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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3세는 악역입니다-276화 (277/390)

276화.

며칠 후, 공작성 앞을 찾아갔던 멘데아 마을의 사람들이 풀려났다.

그들은 가슴을 부풀리고, 의기양양 마을로 돌아왔다.

“아, 우리가 괭이를 들고 찾아가니까 아스트라 놈들이 얼마나 당황하는지……!”

“풍기 위원회도 일정이 밀렸다더라고. 우리 눈치를 보느라 그랬던 게지. 으하하!”

“그래도 놈들이 아가씨를 광산으로 보냈다면서! 내 이놈들을……! 이러지 말고 다시 공작성으로 갑시다!”

“그래, 그래! 이번에야말로 본때를 보여주고 아가씨를 모셔오자고!”

“그럽시다! 자자, 어서 출발—”

그러자 출발을 종용하던 자의 아내가 급히 그의 소매를 끌어당겼다.

“이이가……! 그 입 다물지 못해요?”

“어?”

“무슨 짓을 벌인 줄도 모르고, 내 답답해서!”

다른 사람들도 싸늘한 표정으로 그들을 힐난했다.

“멍청하긴.”

“성까지 찾아가서 그 난리를 피워? 그대로만 잘 풀렸으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을……!”

“앞뒤 사정 살피지도 않고 그저 달려가기만 하니…….”

공작성에 찾아갔던 자들은 세간의 반응에 당황했다.

“대체 왜 이래? 아가씨가 얼마나 훌륭한 분이신지 몰라서 그래?”

“훌륭하긴! 멍청하게 그런 거래를 엎어놨는데!”

“아니, 이 할망구가! 은인에게 그게 무슨 소리야! 가뭄 때문에 옷과 장신구를 팔아서 우리 마을에……!”

“그래! 한 일이라곤 옷이나 장신구를 판 것뿐이지! 결국 이 마을을 구할 수 있었던 건 에릴로트 아가씨였단 말이야!”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니까!”

“에즐로 령에 정거장이 건설될 예정이었단다! 흉년이면 벌벌 떠는 우리를 위해!”

“뭐, 뭐라고……?”

“정거장이 생겼어봐. 상점들이 잔뜩 들어올 테고, 더 이상 이런 환경에서 농사를 짓지 않아도 된단 말이야!”

공작성에 찾아갔던 자들은 황망한 표정이었다.

세상이 바뀌어 있었다.

영웅이라며 칭송하던 자들이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달리했다.

그들뿐만 아니라, 멘데아 마을 전체가 공공의 적이나 다름없었다.

“멘데아에서 왔다고? 가시우! 멘데아 마을 놈들에게 팔 건 없수다!”

“아, 아니, 그게 무슨……!”

“네 놈들 때문에 에즐로 출신들이 무슨 꼴을 당하는지 알기나 해?!”

“무슨 꼴이라니! 우리가 뭘 어쨌기에!”

“에즐로 령 밖으로 나갈 수가 없다고, 눈총 때문에!”

시장만 가도 법석이었다.

상인은 문을 거칠게 걸어 잠그고, 사람들은 싸늘한 눈으로 그들을 쳐다봤다.

여론은 단지 몇 마디 얹는 것만으로도 놀라울 만큼 빠르게 변화한다.

“한데 멘데아 마을 놈들이 어떻게 그리 빠르게 플로렌스 에즐로가 잡혀간 걸 안 거지?”

“에즐로 자작이 선동했다더라고.”

“뭐야?”

“플로렌스 에즐로에게 은혜를 입은 자들에게 소문을 흘린 모양이야. 그래서 흥분한 멘데아 마을 사람들이 그 밤에 공작성에 달려간 거고.”

“멘데아 마을 놈들도 멍청하지만, 에즐로 자작은 관리자란 놈이 제 지역 주민을 그따위로 이용한단 말이야?”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아? 그 자가 우리를 위해 한 거라곤 고작 시늉뿐이었잖아.”

“가뭄에 함께 굶으면 뭐 해. 결국 구휼금도 내주지 못하는 무능력한 자잖아.”

“그에 비해 아스트라 가는 어떻냐고.”

“환경이 받쳐주지 않아 농사가 무리니 대륙 최고의 상점가를 구성하고, 범죄가 민간까지 닿지 않도록 철저히 관리하지.”

“뿐이야? 항만 사업에 크게 지원해주니 상업이 활발해지고, 마도 개발에 끊임없이 투자하니 곳곳에서 사람들이 몰려오잖아.”

“그러고 보면 이상했지. 데이몬드 관할령은 그 중에서도 가장 주민에게 관대한 곳이잖아.”

“이번 가뭄에도 세율을 터무니없이 낮췄다지. 전국 최저율이라던 걸.”

“쫓겨났다는 가신들도 지역의 고혈을 쥐어짜는 자들이었던 모양이야.”

“난 그런 분을 악인이니 뭐니 떠들던 것이 이상했다니까.”

“이것도 에즐로의 선동인 것 아냐?”

여론이 변화하자 움츠러든 건 방계였다.

방계 귀족들은 구심점인 에즐로 자작에게 찾아와 힐난했다.

“이 일을 어찌할 거요? 이제는 사실 본가보다 방계 가문의 오만이 지나치다며 난리라오!”

“내 지역에선 민란이 일어났소!”

“에잇! 눈 뜨고 정거장을 잃을 거요? 항의 서한을 회수합시다!”

“그래, 공작성으로 가자!”

상황은 에릴로트가 유도했던 그대로 흘러갔다.

* * *

성은 방계들의 곡소리로 시끄러웠다.

콘라드가 쿡쿡 웃으며 소식을 전달했다.

“방계들이 아가씨의 복귀를 비는 중입니다.”

“에즐로 자작은?”

“먼발치에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더군요.”

“여론은 항상 자신의 편이라고 여겼잖아. 최고의 무기가 사라지니 그럴 만도 하겠네.”

나는 픽 웃으며 서류를 들췄다.

“앤워드와 시모릭이 일을 잘하고 있네.”

“예, 훌륭한 인재지요. 하지만 어디 아가씨만 하겠습니까.”

나는 “응?” 하며 콘라드를 쳐다봤다.

“그런 아부를 할 수 있었어?”

“아가씨의 자리가 비워지니 이만저만 곤란한 게 아닙니다.”

“곧 복귀할 거야. 그때까지만 고생해줘.”

우리는 서로를 보며 야비하게 웃었다.

여기에 알렉시스가 라곤의 비늘도 가져왔겠다, 일이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음, 그럼 이제 비늘을 카인로드 숙부에게 전해서—”

그때였다.

쾅! 쾅쾅!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무슨 소리람?’

나는 무슨 일인가 하여 방문을 열었다.

때마침 누군가 내게 달려왔다.

“아가씨!”

“……플로렌스 에즐로?”

오늘이 광산으로 떠나는 날인지 그녀는 허름한 차림이었다.

하녀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송구합니다. 아가씨께 꼭 사과를 드려야겠다고 해서요. 방계 귀족들까지 아우성치는 터라…….”

어떻게 됐는지 알겠다.

방계 귀족들이 무릎을 꿇어서라도 내 마음을 돌리라고 종용했구나.

풍기 위원장인 바스티나는 오만한 방계가 본가의 영애 앞에서 무릎 꿇는 꼴이 보고 싶으니, 허가한 모양이고.

하지만 나는 그저께부터 방계들의 방문을 거절하고 있었다.

내 명을 받은 하녀가 가로막으니, 이 난리를 피운 모양이었다.

“사과하려거든 하렴.”

말하자, 플로렌스가 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아가씨께서 벌인 일이죠?”

“사과를 하러 왔다는 건 핑계인 모양이네. 그렇지 않고선 그런 눈빛일 리 없지.”

나는 문고리를 잡았다.

“그럼 할 말 없어.”

“아버지는!”

플로렌스가 울먹이며 고함을 내질렀다.

그때, 다른 방계 귀족들이 도착했다.

플로렌스가 사과하면 나를 구슬려 황자와의 거래를 지속하려는 셈일 터다.

그 뒤엔 플로렌스의 부친인 커넌 에즐로가 있었다.

“아, 아니, 이 녀석이……!”

“어서 사과드리지 않고 뭐 하는 게야!”

플로렌스는 자신을 거칠게 붙잡는 방계 귀족을 뿌리치고 고함을 내질렀다.

“아버지는 정의로운 분이에요. 선하고, 다정한 분이라고요!”

“그런데?”

“그런데 어떻게 사람들을 선동해서 이런 짓을……!”

나는 팔짱을 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너 말이야.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당연하죠! 아버지는 세금 한 닢도 허투루 쓰지 않는 분이세요. 그 폭우가 내리는 밤, 직접 나와 무너진 성벽을 직접 고치셨어요! 모두가 봤다고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인 거겠지.”

“……네?”

“그럴 수밖에 없었으니까.”

나는 창백한 커넌 에즐로를 빤히 쳐다보았다.

“네 아비의 지역은 동쪽에선 몬스터가 쏟아져 들어오고, 남쪽에선 해풍이 불어와. 중앙과 떨어진 척박한 땅이라 상업을 부흥시키기도 무리지.”

“그 말이 여기서 왜 나오죠?”

“그러니 가진 힘이라곤 고작 백성의 신임뿐이란 거다.”

“무슨…….”

“시기는 딱 좋았지. 구민청이 세워지고, 직계들이 네 아비를 끌어들이기 위해 난리였거든.”

“…….”

“해서 다정하고, 선하고, 정의로운 자가 되어야 했던 거다.”

커넌 에즐로가 내 시선을 피하고 마른침을 삼켰다.

“너희 일가가 가뭄엔 굶고, 폭풍이 치는 밤에 성벽을 보수한 걸 사람들이 어떻게 알겠니?”

“…….”

“불러 모은 거야. 보라고! 나는 이렇게 좋은 사람이라고!”

“…….”

“봐, 지금도 네 아비는 악한 내게 거래를 지속해달라고 부탁하려 방계들과 함께 찾아왔잖니?”

“아, 아냐, 아버지는 백성들을 위해서…….”

“하면 네 아비가 직접 내게 무릎을 꿇었어야지. 비겁하게 딸을 무릎 꿇리는 게 아니라.”

“…….”

나는 커넌 에즐로에게 물었다.

“하기 싫었지? 자존심이 상하는 거지? 그래서 딸을 제물 삼은 거잖아, 안 그래?”

“아, 아니, 난…….”

커넌 에즐로가 당황해서 중얼거렸다.

“하면 이렇게 할까. 네가 무릎을 꿇어서 사죄해. 그럼 황자와 거래를 지속할 테니. 다만, 정거장 예정지는…… 그래, 당신의 지역으로 할까?”

나는 내 앞에 있는 방계 귀족을 가리켰다.

저 남자의 지역은 에즐로 가문과 한참 떨어져 있었다.

즉, 정거장이 지어져도 수혜는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이다.

커넌 에즐로의 표정이 확 구겨졌다.

나는 플로렌스 에즐로에게 말했다.

“보렴, 네 아비는 무릎을 꿇지 않아. 제게 이득이 없는데 자존심을 버려가며 그런 일을 할 이유가 없잖니.”

“아, 아버지…….”

“게다가 지금 무릎을 꿇으면 방계의 구심점은 정거장이 지어질 지역의 관리자인 저 방계 귀족이 될 거거든.”

“…….”

“여론을 잃었으니, 있는 힘은 하나. 방계의 구심점이라는 것뿐. 그걸 잃기 싫으니까 움직이지 않는 거거든.”

“…….”

커넌 에즐로가 마른침을 삼켰다.

얼굴은 잔뜩 굳어져 있고, 홉 뜨인 눈은 튀어나갈 것 같았다.

딱 야비하고, 치졸한 표정이었다.

플로렌스 에즐로가 떨리는 눈으로 제 부친을 쳐다봤다.

나는 플로렌스에게 바짝 다가갔다.

플로렌스가 흠칫, 나를 바라봤다.

“그런데 넌?”

“……네?”

“너는 정의롭고, 선하고, 다정한가?”

“무슨…… 저, 저는 당연히 그렇게 살기 위해 노력을—”

“아니잖아. 그냥 대단하다는 시선이 좋았던 것 아냐?”

“……!!”

플로렌스의 맑은 눈동자에 조소하는 내가 비쳤다.

“네가 진정 선하고 다정한 자라면 옷과 장신구를 팔아 구휼자금을 마련했다는 걸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았을 거야.”

“그건…… 그건 그러니까…….”

“하지만 자랑스럽게 말했잖아. 내가 너희를 너무 사랑해서 옷과 장신구를 팔아서 돈을 마련했어—하고.”

“…….”

“감격한 사람들도 있지만, 네게 미안해서 귀리 한 톨 쉽게 넘기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거야.”

“…….”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니? 아니, 넌 안 한 거야.”

“…….”

“자랑하고 싶었잖아. 안 그래?”

“…….”

“왜 방계들을 이끌고 와서 내 앞을 막았니? 다정한 사람이라면, 그들까지 벌을 받을까 봐 홀로 했을 텐데.”

“…….”

“자랑하고 싶었던 거지? 봐라, 본가의 영애 앞에서 당당한 나를. 그렇게?”

“…….”

“왜 오자마자 네 아버지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따진 거야? 바로 무릎 꿇고 사죄했다면 내가 너희 백성들을 위해 정거장을 건설해줄 수도 있었을 텐데.”

“…….”

“싫었지? 그렇게 멋지고 당당하고 정의로운 네가 나 같은 악한에게 무릎 꿇었다는 걸 남들이 보는 게.”

플로렌스가 파르르 떨었다.

방 앞의 경비병들이 힐난의 눈빛으로 플로렌스를 쳐다봤다.

하녀들은 서로서로 무어라 속삭였다.

방계 귀족들은 쯧쯧, 혀를 찼다.

“하여간에 치졸한 녀석이로구만.”

“백성들은 이런 녀석을…….”

플로렌스가 흠칫 주변을 둘러보고 새파랗게 질렸다.

그리고 내게 말했다.

“아니에요! 다 아가씨의 추측일 뿐이잖아요!”

“이 일도 모두 소문이 날 거야. 왜냐면 내겐 경비병과 하녀들의 입을 막을 이유가 없거든.”

“아, 아가씨!”

“싫어? 그럼 부탁해봐. 부탁한다면 네 치졸하고 남들에게 보이는 걸 좋아하는 그 오만한 성정은 드러나지 않게 해줄게.”

플로렌스는 몹시 갈등하는 표정이었다.

지금 무릎을 꿇으면 그 말들이 세상에 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남들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는 건 그 비겁한 성정을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생긋 웃었다.

“이제 알겠지? 넌 정말로 선하고 다정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

“그럼 꺼져.”

플로렌스의 어깨를 탁, 밀쳐낸 나는 쾅! 문을 닫았다.

방계들의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문틈을 통해 흘러나왔다.

“멍청한 계집! 곧장 무릎을 꿇고 사과했더라면……!!”

“아가씨, 에릴로트 아가씨! 제발 대화를 나누게 해주십시오!”

“젠장! 넌 광산으로 썩 꺼져버려!”

사람들에게 밀쳐졌는지, 플로렌스의 비명이 들려왔다.

콘라드와 한지혁이 픽 웃었다.

“이제 방계들이 아가씨께 쉽게 덤비지 못하겠군요.”

“하지만 이상하지 않나…….”

“무엇이 말입니까, 한?”

“왜 상황이 이럴진대 공작님이 나서지 않는 겁니까?”

“그건…….”

나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시험이니까.”

“시험?”

“그래, 시험이야. 누가 공작위에 어울리는 자인지 가늠하기 위한.”

* * *

유쾌한 웃음소리가 공작의 집무실을 가득 메웠다.

드뷔시 자작이 픽, 실소를 흘렸다.

“그리 만족스러우십니까?”

“내 성에 물건 하나가 있다는 것은 진즉에 알았지만, 날이 갈수록 만족스럽구나.”

“데이몬드 님께선 양날의 검이지요. 강력한 무기이나 아군마저 베어낼 것입니다. 하지만…….”

드뷔시 자작이 까딱, 눈썹을 들어 올렸다.

“데이몬드가 홀랑 제 손잡이를 넘긴 자가 아주 영리해.”

“점수를 좀 얻으셨습니까?”

“글쎄. 좀 더 확인할 필요는 있겠구나.”

몸을 일으킨 공작이 창밖을 내다보았다.

“드뷔시.”

“예.”

“이제 슬슬 적오기의 계승자를 결정해야겠다.”

드뷔시 자작이 고개를 숙였다.

‘파란이 일겠구나.’

적오기의 계승자.

공작위를 물려받을 자가 정해질 날이 머지않았다.

이 3세는 악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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