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화.
그리미에 측도 기묘한 분위기를 느끼는 모양이었다.
저들이 바짝 긴장하여 주변을 경계했다.
“무슨 짓을 했지?”
마시타브바의 형 쪽이 물었다.
‘내가 대답해주겠냐?’
이쪽 패를 까는 어리석은 짓을 할 리가 없지.
마시타브바의 동생 쪽이 내 쪽으로 빠르게 파고들며 소리쳤다.
“대답할 생각이 없다면 하게 만들어주지!”
챙!
할러드의 창과 동생 마시타브바의 검이 격렬하게 부딪쳤다.
“치우지 그래, 아저씨?”
그러자 켄달이 동생 마시타브바의 뒤를 잡았다.
“아저씨도 아저씨들만의 오기가 있어서 말이야.”
“아저씨인 건 인정하는가 보지?”
할러드와 켄달이 동생 마시타브바를 막는 동안 나는 한지혁에게 소리쳤다.
“지혁아, 이쪽이야!”
바닥에 주저앉아있는 한지혁에게 그리미에가 다가가고 있었다.
한지혁은 새파란 얼굴로 손바닥으로 땅을 짚으며 슬슬 물러나고 있었다.
“내, 내가 갈 수 있었으면 진작에…….”
그리미에와 한지혁의 힘은 생쥐와 사자만큼이나 차이가 난다.
결코 이길 수 없는 자를 만난 공포심.
공포심이 한지혁을 얼어붙게 만든 것이다.
‘젠장!’
나는 한지혁을 향해 내달렸다.
그를 향해 달리는 동안 장막의 병사가 가로막았지만, 나는 그의 어깨를 짚고 재빨리 뛰어넘었다.
‘난 무능력자 출신이거든?’
아주 어릴 때부터 죽어라 회피 훈련을 했다.
그리미에가 막 한지혁을 잡으려던 그때.
때맞춰 달려온 내가 한지혁의 옷깃을 잡아당겨, 그리미에의 손을 피하게 만들었다.
“움직여!”
“나, 나도 그러고 싶은데……!”
한지혁의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나는 한지혁을 등 뒤로 숨기며 그리미에를 노려봤다.
“그렇다거든요? 오지 마세요.”
“그럴 수야 없지. 저 자와 나는 할 얘기가 많거든.”
“이런, 이 녀석 말이 많아서 피곤한 대화일 텐데요—!”
소리치며 나는 그리미에를 향해 구속용의 마도구를 내던졌다.
그러나 마도구는 그리미에를 구속하기는커녕, 몸에 닿기 직전에 가루가 되었다.
상관없다.
어차피 마도구에 큰 기대는 없었으니까.
신경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 만들려는 거였지.
‘그리고 이것도 네 신경을 다른 곳에 돌리기 위한 수다!’
“옴브레!!”
소리치자 옴브레가 달리아의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와 그녀를 단숨에 삼켜버렸다.
“어? 어어? 아, 아빠! 아빠—! 꺄악, 싫어……!”
옴브레도 그림자 마물.
삼킨 인간에게 부정적인 호르몬을 촉진한다.
인간의 불안과 공포는 그림자 마물에게 최고로 맛있는 식사니까.
그리고 달리아는 이제 주인공 자리를 잃은 평범한 여자애.
저 몸이 마리의 것이든, 마사의 것이든 한 번도 제대로 단련하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아직 영혼이 육체에 완벽하게 정착하지 못했겠지.
이게 무슨 뜻이냐면…….
‘저 상태로 두면 얼마 안 되어서 정신이 붕괴할 거다.’
일부러 다른 세상에서 데려온, 그리미에의 소중한 저 영혼이 말이야!
아니나 다를까 그리미에는 황급히 달리아를 쳐다봤다.
나는 그 틈에 한지혁을 질질 끌어냈다.
“다리에 힘 좀 줘봐!”
“저, 저 눈…… 저 눈이 어떻게 사람 눈이야…….”
“지혁아.”
“죽일 거야. 저 자는 날 죽이고 말 거야. 나를, 저 자가…….”
“한지혁—!”
혼이 나가서 중얼거리는 그에게 고함을 내질렀다.
그제야 한지혁이 퍼뜩 날 쳐다봤다.
나는 양손으로 한지혁의 뺨을 탁, 내리쳤다.
“내가 널 지킬 거야.”
“…….”
“내가 언제 내뱉은 말을 지키지 못한 적이 있었니?”
그가 멍하니 나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지혁아, 너는 내게 또 다른 아빠고, 또 다른 오빠고, 때로는 언니고, 친구고, 선생님이었어.”
“…….”
“넌 내 가족이야. 내가 가족을 지키지 못한 적이 있었어?!”
“……아니.”
한지혁이 제 어깨를 붙잡고 있는 내 손목을 잡았다.
“아니!”
한 번 더 힘주어 말한 그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됐어, 이제 공포는 가셨다. 한지혁은 움직일 수 있어.’
물론 내 등 뒤에 딱 달라붙어 있지만.
가호를 발동했다.
<최약체에서 최강체로>의 1화가 활성화되었다.
변화의 시작.
‘이제 세계는 한지혁의 편이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그리미에의 공격이 날아왔다.
나는 재빨리 마도구를 작동해 결계를 발동했다.
그러나 그리미에의 공격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계가 산산조각 나고, 이어서 돌덩이들이 다시 날아왔다.
마구잡이로 깨져있는 터라 몇몇 돌덩이는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나는 돌이 뒤로 넘어가지 못하도록 팔을 펼쳤다.
그러며 옴브레 쪽을 쳐다봤다.
실체화된 옴브레가 널브러져 있었다.
달리아는 장막 병사들의 부축을 받는 중이었다.
‘젠장 3분을 못 버티네. 아빠는 어디에 있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땐, 그리미에가 아빠를 돌무더기 속에 구속해 놓았었는…… 어?
‘아빠가 없어?’
돌무더기 속에서 얼핏 보이던 아빠의 머리카락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는 건…….
그런 생각을 하던 때였다.
<최약체에서 최강체로>의 서술이 바뀌기 시작했다.
데이몬드 아스트라는 강한 남자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바였다.
단신으로 1천 군사를 물리친 일은 전설이 되어 회자되고 있다.
엄청난 공격력의 가호 <분해> 뿐만 아니라, 평범한 사람과는 비할 수 없는 마력량, 숱한 전투와 훈련으로 가다듬어진 육체.
그를 강자라고 부르는 이유는 많았지만, 그 중 가장 뛰어난 건 가호의 숙련도였다.
그날, 한지혁은 보았다.
5단계를 넘어 초월의 단계에 발을 걸친 전설적인 힘을……!
‘초월의 단계?’
초월의 단계라는 말은 내가 봤던 그 어떤 스토리에도 등장하지 않은 단어였다.
바람이 불어닥쳤다.
먼지가 휘날렸는데…… 먼지? 아냐, 이건…….
내 앞으로 불어온 먼지가 빛무리가 되었고, 곧이어 인간의 형상으로 변했다.
“어?”
“……!”
그리미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빠였다.
돌무리 안에서 몸을 분해해 가루로 만든 아빠가, 내 앞에서 재구축한 것이다!
아빠가 몇 차례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이런 것이었나.”
“너…….”
그리미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가 소리쳤다.
“마시타브바!”
형과 동생이 그리미에의 뒤로 이동했다.
형제의 목에 걸린 펜던트가 가볍게 춤을 췄다.
‘이동의 가호석.’
마시타브바들의 발밑으로 스멀스멀 불온한 연기가 흘러나왔다.
‘저건……!’
고대의 기억에서 본 것이다.
13사자의 딸, 그러니까 나를 수행하던 어린 수호자들 중 ‘마시타브바’라 불렸던 쌍둥이가 시전한 힘.
고대의 쌍둥이는 이렇게 말했다.
“둘이서 하나요, 하나에서 비롯된 둘.”
한 사람만 있어서는 쓸 수 없는 가호.
두 사람이 한 번에 쓸 수 있는 엄청난 힘.
“피해! <공명>이다……!!”
소리치자, 켄달이 흠칫 자신의 가호 <바람>을 이용하여 우리 병사들을 한데 모았다.
그리고 바람의 벽을 만들었다. 신성 결계보다 물리적으로 강력한 방어벽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크아아아아악—!”
병사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나는 새파랗게 질려 양 주먹을 말아쥐었다.
‘장막이 어린 수호자들의 힘을 이용할 수 있는 거야?’
이건 사기잖아!
어린 수호자들의 힘이 얼마나 엄청났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
저들의 <공명>만 해도 말도 안 되는 능력이었으니까!
<공명>.
두 사람이 동시에 상상하는 바를 현실로 이루어주는 엄청난 능력이었다.
달리아는 멍하니 마시타브바들을 쳐다봤다.
“머, 멋지다…….”
한지혁이 내 등 뒤에서 중얼거렸다.
“이, 이게 뭐야. 진짜 이길 수 있는 거야?”
“걱정하지 마.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널 지킬 거야, 내가.”
안심시키기 위해 그렇게 말해지만, 사실 나도 머릿속에서 경고등이 울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지?’
손발이 벌벌 떨린다.
저 엄청난 힘을 대체 어떻게 이길 수 있단 말인가.
나는 크게 심호흡했다.
마시타브바들이 동시에 눈살을 찌푸렸다.
“이 와중에도 심호흡할 정신이 있다니, 놀라운걸.”
동생이 하하 웃었고, 형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주시했다.
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나는 이 전투의 또 하나의 지휘관.
지휘관이 겁먹으면 사기가 바닥을 친다.
블러핑을 해서라도 군사들을 안심시키는 것이 중요했다.
이 모든 게 아빠의 가르침이었다.
“에릴로트.”
“네…….”
“왜 그리 심통이 난 것이냐.”
“저는 아무리 수련해도 발자크의 <강화>나, 요슈아의 <압축> 같은 가호를 이길 수 없잖아요. 진짜 치사해…….”
“그래?”
“당연하죠!”
어느 날 훈련 중에 이런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러자 아빠에게 강도 높은 훈련을 받고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발자크와 요슈아가 나를 쳐다봤다.
“치사한 건 너거든!”
“내가 뭘?”
“가호도 없는 네가 지는 건 당연한 일이잖아. 근데 매번 승부를 겨룰 때면 네가 이긴다고. 온갖 치사한 방법을 다 써서!”
‘그래, 나는 그렇게 이겨왔어.’
계속해서 보고, 생각하고, 작전을 짜고…… 넘어져도 다시 한 번 반복했다.
언제나 내 힘은 <보는 것>, 그리고 <온갖 방법을 전부 써볼 때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빠르게 주변을 둘러봤다.
그제야 이상한 점이 보인다.
‘내가 마시타브바라면 아빠를 제일 먼저 공격했을 거야.’
그런데 왜 아빠를 두고 군사들을 공격했지?
게다가 칼리와 할러드도 별로 영향을 받고 있지 않다.
“가호의 단계! 아빠, 가호의 단계가 저들보다 높은 자들은 영향을 받지 않는 거예요!”
그러자 칼리와 할러드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두 사람이 마시타브바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물론 장막의 다른 병사들이 막았지만 역부족이었다.
칼리와 할러드는 이그리츠 군의 중심, 엄청난 강자였기 때문이다.
그리미에는 마시타브바들을 도울 수 없다. 아빠가 그를 상대 중이니까.
나는 또 유심히 전투를 살피다가 소리쳤다.
“방어하지 못하고 있어! <공명>에 집중하기 위해서 움직이지 못하는 거야! 잠깐…… 집중?”
꾀가 하나 떠올랐다.
‘해볼까……? 그래, 해보자.’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지.
“야, 마시타브바의 동생!”
“…….”
“너 바지 지퍼 열렸다!”
헛소리였는데, <공명>에 의해 사로잡혀 있던 병사들이 풀려났다.
“……?”
“뭐, 뭐야?”
“바지 지퍼가 뭔데?”
“글쎄요…….”
병사들은 물론이고, 칼리와 할러드까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나는 히죽 웃었다.
“얘들아! 저것들, 조금만 다른 생각이 들어도 <공명>을 쓰지 못해! 계속 떠들어!”
마시타브바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반면에 우리 군사들은 히죽히죽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이그리츠 군은 사람 성질 긁기가 특기인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새끼 당황했나 본데요. 형님?”
“야, 우냐?”
그리고 이그리츠 군 외에도 난 ‘혓바닥을 뽑고 싶은 남자 1위’에 능히 선정될 만한 사람을 알고 있다.
난 한지혁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리미에에게 위협받고, 병사들에게 노려져 잔뜩 설움 당하던 그가 포효하듯 소리쳤다.
“너희 아가씨 X나게 쓸모없네—!!!”
달리아도.
달리아를 불러온 그리미에도.
달리아라면 뭐든 다 해줄 것 같은 마시타브바들도.
다른 장막의 병사들도 표정이 딱딱해졌다.
‘훌륭한 광역기다!’
잔뜩 화가 난 마시타브바들은 더 이상 <공명>을 사용하지 못했다.
한지혁은 울분을 터뜨리듯 태권도의 주춤서기 자세로 엄청난 고함을 내질렀다.
“야, 너희 아가씨는 우리 아가씨랑 비교도 안 된다—!!”
아빠 때문에 그리미에는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상황.
마시타브바들의 가호는 한지혁의 저주 받은 혓바닥으로 봉인.
그렇다면 군사들의 싸움이었는데, 이그리츠의 정예병들을 그리미에의 군사들이 상대할 수 있겠는가?
‘됐어, 흐름이 돌아왔다.’
나는 빠르게 달려가 달리아의 목을 퍽, 잡고 등 뒤에 올라타 제압했다.
그 순간이었다.
“에릴로트!”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불빛들이 모였다.
데콘스 관할령의 군사들을 끌고 온 리앙틴이었다.
그 옆엔 데콘스 숙부가 있었다.
‘전군을 끌고 온 거 아냐?’
숙부가 근엄히 말했다.
“언젠가 한 번은 너를 도울 것이라 말하지 않았느냐.”
태양회에서 리앙틴을 도와줬던 일로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리앙틴이 빽 소리쳤다.
“야, 이 계집애야! 여기 계곡이 몇 개인데 계곡이라고만 말하고 끊어! 찾느라 혼났잖아!”
리앙틴의 주변에서 떠돌고 있는 마도구가 눈에 들어왔다.
“언니, 그거 설마……!”
“네가 도움을 청할 정도면 엄청난 세력일 줄 알았지. 그런 세력이 어떻게 장원에 소리소문없이 쳐들어왔겠니? 그렇다면 당연히 다른 관할령과의 전투라는 것 아냐.”
“…….”
“예산을 팍팍 투자해서 구매한 ‘영상 송출기’다, 이것들아! 어디 조부님의 눈앞에서 싸워봐!”
그러고 보니까 리앙틴은 옛날의 나만큼이나 약골이었지.
그리고 나만큼이나 치사하고, 열정적이다.
약한 자신과 관할령의 처지를 알기에 몇 수 앞서 생각할 줄 아는 아이란 것이다!
‘이뻐 죽겠네!’
리앙틴은 재빨리 달려왔다.
그리고 내 밑에 깔려 있는 달리아를 보더니 헹, 코웃음을 쳤다.
그녀가 달리아의 머리를 팍! 찍어눌렀다.
“넌 죽었어~!”
초반부 악역 출신 리앙틴.
메인 악역 출신의 나.
‘악역들은 악역들만의 합이 있단다.’
데콘스 관할령의 군사들이 장막의 병사들을 제압하는 동안, 통신석이 울었다.
나는 “꺅, 꺄악!” 비명을 내지르며 버둥거리는 달리아를 제압하며 통신을 받았다.
[연명장, 손에 넣었습니다!]
콘라드의 목소리였다.
와아아아아—!!
우리 군사들이 일제히 함성을 내질렀다.
우리의 승리였다.
이 3세는 악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