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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3세는 악역입니다-293화 (294/390)

293화.

수호성이란걸 인지하자, 벌렁거리는 가슴이 조금 진정되었다.

‘까, 깜짝이야. 귀신인 줄 알았네.’

한지혁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뭐야. 내 옆에 뭐가 있길래…….”

그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횃불 하나에 의지하고 있으니, 지하는 매우 어두웠다.

그는 옆에 뭐가 있다는 말이 자꾸만 신경 쓰이는지 어깨를 툭툭 털었다.

[이 녀석, 겁이 엄청 많구만. 성에선 밤에 돌아다니지도 못하더만.]

“……!”

말도 하잖아!

그것도 매우 잘 들린다.

내가 처음 남의 수호성을 봤던 건, 실린과 5대5 전투 때였다.

그때에도 실린의 수호성이 말을 하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깨끗한 음성으로 들리진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잠깐만, 혹시 말도 통하나?’

“저기요.”

“뭐야, 왜?”

한지혁의 수호성이 나를 쳐다봤다.

대답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본인에게 말을 거는 줄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쪽이요. 그 한지혁 옆에 매달려 계신 분.”

[……나?]

“그래요.”

[너, 너, 설마 내가 보여?!]

한지혁의 수호성은 까무러칠 것 같은 표정으로 내게 달려왔다.

“그렇게 달려들진 말아 주실래요? 이쪽은 귀신 보는 것 같아서 좀 두렵거든요?”

[이야, 나를 보는 인간이라니! 처음이야, 처음이라고!]

한지혁의 수호성이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끼얏호! 환호를 지르며 벽을 통과하기도 하고, 샹들리에에 매달리기도 하며 오두방정을 떨었다.

[기뻐! 정말로 기쁘다고! 내가 얼마나 대화가 하고 싶었는 줄 알아? 이게 대체 얼마 만이지? 몇백 년…… 아니, 천 년은 족히……!]

누가 한지혁의 수호성 아니라고, 수다가 엄청나다.

뭐, 그리미에에게 받은 수호성이긴 했지만.

‘그것보다 저 수호성은 내 생각을 못 읽는 것 같아.’

세일론이 나의 수호성이기 때문에 생각을 읽었던 건가.

‘그런데 왜 갑자기 수호성이 보이는 거지?’

그런 생각을 하며 향로를 매만지고 있을 때였다.

한지혁의 수호성이 다시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이건 베리테잖아.]

“베리테?”

[그래, 13사도들이 사용하던 거지. 베리테는 진정한 힘을 이끌어내는 마도구거든.]

이 성물이 내 진정한 힘을 이끌어냈다는 거구나.

[베리테를 이용할 수 있는 걸 보니 넌 ‘밤’ 쪽의 인간이구나?]

“밤이요?”

[그래, 낮과 밤. 생명은 모두 낮과 밤의 성질을 타고 나잖아? 넌 아는 게 뭐야?]

내가 그런 걸 어떻게 알아!

그런 건 고대에서나 상식이었겠지!

‘그러니까 알려줘!’

너무 좋아!

나는 눈을 반짝이며 한지혁의 수호성을 쳐다봤다.

한참 그러고 있던 차에 등 뒤에서 한지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짜 왜 그래…… 미쳤어……?”

슥, 돌아보니 한지혁이 잔뜩 굳어 있었다.

“한지혁, 너 관할성에서 밤에 잘 못 돌아다녀?”

“무슨! 사나이가……!”

[거짓말이야. 하인들 사이에 귀신이 나온다는 얘기가 돌고 나서부터 벌벌 떨더라니까.]

“벌벌 떨더라는데?”

“무, 무슨 헛소리야! 누, 누가 그래!”

아니라고 펄쩍 뛰지만,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나와 한지혁의 수호성이 히죽 웃었다.

* * *

향로를 챙겨 들고서 방으로 올라갔다.

한지혁은 떨떠름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니까 수호성과 대화할 수 있다고?”

“응, 향로를 껐을 땐 또 안 보이더라고. 켤 때만 보이나 봐.”

“어쨌든 좋은 걸 얻었네. 이것저것 물어볼 수 있잖아.”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한지혁의 수호성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기요.”

[그래, 그래. 뭐든 물어봐. 뭐든 대답해줄 테니까! 대신 세 시간은 나와 떠들어줘야 한다? 알겠지?]

“……그래요. 일단 첫 번째, 어떻게 한지혁의 수호성이 되었어요?”

[네 백부가 날 넘겨줬잖아.]

“그러니까 어떻게 넘겨줄 수 있었느냐고 묻는 거예요.”

[아아, 그건 네 백부가 나를 원주인에게서 빼앗았거든.]

“빼앗아요?”

[그래. 사람은 죽기 전에 수호성과의 연결이 약해지거든. 그때, 수호성을 빼앗을 수 있어. 정확히 말하면 ‘협상해서 데려오는 것’이지만.]

“좀 더 자세히 말해줘요.”

[우리들은 말이야. 원할 때마다 언제든 인간의 수호성이 될 수 있는 건 아니야.]

“…….”

[적합한 인간이 나타날 때까지 어둠 속에서 마냥 기다려야 하지. 백 년은 우습게 기다려야 한다고.]

“아아.”

[그러니까 넘어오라는 말에 안 갈 수호성이 있겠어? 그리고 그리미에는 그 많은 수호성을 유지할 마력이 있는 인간이거든.]

“…….”

[뭐, 본래부터 제 몸에 있는 마력은 아닌 듯 하지만. 그 놈의 마력 진짜 맛없거든. 어쩔 수 없이 나눠 받고 살았지만 미식가인 내 입장에선…….]

“잠깐. 그리미에도 저처럼 수호성과 대화하는 능력이 있는 거예요? 대화를 할 수 있어야 협상이 가능하잖아요?”

[그리미에는 그런 능력은 없는 것 같던데. 협상은 이노락스 님이 하거든.]

“이노…… 락스?”

[세일론님도 참. 이 이노락스가 몇백 년 잠들어 있었다고 해도 그렇지. 놀이 수준이 너무 떨어지셨구나.]

[감히 내가 누군지 알고! 나는 사자들과 같은 뿌리에서 태어난 자! 제대로 되었다면 열셋의 사자에 포함되었을 자이노라!]

[내 잠든 동안 세상이 변했구나. 감히 인형 따위가 인간에게 반항하다니!]

‘그 여자다.’

고대의 나를 공격했던 여자.

그래서 내가 최초로 세계의 흐름을 손대게 했던 그 여자.

“그 여자의 가호는 뭔데요? 뭐길래 인간과 사사롭게 대화할 수 있죠?”

[그건 가호가 아니야. 이노락스 님은 원래 13사도 중 하나였거든. 그래서 신께 권리를 부여받았지. 생명들과 소통할 수 있는 권리.]

“권리…….”

[13사도는 종말 전쟁 때 권리를 금제 당했으니, 이제 인간과 소통할 수 있는 건 이노락스님이 유일할걸.]

수호성과 대화할 수 있으니, 그만한 마도력을 가질 수 있었구나.

몬스터와 융합하는 기술도 이노락스에게 들었음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이제 반격할 수 있어.’

일단은 다른 수호성과도 대화가 가능한지 실험해봐야겠다.

그때였다.

때마침 노크 소리와 함께 삼 형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릴로트, 황궁에서 서신이 왔어. 잠깐 들어가도 될까?”

“응, 요슈아!”

나는 얼른 문을 열어줬다.

발자크가 픽 웃었다.

“뭐야, 왜 그렇게 반겨? 벌써 내가 보고 싶었냐?”

“엄청. 엄청나게 보고 싶었지.”

“차암나!”

발자크가 으하하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리려던 찰나, 나는 오라버니들 사이에 파고들었다.

“반가워요. 수호성님들! 에릴로트예요!”

보인다, 보여!

다른 수호성도 죄다 보인다—!

* * *

[대화가 가능하다니 놀랐는 걸.]

달콤한 인상을 가진 요슈아의 수호성이 빙그레 웃었다.

[젠장, 저 녀석의 목소리가 들리잖아. 이 꼬마 때문인가? 이 꼬마에게 수호성들의 소통 창구가 되는 능력이 있나 보지?]

거친 인상인 발자크의 수호성.

[…….]

그리고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리시먼드의 수호성.

나는 헤죽헤죽 웃으며, 차를 대접했다.

[귀여운 아가씨, 우린 차를 내어줘도 먹지 못한단다. 마음은 고맙게 받으마.]

[그보다 난 고기. 고기를 먹고 싶다고. 젠장! 하루 세끼를 고기를 먹던 내가……! 뭐, 죽어서 허기는 안 느껴지지만.]

[…….]

여기에 한지혁의 수호성까지 끼어들자, 시장통이 따로 없었다.

[이야, 세 분을 이렇게 뵙게 되다니 영광입니다! 모두 13사도 밑에 계셨던 엄청난 분들이 아닙니까! 경비병 따위였던 저와는 달리……!]

내게 다정했던 요슈아의 수호성은 한지혁의 수호성을 본 체도 안 했다.

발자크와 리시먼드의 수호성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시선은 오직 차와 과자에 집중되어 있었다.

[하아, 향이 무척 좋군.]

[잠깐, 향이 느껴진다고? 가, 감각이 느껴진단 말이야?]

[……!]

수호성 셋의 눈이 번쩍했다.

그들이 허겁지겁 찻잔과 과자를 잡았다.

[느, 느, 느껴져! 맛이 느껴진다고!]

[아아, 향이…… 차 향이……!]

두 수호성은 몹시 감격해서 파르르 떨었다.

한지혁의 수호성도 허겁지겁 한지혁 앞에 있던 물잔을 잡았다.

그러나 손이 유리를 통과했다.

[뭐지? 저는 잡을 수 없는데요?]

요슈아의 수호성이 오만하게 말했다.

[고귀함의 차이일지도. 13사도의 직속 부관이었던 우리와 너 따위가 같을 순 없지 않겠느냐?]

[그, 그런가요…….]

‘고귀함의 차이?’

신이 과연 그런 거로 차등을 두었을까?

나는 혹시나 싶어 한지혁의 수호성 앞에 스콘을 밀어주었다.

“혹시 모르니까 다시 해봐요.”

[글쎄……. 그런다고 해서 될 리가…… 있잖아! 잡히잖아—!!]

한지혁의 수호성은 스콘을 잡았다.

그리고 감격한 표정으로 와구와구 스콘을 먹었는데, 나와 오라버니들의 수호성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이거 설마…….”

[맙소사, 차를 마실 수 있었던 건 이 귀여운 아가씨 때문이었군…….]

[그, 그렇다면 고기! 고기를 다오!]

[…….]

내가 뻣뻣해져 있자, 오라버니들과 한지혁이 의아한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무슨 일이야, 에릴로트?”

“뭐야, 갑자기 왜 그래?”

요슈아와 발자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발자크가 ‘수호성이라는 것들이 네게 뭔짓을 했느냐’고 묻던 찰나, 나는 어깨를 끌어안고 파르르 떨었다.

“대박. 대박이다…….”

이건 로또, 아니, 파워볼이었다!

천 년이 넘도록 아무것도 먹지 못했던 수호성.

그들에게 음식이 얼마나 간절할까.

게다가 한지혁의 수호성처럼 대화를 원하는 자도 있을 터.

“이 세상 정보…… 이제 다 내 것이겠는데?”

나는 향로를 끌어안고 소리쳤다.

“그리미에, 죽었어~!”

—하고.

오라버니들은 잔뜩 신이 난 나를 어리둥절한 얼굴로 쳐다봤다.

“나도 좀 알려주겠어?”

발자크가 시무룩하게 물어서, 나는 상황을 말해줬다.

말하면 말할수록 오라버니들과 한지혁의 표정이 점점 밝아졌다.

“그래, 정말 엄청나네.”

리시먼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

“좀 더 실험해보고 싶은 게 있는데. 기왕이면 권력자로.”

“실험?”

“응, 수호성은 인간에게 영향을 받잖아. 인간도 수호성에게 영향을 받나 궁금해. 예를 들면 호감, 적의 같은 감정, 또 약해지면 건강이 나빠지는지도.”

“그렇다면 좋은 기회가 있어.”

요슈아가 초대장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뭔데?”

“오셀리아 황비의 초대장이다. 너와 달리아를 함께 보고 싶다더군.”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 초대장은 황도 생활이 다시 시작되었다는 신호였다.

* * *

그리미에는 예상했던 대로 별 일 없이 풀려났다.

황제의 비호가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누구인가.

아무리 황제의 명이 있어도, 완벽히 평화롭게 끝내줄 사람은 아니었다.

나는 힐끗 옆을 쳐다봤다.

함께 마차를 타고 가는 달리아의 표정이 어두웠다.

달리아가 우울한 얼굴로 그리미에가 붙여준 하인을 쳐다봤다.

“우리 이사는 안 해요……?”

난 속으로 씩 웃었다.

‘할아버지가 가산을 싹 압수했거든.’

물론 뒤로 찬 주머니가 있겠지만, 그걸 대놓고 쓸 순 없었다.

그래서 그리미에는 1구역도 아닌 2구역에 별 볼 일 없는 집에 들어가게 되었다.

달리아의 하인이 어색하게 웃었다.

“공작님의 노여움이 풀리실 때까지는 아무래도 어렵습니다, 아가씨.”

“……이게 뭐야.”

달리아는 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빙의하면 일단 엄청난 집에 놀라는 거로 시작하는 거잖아…….”

그야, 보통은 그렇지.

‘나도 내가 빙의한 줄 알았을 땐 놀라는 것부터 시작했지.’

마차가 황궁으로 들어갔다.

황궁을 지키는 경비병이 마차로 다가와 물었다.

“신분패를 보여주십시오.”

한지혁이 원화 출신임을 증명하는 호화로운 나의 신분패를 경비병에게 건넸다.

경비병의 표정이 밝아졌다.

“원화!”

“응? 너, 서군이었던 자로구나.”

서군의 병사였던 자였는데, 원화군을 졸업하고 황군이 되었나 보다.

“황궁 경비병이면 중앙군이로구나. 고생이 많았겠어.”

“워, 원화, 다시 뵈어서 저는, 저는 정말이지……!”

울먹울먹한 그에게 미소 짓고 있던 찰나, 달리아의 하인이 그에게 불쑥 신분패를 내밀었다.

신분패를 본 경비병은 단숨에 표정을 바꾸었다.

“죄송하지만, 이쪽 분은 중앙문으로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달리아의 하인이 울컥 소리쳤다.

“이 마차가 어느 가문의 마차인지 모르는가! 달리아 님은 아스트라의 장남이신 그리미에 님의 외동딸로……!”

“아직 인명록에 오르지 않았으니 평민입니다. 평민은 중앙문으로 들어갈 수 없는 것이 규칙입니다.”

“뭐, 뭐야?!”

달리아의 하인이 크게 분개했고, 달리아도 매우 당황했다.

서군 출신의 경비병은 단호했다.

“마차에서 내려 북서문으로 들어가시지요.”

“우리는 황비님의 초청을 받은 손님이야!”

“황비궁에서 별 다른 명이 내려오지 않았으니 규칙을 지키셔야 합니다.”

달리아가 나를 쳐다봤다.

“에릴로트…….”

도와달라는 얼굴로.

하지만 나는 오히려 좋았다.

‘중앙문으로 먼저 들어가면 혼자서 황비를 보겠네?’

딱 좋다.

그때, 한지혁이 얻은 가호를 이용할 수 있을 테니까!

이 3세는 악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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