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화.
* * *
마시타브바들과 그리미에, 달리아는 한 마차에 구금되어 이동했다.
동생 마시타브바가 이를 악물었다.
“확실히 간악하군.”
달리아는 울먹울먹한 얼굴로 제 부친을 쳐다보았다.
“이제 어떻게 해요? 하, 할아버지가 화내실까요?”
“…….”
“아빠아…….”
“염려하지 마라. 황제와의 거래를 주도 중인 나를 쉽게 벌할 순 없을 터.”
“그래도 저를 싫어하시면 어떻게 해요…….”
“후계 자리를 건 전쟁이다. 이만한 전투가 벌어지는 것은 예상하고 계셨을 것이다.”
“정말요?”
달리아가 두 손을 뻗어 팔짱을 끼려 했을 때였다.
그리미에가 팔을 빼냈다.
달리아가 흠칫, 그리미에를 쳐다봤다.
“아빠……?”
“…….”
“왜, 왜 그러세요?”
“……전투 후인 탓에 가호 조절이 안 되니 물러서 있으렴. 소중한 네가 다치게 둘 순 없으니.”
“아……. 뭐예요, 깜짝 놀랐잖아요.”
달리아가 헤헤 웃으며 그리미에의 어깨에 기대었다.
그리미에는 눈을 감았다.
‘전투 중에 나타난 빛. 그건 세계가 다른 자를 구원자로 택했다는 것이겠지.’
에릴로트의 하인에게 손이 닿자마자 빛이 퍼졌다.
게다가 그 하인을 지키려든 에릴로트.
그리고 그 애가 부른 그 특이한 이름…….
“한지혁!”
‘달리아와 같은 자가 에릴로트의 곁에 있었단 말인가.’
대체 언제부터 그 자를 포섭하고 있었을까.
대체 언제부터, 어디까지 대비를…….
“아빠, 저 너무 피곤해요.”
“…….”
“으으응, 피곤하다고요…….”
“아빠, 오른쪽이에요! 마시타브바의 동생이……!”
“할러드! 7시 방향에서 그리미에의 몬스터 떼가 와!”
전투에서의 에릴로트는 세계의 흐름을 읽는 능력을 제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뼈를 깎는 수련이 있었겠지.
위기 속에서도 침착하게 상황을 읽고 있었다.
‘그 애가 내 것이었더라면…….’
그리미에의 손등에 핏줄이 불거졌다.
그리미에 아스트라의 모친은 펜실텅 후작가의 외동딸이었다.
선황제와 혼약이 예정되었던 여인이었는데, 그녀 스스로가 아스트라의 사람이 되길 원했던 것이다.
“크로노스 아스트라를 제게 주세요. 하면 당신의 며느리가 되겠습니다.”
선대의 장남을 거절하고, 현 공작 크로노스 아스트라를 고집했다.
다들 정신이 나갔다고 말했으나, 그녀에겐 확신이 있었다.
강력한 <미래 예지>.
선대 공작마저 손에 넣고 싶어 한 엄청난 가호가 말해주었으니까.
다음 대의 아스트라 공작은 크로노스라고.
저 근사한 사내가 이 제국을 호령하게 될 것이라고……!
그렇게 그들의 장남, 그리미에 아스트라가 태어났다.
자신의 아들을 처음으로 품에 안은 날, 그녀는 비명을 내질렀다.
“왜? 어째서!!”
자식을 품에 안은 순간 ‘들었던’ 것이다.
다음 대의 아스트라 공작이 되지 못하는 미래를.
미래를 바꾸기 위해 온갖 수를 썼다.
선대가 억지로 만든 남편의 사생아들을 처리하고, 아들을 최고로 교육했다.
아들은 훌륭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뛰어난 지략과 열정까지 다음 대의 공작으로서 부족함이 없었다.
미래는 바뀔 것이다.
안심하던 그때…….
데이몬드 아스트라가 태어났다.
남편은 아이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이번에도 별 의미 없는 아이겠지.
그러나 아이와 눈이 마주친 순간 또 한 번의 미래가 들렸다.
적오기 아래에서 아스트라를 호령하는 다음 대의 공작이 저 아이라고.
다음 대의 공작은 제 아들이 아니었다. 천한 저 아이가 적오기를 계승하게 될 것이다.
“어머니, 또 술을 드십니까.”
“좋은 날이지 않니. 네 아비가 아스트라 공작이 된 아주, 아주 기쁜 날. 아하하, 아스트라 공작……!”
“…….”
“이제 그년을 성으로 데려오려나. 왜 있지 않니. 너—무 소중해서 감히 혼인할 생각도 못하고 산에 숨겨두고 금이야, 옥이야 지키던 그년.”
“그 여자는 어머니께서 죽이지 않으셨습니까.”
“아아, 그래. 내가 죽였지. 그년이 아니면 결혼은 죽어도 하지 않겠다고 해서 내가 죽였어.”
“어머니.”
“그 남자의 앞에서 갈기갈기 찢어주었단다. 선대가 말이야. 그 남자를 제압해서 보여주었어. 내가 그렇게 해달라고 했지. 내가…….”
어머니는 점점 미쳐갔다.
“그리미에. 내 사랑스러운 그리미에. 어미는 너뿐이야.”
“…….”
“도망치자. 그래, 여기선 너도 행복하지 않겠지. 알아, 난 ‘들었거든’.”
“…….”
“너는 결코, 결코 데이몬드를 이기지 못해. 그 놈에겐 엄청난 딸이 있거든.”
“…….”
“세상의 흐름을 읽고, 세계의 사랑을 받고, 이 어두침침한 아스트라를 바꿀…… 구원자.”
‘내가 공작위에 오를 수 없다고? 저 바보가 공작이 된다고?’
그럴 리가.
자신은 공작의 가장 뛰어난 아들이었다.
그리고 어릴 때만해도 데이몬드의 능력은 형편없었다.
공격형 가호에 신성 가호까지 가진 자신과 달리, 데이몬드는 사물의 모서리를 조금 분해할 뿐인 하찮은 가호를 지녔으니까.
제 쌍둥이인 리시안만도 못해서, 친모에게 학대받는 멍청이.
그런 놈이 나를 이기고 아스트라의 모든 영광을 거머쥔다고?
어머니의 예지가 틀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데이몬드는 점점 등 뒤로 다가왔다.
점점…… 점점 더.
“그리미에! 세상에, 얼굴이 이게 다 무엇이냐! 데이몬드와의 전투 훈련에서 졌다고 하더니, 너를 이 꼴로 만든 것이냐?!”
“……어떻게 ‘듣는’ 겁니까?”
“뭐?”
“미래요. 어떻게 듣는 것이냐고요.”
“……내 가호는 정확히 말하면 <미래 예지>가 아니야. <수호성과의 대화>이지.”
“수호성?”
“네가 정 원한다면 내 수호성을 보여주마. 내 ‘이노락스’는 여러 가지 특별한 금술을 알고 있거든.”
어머니는 금술을 통해 자신의 수호성을 보여주었다.
이노락스.
처음으로 그 여자를 만난 날이었다.
[아아, 귀여운 그리미에. 너는 꼭 ‘그 분’의 어린 시절을 보는 것 같구나.]
“그분?”
[그래, 그 분. 사랑하는 그 분 말이야. 있지, 그리미에…….]
이노락스는 어머니 모르게 그리미에의 귓가에 속삭였다.
[네 수호성이 되고 싶어. 너라면 나를 더 잘 쓸 수 있을 텐데.]
“그런 방법이 있단 말이야?”
[그래. 방법은 있어. 나는 그 방법을 알고 있지. 귀여운 그리미에, 네가 원한다면 알려주마. ……그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괜찮다면.]
방법은 간단했다.
가호를 가진 자가 죽는 순간, 수호성과의 연결이 느슨해진다.
그때 수호성을 빼앗아 올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그날 그리미에는…….
……세상의 전부가 자신이라는 여자를 살해했다.
그리미에는 달리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노락스.’
[그래.]
‘저 아이는 구원자가 될 수 있는 그릇인가.’
[불안하구나, 나의 그리미에.]
‘허튼 소리.’
후후 웃는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허공을 부유하다가 그리미에의 어깨를 끌어안은 이노락스가 말했다.
[에릴로트, 그 계집이 만든 ‘구원자’는 급조되었지. 네 딸이 가호를 사용할 수 있다면 언제든 세계는 다시 구원자로 네 딸을 택할 거야.]
이노락스는 까르륵 웃으며 그리미에의 어깨에 턱을 괴었다.
[불안할 필요가 있을까. 넌 데이몬드가 가졌어야 할 모든 것을 빼앗았잖니. 그보다 어서 그년을 죽여줘. 응?]
‘…….’
[감히 나의 세일론을 수호성으로 둔 계집을 죽이고, 나와 세일론님이 함께 할 수 있게 해줘. 그게 우리의 약속이잖아?]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았다.’
[대체 언제까지 기다리란 말이야—!!]
‘물러가라.’
[모든 것을 전부 알려주었잖아! 고대의 모든 마법과 금술, 수호성, 모든 것을! 약속을 지켜! 더러운 그리미에—! 더러운 약탈자!!]
그리미에가 마력을 갈무리했다.
꺄아아아아아—!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허공이 일그러지며 이노락스의 모습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거짓말쟁이! 더러운 녀석—! 약속을 지켜! 세일론 님! 세일론 님……!!]
얼마 지나지 않아 이노락스가 사라졌다.
이윽고 마차가 멈추었다.
공작 직속군이 그리미에와 달리아를 먼저 끌어냈다.
“공작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빠…….”
“가지.”
달리아와 그리미에가 먼저 떠났다.
마시타브바의 동생이 인상을 찌푸렸다.
“쿠말 님께 소식을 알리고 공격을 개시하는 게 좋겠다. 저러다 소중한 분께서 다치기라도 한다면 우리는…… 형?”
“…….”
“형.”
“……그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마시타브바의 형이 창밖을 내다보았다.
데이몬드가 딸을 말에서 내려주고 있었다.
“고마워요, 아빠.”
“…….”
“왜 그렇게 못마땅한 표정이에요?”
“그리미에를 죽일 걸 그랬어. 네가 다쳤잖아.”
“헉! 쉿, 사람들이 들어요.”
“들으라지.”
픽 웃는 에릴로트에게 시선이 고정되었다.
마시타브바의 형이 중얼거렸다.
“저 애.”
“호칭이 너무 다정한 것 아냐? 감히 우리의 메시아에게 손을 댄 찢어 죽일 계집이지.”
“……뭐가 됐든.”
마시타브바의 형이 동생을 쳐다봤다.
“전투 중에 세계의 흐름을 읽는 것 같았어.”
“헛소리. 그건 메시아의 능력이야.”
동생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그리미에가 말했잖아. 저 계집의 가호는 <미래 예지>라고. 가호를 감쪽같이 감추고, 제 능력인 것마냥 포장했다는 말을 잊었어?”
“잊지 않았지만…….”
선대 쿠말의 말이 떠올랐다.
아직 이름을 계승하지 못한, 어린 수호자들을 앞에 두고 한 이야기가.
“초대의 수호자들은 비천했지. 그들을 직접 거두고 세상을 알려주신 분이 ‘메시아’시다.”
“그래서 수호자들이 목숨 받쳐서 메시아를 지켰군요!”
“아니, 정작 지켜진 건 수호자들이었지. 마지막 순간에도 등 뒤로 수호자들을 감추고 물러서지 않으셨단다.”
“와아…….”
“아이들아, 우리는 선조의 바람을 이루어야 한다. 인간에게 묶인 수호성을 해방하고, 그들이 다시 삶을 선물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해.”
“그리미에에게 맞서 하인을 지키던 그 모습. 마치 메시아와 같은…….”
“닥쳐—!”
동생 마시타브바가 날카롭게 일갈했다.
그가 굳은 얼굴로 제 형을 바라보았다.
“감히 그 이름을 누구에게 붙이겠다는 거야.”
“…….”
드디어 만났다.
손바닥만 한 빛이 겨우 들어오는 지하동굴에서 애타게 그리던 그녀를.
우리의 기적, 빛, 희망.
그 모든 것.
부모, 형제, 연인, 친구…… 그 무엇보다도 우선되어야 할 우리의 메시아.
마시타브바의 동생이 말했다.
“메시아가 다쳤다는 걸 알면 수호자들이 미쳐 돌겠지. 온화한 쿠말님마저 메시아라면 끔찍하시니, 곧 명이 있을 거다.”
“그래.”
“허튼 생각하지 말고 달리아 님을 지켜.”
“……그래.”
마시타브바의 형이 다시 한 번 창 밖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한 곳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으이구, 누가 보면 다리 부러진 줄 알겠네.”
“후들거려서 못 걷겠다고…… 그러니까 왜 나를 그리미에에게 달려들게 하냐?!”
“어휴, 그러다 넘어지지. 자, 업혀.”
“진짜다, 너?”
“진짜지 그럼 가짜야? 이래 봬도 전투 훈련 받는 몸이거든?”
……한지혁을 업어서 마차로 옮기는 에릴로트에게.
* * *
할아버지에게 무사한 모습만 보여주고서 난 얼른 공작성을 빠져나왔다.
‘지금 중요한 건 연명장이야.’
그리미에와 달리아를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 지금, 모든 걸 처리해야 한다.
나와 한지혁은 말을 몰아서 콘라드와의 약속 장소로 향했다.
발자크와 요슈아가 숲에 널브러져 있었다.
격렬한 전투의 흔적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나무 기둥에 기대서 쉬고 있던 요슈아가 말했다.
“이쪽에도 장막의 전투원들이 왔었어.”
수풀에 대자로 누워있던 발자크가 헉헉거리며 말했다.
“특히 한 놈이 엄청나서. 뭐랬더라…… 수후르마시?”
그것도 고대의 나를 지키던 시종 중 한 명의 이름이다.
발자크가 투덜거렸다.
“가호를 없애는 놈이어서 개고생했다고…….”
요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가호 단계가 본인보다 높은 사람까지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지만.”
그래서 다른 군사들은 전혀 못 쓰고, 오빠들이 죄다 처리한 모양이었다.
요슈아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위험했는데 중간에 난데없이 물러갔어.”
발자크도 손을 툭툭 털며 덧붙였다.
“달리아가 위험 어쩌고 하던데. 연명장을 두고 갈 만큼 달리아라면 끔찍하더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고생 많았어. 연명장은?”
“여기 있습니다.”
콘라드가 건넨 연명장을 확인했다.
방계 가문 가주들의 이름이 적힌 연명장.
배신을 우려해 군사와 무기로 본가를 응징하겠다는 결의까지 꼼꼼히 적어놨다.
‘내 손에 들어왔으니 너희는 죽었지만요.’
나는 씩 웃었다.
“그럼 시작하자.”
다 죽었어.
우리는 즉시 푸슬후르 성으로 향했다.
달리아가 쳐들어올 거란 얘기를 흘린 데다가, 빼돌린 연명장이 사라졌으니 다들 모여서 앞으로의 일을 의논 중일 것이다.
그리고 예상대로 방계 전가문의 우두머리들이 모여 있었다.
나는 회의장을 지키고 있는 경비병을 밀치고, 장내로 들어갔다.
방계들이 흠칫, 나를 쳐다봤다.
“안녕? 죽기 참 좋은 날이지?”
“에, 에릴로트 아, 아가씨 그건……!”
나는 연명장을 흔들며 말했다.
“이거? 별 거 아냐. 그냥 너희들의 위로 3대, 뒤로 3대 정도 몰살할 수 있는 증거밖에 안 되거든.”
“……!”
“뭐해?”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덜덜 떠는 방계들을 쳐다봤다.
그리고 우렁차게 소리쳤다.
“꿇어—!”
이 3세는 악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