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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3세는 악역입니다-278화 (279/390)

278화.

그가 툭, 던진 것을 나는 반사적으로 받아냈다.

작은 약통과 쪽지가 묶인 열쇠였다.

“약속한 건 지켰다.”

그렇게 말한 그가 뒤돌아 걸어갔다.

‘약속한 걸 지켜? 설마……!’

나는 후다닥 쪽지를 펼쳤다.

위치가 적혀 있었는데 이 열쇠를 써서 들어가면 되는 모양이었다.

‘이건 마도병을 숨겨둔 창고구나.’

쪽지를 쥔 채로 감격하고 있을 때, 등 뒤에서 리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둘이 뭐냐고 물었잖아.”

나는 쪽지와 열쇠를 등 뒤로 감추고 말했다.

“별 사이 아니라고 대답했는데?”

“아닌데 브리크트 공자가 널 그렇게 막역하게 대해?”

쉽게 돌아가 주진 않으려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내가 자존심이 뭉개지는 장면을 봤으니…….

‘하여간에 아스트라 직계들의 자존심은.’

그렇다고 바란에서 만났다고 홀랑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난 바란의 왕세자에게 납치되었잖아. 그때 그 무리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어.”

“…….”

믿을만한 이야기인지 긴가민가한 표정이었다.

나는 얼른 덧붙였다.

“난 납치의 피해자잖아? 어떻게든 구슬려야 하니 친구인 척하는 거지. 봐, 이것도 뇌물이야.”

슬쩍 약통을 흔들며 말하니, 리지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그래?”

“응.”

리지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그럼 뭐……. 저기 말이야. 생각해보니까 우리 한 번도 함께 식사를 한 적이 없더라고.”

“……?”

“내일쯤 할래?”

“왜?”

“사촌들끼리 연합하고 있어. 리앙틴과 디오네라가 붙었고, 셀레네와 밀란이 붙었어. 다른 애들도 연합을 찾았고.”

“그래서?”

“너만 없어, 연합.”

리지가 다시 한 번 헛기침하고서 말했다.

“뭐, 우리 연합에 끼워줄 수도 있는데.”

‘리지네는 어디와 연합했을까.’

연합 구도를 알아두면 확실히 도움이 될 것이다.

“그래, 식사 좋아.”

리지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래. 아침에 사람을 보낼게. 저녁에 보자.”

“응.”

“그럼 넌 그 분을 데려와!”

생긋 웃으며 말한 리지가 손을 흔들고 사라졌다.

‘그 분?’

설마 헤반?!

“잠깐! 잠깐만, 언니!”

소리쳤지만 이미 리지는 흥얼대며 멀어져 있었다.

한지혁이 슥, 다가와서 말했다.

“헤반 브리크트를 데려갈 수 있겠어?”

“있겠냐?!”

지금이야 순정남 행세지만, 사실 얼마나 영악한 녀석인데!

부탁을 들어주는 대가로 뭘 요구할지 모른다.

내가 씩씩대니 한지혁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왜 나한테 성질이야.”

* * *

이튿날.

나는 리지의 사람이 전해주고 간 초대장을 노려봤다.

[ 그리미에 관할성 별관에서 20시. ]

그리고 이마를 쥐자, 한지혁이 물었다.

“헤반에게 부탁하기 싫으면 가지 마.”

“하지만 그리미에 관할성이잖아.”

“그리미에가 없는데 어떻게 그의 관할성에서 보자고 하지?”

“리지의 모친인 칼리아 숙모가 그리미에 관할령을 관리 중이니까.“

……뭐, 말이 관리고 알아서 잘 굴러가긴 하지만.

칼리아 숙모가 하는 일이라곤 다 준비된 서류에 도장만 찍어주면 되는 거다.

한지혁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럼 어쩔 수 없지. 가야지. 내부를 탐색할 기회인데.”

“그래. 가야겠지.”

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헤반에게 연락해…….”

“그래.”

“그런데 그 녀석이 같이 가줄까? 지난번에 내가 엄청나게 재수 없이 굴었는데.”

“……그가 대인배이길 빌어야지.”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약을 주긴 했잖아?”

“……리지 언니 앞에서 곤란해져 보라고 한 것 같은데. 뱀 같은 놈이잖아.”

“그럼 뭐…….”

우리는 동시에 말했다.

“빌어야지.”

“빌어.”

—하고.

한지혁이 내 어깨를 두드렸다.

“중요한 것에선 자존심을 굽힐 줄 아는 녀석이라 일이 편하다.”

“난 이런 일엔 별로 자존심 없어. 사회생활을 오래 했어서.”

“그것참 다행이네. 손바닥 좀 잘 비벼봐.”

“특기야.”

걱정은 헤반이 부탁을 들어주면서 뭘 요구하느냐인데…….

그렇게 생각할 때, 등 뒤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콘라드가 어이없는 얼굴로 만담하는 나와 한지혁을 쳐다보고 있었다.

“두 분이 계셨던 세계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이 곳은 귀족과 자존심이 동의어라는 것을 잊으셔선 안 됩니다.”

“남들 앞에선 안 그러지. 한지혁, 연락해.”

“직접 가는 게 낫지 않겠어? 반성하는 느낌도 나고.”

“그럴까? 그럼 성으로 출발하자.”

“옷도 좀 까맣게 입고, 초췌한 얼굴로 응? 양손 공손히 모으는 것도 잊지 말고.”

“너 이 자식, 사과 좀 해봤구나.”

“X튜브. X튜브 사과영상.”

히히덕거리며 말하자, 콘라드가 지긋지긋하다는 듯 관자놀이를 눌렀다.

칸시스에선 자주 본 표정이었는데, 그걸 본 이세즈는,

“저 상냥한 분이 표정 관리를 포기하다니 너희는 대단도 하다.”

—하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자존심을 세우느라 그만한 이득을 포기할 순 없지.

나는 옷을 갈아입고 공작성의 신관으로 향했다.

다행히 헤반은 혼자 있었다.

‘라온이 곁에 있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방을 찾아온 날 보고 헤반이 미간을 좁혔다.

“너, 꼴이…….”

“창고 주소를 받고 생각해봤어.”

“뭘 생각했기에 까마귀가 되어 왔지?”

“네 마음을 내가 너무 쉽게 본 것은 아닌가…… 나라와 애정 사이에서 깊은 고민을 했겠구나…… 그런 생각.”

나는 아련한 얼굴로 헤반을 쳐다봤다.

헤반은 날 지그시 응시했다.

그의 동공에 눈썹을 늘어뜨리고 있는 내가 비치었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또 뭐가 필요한데.”

젠장, 눈치 빠른 녀석.

“필요하다니…… 난 사과를…….”

“바로 털어놓으면 고려는 해본다.”

“리지 언니와 만나는데 같이 가주라!”

랩 하듯 쉴 새 없이 말하자, 그가 헛웃음을 흘렸다.

“지난번에 분명 내가 널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고 한 것 같은데.”

“…….”

“넌 널 좋아하는 남자에게 다른 여자를 만나달라고 부탁해?”

“아니, 뭐, 네가 평생 나만 보고 살 것도 아니고…… 그리고 리지 언니가 사람이 참 괜찮아. 뒤끝이 없거든. 또—”

“안 가.”

헤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곳으로 가려는 듯해서 나는 얼른 그를 쫓았다.

“잘 생각해봐. 리지 언니는 돌아가신 조슬랭 숙부로부터 에칸 땅을 물려받았거든? 거긴 천연 자원이 엄청나게 매장되어 있어서……!”

그러니까 알아두면 얼마나 도움이 되겠어?

그런 뜻으로 말하던 나는 흠칫 입을 다물었다.

헤반이 드레스룸의 문고리를 잡고 날 돌아봤다.

“탈의도 할 텐데 더 따라올래?”

“지금 옷 예뻐. 갈아입지 않아도 돼.”

“글쎄. 내 눈엔 별로 예쁘지 않아서.”

헤반은 기어코 드레스룸에 들어갔다.

셔츠를 벗으려는 듯 단추를 풀기 시작해서, 나는 재빨리 몸을 돌렸다.

‘왜 사람이 있는데 옷을 갈아입고 난리야.’

그러니까 빨리 꺼지라는 뜻이겠지만.

나는 그리미에 관할령 탐방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드레스룸의 반대쪽을 보고 서서 말했다.

“처음부터 공짜로 가달라고 할 생각은 없었어. 네가 필요한 것을 말해주면 나도 고려할게!”

“그럼 적오기는 어때. 포위된 채로 보니까 장관이던 걸.”

되겠냐?

적오기는 공작 직속군의 상징이다.

그런 걸 타국인에게 내어줬다는 것을 들키면 목이 뎅겅 잘릴 것이다.

나는 울컥 치민 화를 참고 말했다.

“적오기는 안 돼. 다른 걸 말해.”

“그럼 용은 어때.”

“장난치지 말고……!”

그때, 등 뒤로 기척이 바짝 느껴졌다.

슬쩍 고개를 돌리자, 셔츠 밑에 받쳐 입는 면티를 착용한 그가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면티가 얇은 탓에 훈련으로 탄탄해진 몸의 라인이 엿보였다.

“그만 가라, 응?”

“……리지 언니랑 만나줘. 그리고 셔츠도 마저 입어줘.”

“뭐야. 바란 성에선 상반신을 벗고 훈련하는 것도 자주 봤으면서…… 아아.”

그가 짓궂게 웃었다.

그리고 내 앞으로 얼굴을 바짝 내밀었다.

“오랜만에 본 내가 너무 남자가 되었나? 하긴, 그때보다 많이 컸지.”

“헛소리 말고.”

“너.”

“……뭐?”

“내가 원하는 건 너뿐이라고 하면 줄 건가?”

“안 돼.”

그가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것 봐. 넌 내가 가장 원하는 걸 줄 수 없어.”

“…….”

헤반이 내 코를 가볍게 잡고 자세를 바로 했다.

“가줄게.”

“정말?!”

“나도 참 등신이지.”

“…….”

“자존심이 뭉개지고, 비참해도 네 부탁은 물릴 수가 없잖아.”

“…….”

그가 내 머리를 가볍게 흐트러뜨렸다.

“뭐든 하자. 네가 하고 싶은 건.”

“……갑자기 멋진 척하지 마.”

“멋졌나 보지? 그럼 파혼하든가.”

“그럴까?”

내가 고개를 기울이며 말하자 그가 움찔 나를 쳐다봤다.

“네가 라온과 등 돌릴 자신이 있다면 말이야.”

“……지독하네, 진짜.”

“없잖아. 평생 외롭게 산 친구를 저버릴 수도, 지금 당장 내게 입 맞출 수도.”

헤반의 눈빛이 깊어졌다.

나를 빤히 응시하던 그가 물었다.

“지금의 약혼자는 할 수 있다던가? 친구, 가족, 동료…… 모든 걸 버리고 네가 원하면 당장에 입 맞출 수도.”

“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

“무엇을.”

“그 애는 내가 원하는 건 뭐든 해. ……설령 죽으라 해도 죽을 거야.”

알렉시스는 모든 것이 나로 이루어져 있다.

내가 원한다면 뭐든 포기할 남자.

황위마저도, 복수마저도 포기하고 그저 내 손을 잡고 고요히 살아가길 선택할 터였다.

헤반이 물었다.

“그는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지.”

“……날 사랑하니까.”

“그 마음도 너는 알고 있었나?”

“어떻게 모르겠어.”

언제, 어디서나 나를 찾는 그 눈을.

아주 어릴 때부터 시선을 마주할 때면 그 눈이 말했다.

너를 좋아해.

네가 소중해. 그 무엇보다도.

그 어떤 것보다도.

헤반이 고요히 나를 바라보았다.

“나와 그의 다른 점이 그거야?”

“…….”

“친구, 가족, 동료. 너를 위해 모든 걸 내버릴 수 있다는 것.”

“……아니.”

“하면.”

“……결코 제 마음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란 점.”

“그리 멋진 점은 아닌 듯한데.”

“아니, 그게 가장 멋진 점이지.”

나는 쓰게 웃었다.

“친구를 잃고 싶지 않은 나를 위해, 제 마음마저 내버리고 친구로 남아주는 남자니까.”

그때였다.

덜컹.

방 밖에서 미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이어서 짤랑, 하는 가벼운 마찰음이 들려왔다.

나는 흠칫해서 방문으로 달려갔다.

“에릴로트?”

등 뒤에서 헤반이 나를 불렀지만 돌아볼 정신도 없었다.

코너 뒤로 익숙한 로브가 보였다.

……알렉시스의 로브였다.

나는 망연히 서서 이마를 쥐다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알렉시스를 쫓아 정신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에릴로트!”

헤반의 목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았다.

* * *

해가 뉘엿뉘엿 지는 오후.

알렉시스는 병영의 뒤뜰에 있었다.

벤치에 앉아있는 그에게 누군가 다가왔다.

“한참 찾았어.”

“……그래.”

“그렇게 듣고 사라지는 게 어디 있어.”

알렉시스가 물기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붉은 햇살이 일렁이는 머리칼에 닿아 부서졌다.

붉은 눈엔 미약한 공포가 엿보였다.

“에릴로트.”

“……응.”

“그런 말을 들었다고 해서 내가 변하는 일은 없어.”

“…….”

“네가 원한다면 뭐든 하는 사람이잖아, 난.”

“…….”

“죽으라면 죽고, 친구로 남으라면 남을 거다.”

에릴로트의 표정이 아프게 일그러졌다.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야.”

고개를 숙이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아주 어릴 때처럼.

알렉시스는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머리카락을 넘어 뺨에 손이 닿자, 에릴로트가 움찔 그를 쳐다보았다.

“나는, 난, 그냥…….”

“그래, 넌 그냥 그렇게 해.”

“…….”

“언제나처럼 모른 척해도 좋아.”

“…….”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결코 마음을 입에 담는 일이 없을 테니까.”

“…….”

알렉시스가 그녀를 향해 희미하게 웃었다.

“날이 덥다. 돌아가.”

그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몇 걸음 걷던 그때.

다다닥, 달려온 그녀가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네 마음을 가볍게 여긴 게 아니야!”

“…….”

“그냥 내가 겁쟁이라 그래.”

“……그래, 알아.”

“알긴 뭘 알아! 왜 상처받고도 말을 안 해!”

“…….”

“비겁하다고 욕하고, 악랄하다고 비난해!”

“그래. 넌 비겁하고, 악랄해.”

에릴로트의 손을 풀고 고개를 돌린 그가 말했다.

“그리고 나도 비겁하고 악랄하지.”

“…….”

“내 감정에 응할 수 없어서 네 마음의 빚이 있는 한, 너는 날 버리지 못할 거라고 알고 있었으니까.”

“……알렉시스.”

“그러니까 네 탓이 아니야.”

“…….”

“네 잘못이 아니니까 울지마, 에릴로트.”

에릴로트가 눈을 꽉 감았다.

‘너는 왜 이다지도 좋은 사람일까.’

그녀에게 한해서 그는 한없이 다정한 사람이었다.

마음의 빚 같은 말을 운운하는 것도 자신을 위한 일임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나는, 알렉시스, 난…….”

“네게 비밀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

“……!”

“네 아버지와 형제들, 또 콘라드나 미켈란, 한지혁 같은 자들은 알고 있는 것도.”

“…….”

“내게 말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겠지. 지금까지 얘기하지 못한 이유가 있을 거야.”

“…….”

“그러니까 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돼.”

이 3세는 악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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