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화.
나는 답장을 기다리며 시계를 확인했다.
‘슬슬 돌아가야 해.’
초조한 마음으로 수정구를 응시했다.
[특별한 움직임이 있다는 보고는 없다.]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 메시지로 확신할 수 있었다.
‘확실히 배신자가 있다는 거야.’
수정구를 조작해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아스트라 공작이 적오기의 계승자를 언급했다. 주인을 위해 무엇을 하면 되겠는가.]
[주인께서 곧 귀환하신다. 너희 종들은 주인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
“……!”
난 인상을 찌푸렸다.
할아버지는 그리미에에 관해서 별 다른 말이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귀환한다는 거지?’
[아스트라 공작이 주인을 찾는가?]
[황명이 있을 것이다.]
‘황제가 그리미에를 불러들일 거라고?’
대체 유배지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었기에…….
물으려던 찰나, 통신석이 울었다.
발신자는 알렉시스였다.
‘내가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워서 찾고 있는 모양이구나.’
이 소식이 아일라 쪽에 들어가게 둘 순 없었다.
아무도 모르는 이 지하도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잡힐 수 있으니까.
나는 어쩔 수 없이 방을 나섰다.
* * *
지하도를 빠져나와 정원으로 돌아갔다.
식사는 이미 끝났는지, 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리지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렇게 오래 자리를 비워?”
“가신들이 말썽이라 감사 준비에 차질이 생겼나봐.”
“아아, 가신들을 꽤 많이 축출했다고 했지.”
“뭐…….”
대답하며 자리에 앉았다.
차를 마시며 사소한 잡담을 나누고 있으니, 두 명이 더 도착했다.
리지의 언니인 카라.
그리고…….
“밀란 오라버니? 셀레네 언니와 연합한 거 아니었어?”
“그렇게 됐어, 에릴로트. 어제도 봤으니 안부는 안 물어도 되겠지?”
“오라버니가 카라, 리지 언니 쪽과 연합할 줄은 몰랐는데?”
그러자 리지가 빙그레 웃었다.
“밀란과 우리 자매는 둘 다 아버지가 안 계시잖아?”
그랬다.
자매의 부친인 조슬랭 숙부는 사고사.
밀란의 부친인 헤르난 숙부는 아일라 사건에 얽혀 있다는 것이 들통나서 축출.
옥사에 몇 년이나 갇혀 있다가, 자결했다.
‘그 사건의 진짜 수괴인 그리미에가 처리한 것이겠지만.’
카라가 찻잔을 들며 말했다.
“밀란과 우리 자매는 모두 후계 다툼에서 도태된 거나 마찬가지야. 아버지가 안 계시니까.”
“그래서?”
리지가 “참나…….” 하며 못마땅하게 말했다.
“도태된 사람들끼리 연합했다 이거지!”
“그러니까 도태된 사람들끼리 연합해서 좋을 게 없잖아.”
“뭐?”
“숙부나 고모들에게 붙어서 살길을 도모하는 것도 아니고, 도태된 사람들끼리 붙어봤자 이득이 없을 텐데.”
“그건…… 그러니까…….”
“우리 아빠를 후계로 밀려고 나를 초청한 건 아닐 거야.”
“…….”
“왜냐면 이번 초대는 우연한 거였잖아?”
아빠를 후계로 밀려고 했다면, 처음부터 나를 찾아와 초청했겠지.
하지만 리지는 헤반을 데려와 달라고 날 초청했다.
‘즉, 이 연합은 원래 날 끼울 생각이 없었단 거야.’
리지가 움찔했다.
밀란은 픽 웃었다.
“그러니까 내가 말했잖아. 에릴로트는 보통이 아니라고.”
리지가 칫, 혀를 찼다. 그러더니 제 언니를 슬쩍 쳐다봤다.
“언니…….”
그러자 카라가 스푼으로 찻물을 가볍게 저으며 입을 열었다.
“우린 방해파야.”
“……방해?”
“우린 방계들에게서 자치권을 빼앗길 바라지 않는다. 해서, 방해파가 되어 방계 세력을 흡수할 거야.”
이야기를 듣던 헤반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설마.”
“그래요. 우리는 아스트라의 2세가 없는 일가. ……즉, 우리는 피차 방계가 될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미래에 방계가 될 테니, 자치권을 잃는 꼴을 두고 볼 수 없다.
—그런 뜻이었다.
“데이몬드 아스트라는 현재 가장 후계와 가까운 사내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왜 그 딸에게 하는 겁니까.”
카라가 나를 지그시 응시했다.
“에릴로트.”
“예, 언니.”
“우리는 더욱 세력을 불릴 것이다.”
“가능하겠어요?”
“우리와 마찬가지로 2세가 없는 아론, 애덤 형제와도 이야기를 마쳤어. 부친이 인명록에서 이름이 지워질 로레이나까지도.”
‘그렇다면 벌써 관할령 넷이 연합한 거야.’
리지, 카라 자매의 <조슬랭 관할령>.
밀란의 <헤르난 관할령>.
아론, 애덤 형제의 <쟈로스 관할령>.
로레이나의 <발데릭 관할령>.
넷을 합치면 장원의 3할이다.
……그렇다면 이 후계 전쟁의 최대 세력인 셈이다.
차를 마신 카라가 찻잔을 소서에 내려놓았다.
“후계와 가장 가까운 데이몬드 백부님께 제안하마.”
“무엇을요?”
“자치권에 손대지 않는다면, 우리는 데이몬드 백부님을 지지할 것이다.”
“못하겠다면?”
“다른 쪽과 거래해야겠지. 어디라도 좋아. 데콘스 백부님이라든가, 구스타프 숙부님, 바실레, 바스티나 고모님. ……아니면 그리미에 백부님이라도.”
“할아버지가 용서하지 않으실 거예요.”
“우리가 조부님이 두렵다고 물러날 수 있을 것 같으니.”
“…….”
“에릴로트, 우린 이야기를 끝냈단다.”
“…….”
“가문에서 내주는 돈을 받아 근근이 살아갈 바에야, 조부님의 철퇴에 장렬히 죽기로.”
나는 눈에 바짝 힘을 주었다.
데콘스, 구스타프 숙부나 바스티나 고모는 무섭지 않다.
디오네라의 모친인 바실레 고모님은 진작에 후계 싸움을 포기했고.
‘하지만 그리미에는…….’
난 카라, 리지 자매와 밀란을 쳐다봤다.
‘물러날 생각이 없는 눈들이군.’
한숨을 내쉬고, 몸을 일으켰다.
“생각할 시간을 줘요.”
“오래 기다리진 못해.”
* * *
관할성.
오늘 있었던 이야기를 들은 오라버니들이 굳어졌다.
“미친……! 정말로 그들 손을 잡을 셈이야?”
“일이 복잡해지는군…….”
“절대 안 돼. 아버지가 공작이 된 후를 생각해야 한다고! ……뭐야, 왜 그래?”
발자크가 조용한 우리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방해파 사촌들의 말에 함께 분개할 줄 알았는데, 조용하니 의아한 모양이었다.
요슈아가 펄쩍 뛰느라 일어나있던 발자크를 조용히 잡았다.
“앉아.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이것보다 중요한 게 뭔데.”
“배신자의 존재지.”
그랬다.
그래서 다른 측근들이 아닌, 오라버니들에게만 오늘 있던 모든 일을 말해주었다.
‘내 곁에 배신자가 있으니까.’
발자크가 “아아.” 하며 나를 힐끗 쳐다봤다.
“배신자가 누군지도 물어보지.”
“그럼 메시지를 나눈 사람도 수상한 걸 알아차렸겠지. 걱정하지 마, 확인해볼 방법이 있으니까.”
“어떻게?”
나는 오라버니들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소리를 바짝 죽여서 작전을 설명해주었다.
“나는 오늘부터 몸을 숨길 예정이야. 바깥엔 아빠를 찾아갔다고 해줘. 후계 다툼 건으로.”
“그게 무슨…….”
“그리고 내가 신호하면 한지혁, 콘라드, 미켈란, 카인로드에겐 각각 이렇게 말해.”
“어떻게?”
“한지혁에겐, ‘살바토레 황자와 약혼할 것이다. 황비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황도로 몰래 떠났다.’”
“…….”
“콘라드에겐, ‘칸시스에서 마독에 감염되어 있었다. 가호를 잃었기에 회복 방법을 찾아내려 떠났다.’”
“…….”
“미켈란에겐, ‘마리의 위치를 찾아냈다. 더는 지체할 수 없기에 황자 명의의 축복의 땅에 무단으로 들어갔다.’”
“…….”
“카인로드에겐, ‘마도병 거래를 위해 바란왕의 총애비와 몰래 접선하기로 하였다.’”
이야기를 들은 쌍둥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미에 쪽에 어떤 이야기가 들어가는지 확인하겠다는 거지?”
“배신자를 색출할 수 있겠어.”
우리 남매는 서로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발자크가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몸을 숨기게?”
“그건 걱정하지 마.”
난 통신석을 들었다.
그리고 바란의 3왕자 유리에게 통신했다.
[에릴로트?]
유리는 이 시간에 무슨 일이냐는 듯 물었다.
“유리, 한 번 더 나를 도와줘야겠어.”
[……이제 그 말이 너무 무서운데.]
“별 건 아냐. 분장한 나를 바란의 시녀단에 넣어주면 돼.”
[그거야 뭐 어렵지 않겠지만…… 아스트라 사람들은 네가 어릴 때부터 보던 자들이잖아. 아무리 분장해도 알아볼 텐데?]
“알아볼 수 없을 거야. 너도 그랬었잖아.”
내겐 나나가 있으니까.
세포 변화로 완벽하게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난 유리의 도움을 받아서, 바란의 시녀로 지낼 수 있었다.
그리고 나흘째의 아침.
바란의 선물을 혈족들에게 전달한다는 핑계로, 다시 그리미에 관할령에 들어갔다.
* * *
그리미에 관할성의 집사가 바란의 시녀들을 환대했다.
“이게 그 유명한 팔슈아로군요.”
집사들이 “호오…….” 신음하며, 선물을 이리저리 살폈다.
‘으이구. 아까운 내 팔슈아.’
저건 쉽게 말해서 보조 배터리 같은 것이다.
심지어 특수한 변환장치로 신성력이나, 마력, 그 어느 쪽의 힘도 충전할 수 있었다.
‘칸시스 대륙을 떠나오면서 시중에 풀린 걸 죄다 쓸어온 건데.’
하지만 유리에게 혈족들 쪽에 선물할 걸 달라고 떼까지 쓸 순 없었기에, 내가 가진 걸 줄 수밖에 없었다.
그리미에 관할성의 집사는 하하 웃었다.
“주인님께서 계셨다면 매우 기뻐하셨을 겁니다. 일어나시죠, 안에 차를 준비해두었습니다.”
시녀들이 집사를 따라 복도를 걸었다.
집사가 막 코너를 돌아갔을 때, 나는 슬쩍 걸음을 늦추었다.
그리고.
‘아웬, 부탁해.’
내 그림자 속에서 옴브레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옴브레의 입속에서 크림슨 구울, 아웬이 튀어나왔다.
그는 미리 바란의 시녀복을 착용하고 있었다.
[감히 내게 치마를 입혀?]
‘어쩔 수 없잖아. 내가 없는 동안 자리를 채워줘야지. 그보다 키를 좀 더 작게 못해?’
[내겐 <기만>과 같은 능력은 없어. 이만큼 작게 만든 것이 한계다.]
“그럼 허리를 더 바짝 굽혀.”
그렇게 말한 난 아웬을 퍽, 밀쳐서 코너 밖으로 밀어버렸다.
그 탓에 아웬이 비틀거렸는지, 집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 아니에용…… 호호…….”
아웬이 한껏 성대를 뒤집어 까서 목소리를 바꾸었다.
나는 그 틈에 반대쪽을 향해 걸었다.
그리고 멀찍이서 무언가를 보며 걷는 하녀를 발견했다.
나는 재빨리 그녀의 뒤로 향해서 탁, 목을 내리쳤다.
정신을 잃은 하녀가 휘청, 주저앉았다.
“나나, 이 여자의 모습으로 바꿔줘.”
그 후, 옴브레의 안으로 들어가 옷을 바꿔입고 나왔다.
옴브레를 다시 내 그림자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거울을 보니 난 완벽히 그리미에 관할성의 하녀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통신석을 들어, 오라버니들에게 연락했다.
“시작해.”
[그래.]
[응.]
통신을 종료한 뒤 지하도로 이어지는 길로 향했다.
결계를 파훼하고 들어가자, 익숙한 길이 눈앞에 펼쳐졌다.
‘수정구. 수정구가 있던 방의 위치가…… 옳지, 여기다.’
이번에도 홰에 불이 놓여있었기에 찾기 어렵지 않았다.
나는 방 안에 몸을 숨기고 수정구의 신호를 기다렸다.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꽤 오래 대기하고 있었을 때…….
지이이이잉—.
이전처럼 수정구에 글자가 떠올랐다.
[긴급 연락 요망!]
‘소식이 들어갔구나!’
배신자 녀석, 발 한 번 빠르다.
수정구에 글자들이 빠르게 변하기 시작했다.
[에릴로트 아스트라가 움직였다. 장막을 급히 파견할 것.]
[무슨 일인가.]
[에릴로트 아스트라가 바란왕의 총애비와 접선한다. 시녀에겐 소식이 없는가?]
수정구에 떠오른 글자들을 보던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젠장.”
총애비와 접선한다고 거짓 소식을 전한 사람.
그건…… 카인로드였다.
나는 양손으로 머리를 쥐었다.
‘그가 대체 왜?’
왜 나를 배신했지?
나는 카인로드가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어주었다.
그가 사랑해 마지않는 양모의 목숨을 구해줬다.
그리고 좋아하는 연구를 마음껏 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왜…….’
어디서부터 일이 꼬였지?
그가 어디까지 말했을까?
정말로 그인가?
머릿속에서 문장들이 어지럽게 얽혀들었다.
‘진정해. 이럴 때가 아니야.’
나는 통신석을 꺼내서 발자크에게 연락했다.
“나야.”
[어, 어? 어, 그, 그래! 오랜만이군!]
[오랜만은 무슨! 이건 아가씨의 코드가 아닙니까! 야, 너, 아무리 급해도 황자와 약혼하는 건……!]
[아가씨?! 몸은 괜찮으십니까? 마독은 어찌 되었습니까!]
[마독이요? 황자와 약혼하겠다고 하던 게 마독 때문입니까?]
[아니, 약혼이라니 무슨…….]
발자크는 한지혁, 콘라드와 함께 있었던 모양이었다.
“뻥이야.”
[예?]
[뭐?!]
“배신자를 색출하기 위해서였어. 그보다 배신자가 누구인지 알아냈거든. 발자크 오라버니, 카인로드에게 사람을 보내.”
[카인로드 숙부가 배신자야?!]
발자크가 꽥 소리쳤다.
“그래, 그러니까 빨리—”
[아니, 그럴 리 없어. 카인로드 숙부일 리는 절대로 없다고!]
“……무슨 소리야?”
[요슈아가 카인로드에게 연락했는데, 그 조카인 테드 마딜로 녀석이 받더라고.]
“테드?”
[그래. 마독은 카인로드가 감염되었던데. 실험하다 일이 생겼나 봐. 벌써 2년째 앓고 있다더라.]
“…….”
[카인로드 숙부는 네가 걱정할까 봐 지금껏 숨겼던 모양이야. 그래서 마리 추적은 테드에게 시켰던…… 어?]
“‘어?’ 는 무슨 ‘어?’ 야! 그럼 테드잖아!”
[제기랄, 이 새끼가……!]
뚝, 통신이 끊어졌다.
나는 그대로 스르륵 주저앉았다.
심장이 쿵, 쿵, 쿵, 정신없이 뛰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한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다행이야. 다행…… 정말 다행…….’
떨리는 손으로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올렸다.
‘카인로드 숙부가 아니었어.’
지난 삶들처럼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지 않았다.
가슴이 벌벌 떨리는 중에도 그런 안도감이 들었다.
그때였다.
“여기서 뭐 하는 거니?”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일라의 목소리였다.
나는 흠칫, 굳어져서 그녀를 돌아보았다.
아일라가 팔짱을 낀 채로 내게 다가왔다.
뒤에는 사람인지, 짐승인지 알 수 없는 자들이 함께 있었다.
“뭐 하고 있느냐니까.”
“…….”
“내 말이 안 들리는 거니, 벨마?”
벨마?
‘이 하녀의 이름이 벨마인가?’
“예, 예, 아가씨. 저, 그게…….”
순간, 목에 검이 들어왔다.
“왜 쥐새끼처럼 이곳에 숨어들었지?”
“그게, 그러니까…… 소, 소식을 전하려고……!”
“소식?”
“예, 바란의 시녀들을 염탐하는 중에 들었습니다. 에릴로트 아스트라가 총애비와 접선한다고 합니다. 해서 급히 연락하고자 왔는데, 이미 주인님께 소식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뭐야? 빌어먹을! 따라와라!”
이 3세는 악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