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3세는 악역입니다-283화 (284/390)

283화.

‘달리아가 맞아.’

저 표정, 저 눈빛.

그리고 여름의 초록을 닮은 녹안…….

내가 알던 그 달리아가 확실했다.

‘그런데 누구의 몸인 거지?’

마사인가, 마리인가.

‘제길, 어느 쪽인지 모르겠어.’

마리는 이공간에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자랐는지 알지 못한다.

마사는 종종 초상화를 받아봤는데, 그림인 터라 완벽하게 실제의 모습과 같진 않았다.

게다가 두 자매는 모친이 쌍둥이로 속였던 만큼, 엄청나게 닮았다.

‘마리인가? 아니면 마사?’

둘 중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달리아를 빤히 쳐다봤다.

달리아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내가 왜 여기에…… 만취해서 촬영장에라도 들어왔나?”

중얼거리며 일어나려던 그녀가 “윽!” 신음했다.

그리미에가 다정한 표정으로 달리아를 쳐다봤다.

“아아, 움직이려 하지 마라. 설명은 차차 해줄 테니 너는 휴식을—”

“설명은 제게 하셔야겠는데요.”

내가 차갑게 말하자, 그리미에가 나를 흘끗 쳐다봤다.

아일라는 코웃음을 쳤다.

“단신으로 우리 모두와 맞설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나? 감히 어디서……!”

“닥쳐.”

“감히……!”

“네 입에선 썩은 내가 나거든.”

“이, 이게!”

아일라의 피부 위로 가시가 돋아나기 시작했다.

흥분했더니 융합한 몬스터를 제어할 수 없는 모양이다.

그러자 아일라의 뒤에 있던 후드 몇이 낄낄거렸다.

아일라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소리쳤다.

“더러운 피가 주제도 모르고……!”

“제발 생각을 하고 말해, 아일라.”

“뭐?”

“넌 인명록에서 이름이 지워졌으니 평민이야. 게다가 금술을 행한 범법자지. 네 논리로 따지면 넌 시궁창이지.”

그러자 아일라의 뒤에 있던 누군가가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

아일라가 그를 노려보았다.

“닥치지 못해?”

“그쪽이나 닥치라잖아. 입에서 냄새가 난다고.”

“너……!”

그때였다.

“그만.”

달리아에게 옷을 덮어준 그리미에가 입을 연 것이다.

나를 쳐다본 그가 말했다.

“조카님이 궁금하시다면 대답해주어야지. 그래, 뭐가 궁금하실까.”

“아일라가 여기에 있는 이유.”

“…….”

“당신이 유배지를 벗어난 이유.”

“…….”

“당신 딸이라는 그 아이.”

“…….”

“그리고 마리를 어떻게 한 건지 대답해—!”

그리미에가 픽 웃었다.

“이제 속을 숨길 생각조차 없는 모양이구나.”

“그쪽이 속을 숨기지 않으니까요.”

그리미에가 하하 웃었다.

“정말이지 넌 데이몬드를 빼닮았구나. 겁이 없는 점이 특히 그래.”

그리미에의 주변에 있던 자들이 공격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자 그리미에가 뒷짐을 지며 말했다.

“그럴 것 없다.”

“하지만 주인님……!”

아일라가 흠칫 소리치니, 그리미에는 눈썹을 까딱 들어 올렸다.

“너는 느끼지 못했느냐.”

“예?”

“근경에서 느껴지는 흉악한 기운 말이다.”

“설마 저 계집이……!”

“그래, 용이다.”

그리미에가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코앞까지 다가온 그가 물었다.

“전쟁이라도 할 셈이었나.”

“그럴 리가요. 제 몸을 지키기 위함이었죠.”

나는 그리미에가 지하도에 숨겨둔 것들을 보았다.

미쳤다고 그만한 것들을 소유한 너와 싸우겠어?

라곤은 위협용이다.

그리고 위협은 확실히 먹힌 듯했다.

그리미에는 나와 싸울 생각이 없어 보였다.

“좋아, 질문에 대답해주마.”

“…….”

“아일라는 본래 내가 데리고 있었단다. 죄를 지었어도 피가 섞인 조카지. 언젠가 아버님께서 용서하실 날을 기다리며 보호 중이었다.”

“그렇게 핑계를 대시겠다고요? 할아버지에게 그 말이 먹힐 거라고 생각하세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니, 염려하지 마라.”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너야말로 무슨 자신감으로 나의 딸을 숨겼느냐.”

“……!”

그리미에가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나는 그의 손을 탁, 쳐냈다.

그러자 그리미에는 재미있다는 듯 짙은 미소를 머금었다.

“네가 내 딸을 숨기고 있었다는 것을 아버님께서 아신다면, 너 또한 그 분의 분노를 살 터.”

“…….”

“내게만 약점이 있는 것은 아니지. 그러니 이렇게 할까.”

“…….”

“너는 일이 해결될 때까지 아일라의 일을 함구해라. 하면 나 또한 네가 내 딸을 숨기고 있었다는 것을 잊어주마.”

“…….”

“난 네가 내 딸을 숨겼다는 증거들을 확보하고 있단다, 에릴로트.”

그리미에가 허리를 굽혀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소름 돋도록 차가운 시선이었다.

“피차 입을 열어서 서로 득 볼게 없지 않겠느냐.”

“당신과 난 달라. 난 당신에게서 마리를 지키려고 했던 거였으니까.”

“그래?”

“그래. 당신이 마리의 모친에게 인체 실험했다는 것을 알고 있어. 할아버지가 세상에서 제일 혐오하는 일이지.”

“증거는?”

“…….”

그리미에가 하하 웃었다.

“증거 없는 말을 믿어줄 사람은 없지.”

“없을 것 같아요?”

“블러핑은 그만해라. 있다고 해도 넌 지금 증거를 꺼내지 못해.”

“…….”

“영민한 너는 알겠지. 지금으로선 나와 데이몬드가 맞붙어선 안 된다는 것을.”

“…….”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그리미에가 픽 웃었다.

“그럼 장원에서 다시 보자꾸나. 그때 정식으로 달리아를 소개하마.”

그리미에가 뒤돌아 달리아에게 향했다.

그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 애를 안아 들었다.

그러자 주변의 사람들이 비죽, 나를 비웃으며 가호석을 꺼냈다. 색으로 보아 이동의 가호석인 듯하였다.

그들은 곧 희뿌연 빛과 함께 사라졌다.

홀로 남은 나는 이를 악물었다.

* * *

나는 한지혁을 챙겨 관할성으로 돌아왔다.

관할성에서 날 기다리던 사람들이 급히 다가왔다.

“에릴로트! 그리미에가……!”

“들었어.”

“들었다고?”

발자크가 눈을 크게 떴다.

“응, 부족 마을에서 만났거든. ……달리아도 보았고.”

“제기랄…….”

발자크가 인상을 찌푸렸다.

요슈아는 드물게 싸늘한 얼굴로 말했다.

“황제가 그리미에를 황도로 불러들였어. 달리아를 소개한 후 황도 제1저택으로 간다고 해.”

“무슨 거래를 한 건지 들었어?”

“아직. 그보다 공작성에서 호출이 왔어.”

“달리아 때문이겠지…….”

“응.”

발자크가 걱정 어린 얼굴로 물었다.

“어떻게 할 거야?”

“빠질 순 없지.”

이럴 때일수록 할아버지와 혈족들이 중요하니까.

나는 콘라드를 쳐다봤다.

“부족 마을에서 데려온 아이가 있어. 충격을 받은 듯하니 잘 보살펴줘.”

“아이를 데려오셨습니까?”

“그래, 그리미에가 마을 사람들을 죄다 납치했다는 증언이 필요할 때가 생길지도 모르니까.”

“일자리를 내줘야겠군요.”

“응.”

나는 엉망이 된 옷만 급히 갈아입고, 공작성으로 향했다.

공작성은 떠들썩했다.

물론 달리아의 등장 때문이었다.

혈족들은 대광장에 있었다.

우리 남매가 들어가자, 사촌들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제일 먼저 달려온 리앙틴과 디오네라가 말했다.

“에, 에릴로트! 큰일이야! 백부님께 딸이 있었대! 죽은 첫사랑이 숨겨서 키우고 있었다지 뭐야!”

“……그렇구나.”

디오네라가 주변을 훑어보고 목소리를 낮췄다.

“그래서 지금 난리가 났어. 외숙부님에게 자식을 입양시켜서 후계자로 만들려던 사람들이 혼이 나갔거든. 엄청나지?”

함께 이야기를 들은 리앙틴이 쯧쯧 혀를 찼다.

“그들만 큰일이겠니?”

“응? 아니야?”

“아니지. 자식이 없어서 후계 서열에서 밀렸던 장남에게 아이가 생겼어. 심지어 후계를 뽑으려는 이때!”

“아, 설마……!”

“그래, 후계 싸움이 더 커질 거야. 심지어 그리미에 백부님은 황제의 마음까지 얻으신 모양이고.”

“화, 황제 폐하의?”

“그래. 밉보여서 쫓겨났는데, 다시 황도로 돌아오라는 명을 내린 걸 보면 확실하지.”

사람들이 크게 쑥덕이고 있었다.

나는 쌍둥이와 시선을 교환했다.

우리가 생각했던 것만큼 엄청난 혼란이었다.

그때였다.

“모두 예를 갖추시오!”

드뷔시 자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할아버지가 등장한 것이다.

그 곁엔 그리미에와 달리아가 함께였다.

디오네라의 모친인 바실레 고모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어머니!”

“그래.”

“조부님께 불려가셨던 거죠? 무슨 일이에요?”

“저 애의 핏줄 감정을 했단다.”

바실레 고모는 훌륭한 마법사로, 마탑의 총책임자이기도 했다.

내가 물었다.

“어떻게 되었나요.”

잠시 침묵하던 바실레 고모가 달리아를 흘낏 쳐다봤다.

“그리미에 오라버니의 딸이 맞더구나.”

“……!”

“……!!”

다른 사람들은 물론이고 나와 발자크, 요슈아도 흠칫했다.

발자크가 내게 속삭였다.

“그럼 마리의 몸인 것 아니야? 마사는 그리미에가 아닌 다른 남자의 딸이라며.”

요슈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바실레 고모의 검증이야. 속이셨을 리 없어.”

바실레 고모는 훌륭한 인품을 가진 분.

그리미에가 세상을 속이는 데에 협조할 분이 아니었다.

나는 잠시 눈을 꽉 감았다.

‘역시 마리의 몸인 건가…….’

생각하던 나는 고개를 저었다.

“마사의 몸일 가능성이 아주 없는 건 아니야.”

“하지만…….”

“그렇잖아. 안 그러면 왜 필요도 없는 마사를 납치했겠어.”

그리미에는 놀라운 마도력을 갖고 있었다.

‘그 마도력을 이용해서 검증을 속였을 수도 있어.’

할아버지가 단상을 걸어 나왔다.

“혈족들에게 알린다.”

사람들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달리아.”

말하자, 달리아가 쭈뼛쭈뼛 할아버지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

“뭐, 뭐야……!”

“무슨…….”

할아버지의 손을 덥석 잡은 것이다.

감히 ‘그 아스트라 공작님’의 손을 저렇게 덥석 잡을 수 있었던 사람은 내가 유일했기에.

할아버지가 달리아를 빤히 쳐다봤다.

“뭐 하는 것이냐.”

“아, 손을 내미셔서…….”

“……이쪽으로 오라는 뜻이었어.”

“그렇군요.”

달리아가 민망한 듯 헤헤 웃었다.

그 애가 손을 슬쩍 놓자 할아버지는 큼, 헛기침했다.

그러곤 다시 단상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리미에의 딸, 달리아 아스트라다.”

광장이 떠나갈 듯 소란스러워졌다.

물론 소문으로 인해 예상하긴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입으로 그리미에에게 자식이 있다는 것을 확정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금월의 마지막 날, 이 아이의 이름을 인명록에 올리고, 아스트라의 모든 권리와 의무를 너희와 함께 나눌 것이다.”

리앙틴이 “어머, 어머.” 중얼거리며 우리 남매를 쳐다봤다.

“역시 장남의 유일한 자식이라 그런가 일이 빠르—”

말하던 그 애가 흠칫, 뒷걸음질 쳤다.

우리 남매의 표정이 북풍처럼 싸늘했기 때문이었다.

* * *

“하하, 이거 놀랍군요!”

“여태껏 짝을 찾지 않으시기에 무슨 일인가 하였는데, 이리 귀여운 따님을 숨겨두고 계셨기 때문입니까.”

할아버지가 내성으로 돌아간 후로도 광장은 시끄러웠다.

가신들이 재빨리 그리미에를 둘러싼 것이다.

방계들도 손바닥을 비비기 위해 그 옆을 기웃거리는 중이었다.

그리미에가 사람 좋은 얼굴로 말했다.

“딸이 있다는 것은 저도 최근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아아, 그렇습니까? 그럼 영애님은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어려서 모친을 잃고 이런저런 일을 하며 지냈던 모양입니다. 그러다 사고를 당해 기억을 잃었지요.”

“세상에, 그런…….”

“고생을 많이 한 아이이니 부디 여러모로 챙겨주십시오.”

거짓말이 술술 나온다.

팔짱을 낀 로레이나가 내게 말했다.

“그리미에 백부님 곁에 달라붙어 있는 가신들 말이야. 너희 쪽 가신 아냐?”

“응, 그러네.”

“장남이 자식까지 달고 나타나서 그런가. 네 아버지에게 충성스럽던 가신들도 단숨에 돌아서는구나.”

로레이나는 쯧, 혀를 찼다.

그러던 때였다.

“저기……!”

그리미에의 곁에서 쭈뼛쭈뼛 서 있던 달리아가 내 쪽으로 달려왔다.

달리아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안녕!”

사람들의 시선이 나와 달리아에게 집중되었다.

달리아가 내 귓가에 얼굴을 바짝 대고 속삭였다.

“아까 본 애지?”

“…….”

“다 모르는 얼굴이라 엄청 불안했는데, 그래도 잠시 봤다고 반가워서……!”

달리아가 어깨를 좁히고 헤헤 웃었다.

그러다 “아.” 하며 다시 내게 속삭였다.

“아빠가 다른 사람에겐 너와 마주쳤다고 말하지 말랬거든.”

“아빠……?”

“응, 아빠.”

남의 몸에 빙의한 건데도 아빠라는 말이 쉽게 나온다.

‘하기야, 달리아는 원래 이렇게 적응이 빠른 애였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리미에가 가신들을 이끌고 나타났다.

“벌써 에릴로트와 친해졌나 보구나.”

“네! 드뷔시 자작님께 들었는데요. 이 애가 저와 동갑이래요. 그래서 친하게 지내려고요.”

달리아가 내게 팔짱을 끼며 그리미에를 향해 말했다.

그리미에는 여전히 사람 좋게 웃고 있었다.

“그래. 에릴로트도 이 아이에게 많은 가르침을 다오.”

“아! 아빠, 그러면 성에 초대해도 돼요?”

“초대를?”

“네!”

“물론 괜찮지. 네 뜻대로 해라.”

그리미에는 나를 향해 웃었다. 그러나 눈빛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네가 네 발로 내 구역에 들어올 수 있겠느냐’라는 듯이.

‘당연히 못 들어가지. 왜냐면…….’

그때, 그리미에와 그의 끄나풀들의 통신석이 미친듯이 울기 시작했다.

통신을 연결하자, 하나같이 짠듯 발신자의 고함이 들려왔다.

[큰일입니다!]

[그리미에 관할성에……!]

[관할성에 불이 났습니다!]

그래.

그리미에 관할성에 못 가는 이유.

그건 바로 내가 불을 냈기 때문이었다.

그리미에가 지하도에 숨겨놓은 힘이 무서우면 말이에요.

화재를 내서 홀라당 태우면 된답니다!

이게 바로 오라버니들과 한지혁, 콘라드가 기함을 한 그 계획이었다.

난 씩 웃으며 그리미에를 쳐다봤다.

‘아무리 달리아를 데려와봐라.’

내가 쉽게 당해주나.

딱딱하게 굳은 그리미에가 날 쳐다봤다.

“너, 설마…….”

그래. 내 짓이다, 인마!

이 3세는 악역입니다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