 도움을 받아서 사계절의 꽃이 몽땅 피었다.

“정말 아름답네. 내 성의 정원이 기억나.”

“너는 정말로 정원에 열심이었으니까.”

“할 일이 그것뿐이어서.”

유리가 희미하게 웃었다.

“응, 모친이 하녀였던 너는 궁에서 없는 사람 취급받았지.”

“하지만 네 덕에 폐하의 눈에 들어서 내게도 할 일이 생겼어. 정말로 고맙게 생각해.”

“응, 넌 은혜를 입었다면서 몇 번이나 고맙다고 했어. 이 은혜를 언젠가는 갚겠노라고…….”

“…….”

유리가 움찔하더니 나를 힐끗 쳐다봤다.

‘착한 유리. 너무 착해서 딱 내가 원하는 화제를 꺼내 준다니까.’

나는 아련한 얼굴로 하늘을 쳐다봤다.

“괜찮다는 내게 넌 아니라며, 꼭 보답하겠다며 내 손을 잡고 몇 번이나…….”

“…….”

“기억나? 살이 에일 것 같은 겨울밤, 캄캄한 정원을 바라보며 ‘이렇게 살다 죽을 거란 걸 알아’ 하면서 쓸쓸히 말하던 것…….”

“…….”

“내가 아니라고 말하자, ‘때로는 위로가 더 아플 때가 있어’ 하며 고개를 숙였지…….”

“…….”

“그래서 난 너를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했어…… 그 때문에 황비 전하의 눈 밖에 나서 죽을 뻔했지만, 난…….”

“내가 뭘 어떻게 해주면 되는데……!”

유리가 눈을 꽉 감고 짓씹듯 말했다.

그전까지 아련한 표정이던 난 단숨에 얼굴이 밝아졌다.

“아사르!”

“……뭐?”

“아사르를 제국의 마철도에 쓰고 싶어. 너희에겐 그리 큰 기술도 아니잖아. 수출이 어렵진 않겠지?”

“아사르야 뭐…… 사실 그리 어려운 기술은 아니야. 기술이라고 할 것도 아니지, 그건 오로지 바탕이 되는 자원이 중요한 거니까.”

“자원?”

“그게…….”

멈칫한 유리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목소리를 바짝 죽인 채 말했다.

“너희는 아사르를 에너지 변환장치라고 여기는 모양이지만, 아니야.”

“……아니라고?”

“예를 들면 말이야. 으음…….”

유리가 “아.” 하더니 나뭇가지를 들고 땅에 그림을 그렸다.

나는 냅다 쪼그려 앉아서 눈을 반짝였다.

“전력석에선 전력을 생성하지?”

“당연하지.”

“하지만 화력석에도 미미한 전력은 있어.”

“그건 아주아주 미미하잖아. 전력석과는 비교도 안 된다고. 전력석에 100의 힘이 담겼다면, 화력석은 0.0001 정도겠지.”

“그 힘을 계속 재생시킬 수 있다면?”

“……어?”

“쉽게 말하면 0.0001의 힘이 소진되지 않도록 계속해서 재생시켜서 100의 힘을 만드는 거야.”

“재생의 힘이 있는 자원이라면…….”

“그래, 너라면 아주 쉽게 얻을 수 있는 그것. ……용의 비늘이야.”

유리가 빙그레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칸시스는 제국에 비해 자원이 훨씬 부족한 만큼, 있는 자원을 어떻게든 활용해야 했거든.”

“아아.”

“그래서 나온 게 <아사르>. 속칭, 미력 재생 장치야.”

맙소사!

나는 유리를 확 끌어안았다.

“최고! 최고야, 유리! 이래서 친구는 중요하다니까!”

“……이용해먹는 건 친구가 아니지.”

“서로 돕는 거지. 서로!”

“일단 놔줄래. 저 뒤에 있는 사람들이 곧 나를 죽일 것 같거든.”

내가 힐끗 쳐다보자 언제 왔는지 요슈아와 알렉시스가 있었다.

알렉시스가 삐딱한 표정으로 말했다.

“혼약자 앞에서 보일 포즈는 아닌데?”

“응!”

나는 활짝 웃고서 일어났다.

“고마워, 유리. 복 받아.”

유리가 픽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로브를 툭툭, 턴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인사하고서 난 요슈아와 알렉시스를 끌고 나왔다.

“알렉시스, 라곤의 비늘 좀 뜯어와 줘.”

“……사과 따오라는 듯이 쉽게 말하는데?”

“나와 한지혁이 없는 동안 라곤을 돌보던 건 너잖아. 비늘 몇 개 뜯는다고 널 죽이진 않을걸?”

“라곤은 너 외의 사람은 다 싫어해. 알긴 해?”

“알아. 하지만 라곤은 착한 애야. 싫어해도 명 없이 죽이진 않거든.”

내가 헤죽헤죽 웃자, 알렉시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곤 휙, 등을 돌렸다.

요슈아가 그에게 물었다.

“어디 갑니까?”

“라곤의 네스트에 갑니다. 비늘을 뜯어 오라잖습니까.”

“훌륭한 심부름꾼이로군요.”

“저도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만.”

그가 나를 힐끔 돌아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발랄하게 손을 흔들며 “그럼 다녀와!” 소리쳤다.

알렉시스가 한숨을 푹 내쉬고 떠났다.

요슈아는 쿡쿡 웃으며 날 쳐다봤다.

“비늘은 왜?”

“그거로 아사르를 만들거거든. 그런데 요슈아는 여기 무슨 일이야?”

“풍기 위원회를 열었다면서.”

“아, 요슈아도 풍기 위원회에 있어?”

“이름만 올려두긴 했지만. 어쨌든 호출되면 얼굴을 비춰야 하거든. 그런데 에즐로는 왜?”

요슈아는 멀리 불이 켜져 있는 신관을 쳐다봤다.

방계들이 묵고 있는 곳이었다.

“에즐로는 최근 방계들의 구심점이 되었어. 건드리기 까다로운 자들이야.”

“그래서야.”

“응?”

“구심점을 깨부숴줘야 더 까불 생각을 못하지.”

2세들이 후계 다툼한다고 엉망으로 만들어놓은 가문을 재정비해야겠다.

난 싸늘한 표정으로 요슈아를 따라 신관을 바라보았다.

* * *

공작성 앞엔 사람들이 빼곡했다.

아직 쌀쌀한 날씨임에도 홑옷만 입고 있는 자.

밀짚모자를 쓰고 괭이를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농부인듯한 자.

머리에 보자기를 쓰고 온, 허리가 굽은 노인.

“아가씨를 뵙게 해주십시오!”

“우리 아가씨께 큰일이 났다고 들었수다. 이 노인네가 대신 목을 바칠 테니 우리 아가씨만은 풀어주시우……!”

“미셀 할머니, 진정하세요. 그러다 또 쓰러지세요!”

와글와글 몰려온 사람들을 보고 경비병들은 당황했다.

모두 에즐로 가문이 다스리는 지역의 백성들이었다.

경비병들이 곤란한 표정으로 쑥덕였다.

“벌써 네 시간째입니다. 어찌합니까?”

“뭘 어째. 이 많은 사람을 죄다 도륙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2세, 3세들께서 시끄러워 잠을 잘 수 없다고 성화십니다.”

그때였다.

통신석이 울었다.

경비병이 통신석을 연결하자마자 바스티나의 짜증 섞인 고함이 들려왔다.

[대체 무슨 일이야! 잠을 잘 수가 없다지 않아!]

“프, 플로렌스 에즐로가 무사한지 확인하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겠답니다.”

[죄다 잡아들이지 않고 뭐 하는 것이냐!]

“백 명이 넘는 수라 위에서 공식 허가가 내려오지 않으면…….”

[불면은 미용의 적이거늘……! 그럼 그 계집을 보여주면 될 것 아냐!]

“예, 예……!”

통신을 종료한 경비병이 후다닥, 상사에게 소식을 전했다.

얼마 후, 지하 옥사의 경비병 둘이 수갑을 찬 플로렌스를 데리고 왔다.

그녀의 양 손목에 채워진 수갑을 본 백성들이 소리 높여 울기 시작했다.

“어찌 된 일입니까. 왜 아가씨께서……!”

“세상에, 이 어린애가 무슨 죄가 있다고.”

“아, 아가씨!”

노인이고, 아이고 모두 서글피 울며 플로렌스의 주변에 몰려들었다.

플로렌스가 희게 질린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

“왜들 온 거예요. 미셀 할머니는 무릎도 아프시면서……! 재클리는 감기 때문에 앓아누운 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요!”

입술이 파랗게 된 아이가 훌쩍훌쩍 울며 플로렌스의 손목에 채워진 수갑을 어떻게든 잡아뜯기 위해 안달이었다.

아이가 경비병에게 매달려 사정했다.

“풀어주세요. 우리 아가씨, 괴롭히지 마세요!”

“이, 이 녀석이…….”

“풀어줘요!”

아이가 허리에 달린 열쇠 꾸러미에까지 손을 대려 했다.

화들짝 놀란 경비병이 아이를 밀쳤다.

아이가 엉덩방아를 찧자, 플로렌스가 비명 같은 고함을 내질렀다.

“무슨 짓이야!”

“아이고, 아가씨!”

“아이고, 아이고!”

그때였다.

인상을 찌푸린 황자와 황실의 사람들이 등장했다.

이 3세는 악역입니다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